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4]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 (합 3:1-15)
오늘 설교제목이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제목입니다. 우리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 이것은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저는 이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오소서.' '내 일이 아닌 주님의 일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일이 우리 가운데 왕성하게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이 '부흥'이라는 단어를 매우 좋아합니다. 아마 한국교회만큼 이 부흥이란 단어를 좋아하는 교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흥'하면 일단 숫적인 증가를 생각합니다. 많이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부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는 모습을 부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많은 교회들이 이 말씀을 표어로 삼고 기도합니다. '하루 속히 이곳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하시옵소서.' '이곳이 가득 차게 하시옵소서' 소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이 기도를 빼놓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빨리 부흥시켜 주시옵소서.' '부흥 성장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때로는 사람을 모이도록 하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부흥회를 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의 부흥회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마만큼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자긍심을 갖습니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이 그런 교회에 다닌다는 것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목사님에 대해서는 매우 특별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 능력이 있는 목사님은 그냥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앞에다 수식어를 붙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너나 할 것 없이 교회의 부흥을 꿈꾸고 그를 위해서 무진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의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토록 교회의 부흥을 꿈꾸며 사용하는 하박국서의 이 부흥에 대한 말씀이 사실은 그들이 생각하는 부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식의 부흥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뒤집어엎어 놓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부흥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부흥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흥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의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의 부흥은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똘똘 뭉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으나, 하나님의 뜻은 그들을 흩으셔서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극심한 핍박을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뿔뿔히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비록 교회는 뿔뿔히 흩어졌지만,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 부흥케 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박국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야만 합니다. 하박국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주의 일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성취욕을 부추기며 채워주는 부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부르짖는 부흥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흥의 의미를 가지고 부르짖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아마 하박국이 말하고 있는 부흥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그런 식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니까, 하박국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놀랄 수가 있습니다. 좋지 않은 소식을 듣고 놀랄 수도 있고, 때로는 너무 좋은 소식을 듣고도 놀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은 어떤 소문을 듣고 놀란 것일까요? 그 소문의 진상은 3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소문을 듣고 난 뒤의 하박국의 반응을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한 말씀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16절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오고, 몸이 처소에서 떨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지금 하박국이 들은 소식이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까? 좋지 않은 소식이라는 것입니까?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박국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하박국이 들은 소문은 무리들이 자신들을 치러 올라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환난 날'에 대한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소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쟁에 대한 소식이었습니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오고, 몸이 처소에서 떨릴 정도로 공포스럽고, 전율스러운 소식이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지금 막 전방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궁지에 몰린 북한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전쟁을 아는 사람이라면, 온 몸에 전율이 흐를 것입니다. 가슴이 뛰고 창자가 흔들릴 것입니다.
지금 하바국이 듣고 있는 소식은 바로 그런 소식입니다. 아니 그 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소식입니다. 전쟁도 단순한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일으키시는 심판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멸하시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박국은 인간적으로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포심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 온 몸에 전율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태에서 하박국은 뭐라고 기도합니까?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라고 기도를 합니다. 여기서 하박국이 말하는 '주의 일'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 하박국이 듣고 있는 바로 그 전쟁의 소식입니다. 하박국이 '어찌하여' 하면서 탄식하던 그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진노의 소식인 것입니다. 하박국은 지금 그 '진노의 일'을 그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이 민족을 심판하시길 한 그 일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말하는 부흥은 바로 그런 부흥입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의 그 일이 어서 속히 왕성하게 일어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부흥의 의미를 알고도 그런 부흥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보시고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일을 어서 속히 이루어주옵소서. 그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기도하는 하박국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1장에서 하박국은 '패역하고 겁탈과 강포가 난무하고 하나님의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고 도리어 굽게 행해지고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이스라엘'나라를 갈대아 사람들을 통해서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를 삼키는데 잠잠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째서 사람으로 하여금 주권자 없는 바다의 어족 같게 곤충 같게 하시냐'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신으로 삼고 그물에 제사하고 초망 앞에 분향하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그렇게 열국을 살육하는 것이 옳으냐'고 따졌던 하박국입니다. 