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다한 창녕 탐방 추가 자료 안내 -지난 2022. 12. 20 창녕 탑사 탑재 때 다 못 실은 얘기를 추가로 안내하오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양파지배지의 숨은 이야기 창녕 양파시배지는 1908년 성재경의 부친 성낙안으로부터 시작된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성재경이 양파의 가치를 알아보고 모종을 구해 창녕의 아버지(성낙안)께 드려 심도록 하였다. 그당시의 양파는 농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대체 작물로 같은 단위면적의 밭작물에 비해 10배 이상을 올릴 수 있어 선망의 품종이었으나, 모종이나 씨앗 값이 너무 비싸 일반 농가에서는 그림의 떡이었다. 특히 모종은 말한 것도 없고 씨앗 1홉이 백미 대두 2말 값 이상이라 시골 농촌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당시 일본의 양파 씨받기 시험포는 외부 노출 없이 철저한 비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종자 씨앗을 채집하는데 몇십 년을거듭하여 실패하였다. 이때 창녕 석 리의 성재경이 아버지(성낙안)에 이어 양파 씨받기를 성공하기까지는 숨은 공로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인근 학교의 원예교사인 조성국이다. 그는 성재경을 도와가며 양파를 재배하며 씨앗을 수확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이는 양파의 개화기가 우기(雨期)라서 꽃이 피어도 결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밭둑에 심은 호박이 덩굴을 이루어 양파밭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덩굴 속에서 양파가 씨앗을 맺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그는 다음 해에는 장마철이 되기 전에 씨앗을 채집할 양파를 유지(油紙 : 기름종이)로 가렸더니 마침내 씨앗을 채집할 수 있었다. 그 다음해는 함석이나 판자로 양파 위를 가려 많은 씨앗을 수확할 수 있었고, 1953년부터 대량으로 확보한 씨앗을 일반 농가에 나누어 심도록 하여 창녕의 양파 보급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후부터 창녕은 다른 농촌보다 부촌으로 거듭나서 양파 재배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창녕 관내의 중고등학교는 공립(2~3개교)보다 사립(7~8개교)이 더 많은 것도 이런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창녕 양파 시배지 *창녕 성씨 고가의 비운사(悲運史) 창녕 성씨 고가는 희비가 상존하는 고가(古家)임에 틀림이 없다. 여기에서 고가(古家)와 고택(故宅)을 한번 짚고 가고 싶다. 고가(古家)는 지은 지 오래된 집을 말하고, 고택(故宅)은 예전에 살던 집을 의미한다. 그리고 고택(古宅)이라는 말은 고가(古家)의 유의어로 쓰인다. 석 리의 창녕 성씨는 만석꾼의 부호로서 양파의 보급으로 베풂의 적선지가로 명성을 떨쳤지만, 성재경의 4촌 성유경(성낙교의 양자)은 일본에서 유학할 때부터 좌익성향이 농후했다. 그는 6.25 와중에 아들 성일기와 두 딸 성혜랑과 성혜림 등 가족 모두를 데리고 월북했다. 막내딸 성혜림은 북한에서 이미 결혼하여 딸까지 두었지만 김정일의 눈에 들어 그의 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 결혼을 김일성에게 끝내 허락 받지 못해 모스크바에서 외롭게 객사하여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언니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이 서울 망명했다가 성남의 어느 아파트에서 암살되었고, 딸은 런던으로 도피하여 숨어 살았으며, 성혜랑 자신은 미국에 망명하여 혼자 살고 있었다. 이에 오빠 성일기는 빨치산 참모장으로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마지막 단계에서 자유대한을 택하였다. 그래서 성일기는 월북한 창녕 성씨 일가 중 온전하게 살아남은 유일한 혈통인 셈이다. 그것은 그가 체포되었다가 방면됐기에 생존하여 가문과 혈통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성일기는 빨갱이 타도에 앞장 선 방첩부대장 김창룡(金昌龍) 장군을 은인이라 부르고, 반공검사인 오제도를 ‘매우 고마운 분’으로 호칭한 것으로 보아 그가 빨치산 유격대 활동 막바지에 체포되어 자수라는 명목으로 석방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뒷받침해 줬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성일기의 부친 성유경(成有慶)은 이미 14세 때 조혼했으나, 도쿄에서 신여성 김원주를 만나 첫아들인 성일기를 낳았다. 성씨 종중(宗中)에도 “손이 귀한 집안에 후사를 이었다”며 중혼(重婚)을 허락하여 만석꾼 4대 종손 지위를 확보한 것이다.
