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송지희 기자의 보살의 길 / 충렬왕비 정화궁주
원나라 속국 전락한 고려시대 비운의 왕비
14년 동안 태자비로 살다가
충렬왕 재혼 후 후비로 격하
여인은 부처님 전에 몸을 낮춘 채 일어설 줄을 몰랐다.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가녀린 어깨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고려 충렬왕 8년(1282),
강화 진종사(眞宗寺)를 찾은 정화궁주는 복받쳐오는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10여년전 남편 충렬왕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생생했다.
당시 고려는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에 임시수도를 꾸렸다.
정화궁주는 이곳에서 태자였던 충렬왕과 결혼했고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오랜 전쟁으로 시름도 많았지만, 되돌아보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녀는 종종 충렬왕과 함께 진종사를 찾아 나라의 평안과 안정을 꿈꿨다.
그러나 1270년,
고려는 결국 몽골에 백기를 들었고 40년간 지속됐던 대몽항쟁도 마침내 끝났다.
그리고 불완전한 평화의 대가로 원나라의 내정 간섭이 시작됐다.
이후 고려 왕실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원나라와의 관계가 모든 정치를 좌우하는 핵심 사안이 됐다.
태자였던 충렬왕은 원나라로 보내졌다. 원 세조의 환심을 사기 위한 볼모나 다름없었다.
태자는 원나라식 머리인 변발을 하고 원나라의 풍습을 배웠다.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리고 1274년 충렬왕은 39세의 나이로,
16세인 원나라 공주 제국대장공주(쿠틀룩 켈미쉬)와 결혼했다.
고려 임금이 원나라의 사위가 되고 원나라가 고려 임금의 장인이 된 셈이다.
충렬왕과 결혼한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 세조,
즉 쿠빌라이의 막내딸로 황제의 직계혈족이라는 점에서 그 위세가 말할 수 없이 높았다.
고려는 자연 원나라의 속국 신세로 전락했다.
그로부터 한달 뒤 고려 24대왕이었던 원종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충렬왕은 변발을 한 채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태자가 왕이 되면 태자비가 왕비가 되는 것이 순리지만,
정화궁주의 신분은 외려 후비로 격하됐다.
후비가 된 정화궁주를 대신해 16살 원나라 공주가 충렬왕의 정비 자리를 꿰찼다.
고려 임금보다 위상이 높은 원나라 공주가 일개 후처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정화궁주로써는 14년간 부부로 살아오다 한순간 첩 신세가 된 황망한 상황이다.
그러나 충렬왕의 고충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왕권강화와 나라 안정을 위해
원나라의 사위가 되어 그 위세를 빌릴 수밖에 없었던 왕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정화궁주는 모든 상황을 감내했다.
그리고 고려에 온 나이 어린 왕비, 제국대장공주를 따스하게 맞이하고 예를 갖췄다.
그러나 정작 제국대장공주에게 정화궁주는 마치 가시처럼 거슬리고 미운 존재였다.
그녀가 14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충렬왕의 여자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질투심 솟구쳤다.
제국대장공주는 몽골여성답게 당차고 활발했지만 권위적이며 시기심이 많았다.
더욱이 아버지인 원 황제를 후광 삼고 민족적 우월감을 기반으로 안하무인의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20살 이상 차이 나는 남편 충렬왕조차 어찌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제국대장공주의 이 같은 성향은 정화궁주에 대한 견제와 괴롭힘으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대상과 상황을 가리지 않는 무례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고려사’ 후비전에 따르면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에게도 욕을 하고 때리기까지 했다.
또 흥왕사 금탑을 비롯해 각 사찰의 보물들을 빼앗아
스님들이 곤혹을 치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사실 어린 제국대장공주로서는 먼 타국의 결혼생활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안하무인은 낯선 나라에서의 불안감을 감추고
자신의 위상을 확인하기 위한 왜곡된 행동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원나라 공주라는 자신의 배경에 사람들이 굴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유야 어찌됐건 충렬왕의 입장에서는
원나라와의 정치적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공주의 호감을 사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무조건적으로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 무례함을 지적하기보다 더욱 우대하며 공주의 배경과 인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왕권강화에 활용하고자 했다.
제국공주 질투에 두문불출
전등사 원찰 삼아 신행생활
충렬왕이 공주의 환심을 사기위해 노력하는 중에도, 공주의 화살은 종종 정화궁주를 향했다.
충렬왕이 아무리 잘 대해줘도 정화궁주를 향한 질투심은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급기야 제국대장공주가 아들(충선왕)을 낳은 충렬왕 1년(1275),
정화궁주는 공개적인 수모를 당하기에 이른다.
원자탄생은 나라의 크나큰 경사로, 이를 축하하기 위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제국대장공주의 질투를 피해 두문불출하던 정화궁주도 연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공주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화궁주와 공주의 의자를 나란히 배치한 것이 문제였다.
정화궁주를 위해 충렬왕이 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배려였으나
결과적으로 제국대장공주의 질투심을 자극해버린 것이다.
황급히 이를 수습했음에도 공주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정화궁주가 나섰다.
그녀는 제국대장공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한 태도로 축하주를 올렸다.
이미 권력과 지위, 경쟁심 등을 내려놓은 그녀였기에, 진심을 담은 축하 인사도 건넸다.
정화궁주가 자청해 스스로를 낮추는 모습에 제국대장공주의 마음도 서서히 풀어졌다.
