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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은 바다로 흐르지 않는다 ⑫
이 대 영
▣ 삼천리 자전거
초가지붕을 타고 내려온 고드름이 뽐새를 자랑하며 물방울을 모으고 있었다. 방금 사랑채 지붕을 넘어 온 햇살이 붉은 기운을 힘차게 쏟아붓는 중이었다. 밤새 기운을 모은 고드름은 맑게 다진 내공으로 위세가 대단하다. 그래도 붉은 기운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래로 물방울을 떨구며 제 몸을 줄이고 있다.
이 행수는 안방 문을 열고 대청으로 나왔다. 순간, 그의 발이 휘청인다. 그는 몸이 서서히 말라가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이렇게 갑자기 무너질 수가 있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약을 먹을수록, 암세포는 연일 생성과 전이를 반복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행수가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은 것은 지난 여름이었다. 청양 구봉광산이 매몰되어 광부들을 구조하느라 생난리를 치던 때였다. 이곳 사람들에게 7월에 있었던 동백림사건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하지만, 인근 광산에서 사고가 나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무리 떠들썩한 사건도 자신과 직결되지 않을 때는 혀를 끌끌 차는 수준에서 그쳤다.
공수원 육동 사람들의 관심은 늘 휴전선 근방에서 일어나는 남북 충돌사건이나 간첩 사건에 있었다. 지난 7월 8일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은 언론을 통해, 재독 음악가인 윤이상을 포함해 194명이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며 간첩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전국은 다시 반공 분위기로 이어졌다. 북한이 동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막대한 공작금을 동원하여 서유럽에 재학 중인 유학생 및 각계각층의 장기체류자들에게 심리적인 공작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중앙정보원이 6·8 부정 총선 규탄시위의 무력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사건을 확대 발표한 것이었지만, 이곳에 사는 주민 누구 하나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연초, 동해안에서 명태잡이 어선들의 월경을 막기 위해 초계 중이던 ‘당포함’이 북한 동해안 동굴포대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 사건도 있어 사람들은 간첩이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행수는 어지럼증과 구역질이 심해지고 가슴에 통증을 느끼자 서울에 사는 둘째 아들의 권유로 서울 큰 병원으로 올라갔다. 병원에서 보낸 하룻저녁은 그에게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사리원댁이 곁을 지키고는 있어도 병실 침대에는 죽음을 앞둔 암 환자뿐이었다. 환자들의 신음과 숨넘어가는 기침 소리의 이어짐은 그에게 지옥으로 다가왔다. 더욱이 익숙하지 않은 크레졸 냄새까지 떠돌아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쩌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면 뼈만 앙상하게 남은 환자들이 눈만 멀뚱거리고 있어 저것이 사람인가도 싶었다. 더욱이 치핵을 앓아 뒤끝도 개운치 않았다.
이 행수는 한동안 치질로도 고생을 했다. 처음에는 선홍색 피가 묻어나와 뒷간 신문지가 너무 뻣뻣한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일주일이 지나자 항문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장터에 있는 약방에서 연고를 사다가 바르고, 밖으로 삐져나온 치핵을 안으로 집어넣어도 그때뿐이었다. 술을 줄이는 것은 물론, 따뜻한 물로 좌욕도 하고 돌나물즙을 마시고 바르기까지 했다. 또한 달팽이를 은박지에 싸서 완전히 재가 될 때까지 태운 뒤, 그 가루에 황설탕이나 돼지기름을 섞어 환부에 바르기도 했다. 치료 후 한동안 통증이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곧 재발하곤 했다. 도라지와 버들강아지 뿌리, 무청, 호박씨, 모란꽃을 끓여 치핵에 바르기도 하고, 마늘 한 쪽을 까서 항문에 밀어 넣는 등 별짓을 다 해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뭉클한 치핵이 밖으로 튀어나온 뒤에야 그는 침쟁이 강 영감을 부르기로 했다. 