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문고바위와 부채바위
김천시 신음동 금음(今音. 琴音) 마을 입구에 차돌바위가 있는데, 대부분이 땅속에 묻히고 윗부분 조금만 노출되어 있다. 이것이 부채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부채바위라 부르고 있다.
옛날 이 마을은 부촌으로 모두가 잘 살았는데, 광대가 줄타기할 때 부채로 써 바람을 잡아 몸을 가누듯 금음마을도 이 부채의 바람으로 인하여 부자마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을은 큰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다름아닌 화적떼들이 달이 멀다하고 침입하여 동민을 괴롭혔는데, 하루는 도사가 마을을 찾아왔기에 화적떼를 막을 방법을 물어더니, 도사는 말하기를 화적떼가 자주 드는 까닭은 부채바위 탓이라 하고 이것을 없애버리면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도사가 시키는 대로 부채바위를 깨뜨리고 땅에 묻어버렸다. 그뒤로는 과연 화적떼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동민은 모두 가난에 빠지고 말았다. 마을이 가난해지니 자연 화적떼가 들지 않았던 것이다
2) 봉황대(鳳凰臺)의 건립
김항주(金恒柱)가 1776년 김산군수로 있을 때 하루는 꿈을 꾸었더니,봉황이 구화산 밑에서 날아가는지라 그곳이 길지라 하여 어는 건물을 헐어다가 정자를 짓고 이름을 '봉황대(鳳凰臺)'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연화지에 있는 봉황대는 1838년에 김산군수 이능연(李能淵)이 구화산 밑에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3) 서낭골의 정기(精氣)
문당동 당골 뒤에 자리한 구봉산(九鳳山)에 서낭당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6.25 전까지 당골의 동제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서낭골을 바라보고 장차 큰 인물이 나서 명나라를 괴롭힐 것이라 하여 서낭골 산맥을 끊어 버렸다. 그 후로는 당골이 쇠퇴하고 구읍이 성해졌다 한다.
4) 따배이말래이
김천시 신음동 부거리(富巨里) 뒷산이 부춘산(富春山)인데, 꼭대기를 '따배이말래이(또아리말랑이)' 라 부르고 있다. 옛날 천지개벽할 때 부춘산이 물에 잠겨 또아리만큼 남았고, 금오산은 꼭대기가 거무(거미)만큼 남아서, 부춘산 꼭대기는 '따배이말래이' 라고 하고, 금오산 꼭대기는 '거무산' 이라 부른다고 한다.
5) 여제단(여祭壇)의 기자제(祈子祭)
문산못 동쪽 뒤 산마루에 있는 떠돌이 귀신의 한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이곳에서는 아들을 얻으려고 제사도 지냈다. 아들 없는 남자가 제수를 차리고 제사지낼 때 촛불을 끄고 "무자(無子)요." 를 세 번 외우고 절을 했다 한다.
6) 애씨굴
애석굴(哀惜窟)이 변한 말로, 공설운동장 동쪽 석축 쌓은 언덕배기의 문화예술회관 자리에 굴이 있었는데 옛날 옥사나 처형된 시신을 이곳에 버렸다고 한다.
7) 앗골
아곡(衙谷)에서 온 말인데 삼락동 구화산 들어가는 긴 골짜기를 말한다. 이곳 사람이 서울에서 나그네와 만나 수인사를 하는데, "댁은 어디 사시오?", "앗골 삽니다." , "앗골이 어디오?", "앗골은 계삼골, 동성골, 허대샘골....." 하고 앗골에 있는 아홉골짜기 이름을 늘어 놓았다. 나그네는 앗골을 아홉 고을로 알아듣고 "당신 많은 고을을 살았소," 라 했다. 고을살이란 군수 역임을 말한다.
8) 김천 부춘산(富春山)
김천시내 직지교에서 상주방면으로 가다보면 대형 할인매장인 이마트가 있고, 그 옆길로 빠져 김천농공고 방향으로 이백미터쯤 가면 부거리 동네가 나온다. 부거리 동네뒤에 그리 높지 않은 위치에 부춘산이 자리잡고 있다. 시청 청사 뒤에서 동네 등줄기를 연결하는 중추적인 작은 산맥을 안고 있다.
원래 부거리 동네는 지금으로부터 삼, 사백년전 창녕 조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아마도 봉산면의 봉계의 조씨 가문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맨몸으로 이 마을에 들어선 조씨 일가는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여 마을을 가꾸고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는데, 워낙 천성이 부지런하고 알뜰하여 재산을 많이 형성하였다. 다른 마을에까지 잘 산다는 소문이 퍼져 구경삼아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마을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연히 부지런하게 되어 제각기 남부럽지 않은 세대를 이루었다. 재산이 불어나자 인근 농토를 구입하여 땅에다가 금전을 투자하게 되어 가장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여 마을 사람 거의가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농지를 조금씩 구입한 것이 다른 부락에 비교가 되지 않을정도로 농사규모가 커져 대규모 영농을 하게 되었다. 인근 마을에서 품을 팔기 위해 모여든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부자동네답게 도로변과 골목에 상가도 많고 사람도 많아 번성기에는 사백여호에 달하는 가구가 살았다. 일제시대에 동네 중간으로 철길이 놓이자 그때부터 기차소리에 동네의 영험한 기운이 조금씩 사그라들었지만 그래도 그 명맥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1970년대에 마을앞에 경부고속도로가 뚫려 마을 농토가 줄어들고 동네 입지도 좁아지긴 하였지만 교통망의 확충에 따라 토지가격은 덩달아 올라 과거의 부촌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부거리의 또다른 지명유래는 산의 옛말 북막이 북골, 부골, 부거리로 변음되어 온 것이라고도 한다.
