▣나의 삶 나의 시조 <우연한 기회로 시조의 늪으로 빠지게 한 인연들> - 후당 전보규 내가 시조에 입문하여 등단과 작품활동을 하기까지는 약간의 곡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우연한 기회로 필연적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나 할까? 학창시절에는 누구나 한 번쯤 문학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듯이 나 역시 중학교 때 시인이신 김주경 선생님을 만나 학교문집 발간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였고, 고등학교 때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나오신 이용우 선생님의 지도로 시와 산문, 고시조에 깊이 빠져본 경험도 있었다. 그런 연유로 대학에서도 문예활동에 발을 담갔고, 일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문예 지도에 씨름한 결과 시•군이나 도 문예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나도 덩달아 교원 예능 실기대회에서 시부와 산문부에서 최고상을 받기도 하였다. 90년도 초반에 경북 영주교육청의 장학사로 근무할 당시의 일이다. 하루는 교육장님의 부름을 받고 2층으로 올라갔다. 이번에 정부 보조금으로 영주시 노인회관이 곧 완공되어 입주 기념식을 해야 하는데, 새 건물이라 벽의 공간이 많아 삭막해서 관내 기관장님들이 좋은 그림이나 글씨 등의 액자 한 점씩 기증하기로 하였으니, 우리 교육청은 뭘 기증했으면 좋을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준비할 기한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아 급히 관내 미술 선생님들께 연락해 보니 그런 곳에는 동양화나 산수화가 제격인데 그들은 서양화를 전공하였기 때문에 그런 곳에 게시할 작품으로는 마땅찮다고 하였다. 궁리 끝에 노인회관에 오는 회원인 남녀노소 모두가 학력이나 재력이 다양하겠지만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귀가 좋을 것 같아 짧은 시구를 적어 교육장님께 드렸더니, 매우 흡족해하시며 붓글씨를 잘 쓰는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표구하도록 지시하셨다. 오 육십은 꽃이요 칠 팔십은 청춘이라 구순에 오려거든 백수에 다시 오너라 - 「노인회관」 전문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어느 날 오후 교육장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가니 점잖은 노신사 한 분이 와있었다. 교육장님은 이분이 당시 실세인 금진호 상공부 장관의 어른이신 금교성 영주노인회장님이라면서 인사를 시켜주었다. 금 회장님은 “이번 우리 노인회관에 좋은 글을 지어주신 분이 누군지 궁금도 하고, 또 감사의 인사도 드릴 겸 이렇게 왔다오, 무엇보다 우리 회원들이 그 글을 보고 많은 감회를 느꼈다오. 백 세가 되어 다시 오라고 하니 그때까지 살아있어야 할 터인데 하며 손가락으로 남은 나이를 꼽으며 서로 웃기도 하였지요.”라고 하시며, 주머니 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나에게 주셨다. 한사코 사양하는 나에게 “예로부터 선비의 글 값은 있었다오. 적지만 성의이니 받아주오.” 하며 간곡히 건네주셨다. 나는 글을 지어주고 글 값을 받기는 난생처음이라서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교사 시절부터 학교나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윗분들의 원고를 대필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강의원고, 격려사, 대회사, 축사, 식사나 조사弔詞, 만장輓章까지도 지을 때도 있었다. 시간상 급박해 밤늦게까지 책상에서 씨름하기가 일쑤였지만, 이런 일들이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는 또 다른 기회요 도약의 발판이 되었다. 글이란 펜대만 들면 머리에서 쏟아지는 것이 아니다. 쓰임의 성격을 파악하여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재미있게 쓸려면 평소에 연설집이나 관련 서적을 구하여 내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했다. 옛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각고의 노력으로 그런 분야에 전문적 식견과 소양을 조금씩 쌓을 수 있었다. 