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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하시는 주님
본 문 : 막 7 : 31 - 37
약 10여 년 전에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던 책 가운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춤추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의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를 연결하는 유명한 golden gate bridge(금문교)가 있습니다. 이 금문교로 가는 도상에 17개의 톨게이트가 있습니다. 통행료 징수대 박스 17개 나란히 있는데 어느 날 이 책의 저자가 그중의 한 징수대를 통과하려고 보니까 그 박스 안에서 티켓도 끊어 주고 돈도 받는 사람이 음악을 아주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면서 돈을 받는 거예요. 근데 그 행동이 너무 재미있어서 “뭘 하십니까?”하고 물어봤더니, “파티를 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파티라니요? 누구를 초대하셨나요?” 그러자, “제가 제 자신을 초대했지요.”라고 대답을 하는 겁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저자는 이런 질문을 했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파티를 열고 있지 않습니까?” “아! 저 사람들이요? 저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 박스는 말이죠. 관입니다. 아침 8시 30분에 출근해서 오후 4시 반에 퇴근하기까지 저 사람들은 관속에 갇혀 있는 시체들이란 말이에요.” 이 색다른 대답 앞에 더 호기심이 발동해서 계속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저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요? 나는 중요한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이란 것이 뭡니까?” “저는요. 댄스 교수 가 될 예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돈을 받고 여기 박스를 연습장을 삼아 연습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저 사람들의 방을 잘 보세요. 저게 닫혀있는 관이라면 제가 있는 이 박스 안은 열려있는 무대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비극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나만의 폐쇄된 공간 안에서 혼자서 외로워하다가 외롭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런 유형의 한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장애인 중에서도 중증의 불행을 앓고 있던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귀가 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도 어눌한 거의 언어를 잃어버린 그래서 말이 거의 불가능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살고 있었기에 그는 완전히 외부세계와 단절된 상태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연민으로 이 사람을 쳐다보시다가 유명한 말씀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아람어로 ‘에바다’라는 말인데, ‘열려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 사람의 귀가 열렸습니다. 또 입술이 열렸습니다. 그는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인생이 열린 것입니다. 참으로 극적인 상황을 본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곳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할렐루야!
그는 말을 분명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거예요. 구약 이사야서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백성들에게 보내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물음 앞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하지 않습니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서는 그가 가야할 백성들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눈 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소원하는 것은 네가 가서 이 말씀을 선포할 때에 저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고침받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 육체적인 장애보다도 훨씬 더 불행한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 장애요, 그리고 영적인 장애입니다.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가 하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외롭고 답답한 자기만의 세계 속에 폐쇄된 채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권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했던 동일한 말씀의 권능으로 주님께서는 귀먹고 어눌한 이 사람을 향해 ‘에바다’ ‘열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렸습니다. 가슴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어요.
여러분, 우리 주변에 이처럼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할 인생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가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주님이 이 사람에게 어떻게 기적을 베푸셨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사람을 향해 명령하기 전에 먼저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통해 진정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면 먼저, 개인적인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3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데리고”라고 기록되어 있죠? 예수님은 무리가운데서 이 사람을 분리해 내셨습니다. 따로 데리고 가셨어요. 공개적 접촉이 아니라 개인적 접촉을 시도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이 듣지 못하고 말이 어눌한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는데, 만약 공개적으로 이 사람을 다루게 되면 이 사람이 당황할까봐서 이 사람의 처지를 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나도 다정하시고 다감하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치유를 시작하십니다. 어떻게 치유하셨습니까? 아주 흥미로운 방법을 사용하셨어요. 예수님은 사람들을 대하실 때, 한 방법만을 고정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각각 사람의 처지에 맞는 방법을 선택하셔서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하실 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먼저, 손가락을 양 귀에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양 손가락으로 그의 귀에 대셨을 때, 또한 예수님 이 침을 묻혀 그의 손으로 혀를 만지셨을 때 이 사람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 순가 그는 “들리지 않는 내 귀에, 그리고 말하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내 혀에 뭔가 놀라운 일이 일어날 모양이다.”라는 어떤 기대감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와 형편을 살피시고 긴밀하게 접근하셔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놀라운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막연히 그냥 세상의 빛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비치는 참된 빛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나만의 갈등과 고민도 다 아십니다. 내가 홀로 겪고 있는 좌절의 아픔을 아시고, 내가 숨기고 있는 나만의 비밀과 나만의 두려움과 불안을 아시면서 주님은 개인적으로 내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에 보면“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했습니다.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이름을 오늘도 부르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삭개오야, 마리아야, 성복아, 하경아, 하경이는 제가 사랑하는 여자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친구였지만 서둘러 삶을 마감하고 말았던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은 아픈 가슴으로 친구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사로야 나오너라.” 무덤을 쏘아 보시며 친구의 이름을 부르셨어요. 그때 주님이 만약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러지 않고 ‘송장아 나오너라’ 그랬다면 볼만했을 것입니다. 지구상의 죽었던 송장들이 그때 다 일어났을 것입니다. 아직은 부활의 시간이 아니에요. 