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탄생과 소명
예레미야는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아나돗’에서 사제 힐키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나톳은 어떤 곳인가? 다윗 왕이 죽자 솔로몬은 이복형 ‘아도니야’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당시 대제사장 ‘에브야타르’는 아도니야를 지지했다. 하지만 솔로몬이 승리하자 그는 파면되었고 ‘아나톳’으로 쫓겨 갔다. 이후 이스라엘의 제관 계급은 ‘차독 가문’이 독식했고 ‘에브야타르’계 사제들은 출세 길이 막혔다.
예레미야의 어원은 ‘이르므야후’(Yirmyahu)에서 왔으며 ‘야훼께서 내던지시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름 자체에서 고통의 예언자임을 느낄 수 있다. 그가 태어난 때는 이스라엘 격변기였다. 북 이스라엘은 멸망했고 남쪽 ‘유다국’은 주변 강국의 정세에 따라 좌지우지 전락했다. 이러한 유다 왕조 망국과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예레미야가 받은 사명이었다. 왕국의 멸망 후에는 감독관 그달리야를 살해한 일단의 주전파(主戰派)들에 의해 이집트로 잡혀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동족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은 요시야 임금(기원전 640-609년)이 다스리던 기원전 627/6년경으로 당시 예레미야는 20대의 젊은 나이였다. 그후 그는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기원전 587년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의 긴 기간동안 예언직을 수행하게 된다.
예레미야는 16대 ‘요시야 왕(기원전 640~609)’ 때 나타나 다섯 임금의 재임중에 활동하였다. 요시아는 이집트 느코왕과 전쟁에서 패배하고 사망하였다.17대 ‘여호아하즈’는 요시야의 장남으로 석달간 왕으로 있다가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이집트는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그가 ‘여호야킴’이다(2열왕 23,34). 그러나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에게 반기를 들다 포로로 끌려갔다. 그의 아들 ‘여호야킨’이 19대 왕이 되었지만 그 역시 석달 만에 실각되었고, 바빌론에 의해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 20대 임금이 된다. 그가 유다의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이다(2열왕 24,17).
이러한 예레미야의 생애와 선포 말씀을 전하고 있는 예언서의 내용들은 그가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살았던 ‘말씀의 예언자’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그 유명한 다섯 개의 예레미야 고백록을 통해 그가 예언자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겪었던 갈등과 회의를 만나면서 진솔한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며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생수(生水,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저버리고 마음이 갈라졌던 이스라엘에 대한 질책의 말씀은 우리의 충실치 못한 삶을 반성하게 하며, 영원한 계약에 대한 그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써 맺으시게 될 결정적인 새로운 계약을 향한 전망을 제시해주고 있다.
2. 활동시기와 시대적 상황
예언서의 내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이 선포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40년에 걸친 예레미야의 활동을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여 관련된 성서 텍스트와 각 시기의 시대적 상황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소명과 첫 번째 활동시기(기원전 627/6년-622년)
예레미야가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기원전 627/6년경의 남왕국 유다는 종교적인 타락과 사회,정치적 불안이 만연했던 때였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요시야 임금이 아직 본격적인 통치를 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선대(先代) 므나쎄 임금(기원전 687-642년) 시대의 혼란했던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실상 므나쎄 임금 때 왕국이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그 결과 사회적인 혼란과 함께 강대국의 이방 종교들이 유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도 참된 야훼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다양한 이방 종교에 물들어 갔으며, 하느님께서 삶의 근본 규범으로 주셨던 사랑의 계명들을 실천하지 못하고 부정과 불의에 빠져들게 된다.
바로 이러한 때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1장) 예언자 예레미야는 당시 혼합 종교와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던 백성들을 질책하면서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동시에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와 참된 하느님 백성으로서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2-6장) 한편 하느님께서 새롭게 맺으시고자 하는 새로운 계약을 통해 남왕국 유다 뿐 아니라 이미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던 북왕국 이스라엘도 함께 하나의 하느님 백성으로서 구원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기도 한다.(30-31장) 그후 기원전 622년 요시야 임금에 의해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이 단행되자 예레미야는 약 10여 년간 활동을 멈추고 휴지기를 가지게 된다.
2) 두 번째 활동시기(기원전 609년 이후 몇 해)
기원전 609년 요시야 임금이 이집트 파라오 ‘느코’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여호야킴이 새 임금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패전으로 인한 이집트를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선대의 종교개혁과 자주적 독립을 위한 시도들을 이어가지 못하고 다시금 이스라엘을 혼란 속에 빠뜨린 악한 임금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등장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재개토록 하게 된다.
이때 예언자는 임금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의 박해 가운데 외로이 그러나 굳건하게 그들의 불의를 고발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심판을 선포한다.(7-26장; 35-36장) 특히 성전에 대한 당시의 맹목적인 신뢰를 질책했던 선포(7장, 26장)와 함께 예언자의 고백록(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이 나온 것도 바로 이때이다. 한편 예레미야는 당시 혼란했던 이스라엘과 관련을 맺고 있던 주변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기도 하였다.(46-51장)
3) 세 번째 활동시기(기원전 594년-587년)
예레미야의 세 번째 활동은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임금인 시드키야 제위 제4년부터 왕국이 멸망한 기원전 587년까지 펼쳐지게 된다. 이때 예언자는 임금의 무능함과 함께 당시 친 바빌론파와 친 이집트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던 왕국의 분열상을 고발하면서 이스라엘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죽음을 무릅쓰고 선포한다. 그러나 예언자의 말에 귀를 닫고 듣지 않았던 그들은 마침내 기원전 587년 예레미야가 경고한데로 멸망하게 된다. 한편 예언자는 왕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섰던 이 시기에 미래에 다가올 구원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와 관련된 내용은 27-29장, 32-34장, 37-39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4) 마지막 활동시기(기원전 587년 이후)
예레미야는 왕국을 멸망시킨 바빌론에 의해 감독관으로 내세워진 그달리야가 암살된 직후 그의 서기인 바룩과 함께 친 이집트파에 의해 이집트로 끌려가게 된다. 여기서도 그는 난을 피해 이주해 온 동족들을 격려하며, 우상숭배의 위험에 직면해 있던 그들의 회개를 촉구한다. 이처럼 예언서는 예레미야가 마지막까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해 봉사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복사+ 편집하였음을 밝힙니다
신은근 신부,굿뉴스, 2009년 9월 6일 연중 제23주일 마산교구 주보
송재준 신부, 굿뉴스,월간 빛, 2002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