창녕 성씨 고가
성일기가 경성사범 부속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자, 어머니 김원주는 아들을 모스크바로 유학을 보내기 위해 평양으로 불러올렸다. 그러나 “월북 청년들은 먼저 빨치산 복무 경력을 쌓아야 한다.”라는 노동당의 방침으로 빨치산 훈련을 받고 남파되어 본명 대신에 ‘차진철’이란 가명으로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53년 휴전될 무렵부터 얼마 남지 않은 잔존세력의 진로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어느 날 빨치산 사령관이 성일기 참모장에게 “북상하기도 어렵고 일본으로 밀항해야 할 판국이니 고향 창녕에 가서 은신처나 찾아보라.”라고 지시했다. 성일기는 경호원을 데리고 창녕에 잠입하여 큰아버지(성낙문)한테 사실을 고백하니, 집안의 4대 독자라서 어떤 일이 있어도 살리려는 마음이 간절하여 숨겨주기로 하고, 사령관과 간부 몇 명을 정원사로 위장하여 채용하였다. 얼마 뒤, 그의 큰아버지는 “이제 너도 자수해라.”라고 권하였으나, 그만 탄로 나서 1953년 12월 육군 특무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방첩부대장인 김창룡 장군과 각별한 교분을 지닌 큰아버지의 뒷수습으로 '생포'가 아닌 ‘자수’로 조서를 꾸며 서류상 재판절차만으로 풀어주었다. 당시 대구에서 겨우 3개월의 영창 생활을 한 후, 성일기에게 야간 통행증을 발급해 주면서 “상기자에 관한 문의 사항이 있으면 1928부대장(김창룡)에게 문의할 것”이라고 명시했다니, 곧 방첩대장(김창용)이 그의 신변을 보호해 준 셈이다. 자유의 몸이 된 성일기는 1954년 단국대 영문과, 1956년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선대가 남겨 놓은 고향 땅과 서울 등지의 부동산을 찾아 매각하고 나서도 빨갱이를 그토록 싫어하던 큰아버지 댁에 얹혀살기도 했다. 그 뒤, 2001년 10월 21일에는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이 모여 창녕 성씨댁 행랑채 가까이 땅속에 묻어둔 6.25 빨치산 자료들을 발굴하여 공개하였다. 빨치산 자료들은 맥주병을 비닐로 싸고 다시 군용 판초 우의를 씌워 묻어두어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고 한다. 성일기는 불온사상으로 김씨 왕조에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성한 후 대한민국으로 전향하여 온전하게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로 이를 증언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만년교의 내력 영산의 홍예교는 반원형 무지개다리로 일명 만년교라고도 하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만년교라는 비석은 입구에 큰 글씨의 한자로 새겨져 있는데, 세울 당시 영산 고을에 신통한 필력을 지닌 13세의 신동(神童)이 있었다. 다리가 완공되기 전날 밤, 그 소년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 이렇게 당부하였다. “듣건대 네가 신필(神筆)이라니 내가 거닐 다리에 너의 글씨를 한 점 새겨두고 싶다. 다리 이름은 만년교라 할 터이니 써보도록 해라.” 꿈에서 깨어난 소년은 목욕재계하고 먹을 갈아 그 밤이 지새기 전에 「만년교(萬年橋)」라고 석 자를 써놓았다. 그 글씨가 바로 그때 우리가 본 그 글씨로 비의 오른쪽 측면에는 작은 글씨로 「십 삼세 서(十三歲 書)」라고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창녕 만년교 비
홍예교로는 영산홍예교를 비롯하여 순천 선암사의 승천교, 보성 벌교의 홍교, 여수 흥국사의 홍교가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럼 우리나라에는 국보가 없는가? 분명히 국보가 있다. 그것도 두 점씩이나. 그런데도 우리가 자주 보아 온 것이지만 대충 보고 지나치고 만다. 바로 경주 불국사의 대웅전을 오르내리는 계단이 국보 23호인 청운교(위쪽 계단)•백운교(아래쪽 계단)와 극락전을 오르내리는 계단의 다리인 국보 22호 연화교(아래쪽 계단)•칠보교(위쪽 계단)이다. 이 다리는 통일신라 시대인 751년(경덕왕 10)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다리들은 2개의 층으로 되어 있으나 하나로 묶어 국보로 지정되었다.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국보 23호)
경주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국보 22호)
*창녕 석빙고를 통해 알게 된 사실 석빙고는 옛날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다. 겨울철에 얼음을 깨어 보관하였다가 입하 때부터 상강 때까지 얼음을 꺼내 배분하는 곳으로 조정에서 모두 관리하였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빙고는 모두 6곳으로 경주 월성, 안동 예산, 창녕, 청도 화양, 현풍, 영산 등으로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 중에도 보존 상태가 가장 완벽한 곳은 경주 월성 석빙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석빙고로는 국보가 없다. 국보는 우리가 직접 관리하는 문화재로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으로 가치가 큰 것과 제작 연대가 오래된 것 중에서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 정한다. 다만 북한의 국보 69호인 해주 석빙고는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 없는 관계로 국보급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것은 1735년(영조 11)에 개축한 것이다.