그에게서 몇 번 치핵을 다스려 효험을 봤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굵은 돋보기를 쓴 강 영감이 낡은 가죽가방을 들고 이 행수의 사랑채를 찾았다. 그는 이 행수의 아랫도리를 내리게 한 뒤 엉덩이를 하늘로 추켜올리게 했다. 그리고는 이 행수에게 조금 따끔할 터이니 입에 수건을 물고 있으라고 주문했다. 이 행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딱하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치료를 중단하고 병원으로 가볼까’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 행수는 멋쩍은 기분에 옆에서 걱정하는 눈으로 지켜보던 사리원댁을 밖으로 나가게 했다. 그러자 사리원댁은 “병원에 가자고 해도 증말 말 안 듣는 고집불통!”이라며 눈을 흘겼다. 강 영감은 어디서 구했는지 삐삐선에서 빼낸 듯한 실 같은 구리 선 한 가닥을 치핵에 단단히 묶고 있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휴대용 휘발유 통을 꺼내 뚜껑을 열고 목화솜에 묻혔다. 그런 다음 치핵을 이리저리 닦는 듯했다. 강 영감이 라이터에 불을 켜자 지직거리며 치핵이 타들어 갔다. 이 행수의 입에서 ‘으-악!’ 하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지지-직!’ 하며 돼지털 타는 소리가 나더니 괴이한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찼다. 강 영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껄껄대며 환부를 살폈다. “조금 덜 탔다!”는 말에 이 행수가 기겁하며 입에 물고 있던 수건을 뱉어냈다. 그러자 강 영감은 엄살이 심하다며 엉덩이를 한 대 때리고는 아까징끼를 솜에 발라 환부를 닦았다. 이 행수는 따가움을 못 이겨 또 한 번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고통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날 밤부터 시작된 오한과 발열, 두통으로 그는 정신을 놓아야 했다. 장터 약방에서 해열제와 진통제를 지어와 고통을 줄여가는 수밖에 없었다. 미련한 줄 알면서도 시골 사람들은 대부분 민간요법으로 병을 치료하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행수도 그중 한 명이었다.
큰 드럼통 속에 누워 엑스레이 사진을 찍은 이 행수는 병실로 돌아와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은편 침대에 누워있던 같은 또래의 남자는 폐암이어서 내일 방사선 치료를 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상의를 벗고 의사가 매직으로 그려 놓은 동그라미들을 짚으며 “이게 사람의 몸이냐”며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마치 푸줏간에 걸려있는 도장 찍힌 생고기처럼 푸릇한 표식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었다. 그는 검지로 표식한 부분을 콕콕 찍으며 레이저 광선을 쏘는 시늉을 했다. “요즘은 의술이 좋아 조금만 고생하면 낫지 않겠어요?”라는 위로의 말을 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담당의와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둘째 아들과 사리원댁은 아직 수술할 단계는 아니라고 위로하며 집에 돌아가 약으로 다스려도 된다는 말을 전했다. 이 행수는 사리원댁의 눈에 눈물이 그렁한 것을 보았다. 이 행수는 의연함을 보이면서도 ‘아뿔싸! 늦었구나!’ 하며 아득한 늪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귀가 후 사리원댁은 민간치료법에 매달렸다. 요 몇 달 동안, 이 행수는 안 먹은 약이 없는 듯했다. 유근피, 애기똥풀, 율무쌀, 다래나무 뿌리, 청미래덩굴 뿌리, 까마중, 잉어즙, 왕지네가루 등 위에 좋다는 약은 거의 먹은 듯했다. 사리원댁이 직접 만든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이 행수의 병증을 알고 있는 이웃들이 직접 약을 구해와 전해주며 아픔을 공유했다. 그가 생애 가장 우울한 늦여름을 보내는 동안 구봉광산에 매몰되었던 광부가 16일 만에 생환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광부는 운 좋게도 비상용 식수와 지상과 연결된 전화기가 있는 대피소로 피신하여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고 했다. TV와 라디오 방송사는 그가 구조되는 순간을 생중계하는 등 그는 최고의 영웅이 되고 있었다. 지난 총선에서 불거진 부정선거 의혹으로 어수선한 정국을 수습하려는 정부의 발 빠른 움직임은 그를 ‘철인’으로 만들고 성금 모금 운동을 벌이는 등 이반한 민심을 되돌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까지 나서 “온 국민의 기쁨을 전한다. 참으로 반갑고 기쁜 일이다. 조속한 시일 안에 건강을 회복, 힘찬 새 생활을 하기 바란다.”는 담화까지 발표했다.