주님은 한 사람, 나사로를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형편과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나에게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다가오셔서 나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시고, 나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 된 우리들도 누군가에게 진정한 소망과 도움을 주고자 한다면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다가가야 합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를 배려하며 그의 삶의 형편을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기적은 시작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본문 34절 읽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는 뜻이죠? 우리들은 기도할 때는 당연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기도의 방법은 다양한 것입니다. 눈을 뜨고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버스 안에서도 기도할 수 있고, 운전하면서도 기도할 수가 있고요, 길을 걸으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환자를 고치기 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먼저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은 사실 기도할 필요가 없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하려 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일 중 하나는 예배드리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 전도하고, 음식을 만들고, 차량을 운행하고, 안내하고, 꽃을 가꾸고, 찬양을 하는 것 등등,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봉사와 헌신은 예배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도의 의무를 다한 후에 필요한 것입니다.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오. 예배가 우선입니다. 기도가 우선입니다. 예배드리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도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될 가장 위험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힘과 내 자원, 내 정성만 가지고 일하다 보면, 금방 지쳐버립니다. 마음이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앞에 나아와서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무능력과 부족함으로 좌절 가운데 빠져 있었다면 이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새로운 능력이 임하심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공급하시는 새로운 능력과 기쁨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주님의 치료하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고통 중에 있는 그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34절을 보면 ‘하늘을 우러러’ 그 다음에 무슨 단어가 나옵니까? ‘탄식하시며’ 그랬습니다. 저는 영어 성경 가운데 NIV 영어성경을 주로 보는데, 거기에는 그냥 탄식이 아니라 ‘deep sigh’ 아주 깊은 탄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탄식한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은 탄식을 하신 거예요. 왜 깊은 탄식을 하셨을까요?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그와 함께 아픔을 느끼고 싶으신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아픔이 얼마나 괴로울까?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고통이 얼마나 힘들까?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한 아픔이 그동안 얼마나 심했을까?”
주님은 환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공감하시면서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십니다. 주님은 아마도 이 때 눈물을 흘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이웃의 고통을 치료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다.”
참 중요한 말입니다. 주님은 단순히 능력만으로 환자를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환자의 마음의 고통과 육체의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공감하셨어요.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로 유명한 레오 버스카글리아라는 사람이 쓴 글에 보니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 한 분이 암 진단을 받습니다. 암 진단을 받은 그 날부터 할아버지가 갑자기 난폭해 졌어요. 식구들을 향해서 욕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욕을 퍼 붓습니다.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급기야는 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입원해서도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간호사와 의사들에게도 포악하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사의 치료를 거부합니다. 그를 돕는 방법은 그를 설득해서 의사의 치료를 잘 따르도록 해야 하는데, 도무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가족들은 옛날 친구들을 찾아서 할아버지를 설득하도록 병실에 들여보냈지만 친구들도 도움이 되지 못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거에 절친하게 지냈던 은사들을 들여보내 보았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동네 교회의 목사님을 보냈더니 목사님도 욕만 몽땅 먹고 쫓겨났습니다. 전문 상담사를 들여보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동네에서 할아버지가 가끔 만나던 어린 꼬마가 하나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찾아 왔어요. 식구들이 반 호기심으로 그럼 네가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만나 보라고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30 여분이 지나도 병실이 조용합니다. 가족들은 너무나 놀래서 병실로 들어갔습니다. 병실에는 할아버지와 꼬마 아이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마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후로 할아버지의 태도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태도가 부드러워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다정해 졌습니다. 의사의 치료도 잘 받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소년을 붙들고 사람들이 물어 보았습니다. “너, 할아버지하고 무슨 얘기를 했니?” 그러자 소년이 대답합니다.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저는요, 아파하시는 할아버지와 같이 그냥 울었어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할아버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이 꼬마 친구가 함께 우는 순간, 그 눈물 속에서 이 할아버지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된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도 부탁을 받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몸이 피곤하고 지쳐있지만 전도사가 기도 부탁을 받고 안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지만 사실 형식적으로 의무적으로 기도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틀림없이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기도 부탁을 받는 순간, 부탁하는 그 분의 고통과 아픔이 마치 나의 고통과 아픔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면서 기도하면 틀림없이 무언가 변화의 조짐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웃의 아픔을 공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시겠죠?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 깊은 고통까지도 어루만져주시길 원하십니다. 지금 이시간도 우리 앞에 다가오시는 주님을 발견하십시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그 주님은 우리의 눈을 만지시고, 손을 만지시고, 마음을 만지십니다. 내 깊은 고통의 상처들을 어루만지십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의 그 손길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어떠한 질고와 고통도 치유될 것입니다. 변화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손길을 붙잡고 주님의 능력의 치료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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