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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을 입은 사람
고린도전서 1:18-25
어떤 사람이 잔치에 초대가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대단한 잔치였습니다.
오케스트라가 동원이 되어졌고, 오 백 석 정도의 좌석이 준비된 잔치였습니다.
공식적으로 초대받은 이 사람은 화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이 잔치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자기의 자리가 없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을 불러서
"내 자리가 어디냐?"고 물어 보아도 내 자리가 어디인지를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열심히 자기 자리를 찾아보아도 역시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정신과 의사인 어떤 사람이 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제일 많이 꾸고 있는 꿈을 소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삶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꿈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나는 분명히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신병자가 아니예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들 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제대로 된 삶의 자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시 한번 여러분들 스스로 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의 삼의 자리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삶을 살았던 모세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이때의 모세의 삶의 자리는 어떠했겠습니까?
40년 동안의 목자로서의 일상이 이제는 습관화되어져 버린 자리입니다.
아직까지도 그의 가슴속에는 동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가득해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동족의 해방과 자유를 생각할 수 없는 희망을 잃어버린 절망의 자리가 바로 모세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는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모세는 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삶의 자리를 회복합니다.
자기의 삶의 자리를 또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이 새로운 삶의 자리로 서서 하나님의 소명의 길로 출발하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의 삶의 자리가 어디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다른 이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야, 모세야" 부르시는 부르심에서 모세는 새로운 삶의 자리,
제대로 된 신앙인의 삶의 자리를 회복하고 소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24절에 보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씀이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내 삶의 자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삶의 자리,
그것이 바로 내가서야 할 분명한 삶의 자리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름을 위하여서 출발되어지는 삶의 자리입니다.
이사야서 43장 1절에 보면,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것이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에서 내 삶의 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어디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의 자리가 그리스도인의 제대로 된 삶의 자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알게 되고, 체험하고,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너는 내 것이라고 불러주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삶의 자리라는 것은 어떤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24절을 제가 다시 한번 봉독 해 드리겠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누구냐?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말씀에서의 그리스도는 앞뒤의 문맥에서 바라 볼 때 무엇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가 하면,
주님이 지신 십자가라고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결국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내게 능력으로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입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아닌 그 어떤 것도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그 무엇으로도 만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물질이 많으면, 돈이 많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인격적으로 훌륭하면 -물론 신앙 인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인격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됩니다.-
그러나 단순한 도덕성이나 십자가가 없는 인격으로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신앙인의 자리를 만들 수 있느냐?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우리 죄를 대속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는 방법이 주님이 지신 십자가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 오직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신앙인의 삶의 자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다시 한번 믿으시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기록되는 시대적인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은혜를 모든 사람들이 미련한 것이라고 다 배척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22절의 말씀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이다"라고 기록이 되어져 있고, 23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를 전하는 것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 이렇게 설명이 되어져 있습니다. 유대인은 기적과 표적을 구하지 십자가를 전하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기적을 구했습니다. 많은 유대인 가운데 가난하고 어려운 민중들도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기적과 표적을 얻기 위해서, 병을 고치고, 그리고 빵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따라다닌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은 어떠합니까? 구약에서 계속해서 예언되어졌던 그리스도, 메시야는 누구였습니까? 많은 군대를 데리고 오는 만왕의 왕이 되어서 로마의 세력을 다 무찌르고 정치적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는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또 한가지는, 지금 기아와 배고픔으로 허덕이고 있는 민중들에게 빵을 주어서 그 배고픔과 허기를 해결할 수 있는 경제적인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메시야인줄 알고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돌아 가셨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에 대하여 메시야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에게 대하여 최대한 모욕이라 생각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가장 강하게 핍박했던 것이 초대교회의 상황이었습니다.