광부의 생존 귀환은 이 행수에게도 새로운 희망이었다. 주기적으로 서울에 올라가 진찰을 받을 때마다 의사 또한 암세포 활동이 둔화했다며 긍정적인 말을 전했다. 또한 “신약이 계속 출시되고 있어 참고 견디시면 암 정복도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행수는 식욕이 감퇴하고 위통과 구토로 고통은 더해갔다. 이제는 마약성 진통제가 아니면 통증을 줄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통제를 먹으면 통증은 줄어도 마냥 쏟아지는 졸음에 취해,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모를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밖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이 행수가 마당으로 내려오려 하자 일찍 일어나 눈을 쓸고 있던 큰아들이 지팡이를 가져왔다. 이 행수는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뒷마당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밤새 내린 눈으로 뒷산은 하얗게 덮여 있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여우 울음소리가 귓전까지 들리더니 최근에는 그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이 행수가 발을 디딜 때마다 굵고 깊숙한 발자국이 눈 위에 찍혔다. 수국나무 근처에 이르러 처마 밑을 본 이 행수는 깊은 탄식을 자아냈다. 나무 근처에는 어지럽게 발자국이 널려 있었다. 지난밤, 잠결에 들은 인기척이 사실이었음이 드러났다. 아이들을 깨우기도 그렇고, 통증이 서서히 가슴을 파고들던 시간이라 그는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오래 집중할 수 없었다. 강하게 부는 바람과 갑자기 밀려오는 한기에 그는 몸을 움츠리며 잠속으로 미끄러졌다. ‘설마, 그럴리야!’ 하는 마음을 갖고는 있었지만, 예상대로 그가 아끼던 자전거가 사라지고 없었다. 한 달 전에 구입한 자전거는 기아산업 제품으로, 가히 가보라 할 만큼 삐까뻔쩍한 신제품이었다. 짐받이가 널찍하여 짐을 싣거나 사람을 태우기가 용이하게 제작된 자전거였다. 거무튀튀한 자전거만 보던 사람들 눈에 날렵한 하늘색 자전거는 고급스러워 보였다. 쌀집 자전거가 짐꾼용이라면 이 행수의 자전거는 맥고모자를 쓰고 양복을 입은 신사들이 타는 고급제품이라 할만했다. 그런 자전거가 하룻밤 사이에 도둑을 맞은 것이었다. 도둑도 애를 먹었을 것이다. 자신의 발자국이 눈에 찍힐 것은 뻔했고, 자물쇠가 채워진 자전거를 메고 미끄러운 길을 이동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도둑이 담 너머로 자전거를 옮긴 흔적이 역력했다. 이 행수가 까치발을 딛고 담 너머를 살피자 도둑의 발자국은 담장 밑 수로를 따라 바깥마당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새벽에야 그친 눈발은 도둑의 족적을 선명하게 남기고 있었다. 아버지를 뒤따라온 큰아들은 자전거가 없어진 것을 보고 놀라며 탄식을 했다. 자전거는 생전에 아버지가 자기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이 될 수 있는 소중한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어제도 땅이 미끄럽다며 사리원댁이 만류해도 그는 큰길로 나가 자전거를 배웠다. 손주들도 자전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즐거워했다. 행여 아버지가 넘어지면 박수를 치며 깔깔댔다. 동네 아이들도 그런 모양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즐겼다. 잠시 자전거가 쉬는 틈을 이용해 아이들은 서로가 자전거 벨 소리를 울려보려고 줄을 섰다. 자신이 조작하여 ‘찌렁~ 쩌엉!’ 하고 울리는 소리가 신기한 듯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좋아했다. 편종 소리를 닮은 요상한 소리는 아이들이 벨을 당기는 힘과 시간차에 따라 다른 소리를 냈다. 아이들은 자전거 안장에 올라 신나게 페달을 밟아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이 행수의 손자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는 그만의 특권으로 남겨 놓을 성싶었다. 이제, 이 행수의 집 애장품이기도 하고 마을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던 자전거가 없어졌으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 행수는 도둑이 누구인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전날, 의당에 사는 여동생이 그의 둘째 아들과 함께 이 행수 집에 왔었다. 이 행수의 유일한 여동생이었지만 남편이 일찍 죽어 가세가 형편없었다. 