그런 활동이 거듭되면서 모아둔 원고가 아까워 「대필 인생」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하려다 나를 아껴 주신 분들의 글을 대필했다고 내 원고라고 할 수 없을 것 같고, 또, 그분들이 아직도 현직에 계시거나 퇴직 후에도 아직 살아 계시는데 이런 글을 책으로 출간한다면 결례될 것 같아 모든 것은 없던 일로 하고 미련 없이 포기하였다. 세월이 흘러 나도 시•군 교육청 학무과장과 도 교육청 장학관을 거쳐 지역 교육청의 기관장이 되었다. 이젠 내가 각종 대회사나 축사, 격려사 등을 해야 했고, 나만의 특색 있는 원고가 절실했다. 그런 글을 숱하게 써 봤기에 개성 있는 독특한 소재로 나만의 소리를 내려면 남에게 부탁하지 않고 직접 작성하여야 했다. 평소에 애독했던 고사나 예화 중심으로 의미를 함축시켜 작성하였다. 강의원고를 제외하곤 아무리 길어도 2~ 3분의 짧은 내용의 소재인지라 일선 현장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몇 년간 시행한 행사의 원고가 수백 편이나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자료를 사장(死藏)시키지 말고 책으로 엮으라고 권하길래 원고를 다시 칼럼 형식으로 다듬었다. 중간에 야간의 갈등도 있었으나, 지금까지 애쓴 흔적이 아까워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소재들을 「후당後塘의 짧은 글 깊은 뜻」이라는 제재 아래 총 7부 366편의 글을 담아 출간하였다. 후당後塘은 나의 고향 자연부락의 이름이다. 객지에 나와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에서 일찍부터 나의 아호로 사용하였다. 이 책의 소재로는 지금까지 감명 깊게 읽었던 동서고금의 고사나 역사서, 전기집, 자서전, 예화집 뿐만 아니라 소설 및 비소설류까지 망라해 많은 종류의 글을 인용해서 한 소재를 한 페이지에 담은 그야말로 짧은 글이다. 아직 퇴직을 몇 년 앞둔 터이지만 현직에 있으며 많은 이들의 성원에 보답하는 차원에 비매품으로 초판에 1,000부를 발간하여 지인이나 동료들에게 배포하였더니, 입소문이 나서 책을 구하려 하는 이가 많아 사 쇄에 걸쳐 총 4,000여 권이 발부하기도 하였다. 출판에 따른 다소의 금전적 지출은 있었지만 많은 분의 뜨거운 성원으로 경비를 상쇄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느새 나도 정년이 다가왔다. 특히 은퇴 세대들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퇴직하면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따른 우려이다.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약관에 교단에 발을 디딘 후,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앞만 보며 달려온 터, 이제 퇴직이라는 단어와 함께 새로운 삶을 맞아야 했다. 사업을 하시는 지인 중에서 자기네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좀 도와 달라고 하였으나 모두 고사하였다. 이 나이를 먹어 남에게 얽매이는 것보다 이젠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을 골라 소일거리로 추려보았다. 우선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즉, 정적활동과 동적활동이다. 온종일 정적활동이나 동적활동만 한다면 무리라 두 가지를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소일하는 조화와 균형이 필요할 것 같았다. 먼저 시작한 것이 오전의 동적활동이다. 퇴직자가 보편적으로 시도하는 동적활동은 운동이다. 나도 테니스와 골프, 헬스, 고적탑사나 문화기행 등 눈에 와 닿았다. 평소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라 매일 일찍부터 몇 시간 운동을 통해 체력을 단련하는 일과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점차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고희를 넘기니 하루에 몇 가지 운동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차츰 횟수를 줄이다 보니 이제는 집 근처의 스포츠 센터에서 헬스 중심으로 근력과 지구력 운동을 한 후, 목욕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집안 정리를 하곤 하였다. 부부 교원이었지만 현직에 있을 때는 가사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퇴직 후에는 가사의 일정 부분이 내 몫으로 배분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다음은 오후 일정이다. 