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편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했던 시대
7. 유대인과 이방인 (유투브)
121:7.1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기원, 역사, 운명에 대한 확고한 개념에 도달했다. 그들은 자신과 이방인 세계 사이에 엄격한 분리된 벽을 쌓았다; 이방인의 모든 생활 방식을 속속들이 경멸하는 눈으로 보았다. 그들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 숭배했고, 혈통이라는 잘못된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독선에 빠졌다. 그들은 약속된 메시아에 대한 선입관을 형성했고, 그러한 기대는 대부분 그들의 민족적, 인종적 역사의 일부로 다가올 메시아를 상상했다. 그당시 히브리인들에게 유대 신학은 돌이킬 수 없이 확립된 채 영원히 고정되었다.
121:7.2 관용과 친절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은 유대인들이 이교도라고 여기는 다른 민족들을 향한 오랜 태도와 정반대였다. 여러 세대에 걸쳐, 유대인은 외부 세계에 대하여, 사람이 서로 영적 형제라는 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야훼를 이방인들과 대등한 관계로 섬기기를 꺼렸으며, 마찬가지로 그러한 새롭고 이상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121:7.3 서기관, 바리새파, 성직자들은 유대인들을 로마 정치 통치의 정치적 사슬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유대인 의식주의와 법률주의의 끔찍한 속박 속에 가두었다. 예수의 시절에 유대인은 율법의 지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전통의 요구에 똑같이 묶여 있었고, 이것은 개인 및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관련되어 침투했다. 이러한 세심한 행동 규제는 모든 충실한 유대인들을 따라다니며 지배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신성한 전통을 무시하려고 한 한 사람을 즉시 거부하고, 그들이 오랫동안 영광스럽게 여기는 사회 행동 규율을 감히 어기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바로 아버지 아브라함이 예정해 놓았다고 생각된 교리에 서슴지 않고 충돌한 자의 가르침을 도저히 좋게 여길 수 없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을 준 것이므로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121:7.4 그리스도 이후 1세기가 되자, 이름 있는 선생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풀이한 말씀은 기록된 율법 자체보다도 더 높은 권한을 가졌다. 이 모든 이유로, 유대인의 종교 특정 지도자들은,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편으로 사람들을 더욱 쉽게 집결시킬 수 있었다.
121:7.5 이러한 상황들은 유대인들이 종교적 자유와 영적 자유의 새로운 복음의 전달자로서 신성한 운명을 완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전통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야 할 율법”을, 에스겔은 “사람의 혼 속에서 사는 새로운 영”을,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이 사람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고 올바른 영을 다시 새롭게 해주시길” 기도했다. 그러나 선한 행위와 율법에 굴종할 것을 부르짖는 유대 종교가 전통적 습성의 수준까지 침체 되었을 때, 종교적 진화의 움직임은 서쪽의 유럽 민족들에게 넘어가 버렸다.
121:7.6 그래서 진보하는 신학을 세상에 전하는 데에 다른 민족이 부름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리스인의 철학, 로마인의 법, 히브리인의 도덕,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바울에 의해 형성된, 즉 personality(퍼서낼러티, 성격)의 신성과 영적 해방을 주장하는 복음이었다.
121:7.7 바울의 기독교 교리에 담긴 도덕성은 유대교에서 나왔다. 유대인들은 역사를 하나님―일하는 야웨―의 섭리라고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더 뚜렷한 영생 개념을 가져왔다. 신학과 철학 면에서 바울의 교리는 예수의 가르침뿐 아니라, 플라톤과 필로의 영향도 받았다. 윤리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뿐 아니라 금욕주의자들한테서도 영감을 받았다.
121:7.8 예수의 복음은, 바울의 안티옥 기독교 종파에 담겨 있는 것처럼, 다음과 같은 가르침들과 혼합되었다:
1. 유대교로 전향한 그리스인들의 철학 논리. 이것은 영생 개념을 어느 정도 포함한다.
2. 유행하던 신비주의 종파들의 매력 있는 가르침, 특히 어떤 신이 희생제물이 됨으로서 대속, 속죄, 구원을 이루는 미트라교의 교리.
3. 자리 잡힌 유대 종교의 탄탄한 도덕성.