그가 올 때마다 대동하던 두 아들 중 한 명은 초등학교 6년을 다니는 동안 한 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들을 중학교에 진학시킬 여력이 없어 공주 읍내 철물점에 맡겨 배달일을 하고 있었다. 어제 방문했던 둘째 아들은 형의 도움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공부에 뜻이 없어, 여동생과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열등의식을 극복하려는지 노상 쌈박질에 도둑질까지 하고 다녀 어미의 속을 썩였다. 둘째 아들의 방문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설마, 외숙 집 물건에 손을 댈까’ 하며 그를 살갑게 대했다. 더욱이 며느리는 그가 아끼던 김도 내놓고 계란찜까지 하여 저녁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거기에 용돈까지 넉넉하게 주어 보냈으니 별 탈은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지부상족(知斧傷足)이란 말대로 하루를 못 참고 사달이 난 것이었다.
이 행수는 아들과 함께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 갓바위로 가는 산길을 타고 올랐다. 차가운 바람이 눈을 날리며 거칠게 지나갔다. 공수원 벌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에 양 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공수원 일대 전답 대부분을 소유했던 대지주라 죽어서도 자신이 경작했던 땅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둑의 발자국은 양 씨의 선친 묘에서 끊겨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산소에는 자전거 자물쇠통이 부서져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담장을 넘어, 이곳까지 자전거를 메고 온 도둑은 산소에서 돌로 자물쇠통을 깨부셨을 것이다. 도둑이 괘씸하다고도 생각했지만, 한 편으로는 짠한 감정도 들었다. ‘얼마나 자전거가 가지고 싶었으면 눈 오는 새벽에 이곳까지 메고 왔을까!’ 또 ‘자전거를 끌고 산비탈을 내려가 어떻게 저 미끄러운 신작로를 헤쳐 갔을까?’를 생각하니 기가 막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화를 참지 못하여 씩씩거리는 큰아들을 보자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자전거는 다가오는 장날에 다시 사주기로 하고, 큰아들을 다독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 사리원댁도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찬 바람을 쐬며 산에 올랐으니 걱정할 만도 했다. 때맞춰 이 행수의 가슴에 엉켜있던 기침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러자 급히 큰 며느리가 그를 부축해서 방으로 모셨다. 안방에는 이불이 깔려있고, 머리맡에는 각종 과자가 쟁반에 놓여 있었다. 사실, 과자나 사탕은 이 행수보다 큰손자가 주로 먹었다. 할아버지가 잠든 것으로 판단한 손자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와 사탕을 가져가곤 했다. 이 행수는 잠든 척하며 실눈으로 손주의 행동을 쳐다보는 기쁨을 누렸다.
이 행수가 차가운 몸을 이불 속으로 밀어 넣자 훈훈한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는 맞은편 천장 아래에 걸려있는 자신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일 년 전, 뒤꼍에서 찍은 흑백사진이었다. 사진의 배경으로 까중나무 몇 그루가 서 있어 자신의 모습이 그리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이 행수의 죽음을 예견한 둘째 아들이 몇 달 전 서울에서 제작하여 가져온 것이었다. 양쪽 볼 위에 불거져 나온 광대뼈와 짙은 눈썹, 약간 패인 듯하면서도 깊이 있어 보이는 까만 눈동자, 제법 그럴싸하게 자리를 잡은 검은 수염, 초라하지 않게 나무와 함께 서 있는 구도 등이 그의 영정사진으로 손색이 없었다. 며느리가 가져온 따뜻한 미음 몇 숟가락과 약을 먹자 그는 스르르 눈이 감겼다. 요즘 들어 약사가 수면제의 비중을 더 늘리는 듯했다.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다. 분명, 비는 내리는데 이 행수의 몸을 비켜 가고 있어 그의 옷은 마른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붉고 푸른색으로 다가오는 안개는 마치 온몸을 밀어내듯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좌우로 긴 허리띠처럼 이어진 기와집 지붕에는 흰 고니와 공작, 앵무새가 앉아 있고, 하늘에는 몸 하나에 두 개의 머리가 달린 희귀조와 사람의 머리를 가진 새들이 소리 없이 날고 있었다.
