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씀 말라기 3장 13-15절[9]
제 목 어리석은 자들의 지혜
세상은 하루에도 몇 번씩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판사는 법으로 판결을 내리고, 노인들은 세월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판단하며, 학자들은 지식으로, 세상은 죄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나 결론이 다르며, 사람의 인격과 지식, 능력과 지혜에 따라 다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날까지 잘못 된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배우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또 자기의 단점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인격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종교를 갖느냐에 따라서 사람마다 살아가는 모습이나 생각이나 판단의 기준이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 역시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가졌을 때 삶의 모습은 완전히 다를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께 받는 복 역시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심령에는 말씀의 열매가 있을 것이고, 말씀과 상관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의 그릇은 비어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백성에게 여섯번에 걸쳐 하나님의 뜻을 보이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제사장과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그 첫번째는 여호와께서 백성을 향해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주께서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들이 세상의 욕심에 두 눈이 가려지자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내가 너희 아버지인데 나를 공경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있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우리가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했느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더러운 떡과 점과 흠이 있는 제물을 드리고도 그들은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그들은 이혼과 잡혼을 하며 거룩한 자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괴롭혀 드리고도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힐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자녀가 자녀답게 살지 않으면 아버지는 스스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네번째 세상사람과 전혀 다름없이 살아가는 백성을 보시면서 너희들이 먼저 내게로 돌아오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둠에서 길을 잃은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귀신들린 자를 찾아가 점을 치고,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간음을 하며,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거짓맹세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인데도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번째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느냐고 말씀하시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을 살았다면 자기의 재산 소유권과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고 세상사람과 같은 인생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보여드릴 수 있는 십일조와 봉헌물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고도 그들은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섯번째 여호와께서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할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지금 자기들이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더 큰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금식하고 회개하는 것이 헛되다는 말을 했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산다고 해도 세상사람처럼 고난도 당하고, 어려움도 당하는데 하나님을 믿어봐야 특별한 것이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도 세상에서는 교만하고 악한 자가 더 잘 살고 번성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영원한 세계에 가기 위한 훈련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지만 세상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그저 헛된 고난일 뿐입니다.
백성들은 믿음이 흔들리자 악한 자들이 “우리가 아무리 악하게 살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다”는 말이 좋게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여러 번에 걸쳐 뜻을 전하셨지만 백성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시고 그들에게 쏟아 부은 사랑은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영원한 생명보다 세상을 원하는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돌이킬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죄는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화인 맞은 심령처럼 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혼자 죄를 지을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죄를 지으면 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조차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래서 죄가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러번 돌이킬 기회를 주셨지만 백성들은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면서 훗날 임할 심판조차 믿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런 백성들을 보면서 간절히 기도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박국 1장 13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당시 유다의 마지막 등불이었던 요시야왕이 죽고 유다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들면서 나라가 모래위에 세워진 집처럼 서서히 기울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말씀대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악과 불의와 폭력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의인들은 악인에게 오히려 시련을 당하고 있었고,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하박국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하박국은 왜 악인이 득세하며 의인이 핍박을 당하느냐고 부르짖었고, 간절한 기도에도 응답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부르짖는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냐고 간구하였습니다.
점점 타락하는 유다백성을 보면서 그는 분노했고, 응답하시지 않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는 좌절했습니다.
유다는 그동안 열방의 공격을 막고 계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편안한 삶을 살게 되자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세상의 권세를 갖기 위해서 더 악한 길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타락한 백성들을 보고 계시면서도 침묵하신 것입니다.
지금 하박국이 보고 있는 타락한 유다의 모습은 말라기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있는 백성들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세상의 힘을 가지고 의인을 핍박하는 것은 의인을 핍박하기 보다는 의인이 섬기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선지자에게 썩은 유다를 징계하는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박국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민족보다는 그래도 하나님을 아는 유다가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게 하시느냐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타락한 유다나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민족이나 똑같다는 것을 하박국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채찍으로 사용하실 바벨론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험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먹이를 움키려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바벨론이 유다를 공격하기 위해서 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아주 교활하고 비열한 사람들입니다.
상대가 힘이 있으면 친절을 베풀고 잘해주다가 상대가 약하다 싶으면 탐욕스러운 정체를 드러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교활한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을 보면 유다가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는지 알 수 있고, 세상과 전혀 다름없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박국 3장 16-18절에 거칠고 잔인한 바벨론의 공격을 알고 있는 하박국의 심정이 얼마나 절절한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유다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을 아는 하박국은 바벨론이 쳐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뼈가 썩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유다에게 이런 고난이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하박국은 고난뒤에 올 구원의 역사를 기대하며 감사했습니다.
하박국이 돌이키라고 외칠 때 유다백성이 들었더라면 바벨론과 같이 잔인한 사람들을 통해 받는 고난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박국은 유다가 돌이키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바벨론의 침공을 막아달라고 기도했지만 유다가 회개하지 않는 한 자기가 기도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박국 3장 2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가끔 교회나 가정에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시켜 달라는 하박국 말씀이 액자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합니다.
이 구절을 붙여 놓은 것은 교회나 가정을 수년 내에 부흥시켜 달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겠지만 그것은 하박국이 왜 이런 기도를 했는지 전후 사정을 몰라서 교회나 가정에 붙여 놓은 것입니다.
하박국이 주의 일이라고 한 것은 타락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당하는 것이 바로 주의 일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유다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벨론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유다가 깨달을 지혜와 믿음을 주시고, 긍휼하심도 잊지 말아달라는 기도입니다.
바벨론에게 고통을 당한 후 회개하고 돌아오는 유다로부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바로 부흥인 것입니다.
그는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시는 그 심판 가운데 정의가 온전히 실현될 것을 하박국은 알고 있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만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환난을 당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 고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하박국의 신앙인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자만이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말라기의 책망을 받는 백성들도 교만한 자가 복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고 하면서 심판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습니다.
악을 행해도 심판이 즉시 임하지 않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조롱하며 악에서 돌이킬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데도 하나님께서 즉시 심판하시지 않는 것을 도리어 두려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어도 심판이 임하지 않자 더 교만해진 것입니다.
어쩌면 이들의 말이 맞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악을 행할수록 더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있고, 그 재산이 그에게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의 침묵을 깨는 삶이기 때문에 반드시 바벨론과 같이 잔인한 자를 통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도 어떨 때는 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은 자들의 말이 지혜롭게 들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고백처럼 어리석은 자들의 지혜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성도들이 보는 눈이 있어야만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지혜로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말들이 얼마나 열매가 없는 죽은 나무와 같은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아서 의인이라 칭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