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볼 때 가령 60년대, 70년대를 이것은 한국의 경제 발전에 시동을 거는 단계다. 시동을 거는 단계에서는 아주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고 그 정보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그 지도자의 지도력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떼 박 대통령은 5개년 개발 계획을 세워가지고 국민들의 관심을 글로 집출을 시켰다. 당시 한국의 1인당 gnp는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한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일제 귀속재산 불화와 원조의 특혜 배분으로 일정한 자본이 축적되고 있었으나 국내 산업 구조는 허약하고 불균형했으며 국민 대다수는 가난했다. 교육받은 인력은 넘쳐 흘렀지만 그들의 잠재력은 쓰일 데가 없었다. 더욱이 50년대 말 미국의 원조 정책이 무상원조에서 유상원조로 바뀌면서 원조마저 줄어들고 있었다. 300 산업 가동률이 저하하고 한국 경제에는 당장의 위기가 닥쳤다. 경제 개발은 그 시대의 절박한 요구였다. 그러나 그 개발의 방향이 수입 대체가 아니라 외부 지향적인 수출 주도로 나아가게 된 데에는 미국의 역할이 컸다. 1961년 11월,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미국을 방문했고, 캐네디 대통령과 박정희 의장 사이에서 한국의 미래가 논의됐다.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정부는 세계의 다른 여러 나라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수입 해체에 기반한 국가 및 정부 주도의 산업화를 원하였고, 남한의 점진적으로 산업화의 기반을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1961년에 캐네디 정권이 들어서자, 세계 경제 안에 들어오라는 매우 강한 압력이 한국에 가해졌다. 미국이 이러한 정책을 펴게 된 것은 미국이 194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 국가들의 안보, 군사, 산업화, 경제 정책을 지원해 왔는데, 이제 캐네디 정부는 지불 능력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경제정책 자문가들 역시 경공업에 기반한 수출을 통해 새로운 발전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한국은 계속 추진해 나갔고, 또 한국은 매년 높은 성장률을 기록해서 그런 방식의 경제 발전의 한 모델이 되게 되었다. 1960년대 당시 북한의 경제력은 남한을 앞지르고 있었다. 소련의 기술과 원조, 국민 총동원 체제가 이룬 성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65년 한국에서는 한일 정상화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이전에 멕시코도 미국의 자본을 들여와 성장했다. 그러나 도약기를 지나자 미국 자본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멕시코 자신의 목적에 맞게 쓰여진 것이다. 멕시코처럼 한국도 외국 자본을 들여와 활용한다면 한국의 산업은 크게 발전할 것이고, 그것은 한국의 일본에 대한 의존 문제를 훨씬 더 많이 보상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때 박 대통령은 한일 관계를 정상화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였다. 한국은 한일관계를 정상화했고 이후 한국 경제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국은 아직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을 포함한 외국에 대한 의존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많은 우려를 한다. 불행했던 과거의 한일 관계를 청산하고 영광스러운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한일 협정이 6월 22일 오후 5시, 일본 수상 관저에서 정식 조인했다. 1964년 동경올림픽은 급성장한 일본의 재기를 세계에 펼쳐보인 쟁점이었다. 전후 복구는 완결되고, 제2의 산업혁명으로 신 분야, 신기술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생산력의 확대는 더 많은 시장을 요구하고 있었고, 일본은 제3세계 국가들의 개발을 지원함으로써 새로운 해외 시장을 형성해 나가는 중이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일본 자본의 해외 진출 욕구와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과거에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했던 일본과 손을 잡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그의 힘을 빌린다는 것에 나는 시위운동을 하던 학생들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는 것에 대해 무조건 비난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