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5장 1-22절
찬송가 527장 ‘어서 돌아오오’
오늘 본문 5장은 예레미야애가 마지막 장으로 앞 선 장들은 히브리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구성되었다면 5장은 알파벳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 장이 22절로 이루어진 구성을 깨지는 않았으며 4장의 내용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그들이 당한 고난의 내용이 그림을 그리듯 펼쳐지며 그 처음과 끝에 위치한 간구의 기도와 어우러져 성경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흉년이 들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 했으나 그조차 주는 자가 없는 극심한 궁핍 속에서 탄식하며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는 가운데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하며 돌이키는 탕자의 모습이 예레미야애가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며 예레미야애가속에 담겨진 탕자의 노래를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간구함(1절)
(1)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해달라고 요청을 하며,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는 ‘자카르’라는 단어인데 ‘기억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방주에 있는 노아와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바람이 불어 물을 마르게 하시며 사용되었던 단어가 ‘자카르’입니다. 또한 라헬이 자녀를 낳지 못할 때 그를 생각하셔서 요셉을 주실 때 사용된 ‘생각하사’라는 뜻의 단어가 ‘자카르’입니다. 마지막으로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노예로 고통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실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자카르’입니다. 하나님께 ‘자카르’라는 단어가 사용되면 우리의 고통, 상실, 심판을 기억하셔서 긍휼가운데 건져주시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예레미야가 드렸던 이 애가의 노래를 전쟁의 폐허가운데 많은 유대인들은 읽고 부르면서 5장의 ‘자카르’의 기도를 드리며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위로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이 ‘자카르’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에 징계로서의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기도 하며 상실의 아픔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상황을 주께 기억해달라고 간구하는 ‘자카르’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카르’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회복의 소망 가운데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심판으로 인한 고통과 상실의 현장(2-18절)
그들에게 임한 심판의 현장은 너무나도 처참했습니다. 그 끔찍한 고통의 현장을 목도한 예레미야는 전쟁의 패배 후 자신들이 잃어버린 상실의 아픔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2-5)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오며 우리의 어머니는 과부들 같으니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기진하여 쉴 수 없나이다
먼저 그들은 재산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받았던 기업과 그 위에 세워진 집들을 빼앗겼습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가장 경제적 약자로 여겨지는 고아와 과부들같이 생활고의 끝으로 내몰려 있는 상황입니다. 흔히 마시던 물과 나무를 위하여 은과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들이 누리던 경제적 풍요로움은 타인의 것이 되었고 그들은 나그네와 같은 상태로 자신들의 것을 갖기 위해서 도리어 값을 지불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치 부자로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서 자신이 살던 집에서 노동하는 처지가 된 것과 같습니다. 6-7절은 그렇게 된 이유가 나옵니다.
(6-7)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현재의 고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이방백성들을 의지한 결과이며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조상들이 심판을 당하여 없어졌고 그 자손들까지 그 죄악을 담당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담당하고 있다는 단어의 의미는 ‘무거운 짐이 되다, 짐을 운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상들의 범죄 함으로 인해 후손들에게 무거운 짐과 같은 심판의 결과가 영향을 주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부모의 방탕한 삶의 결과가 궁핍과 빚이 되어 자녀에게 이어지듯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던 조상들의 죄 값은 현재를 살아가는 그 자손들에게 부담이 되어졌습니다. 이는 부모의 죄로 인해 자식이 심판을 당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모가 행한 죄로 인해 나타난 결과들이 자녀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나의 선택의 결과는 나의 뒤를 따라오는 자들에게 어쩔 수 없이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리는 영향을 줄 것인가 주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향력이 큰 가 작은가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지 살아있는 모두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선택할 것은 ‘선한 영향력을 끼칠 것인가 악한 영향력을 끼칠 것인가’입니다. 우리가 불순종과 죄악의 길이 아닌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걸어갈 때에 자손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삶이 아니라 선물이 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8절에서 10절을 보시겠습니다.