그러던 하박국이 이제는 하나님의 그 심판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속히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하박국의 마음을 이렇게 바꾸어 놓은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미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에 대한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사람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패역을 심판하시겠으나, 그렇다고 갈대아인들의 불의함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이 심은대로 반드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그 진노의 잔이) 그들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더러운 욕이 그들이 거짓 영광을 가리우게 될 것입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바록 그 말씀이 하박국의 기도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기 민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 그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자기 교회 중심적인 사고 방식에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얼마나 나 중심적이며, 얼마나 육체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바라 보아야합니다. 어째서 우리의 생각은 다른 교회보다는 내 교회가 부흥케 되어져야 하고, 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야 하고, 내 교회의 재정이 풍성해져야하고, 내 교회가 더 크고 화려하게 지어져야 하고, 내 교회가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하고, 내 교회에서 많은 선교사를 보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수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으며, 수 많은 목회자들이 끼니를 걱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차 있고, 내 교회의 재정이 풍성하다는 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과연 그것이 주의일일까요?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일까요? 그것이 진정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겠습니까? 우리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며 그것을 이용하여 내가 속한 교회가 커져야만 한다는 식의 부흥의 논리를 버려야만 합니다. 참된 부흥은 내 교회가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케 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많은 사람들이 몰여와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내 교회가 부흥케 되어지고 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 나라가 부흥케 되어지고 하나님 나라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반문하고 싶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이런 식의 부흥을 생각하고 있는 한 우리는 그들에게 참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뭍은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그 고난의 십자가를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것들로 그들을 미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큰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당도 크게 지어야 합니다. 차도 큰 차로 사야 합니다. 뭔가 우리 교회는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합니다. 그래서 담임목사의 위대함을 자랑합니다. 교회 안에 유력한 인사가 있음을 자랑합니다. 이것저것 자신들이 하는 일들을 자랑합니다. 그러한 자랑 속에 우리 주님은 감추어져 버리고 맙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피 뭍은 복음은 가리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내 교회에 많은 사람이 몰려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 교회만 풍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주님의 그 일의 부흥을 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소망하며 부르짖어야 할 부흥은 '주의 일의 부흥'입니다. 그 주의 일이 내 창자를 흔들리게 하고 내 입술을 떨리게 하고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오게 학 내 몸을 떨리게 하더라도 그것이 주의 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주의 일의 부흥을 갈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욕망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내 욕망을 주님의 일로 치부해 버리는 악함을 버려야만 합니다. 어째서 우리는 나의 성공이 주님의 성공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주님께 사용되었던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과연 그렇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까?
우리는 요셉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의 성공적인 인생을 통하여 일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내가 잘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도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왕이 되었던 다윗의 인생을 보면서 나의 성공이 하나님의 성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왕비가 되었던 에스더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렇게만 쓰였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핍박과 조롱을 받았으며, 세상에서 멸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는 저들이 인간적으로 원하는 일들이 틀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욥이 그랬고, 요나가 그랬고, 호세아가 그랬습니다. 바울이 그랬고, 예수님의 12제가 그랬고, 초대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비록 그들이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실패자의 모습이요, 망하는 모습처럼 보였으나, 그것이 주님의 일의 부흥에 사용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 주님이 흥하기 위해서 내가 망해야 한다면 우리는 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나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었기에 그것이 하나님 일의 부흥이었기에 그 잔을 기어이 마시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그 잔을 피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나, 결국 그 잔을 마시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좇으려면 나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나, 우리는 나를 부인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인되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간구해야할 부흥이 어떤 부흥입니다. 나의 부흥입니다. 내 뜻의 부흥입니까? 내가 속한 교회의 부흥입니까? (저는 말씀을 전하는 자의 양심으로 도저히 그렇게 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르짖어야 할 부흥은 주님의 일의 부흥입니다. 그것이 그 뼈를 썩이는 것이 될망정 우리는 주님의 일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참된 부흥이기 때문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이 왕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그 나라를 위해서라면, 때로 우리는 내 모든 삶을 접고서 탄자니아로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각오하는)북한의 가조 선교사로도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편협하고 이기적인 내 욕망에 사로잡힌 부흥의 생각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일의 부흥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 나라만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