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에게 최대한 모욕을 주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거절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22절의 말씀에 보면, "지혜를 찾는 사람들이다" 23절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미련한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의 십자가는 종이 큰 죄를 지었거나, 아니면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들은 에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은 예수의 십자가야말로 가장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난 우리의 오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으십니까?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생명의 자리에 서 있다고 믿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가 유대인들과 같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과 표적에만 관심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통하여서 내가 세속적인 복을 모조리 다 받겠다는 생각만에 사로 잡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질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병도 고쳐주시고 다 해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나를 구원하신 것은, 부르심을 입게 한 것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서 단순히 세속적인 복만 받겠다. 기적과 표적만을 따라가겠다'고 하면, 여러분들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 귀한 십자가의 은혜를 유대인처럼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적과 표적만 구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가는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헬라인들이 아닙니까? 자기의 지성적인 능력으로 믿음을 멀리하거나 십자가의 은혜를 미련한 것으로 헬라인처럼 믿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십자가의 은혜보다 훨씬 더 높이 있는 우리의 모습은 없습니까? 역시 이 사람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금으로 도금하거나 금으로 만든 사치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우리를 하나님이 자녀 되게 해 주시는, 그의 살을 찢기시는 고난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기 위하여서 그의 핏방울을 하나 하나 흘리시는 희생이라는 것을 여러분들 아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유대인과 같은 자세는 없습니까? 헬라인과 같은 자세가 없습니까? 우리가 오늘 이 모든 것을 성령으로 비워내고 깨끗이 비워내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되엇다는 내 삶의 정체성, 자기 자리를 회복하고 되찾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 금요기도회는 1여전도회가 중심이 되어서 기도회를 했습니다. 1여전도회는 일흔이 넘으시는 분들도 형성이 되어져 있는 참 노임들이시지 않습니까? 일흔이 넘으시는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앞에 나와서 찬양을 했는데요 저는 그 찬양에 크게 은혜를 받았어요. 그 찬양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제가 보기에는 그 찬양을 하고 있는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정말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이런 모습이 아닌가?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여기에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의 삶의 자리가 있지 않는가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지금의 삶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분명한 삶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자기의 정체성을 다 망각해 버리고, 믿음의 정체성을 망각해 버리고 마치 군대 마귀가 걸린 사람처럼 우리는 혼돈해져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외에 다른 것을 따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십가가의 은혜가 아닌 다른 것을 자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 고린도전서를 쓰는 바울의 중요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전부 자기자랑에 빠져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없어요. 여러분들 이 말씀의 후반부를 읽어보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없고, 오래 믿었다는 사람이 전부 자기 자랑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은혜의 희생과 고난의 은혜를 받은, 부르심을 받은 삶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유대인과 같은 모습, 헬라인과 같은 모습이 있다면 그것을 다 버리시고,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삶의 자리를 되찾고 회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자기 정체성을 찾으시는, 삶의 자리를 회복하시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 십자가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18절 말씀을 봉독 해 드리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는 무엇이냐?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절 말씀에도 보면,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삶의 자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인가? 그 사람은 자기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경말씀에 읽어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제사의 결투를 하지 않습니까? 이때 하나님의 능력은 불로 역사하여서 엘리야를 승리케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실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해서 각색 병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홍해 바다를 여러 주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게 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해 주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할 수 있게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보다도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히 계시된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히 나타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서 완전히 계시되었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서 사단의 머리를 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의 우두머리의 사단의 머리를 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는 다 용서되어지고 대속 되어지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은 오늘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역사 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사람을 구원하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앙에 두고 양쪽에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한쪽에 있는 강도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어요.