(8-10) 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여기서 언급된 종들은 바벨론 왕의 명령으로 유다를 통치하는 자들을 의미하며 그들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자가 없는 현실의 고통을 노래합니다. 또한 거주하는 곳에 양식이 떨어져 광야를 지나 양식을 얻기 위해 돌아다녀야 하는데 전쟁으로 인해 광야에는 그들의 양식과 재산을 노리는 자들이 위협하고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전쟁으로 인한 기아는 백성들이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는 영양실조의 상태가 되게 만들었고 그들의 피부는 굶주림의 열기로 인해 검게 변해버렸습니다. 이는 삶을 지탱하는데 꼭 필요한 의식주를 상실한 유대인들의 고통을 보여줍니다. 마치 먹을 것이 없어 쥐엄 열매를 주워 먹으려 하나 주는 자가 없던 탕자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11-16) 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청년들이 맷돌을 지며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이어서 본문들에는 전쟁으로 인해 그들이 상실한 것들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부녀란 결혼한 여자를 의미하고 처녀란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가정에서 어머니와 아내와 딸을 상실했습니다. 식민지 시대를 경험했던 우리민족은 가족이 성 노예로 끌려가는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고통은 해결되지 못한 채 민족의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찬가지의 큰 고통이 유대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12절은 지도자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적들의 손에 의해 목매달려 죽임을 당하였고 백성의 장로들은 존경을 받지 못하고 숨겨진 자 같이 되었습니다. 13절부터는 소중한 일상의 상실을 이야기합니다. 청년들은 꿈을 잃어버린 채 빼앗긴 짐승을 대신해 삼손처럼 맷돌을 돌리고 있으며 뛰어 놀아야 할 아이들은 나무를 지다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립니다. 노인들은 성문에 앉아 사람들을 가르치던 존귀함을 잃어버렸고 청년들은 노래하는 삶의 즐거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들로 인해 마음에는 기쁨이 사라졌고 즐거움의 춤이 변해 슬픔의 애가가 되었습니다. 16절에 그들의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다는 것은 다윗 왕가의 왕권이 무너진 것과 그들의 영광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모든 상실의 고통은 자신들의 범죄함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마치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사랑받던 탕자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종 살이 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17-18) 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
마음이 피곤하다는 것은 마음이 병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극한 상실감을 경험하면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을 해도 기쁘지 않고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게 느껴집니다. 마치 큰 재난을 당한 뒤에 국민들이 트라우마가 생기고 국가적 우울감을 느끼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병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눈들은 어두워졌으며 시온산은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논다고 이야기 합니다. 유대 문화에서 여우는 파괴, 황폐를 의미합니다. 당시 포도원에는 서로의 소유를 구분하고 작은 짐승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작은 담을 만들었는데 설치류를 잡아먹으려는 여우들은 이리저리 부딪치며 담을 허물었고 허물어진 담 사이로 들어가 사냥을 하면서 심어놓은 포도나무를 망가뜨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여우가 뛰어 논다는 것은 망가진 포도원처럼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그 땅이 황폐하여 졌음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적들이 여우처럼 자신들의 땅에서 유린하고 있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극심한 상실을 경험하면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병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만나기 싫고 무엇도 먹고 싶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여우가 뛰노는 황무지처럼 황폐하여 지기도 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 상태를 민족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애가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런 민족적 아픔 속에 단순히 애가만 부르고 멈추지 않습니다. 그에겐 희망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도저히 희망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처참한 현실 가운데 예레미야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희망을 노래하며 간구하는 예레미야(19-22절)
(19-20)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예레미야가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처참한 현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왕되신 하나님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급선회하는 비행기 조종사처럼 무너진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언급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와 주권을 노래합니다. 이것은 황폐한 땅에서 그들의 소망은 영원한 통치자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다 무너진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은 유일한 하나님의 보좌만이 자신들이 소망을 걸 유일한 곳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편 11편 3-4절에 이런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때로는 여러 가지 삶의 고난으로 인해 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고 애가를 부르며 마포대교에 올라가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봅니다. 그 곳에 우리의 아픔을 기억하시고 잊지 않으시고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1절에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고 ‘자카르’의 기도를 드렸던 예레미야는 20절에 자신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버려두지 말아 달라고 간청의 기도를 드립니다. 허기진 배를 채울 한 주먹 쥐엄 열매조차 없던 탕자가 떠올린 곳은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한 아버지의 집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였습니다. 탕자가 자신의 망가진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방법 외에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버지의 보좌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방법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 보좌를 기억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을 간구합니다.
(21-22)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오늘 이 예레미야의 간구에서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돌아가겠사오니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이 고백은 철저히 회복의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의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향해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겸손히 간청하였던 것처럼 예레미야는 동일하게 주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돌이켜 주시면 돌아갈 수 있겠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으로 갔을 때 아버지가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그의 회복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탕자는 아들 됨을 회복할 자격이 없었기에 그저 종 중의 한 명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의 자녀된 자리를 회복시키기 원하였을 때 그가 예전의 자리로 온전히 회복될 수 있었듯이 이스라엘의 회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겸손하게 민족의 회복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22절의 내용을 쉬운 성경 번역본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습니까? 영원토록 진노를 풀지 않으시렵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실은 호세아 11장 8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당한 성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성읍들처럼 사라지게 하시거나 잊어버리지 않으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이며 결코 그 자녀 된 백성들을 놓으실 수 없으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치 집 나간 탕자를 오래도록 멀리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제나저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나무를 뽑고 끝난 줄 알았는데 실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다시 심으실 것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카’, ‘슬프다’로 시작한 예레미야의 애가는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는 희망의 노래 곧 다시 새롭게 하시고 옛적 같게 하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간구하며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가 예루살렘과 같고 ‘에카’, ‘슬프다’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라 할찌라도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기억하고 그 앞에 ‘자카르’, ‘기억하소서’의 기도로 나아갈 때 비참한 노예의 자리에 머물던 탕자를 측은히 여기며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았던 아버지 같으신 우리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고난의 자리에서 고개를 들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함께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나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위에는 주어진 삶의 고통과 아픔으로 탄식하는 인생들이 많습니다. 도저히 삶의 무게를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아 마지막 한 숨을 내쉬며 강물에 몸을 던지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버지, 오늘 슬픔으로 시작되었던 예레미야의 탄식이 다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보좌로 말미암아 소망을 얻은 것처럼 우리의 삶에 절망의 끝자락에 서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혼자 무너지지 아니하고 우리를 기억하시고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생의 회복을 경험하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백성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길을 전했지만 듣는 자 없어 슬퍼했던 예레미야는 이제 심판을 당한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포도원지기가 되어 회복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위에 고통당한 자들과 길 잃은 자들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회개와 회복을 간구하는 선한 포도원지기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