약속이 있어 외출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연히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친구의 권유로 정적활동으로 수필 공부를 하였다. 흔히들 수필은 산책하듯이 가볍게 쓰는 글이라고 하나 그 개념이 머리에 와 닿지 않았다. 집 근처에 있는 대구 MBC 수필창작반에 입교하여 2년간 공부하였다. 글의 내용을 구성하는 단계부터 화소를 구상하는 과정 등을 공부하면서 경수필과 중수필, 경험수필과 사유수필에 대해 눈뜨게 되었다. 이따금 서점에 들러 수필집과 고시조집도 구하여 틈틈이 고시조 공부도 다시 하였다. 천성이 책 읽기를 좋아한 탓도 있지만,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시력을 물려받은 영향이 무엇보다도 컸다. 특히 고시조를 주제 및 내용별로 읽고 음미하는 멋도 있었다. 휴대전화의 카톡으로 지인들에게 1주일에 한 번씩 「후당의 고전산책」이라는 타이틀로 고시조 한 편씩 보내주곤 하였다. 카톡은 장문보다는 단문이 활용하기가 편리했다. 특히 고시조는 시운도 맛깔스러워 호응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고향 선배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서두에는 좋은 시조를 보내주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이제는 이따금 귀하가 지은 시조작품을 보고 싶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까지 현대시조보다는 고시조에 많이 심취되어 있어서 남에게 내놓을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생각 끝에 다시 틈틈이 혼자서 작품활동에 시작하였다. 어느 날 나의 시조를 받아보던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조를 하시려면 문단에 등단하면 작품활동은 물론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될 것이라.”라며 권유하였다. 문단의 등단 절차나 방법에 대해서 자기가 안내하겠는 후배의 호의가 고맙기도 하여 한번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나의 노후 문학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자기가 등단할 때 많은 도움을 주신 「시조문학」의 고현숙 편집국장과 협의했더니 직접 전화를 주면 상세히 안내해 주겠다고 한다면서 연락처도 함께 보내주었다. 고 편집국장께 전화를 넣어 인적 상항을 알렸다. 본회의 목적과 활동 및 신인 등단에 대한 절차를 안내하면서 지금까지 자작 활동한 작품 중 5편을 메일로 보내 달라고 하였다. 고르고 골라 다섯 작품을 딸내미 시집 보내듯 보냈다. 얼마 후 돌아온 대답이었다. “선생님의 작품을 심사위원들이 심의한 결과 고시조 시어와 운율의 냄새가 많이 풍겨 나와 현대시조 중심의 본회의 활동과 차이가 있으니 이들 작품 중 현대시조로 개작해서 다시 보내주면 심사위원들이 재심의하겠다.”라고 하였다. 젊을 때부터 고시조를 좋아하고 즐겨 암송했던 결과라고 생각되며 애초 시도하지 말 걸 하고 후회도 하였으나, 인제 와서 없던 일로 하자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아 며칠 붙들고 늘어졌다. 각고 끝에 단시조 몇 편을 마무리하여 보냈다. 어젯밤 빗소리에 깊은 잠 잃고 나서 지나간 긴 세월을 되돌아 보노라면 슬픔도 기쁨이 되어 이 가슴이 벅차다. - 「빗소리」 전문 비단실 열두 줄에 마디마디 혼을 실어 말 못 할 사연들을 주저리 엮어 담아 어리듯 취한 손길에 흐느끼며 절규한다. - 「가얏고」 전문 며칠 후, 고 편집국장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심사위원들이 재심의 끝에 작가의 노력과 정성을 봐서 등단을 결정하였으니 앞으로 열심 정진하여 본회 활동에 일조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당부의 말씀도 함께 전해주었다. 「시조문학」의 등단으로 나의 새로운 문학세계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지식은 ‘경험의 총화’라고 하더니만 무엇보다 우선 좋은 작품을 많이 읽고, 많이 지어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은 문학작품을 쓰는 기본 요령인지라 친구의 도움으로 「대구시조인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시우詩友들과 교분을 나누며 소양도 넓히는 시간도 점점 더 많아졌다. 나의 이런 생활이 집사람에게는 다소 못마땅하였다. 이따금 핀잔 아닌 핀잔으로 “아직도 젊은이인 줄 아세요? 책상에 메이는 시간을 줄이고 나들이도 좀 하시라.”