해주 석빙고(북한 국보 69호)
그러면 궁궐이 있고 고관대작과 백성이 가장 많이 사는 한양(서울)에는 석빙고가 없었을까? 당시 한양에는 2곳의 큰 빙고가 있었다. 성동구 옥수동에 나라의 제향에 사용할 얼음을 보관 저장한 동빙고와 용산구 서빙고동에 있었던 서빙고로 궁중의 전각과 관아나 문무백관에게 벼슬에 차등으로 공급되었다. 또 빙고를 관리할 종5품 관리를 두어 그 임무를 맡겼고, 두 곳 모두 나무로 만든 빙고로 오래되면서 불에 타거나 훼손되었다. 그래서 나무로 만든 얼음 저장소라고 하여 목빙고(木氷庫)라 하지 않고 그냥 빙고(氷庫)라고 하였다.
서울 서빙고의 옛터 *창녕 만옥정공원의 역사적 재음미 만옥정공원에는 진흥왕 척경비가 있다. 이 비는 원래 화왕산 기슭의 대밭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14년 소풍 온 학생이 그 위에 걸터 앉아 점심을 먹다가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학교에 신고한 것을 당시 일본인 교장이 관아에 신고하여 발견된 것이다. 받침돌이나 지붕돌도 없이 몸돌만으로 누워져 있는 돌멩이에 알 수 없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신고한 것이다. 당시 1914년 조선 총독부의 위촉으로 창녕 고적을 탐사하던 일본인 역사 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신라 시대의 비석임을 확인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모두 643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고, 그중 400자 정도만 판독할 수 있었다. 다행히 비문의 첫 부분에 <기사년 이월 일일 입(己巳年 二月 一日 立 : 기사년 2월 1일에 세움>)이라는 글자가 뚜렷하여 이 비가 561년(진흥왕 22)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비문에는 대략 3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비를 세운 사실, 곧 진흥왕이 가야 땅인 창녕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 둘째, 고관을 모아 놓고 왕으로서 통치의 이상과 포부를 밝히고, 그들에게 백성을 잘 이끌도록 당부한 내용. 셋째, 왕의 행차에 수행한 42명의 관리 이름과 직위와 출생지 등을 순서대로 기록한 내용.