이 행수가 걷는 길은 낯익은 길이었으나 어느 곳인지 명확하지는 않았다. 그가 정신을 모아 앞을 보니 저 멀리 앞쪽에 궁궐 같은 건물이 놓여 있었다. 이 행수가 겁먹은 다리를 다독여 그곳으로 가까이 갈수록 비는 서서히 걷혔다. 건물의 입구 앞 넓은 정원에는 새들이 날고 있었는데, 모두 처음 보는 종이었다. 한 몸에 머리가 두 개 달렸다는 비익조였다. 그 새는 암컷과 수컷이 각각 눈과 다리, 날개를 하나씩 갖고 있어 마음이 서로 통해야 날 수 있는 새였다. 낯선 풍경, 어설픈 인지능력에 이 행수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가던 발목에 힘을 주어 멈춰 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음악에 밀려 대궐로 나가고 있었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석 날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밤 깊어 사람 없자 은밀히 속삭였죠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련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장구해도 끝날 날이 있지만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끊임없는 우리 사랑은 다할 날이 없으리
비익조가 리듬을 타고 하늘을 날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그를 맞이하는 듯한 합창 소리에 이 행수는 잠시 두려움을 걷어냈다. 그리고 노래 가사처럼 자신의 삶에서 진정 ‘사랑’이라는 것이 있었는가를 곱씹어보았다. 가난으로 점철되었던 가족의 삶, 그리고 땅속에 손가락을 묻고 살아 온 시간이 8할은 될 듯싶었다. 그래도 그에게 사랑이란 것, 혹은 그 느낌을 처음 경험하게 한 것은 두 아내였다. 동네 또래 여자들과 마주쳐도 먼저 내외하던 그였다. 그러던 이 행수가 대나무집 떡장수 여인의 중매로 만난 첫 번째 여인은 민담의 주인공으로 나올법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그마한 키에 긴 생머리를 엮어 댕기 머리를 하고 있었다. 검정 치마에 무명 저고리를 걸친 단아한 모습에 그는 처음으로 가슴이 찌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더구나 검정 고무신에 시선을 묶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여인의 자태에 그는 반해 버렸다. 전쟁 통에도 숯 장사를 하던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함께 힘든 세월을 걸어 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거친 세월을 걷어내고 그녀가 이따금 보이는 미소는 그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 청사초롱을 밝히고 신혼 방으로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그의 아들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사흘 밤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부의 배에 올라 버둥거렸지만, 합궁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첫날 밤은 고쟁이 끈을 푸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방사하고 말았다. 이어 이틀 밤 동안에는 합궁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는지 고추가 영 말을 들지 않았다. 고자인가도 싶어 아침에는 아내의 얼굴을 보기도 민망했다. 다행히 나흘째 되는 날 새벽, 불끈 솟아오르는 하체의 느낌에 그는 서둘러 합궁을 시도했고 드디어 입궁에 성공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몸 안의 피가 한 곳으로 빠져나가는 황홀함을 경험했다. 이튿날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고, 아내는 남편의 시선을 피하며 부끄럼을 탔다. 그런 아내의 모습이 더 할 수 없이 예뻐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이 행수가 느끼던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아이를 낳고 그들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이젠, 굶어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 6,25 전쟁이 발발했다. 비록 인민군이 금강 전투에 몰입하여 공수원 육동을 그냥 지나쳤다고는 하나, 그를 다시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보전해야 했으며, 째보로부터 딸을 보호해야 했다. 아들과 아내는 물론 이웃과 자산의 전부인 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징용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자식들의 생명은 건사했으나 아내의 죽음만은 막지 못했다. 다행히 사리원댁이 들어와 전처의 빈자리를 채워 주었지만, 삶의 여정을 돌아보았을 때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다만 길 여기저기에 나 있는 상처가 그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아 온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였다. 