공주가 별말 없이 잔을 받아들이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던 연회장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고비를 잘 넘기는 듯 했다.
그때 충렬왕이 정화궁주에게 눈짓을 보냈다.
내친김에 한잔 더 올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그러나 이미 질투에 사로잡힌 제국대장공주에게는 이조차 곱게 보이지 않았다.
“어찌 그리 흘겨보십니까? 정화궁주가 제게 무릎을 꿇어 못마땅하십니까?”
제국대장공주는 순식간에 돌변해 손에 들었던 잔을 내팽겨 치고는 칼날같이 쏘아붙였다.
당황한 정화궁주가 그녀를 달래며 무릎을 꿇은 채 연달아 석잔의 술을 올렸지만
연회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한 채 곧 파하고 말았다.
이후 정화궁주는 더욱 몸가짐을 조심했다. 별궁 밖을 산책하며 남들 눈에 드는 것조차 삼갔다.
그러나 아무리 몸을 사린들 무고한 일에 휩쓸리는 것조차 피할 수는 없었다.
충렬왕 2년 12월 다루가치의 관사로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었다.
“정화궁주가 왕의 총애를 잃자 여자 무당을 시켜 공주를 저주하고 있다.
또 제안공(?安公)을 비롯한 43명은 불충한 일을 도모해 다시 강화도로 가려한다.”
원나라 황제의 딸을 저주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불충한 일을 도모함은 원나라에 대항하려는 의도임에 명백했다.
익명서는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나아가 고려의 안전이 흔들릴 수 있는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익명서는 곧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에게 보고됐다.
연회석상에서의 일이 앙금으로 남아있던 공주가 분기탱천했음은 당연지사였다.
공주는 즉시 정화궁주를 옥에 가두고 후비의 지위를 박탈하고자 했다.
영문도 모른 채 투옥된 정화궁주로서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변명할 기회조차 없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니
그 신세가 그저 처량하고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평소 불심 깊고 바른 심성을 가진 그녀가
무당의 힘을 빌려 공주를 저주할 리 만무하다는 것은 왕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익명서의 내용이 거짓으로 판명되기 전에는 충렬왕조차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무턱대고 정화궁주를 옹호했다가는
공주의 분노만 더 키우는 꼴이 되리라는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고한 정화궁주를 언제까지고 옥에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유경(柳璥)이라는 신하가 나섰다.
그는 제국대장공주 앞으로 나아가
익명서에 기재된 43명 가운데 5년 전 죽은 사람까지 포함돼 있다는 점을 들어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님을 조목조목 증명했다.
또 불확실한 투서에 휘말려 무고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자칫 공주의 명예에 해가 될 수도 있음을 우려했다.
제국대장공주는 제멋대로였지만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한순간 분노에 눈이 멀어 정화궁주를 옥에 가뒀지만,
그동안 접해온 정화궁주가 그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내심 눈치 채고 있었다.
또한 익명서를 입수해 올린 다루가치는 똑똑하지만 음흉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었다.
어쩌면 정화궁주를 질투하는 공주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는,
과도한 충성심으로 이 같은 일을 꾸며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주는 유경의 간청을 받아들인 양 정화공주를 석방시켰다.
억울한 누명은 벗었지만 정화궁주에게 더 이상 궁궐은 마음 편히 머물 곳이 아니었다.
제국대장공주의 눈치가 보여 남편 충렬왕도 만날 수가 없었다.
조용히 살고자 했음에도 시시때때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이 그녀의 마음을 들쑤셨다.
마음이 고통스러워 걷잡을 수 없을 때는 경전을 펼쳐들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대어 시시각각 솟는 미움과 원망을 삭혀내려 애썼다.
그럼에도 마음속 깊이 각인된 한과 서러움까지 씻어낼 수는 없었다.
본인의 처지가 처량해 서러움이 복받쳐오를 때는 자조 섞인 혼잣말로 신세 한탄도 했다.
그녀를 위로하는 것은 오직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궁녀들뿐이었다.
그녀가 갑작스레 진종사 참배길에 나선 것도
별궁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는 그녀를 안타까워한 궁녀들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지금은 말날 수 없는 남편과의 추억이 깃든
진종사에서 애끓는 기도를 하고 나자 마음이 한결 후련했다.
지친 기색으로 법당을 나선 그녀를 주지 스님이 따스하게 맞았다.
정화궁주는 준비해 온 옥등을 스님에게 시주했다.
“앞으로 진종사를 제 원당으로 삼아 기도하겠습니다. 항상 잘 보살펴 주십시오.”
진종사는 지금의 ‘전등사’다.
정화궁주가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사찰명을 전등사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화궁주는 스님에게 부탁해 송나라에서 가져온 ‘대장경’을 전등사에 봉안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녀는 종종 전등사를 찾아 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정화궁주가 부처님 전에 간절히 발원한 것이 무엇이었을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신세를 슬퍼하고 원망하기보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기도했으리라는 것이다.
‘고려사’ 후비전에도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정도로 조용한 삶을 살았던 정화궁주.
그녀는 충숙왕 6년까지 왕실에 머물다 세연을 접었다.
죽기 전 말년에는 충숙왕의 배려로 충렬왕과 만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다시 재회한 두 사람.
어쩌면 이들은 아무도 몰래 전등사를 찾아 참배하고,
폭풍처럼 스쳐간 지난 세월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2012. 07. 30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