라고 성화였다. 매일 집에 틀어박혀 시조 공부한답시고 하루에 대여섯 시간 이상 몰입하니 건강을 해칠까 염려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기던 태생이라 아직도 생활습관을 쉽게 바꾸지 못한 것을 보니 그것도 팔자인 모양이다. 예로부터 ‘무지한 사람이 용감하다.’라는 말이 있다. 아직은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틈나는 대로 「시조문학」에 투고하였다, 그리고 지난해(2019년)에는 겁 없이 본지의 소시집 코너에 머리를 내밀었고, 올 여름호에는 표지 작자로 선정되어 송귀영 부회장님이 작품에 대한 시평을 해주기로 하셨다길래 결례를 무릎 쓰고 출판 전에 미리 받아볼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다고 졸랐다. 이런 졸작을 어떻게 평을 하실지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송 부회장님이 이번 여름호에 실릴 나의 작품 20편을 다 보시고는 장문의 평설을 보내주셨다. 평소 본 회지를 통해 송 부회장님의 작품이나 평론을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다. 무엇보다 해박 정론하고 매끄럽게 기술하는 문장 구성이 탁월한 분이었다. 특히 작품과 시인의 세계를 깊게 조망하는 혜안으로 구김살 없이 평하는 독특한 필력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간혹 어떤 이의 시평을 읽노라면 날카로운 칼끝으로 사정없이 가슴을 후벼 파는 분도 있었다. 지도 차원이라 그럴 수도 있겠으나 공개되는 지면을 통해 밝힌 평설로 당사자는 많은 상처를 받아 절필까지 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송 부회장임은 신인 작가의 그런 심경을 충분히 헤아리며 어루만져 주는 너그러우신 분이었다. 이로 인하여 나의 시조 세계가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는 큰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송 부회장님과 이런 인연으로 나의 작품에 대한 지도 말씀과 친필 사인을 한 시조집 「북창 넋두리」, 「뿌리의 근성」, 「바람의 미학」, 「정동진 연가」, 「여의도 벚꽃 질라!」 「호수의 그림자」 등 10여 권을 보내주시면서 틈나는 대로 한번 읽어보라고 하셨다. 보내준 시조집을 읽는 순간마다 아름답고 품격 높은 시어와 매끄러운 운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우선 작품의 양에서 놀랐고, 어쩜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남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시어들을 아름답고 정감 나게 표현할 수 있는지 마치 어휘의 마술사와 같은 분이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후, 이따금 메일로 내가 보낸 작품을 알뜰히 살피고 평까지 하여 보내주시며, “시조의 이미지 창출의 근본은 비유와 은유의 상징이다. 비유와 은유에 있어서 시적 사물의 실체와 그 형상을 다각화하려는 관념이 가깝게 있으면 신선함이 떨어진다. 한 작품을 독자에게 공감을 주려면 무엇보다 적절성과 비예측성의 설정이 중요하다.”라고 작품활동의 접근 자세를 설파하시는 포인트는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나는 송 부회장님을 통해 또 다른 시조작품의 세계와 은유와 비유의 미학을 깨닫고 안목을 넓히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나의 시조작품 활동에서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자주 연락을 드리곤 한다. 여름호가 배송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조문학」에서 또 연락이 왔다. 「시조문학」의 심사위원들이 나의 작품인 「망양정望洋亭」이 「올해의 시조문학 작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서 축하한다는 전갈이었다. 「시조문학」에 입문하지 고작 3년 남짓한 정도밖에 되지 않고 번번한 시조집 한 권 내지 못한 신인에게 너무 과분한 특전이었다. 고맙기 짝이 없으나 그런 정도의 수준은 아닌 것 같아서 몇 번 사양도 했으나 심사위원들이 충분히 인정하여 결정한 사안이라며 하였다. 「망양정」은 나의 고향인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해변의 산에 있는 정자로 관동팔경의 하나다. 특히 망망한 바다를 마음껏 조망할 수 있고 주위의 경관이 빼어나 조선 숙종 대왕의 어필로 ‘관동제일망루關東第一望樓'라는 현판을 하사받기도 한 유명한 마루 정자이다, 지척도 천 리라서 어렵사리 닿은 발길 우뚝 큰 송림 새로 잔솔가지 안부 묻곤 뭘 하다 이제 왔냐며 핀잔까지 곁들인다. 