창녕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 국사 시간에 배운 신라 24대 진흥왕 순수비는 모두 네 곳으로 알고 있다. 북한산비(국보 3호), 함남 함주군의 함초령비(국보 110호), 함남 이원군의 마운령비(국보 111호), 경남 창녕비(국보 33호)이다. 그러나 창녕비는 순수비라고 하기보다는 척경비라고 한다. 그럼, 순수비와 척경비는 어떻게 다른가? 순수비(巡狩碑 : 돌 순, 사냥 수, 돌기둥 비)는 왕이 나라의 안을 두루 돌아보며 순시하고 세운 비를 말하고, 척경비(拓境碑 : 넓힐 척, 경계 계, 돌기둥 비)는 왕이 나라의 경계를 넓힌 곳임을 알리는 의미를 지닌 비석이다. 그래서 순수비에는 순수관경(巡狩管境 : 왕이 친히 관할 경계를 돌아봄)이라는 말이 들어 있지만, 창녕비는 그런 말이 없이 새 점령지의 정책과 이에 관련된 사람을 열거했을 뿐이기 때문에 척경비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국보 3호)
다음은 창녕척화비이 대한 이야기다.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르면서 백성들에게 서양세력의 침략을 강력히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 주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써 그 내용으로는 큰 글씨 12자, 작은 글씨 12자가 새겨져 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양이침범 비전칙화) 主和賣國(주화매국) :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매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我 萬年子孫(계아 만년자손) 丙寅作 辛未立(병인작 신미입) : 우리 자손만대에 훈계하고자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이는 흥선대원군의 서양 오랭캐와는 통상을 저지하고 더욱 강력한 쇄국정책을 표방함으로써 못처럼 일 수 있던 개방의 물결은 물거품이 되는 사건이다.
척화비
*평장했던 곽재우 장군 묘의 비사(祕史) 이번 탐사에 보조코스로 잡혔던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묘소는 시간 관계로 탐방하지 못해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전에 이곳을 탐방한 일이 있었던 필자는 옛 기억을 되살려 간략히 안내하고자 한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군은 4월 22일에 의병을 일어켜 임란의 최초 의병장이 되어 우리나라의 지형지세를 이용해서 종횡무진하며 싸워 전투마다 대승을 거두었지만, 임금의 무능함과 당파에 휩싸인 조정에 실망과 함께 많은 피박과 고초를 당하였다. 말년에는 솔잎으로 연명할 만큼 검약한 생활을 하면서 당대의 선각자인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등과 가까이 교류하다가 1617년(광해 9) 4월 12일에 별세하였다. 필체가 웅건하고, 활달했으며 시문에도 능했던 장군의. 묘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일명 구지산)에 있다. 그런데 당초에는장군의 묘에는 봉분이나 묘비도 없이 평장((平葬)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연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번에 여러 사료를 조사해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란으로 선왕(성종과 중종)의 두 릉(선릉과 정릉)이 훼손되고 불에 탔는데 신하된 자가 어찌 예장으로 묘에 봉분을 쌓겠는가? 내가 죽으면 그냥 구덩이에 묻기만 하고 묘비도 세우지 마라."
장군이 별세하기 전에 후손을 모아 놓고, 이렇게 신신 당부하였다니, 이것 하나만 보아 장군의 충절과 고결한 기개는 하늘을 찌러고 남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숙연할 따름이다.
선릉(성종대왕 릉)
정릉(중종대왕 릉)
임란 때 훼손되었던 성릉과 정릉은 현재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능으로 1596년(선조 26)에 서울로 북상한 왜군이 능을 파헤쳐 능 속의 관과 정자각까지 모두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렸다. 여기에 장군은 크게 격분하고 자책하였다. 임란 후, 그때까지 복원되지 못한 것을 보고 통분한 장군은 세상을 하직하면서 자손들에게 그렇게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장군의 묘가 애초의 평장보다 조금 도톰하게 봉분도 하였고 묘비도 세워져 있다. 거기에는 이런 사유가 있었다.
장군이 돌아가신진 114년이 지난 1731년(영조 7)에 현풍현감으로 부임한 이우인이 장군의 묘소에 참배하고 나서 후손들에게 간곡히 권유하였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아무 표식이 없는 장군의 묘를 실묘할 수 있으니, 약간의 봉분과 묘비가 필요할 것 같다.“
현감의 권유를 받아들여 곽씨 종중은 다시 논의를 거쳐 먼저 돌아간 장군의 첫 부인이자 정부인인 상산 김씨와 합부(合祔 :합장)하여 지금처럼 나직히 봉분하고 받침돌이나 머릿돌도 없는 묘비도 세웠다고 한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 묘
장군의 묘소 앞에는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1592. 4. 22)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의병장의 묘소에서 구국창의(救國倡義 건질 구, 나라 국, 광대 창, 옳을 의 :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건지기 위해 의병을 일어킴)이라는 추모비를 보는 순간 무심한 나그네도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어서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이 자료를 본 후에 한번쯤 답사를 권하고 싶다.
곽재우 장군 묘소 앞의 '구국창의'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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