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한 번 내려와 봐라"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의 강도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이 최초로 돌아가신 십자가를 통하여서 한쪽은 구원으로 한쪽은 멸망으로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의 처음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들 "예배 보러온다." 그러한 말을 하지요? 예배 보러온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예배를 왜 보러 옵니까? 예배는 드리러 오는 것이지요. 예배 보러 온다는 말속에 무엇이 있느냐 하면, 예배 구경하러 온다는 것입니다. 불났습니까? 구경하러 가게? 구경하겠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십자가를 구경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금으로 만들어서 목에 걸고 십자가를 교회에 걸어놓고 있는데 그 십자가를 구경하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을 읽어보면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초대교회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 되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헤롯왕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는 야고보를 칼로 죽입니다. 야고보가 순교하지요. 그리고 한 번 설교하니 삼 천명이 회개하고 오천명이 회개하면서 베드로의 십자가의 증거를 통하여서 놀라운 복음의 확장의 역사가 일어날 때, 헤롯은 그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겹겹이 군사를 세워 놓았습니다. 그 말씀까지 읽어보면 십자가의 능력은 패배했고, 세속적인 권력이 승리한 것 같아요. 그러나 그 다음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서 베드로를 출옥시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씀에 무엇이 나왔는지 아십니까? 헤롯왕이 두로와 시돈에서 연설을 하는데, 그 말을 듣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야, 저 소리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다" 그러니 이 헤롯왕이 정말 신이 된지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헤롯을 쳐서 충이 먹어 죽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있는 12장 24절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 하여 더하더라"는 말씀으로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한 장의 말씀에서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승리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아니 한 장의 말씀이 아닙니다. 역사가 그렇습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누가 승리했습니까?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라고 말한 사람이 승리했습니까? 십자가의 능력이 승리했습니까? 이 역사에 누가 승리했습니까? 십자가의 능력이, 그 결과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해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면,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이냐?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을 쓴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내가 아는 모든 세상의 것, 세상의 지혜, 또 주어진 위치들,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깨끗하게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 3차에 걸친 대 전도여행을 하면서 실패한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테네 전도입니다. -성경에는 아덴 전도라고 합니다.- 아테네에 가서는 자기가 신 플라톤 철학에 정통하니까 플라톤 철학적 사상을 가지고 아테네에다가 복음을 증거 했어요. 그러나 그 곳에는 교회도 세우지 못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바울의 전도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 2절을 네가 읽어 드릴께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이 아테네 전도하고 난 다음에 어디간지 아십니까? 바로 이 고린도에 갑니다. 그러니까 이 고린도 전도를 할 때에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증거하지 않겠다고 그는 결단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도는 큰 성공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바울의 십자가의 능력은 결국 로마를 정복하고 복음을 세계로 열리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야 되겠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고,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도구가 되어야지 그 자체가 우상이 되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19절, 20절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는 지혜가 다 쓸모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서도 보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니라" 여러분 세상의 능력에 삶의 자리가 서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의 도구로서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예수 이름을 증거 하는 도구가 되어야 될 뿐입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집니다. 그곳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곳에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구현되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산 속에 멧돼지 한 마리가 있었어요. 하루 종일 산 속을 헤맸는데 토끼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기진 맥진하고 있는데, 길가에 사과가 한 개 떨어져 있는 거예요. 너무 배가 고파서 그 사과 한 개를 맛있게 먹었어요. 그랬더니 눈이 떠지면서 힘이 조금 났어요. 그래서 이 멧돼지가 '아! 이 사과가 떨어진 이 사과 밑의 땅 속에 사과가 많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땅을 파기 시작했어요. 그의 발과 주둥이로 열심히 땅을 파 보았는데, 아무리 파도 사과가 없는 거예요. 드디어 그의 발은 부르터서 피가 나고, 주둥이는 피 범벅이 되었어요. 그 땅을 파다가 기진맥진하다가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어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뒤로 넘어져서 보니까 사과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사과가 너무 많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멧돼지가 그 몸으로 한 번 힘으로 그 나무를 부딪혔다면, 사과가 떨어져서 얼마나 맛있게 먹었겠습니까? 그래서 몸을 뒤집어서 한 번 부딪칠려고 해 보니까 힘이 없어 뒤집을 수가 없어서 보기만 하고 못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이 멧돼지처럼 땅 속에 사과가 있을 것이라고 열심히 땅을 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여러분들이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지혜와 위치와 능력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힘에 위하여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부르심으로 입은 사람들이 될 때, 그것이 우리의 자리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삶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십자가 없는 자기의 지혜와 십자가 없는 세상의 능력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은헤를 체험하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의 자리에 서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어느 자리에 서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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