두 눈에 못 담은 바다 한 폭에 채워 담고 바다에 빠진 달도 물 위로 건졌으나 관동의 제일망루[第一望樓]는 그릴 엄두 못 낸다. 청잣빛 거센 파도 화폭에 덧칠하며 갈 길 바쁜 고깃배도 떼를 써서 붙잡아도 놀다간 산들바람은 간 곳 몰라 못 부른다. - 「망양정望洋亭」 전문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온다‘는 말이 있다. 우연히 대구 매일신문사에서 매년 7월에 「매일 시니어 문학상 공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겁 없이 한번 응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락은 고사하고 나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받는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열심히 준비했다. 얼마 후, 매일신문사에서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내 응모한 시조작품 중 「황혼길」이 본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통보였다. 이게 웬일인가! 놀램과 기쁨의 교차였다. 이런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송귀영 부회장님의 시조집 공부가 절대적이어서 즉시 입상 소식과 함께 작품을 보냈다.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이 작품은 충분히 입상할 수준이라고 뜨거운 격려와 함께 더욱 건필을 기원하는 덕담도 담아 주셨다. 시상식 때 심사위원들을 만날 기회가 있어 인사를 드렸더니, 그분들도 덕담 차원이겠지만 모처럼 좋은 작품을 고르게 되어 심사하는 사람으로서도 마음이 편했다며 격려해주었다. 곰 삭혀 눌려 놔도 식지 않은 서운함이 뜸 들여 들춘 추억 옛정을 우려내어 이 빠진 장뚝배기에 늙은 속내 채운다. 주름져 거친 손을 포개어 마주 잡고 깨진 언약 조각 맞춰 애틋한 정 일깨워서 굵어진 손가락 마디 보듬어서 어른다. 젊을 때 꾸던 꿈은 뼈다귀만 발레 내고 물렁한 맨 살점만 장독에 삭혀두니 한순간 지난 세월도 빛바래도 웃는다. - 「황혼길」 전문 며칠 전에는 「◯◯시조인협회」에서 요즘 코로나 사태로 의기소침한데 그와 관련된 소재로 작품집을 출간할 계획이라는 신작 몇 편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마음을 가다듬어 다소 해학적인 소재로 몇 편을 다듬어 투고하였다. 그중 한 편이 「추석 유감」이다. 우라질 코로나에 모두가 질겁하여 고뿔 끼 없는데도 마스크는 입에 달고 외출도 자제하라는 재난 문자 홍수 나네. 잘 난 아들 나라 일꾼 돈 잘 번 자子 데릴사위 온종일 격조해도 전화 한 통 없더니만 올 추석 못 내려가니 돈 몇 푼 입금한 데. - 「추석 유감」 전문 작품의 세계는 끝이 없고 언제나 진행형이다. 지금은 비록 하잘것없어도 마른 땅에 눈 쌓이듯이 세월의 흐름 속에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라 스스로 다잡고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인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역시 나이기에 큰 욕심도 없다. 다만 시조작품 활동에 만족하며 즐기고 싶을 뿐이다. 흔히들 각박한 세상이라지만 그렇지만 않은 것 같다. 나의 삶과 시조 세계에서 우연한 기회로 만난 귀인들 때문에 노후에도 이렇게 풍요롭게 보낼 수 있기에 그분들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늦게 시작한 시조작품에 매료되어 오늘도 책상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작품 삼매에 빠진 나의 심경을 그 누가 알아주랴만 혼자 즐기는 이 기쁨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누리고 싶은 것이 조그마한 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전보규> 약력 경북 울진 죽변 출생, 아호 : 후당後塘 시조문학 등단 및 신인상 수상 시조문학 문우회 부회장 • 대구시조시인협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시조문학 올해 작가상 수상 매일신문 주니어 문학상 시 부문 본상 수상 전 경산 • 구미 관내 학교 교장 전 구미 • 군위교육청 학무과장 전 경상북도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 전 김천교육장 저서 : 칼럼 <후당의 짧은 글 깊은 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