121:7.9 예수의 시절에 지중해의 로마 제국, 파르티아 왕국 및 인접한 민족들은 모두, 세계의 지리, 천문, 건강, 질병에 관하여 서툴고 원시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새롭고 경이로운 나사렛 목수의 선언에 당연히 놀라워했다. 많은 사람이 좋은 영과 나쁜 영에게 신들린다는 생각은 인간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돌과 나무에도 영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이때는 마법에 홀린 시대였고, 누구나 기적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었다.
첫댓글 제목 : 유대인과 현대인
유대인이 이방인과 엄격한 분리된 벽을 쌓고 무엇이든지 이방인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던 예수님 당시의 시대 상황은 꼭 그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우리 대한민국은 정말로 개인의 종교성이 다양하다. 그럴지라도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주로 형성된 분위기는 불교적 성향인 듯하다. 불교가 오랜 역사를 통해 마치 민족 종교인 듯이 보편적으로 퍼져서, 그 정신이 시대를 타고 내려와서일까? 나는 기독교에 입문한 후로, 절에 가는 것이 마치 미신인 듯, 꺼려져서 선을 그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그 지역의 주요 관광 순서에 오래되고 기념이 될 만한 유명한 절을 탐방하게 된다.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나들이라는 인식이 배여서 그런지, 그렇게 절을 방문하는 것은 전혀 꺼리낌이 없고, 자연스럽게 기념이 될만한 불상 옆에 서서 포토 시간을 갖게 된다.
예수 시절 유대인은 종교의식, 견고한 도덕적 윤리규범 (탈무드, 토라)의 속박 속에 가두었다. 자연히 예수님의 가르침은 뿌리를 내릴 수 없었고, 예수의 복음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헬라 세계로 넘어갔다. 이렇게 유럽의 문화는 거의 기독교의 가르침 아래 형성되었다. 우리나라 여행지에 불교 사원이 들어가 있듯이, 이제 유럽 여행 방문지에는 찬란한 성당 탐방이 빠지지 않는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이루었고, 이방인 듯한 동방의 우리나라도 그 기독교의 물결이 들어와 넓게 퍼져서, 불교와 쌍벽을 이루며, 생활과 신념을 지배한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계속 진행중에 있다.
이렇게 형성된 예수의 가르침이 참된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바울에 의해 형성된 신성과 영적 해방을 주장하는 복음이었다”(121:7.6)는 유란시아서의 새로운 지적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3대 표어에 길들여져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의구심 뿐만 아니라, 당혹감과 괴리감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성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바울의 서신에는 바울의 의식 속에 있던 “① 그리스인들의 영생 개념, ② 대속, 속죄의 근간이 되는 신비종파의 미트라교 교리, ③ 유대 종교의 도덕성”이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생 개념이나, 도덕성은 유란시아서 전체에 흐르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부분은 우리의 종교적 테두리에 미트라교의 신비주의의 흐름은 너무도 많은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특이나 대속 교리는 영생 개념과 도덕성과 합쳐져서, 바로 유대인이 가졌던 오만한 틀에 나를 가두는 성향으로 이끈다. 이것이 바로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손가락질하는 원인이다.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특권 의식’,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 특권 의식 때문에, 배타적인 사람이 되어, 참된 진리의 도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란시아서는 이러한 틀을 무너뜨린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4부 기록은 예수님의 참된 종교적 가르침을 제시한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말부터 1부, 2부, 3부는 하나님의 실체성에 대해 논리적으로 펼쳐놓았기 때문에, 날고 기는 어떤 신학자도 이를 반박하기가 어렵다. 사실이 되는(믿음 필요), 신성한 진리의 개념을 우리 의식 속에 세우는데 너무도 체계 있게 정리되어 있어서, 어떤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한다.
유란시아서가 인간의 삶 속에 적용되는 부분은 바로, 파워-퍼서낼러티 (power-personality), 즉 성격(성품)의 완성이다. 우주 아버지의 명령, “내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계시가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완성을 할 것인가? 각자의 단계 속에서,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의 지시적 언어나, 글이 그렇게 효과적일지 의심스럽다. 각자의 체험 단계에서, 내 의지가 선택한 방향대로 한 단계 한 단계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