동네 뒤쪽에서 수호신처럼 자리잡은 부춘산은 동네 부자마을의 이름을 따 만물이 태동하는 화려한 봄날에 산의 정기를 토해낸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진산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일명 달봉산으로도 불리우며, 풍수지리학적으로는 백두대간의 중추인 소백산중의 난함산(태조산), 문암봉(증조산)과 더불어 부춘산(조산)에서 혈을 맺어 그 정기가 이곳 부춘산에서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부춘산의 왼쪽으로는 청룡좌를 상징하고(금류아파트옆), 오른쪽으로는 백호좌를 수놓은(김천농공고옆) 자리로 일컬어지고 있다. 수억년의 퇴적변화를 거친 장중한 침묵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산기운이 산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져 산과 함께 호흡하고 대화를 나누어 왔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산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지금도 등산으로 건강을 다지는 노인들이 건강을 자랑하며 장수를 누리고 있다. 다른 지역도 유사한 곳이 있겠지만, 이 부거리를 짊어지고 있는 산의 지형은 태초에 땅이 생긴이래 지금의 부춘산이 자리잡게 되기까지는 천지가 요동하는 대변환을 겪어왔다.
그 한예로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전설적인 이야기 노아의 대홍수때처럼 오랜 옛날 옛적 이곳 부춘 산하도 대홍수로 인해 지상의 모든 토지가 물에 잠식되고 급기야 부천산의 목턱까지 물이 차올라 숨가쁜 장면을 연출시켰다. 천지간에 물바다를 이룬 나머지, 마치 망망대해에 뜬 외로운 섬처럼 부춘산의 꼭대기 일부만이 사방을 지켜볼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다행히 부춘산의 꼭대기는 수중고혼을 면했는데, 남은 면적이 부녀자의 머리에 물동이를 얹는 또아리만큼만 남았다해서 부춘산 꼭대기를 ꡐ따배이 말래이(또아리 말랑이)ꡑ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또아리를 튼 모양중에서도 가장 위태하게 작게 남은 끝부분이라는 뜻이다. 최후의 위험천만한 상태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처럼, 그후 이 산아래 모여든 사람들의 강인한 삶의 원천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때 부춘산의 산마루턱에 남아 있었던 또아리만큼의 산흙에서 신성한 영령이 깃들어 있다가 다시금 부춘산 아래 마을사람들을 영험하게 돌보게 되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산세의 모양이 김천시의 중심지에 자리잡아 동쪽의 해뜸을 받아들여, 김천시 온누리에 뿌려주는 은혜로운 역할을 할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 말이 현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부춘산 밑 동쪽 방향으로 김천시청사가 들어섰고, 그 바로 옆에는 시의회 청사가 곧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공교롭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들어맞는 일이다. 김천시민의 모든 역량과 힘이 이 부춘산의 정기를 나누어 받아 김천의 발전의 원동력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결과가 옛사람들이 전하는 말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거리동네의 자긍심을 가질만한 근거도 동가를 갖고 있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연부락에 동네를 상징하는 동가(洞歌)를 갖고 있는 예가 희귀할 정도인데, 부거리동네는 부춘산의 정기를 받았음인지 마을앞에 부거리 동네 동가를 기념비에 새겨넣고 오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 가
작사. 작곡 강 문 수
구화산 푸른초목 내려다보고
맑고 맑은 직지천 흘러내리고
앞으로는 기차가 통통 달리내
귀엽고 사랑하는 우리마을 부거리
진보해라 발전해라 우리 부거리
아침마다 해떠오는 그 빠른 힘으로
청년아 소년들아 같이 손을 잡고서
십삼도에 울리도록 같이 힘써 나가자
순박한 민족에 혼 깃들이듯이
인정많고 열성많은 우리 선조가
앞으로의 우리네 나갈길 너를 보호하네
일어서서 힘써 나가자 우리마을 청년들
맞춤법상으로 일부 틀린 부분도 있으나, 전체적인 문맥과 뜻을 헤아려보면 부춘산의 산정기를 물려받은 여운이 곳곳에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구화산은 부춘산너머 구화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그 사찰과 연결된 산마루와 부춘산이 인접해 있어 부춘산을 구화산으로 바꾼 것 같다. 아마도 글의 작사자가 깊은 불심을 가진 신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동가의 주제는 청년의 기상을 강조하며 밝은 미래를 추구하는 의지가 담겨있어 줄기찬 연속성으로 인간의 삶과 노래를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부춘산의 기상과 단아한 자태는 부거리 사람과 김천시의 미래와 함께 영원한 모습으로 남게 될 것이다.
▶ 위 치 : 경상북도 김천시 신음동 부거리 부춘산(해발 310m)
▶ 주변명소 : 김천시청, 이마트, 김산향교, 교동연화지, 문화예술회관, 시민대종각, 종합운동장. 조각공원, 강변공원
▶ 안 내 : 김천시 산림과(054-420-6311)
김천시 대신동사무소(054-432-2517)
※ 자료제공자 : 김천시 대신동장 최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