그것은 자의에 의한 것도 있었지만, 타의에 의해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은 것도 많았다. 모든 것을 처자식에게 맡기고 어디론가 훌훌 떠나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인생이었다. 그는 손주가 좀 더 자란 후에, 미련 없이 상처들을 보듬으며 먼 길로 가고자 했으나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삶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 속성이 있었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대궐 문으로 들어서자 수문을 지키는 이들이 그의 앞을 막으며 눈을 부라렸다. 그곳에는 이 행수만 온 것이 아니었다. 검은 복장을 하고 얼굴에 흰 분칠을 한 수문병들은 다섯 또는 열 명씩 인원을 모아 명부에서 실명을 확인한 뒤 안으로 들여보내고 있었다. 이 행수는 까치발로 서서 안쪽을 살폈다. 그러자 마치 사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풍경이 놓여 있었다. 단 위 옥좌에는 붉은 옷을 입고 손에는 염주를 든 백발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왕 같기도 하고, 부처 같기도 했다. 왕이라고 보기에는 의상에 붉은색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고, 왕관도 화려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염주를 들었다고는 하나, 부처 같은 인상도 아니었다. 더욱이 검은 수염까지 달고 있었다. 그가 앉은 용상에는 붉고 푸른 비늘을 지닌 용 한 마리가 있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주변인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이는 두 여인이 서 있었다. 그들 또한 목에 염주를 들고 고깔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유사한 복장을 한 이들이 두 줄로 옹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깔에 호피 무늬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이목구비가 똑같았다. 코가 길고 입술은 삼각 모양이었으며 손이 일반인의 반밖에 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사내는 단 아래서 기록물을 낭독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톤을 낮게 했다가 마지막 부분에서는 톤을 높였고, 그의 마지막 발음에 의해 소환자는 좌우로 나뉘어 발길을 옮기는 듯했다. 이 행수는 눈을 부라리는 장부를 든 수문장과 눈이 마주치자 경직되어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옴짝달싹 못 했다. 이름을 쉽게 찾지 못하고 이름을 몇 번이나 묻던 수문장은 대로하며, 부르지도 않은 자가 뭐하러 이곳에 왔느냐며 호통을 쳤다. 그리고는 그가 이 행수의 어깨를 ‘툭’ 치자, 마치 강풍에 떠밀린 듯 날아올라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에 놀라 혹시 목이나 뼈가 부러지지 않았나 확인하기 위해 그가 눈을 뜨자 익숙한 풍경이 다가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바로 이 행수의 집 안방이었다.
“아버님 정신 차리세요!” 하는 며느리의 음성이 들렸다. 그는 가늘어가는 호흡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에는 아내와 며느리, 그리고 두 아들 내외가 앉아 누워있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행수가 “너나 정신 차려라!”라고 외치자 방 안의 긴장감이 다소 누그러지는 듯했다. 이 행수의 입에서 손자의 이름이 새어 나오자 막내며느리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가 손자를 부르는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손자는 마당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흰 눈을 두 손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사리원댁은 막내며느리 손에 끌려들어 온 손자를 이 행수 곁에 앉게 했다. 그러자 이 행수는 아무 말 없이 손자의 손을 가져와 자기의 가슴에 얹었다. 그리고는 깊은숨을 내 쉬는가 싶더니 이내 얼굴이 평온해졌다. 그가 이승에서 내 쉰 마지막 긴 호흡이었다. 고단했던 삶이 드디어 끝나는 순간이었다. 도장골로 넘어가는 산등성에서, 그가 한없이 마을을 내려다본 지 사흘 만이었다. 밖에는 마치 문상을 오는 듯, 흰 눈이 소복소복 다가오고 있었다.
이 행수의 손주는 마당과 텃밭을 뛰어다니며 눈을 입으로 받아먹기도 하고, 두 팔을 마구 휘두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뒤에서는 이 행수의 시신을 앞에 둔 숨 쉬고 있는 자들의 통곡이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