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1] 자랑스런 교회 모습 (살후 1:1-12)
1. 자랑스런 교회 모습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 어졌음이라)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 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1:1-12)
성직 매매, 교회 세습, 면죄부 판매 등 교회의 타락으로 암흑기 시대로 불리우는 중세에 스스로 정통(catholic)이라고 자처 했던 교회에 그 타락상을 항의(protest) 고발함으로(비텐베르크 성문에 붙힌 마틴 루터의 95개조 항의문)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던 점을 염두에 두고 부끄러운 한국 교회 치부를 드러냄으로 자랑스런 교회 모습을 찾고자 드리는 말씀입니다. 교인수 수만명에서 수십만명을 자랑하는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대부분 교회 세습이라는 중세 시대의 병폐를 답습하고 있어 세인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중 감리교회에서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모 교회에서 내년에 은퇴하는 담임목사 후임에 아들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대해 비판여론이 비등해지자 그 교회 어느 장로가 <기독교 타임즈>에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반론 내용은 그 교회 위상이 세계적이어서 세계적인 지도자들과 어깨를 맞대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걸맞는 학위(박사)를 소지하여야 하며, 아울러 영어 동시 통역이 가능해야 하며, 광대한 그 교회 조직을 이끌 수 있는 탁월한 행정력을 갖추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그 교회를 잘 알고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담임목사의 아들이 교회를 맡아야 교회가 안정되기 때문에 가장 적임자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그 교회의 주장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를 따라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는 실력과 능력있는 사람만이 살아 남을 수 있고, 무능하고 실력이 없는 사람은 자연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같은 것을 와 <세계화>를 통해 뻐아프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무능하고 실력이 없어 도태된 80%의 사람들은 실력과 능력으로 경제를 장악한 20%의 사람들이 던져주는 빵부스러기를 받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앞서 교회 세습을 목전에 두고 있는 교회도 학벌이 시원치않아 겨우 신학교나 졸업하고 일상영어회화도 변변치 못하고 시골 농어촌 개척교회만 돌아다녀 특별한 교회행정경험도 전무한 목사, 실력과 능력과 학벌이 없는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과 섬김으로 지배되어져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 조직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십자가 희생 위에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아무리 교인들이 많아져 소위 교세가 확장된다해도 끝까지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실력있고 능력있는 사람만 불러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에서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시어서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만드시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치고 어디 변변한 사람 하나 있었는가?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 전서 1:26-29)
교회는 사람의 실력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담임목사가 아니라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안에서는 적어도 능한 자가 무능한 자를 사랑으로 섬기며, 문벌좋은 자가 문벌이 없는 자를 더욱 존경하며, 지혜로운 자가 미련한 자를 섬기며,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며, 세상의 존귀한 자가 천한 자를 섬기며,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교회 담임자도 학벌이나 문벌, 실력이나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모두가 다 서로 이처럼 사랑으로 섬기는 가운데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크다고 해서 어찌할 수 없이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원리를 따른다면 이미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자선, 복지 단체나 이익집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라에서는 법으로일지라도 공공단체나 기업체에 장애인들을 의무적으로 고용하도록 하고 있는데 시각장애인 교회, 청각장애인 교회, 등 장애인 교회를 각각 따로 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위 대형교회에서 이들 장애인 목회자들을 수용하여 장애인들을 사랑으로 섬길 수는 없는 것이겠습니까? 교회는 크든 작든 예수 십자가 위에 세워져 그 십자가의 정신인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교회 안팎에서 막강한 교세를 내세워 지배하려는 자세는 예수 십자가의 삶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배구조를 과감히 개혁하고 일체 섬김의 구조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교회는 "믿음이 더욱 자라는 교회", "서로 사랑함이 풍성한 교회", "환난 중에 인내하는 교회" 등입니다. 믿음이 더욱 자란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더 예수를 닮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교회는 서로를 섬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별 족장으로 정탐군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40일동안 정탐을 마치고 모세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27)...`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28)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민13:27-29)
이같은 보고에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두려워하며 절망감에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정탐에 동행했던 갈렙이 일어나 백성을 안돈시키며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며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정탐군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31)...`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1-33)"
한 마디로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며 그들 앞에 우리 자신은 <메뚜기>같은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볼 때 <메뚜기>같았을 것이라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존심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과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메뚜기>같이 보잘 것 없고 하찮아 보일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실 때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있는 자들, 강한 것들,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자" 했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비록 <메뚜기>같아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지극히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 여러분은 자신들을 <메뚜기>로 보지 말고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오히려 "세상의 강한 것들과 있는 것들과 지혜있다고 하는 것들을 우리의 <밥>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 그들은 우리 밥이라 !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 그들을 두려워 말라 !'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민 14:7-10)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메뚜기>같이 여기며 두려워하며 좌절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2)고 말씀하시므로 하나님 백성으로 자신을 <메뚜기>로 여기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악평하므로 하나님을 멸시하며 믿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탐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40년간 패역한 죄를 지고 광야에서 유리 방황하다가 소멸되어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반면 가나안 땅의 모든 족속들을 "<우리의 밥>으로 여기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믿음으로 백성을 격려했던 여호수와 갈렙만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는 그토록 하나님의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직접 체험했으면서도 믿음이 날로 자라기는커녕 "하나님의 주신 약속의 땅을 악평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신을 세상에 비교하여 <메뚜기>로 여기는 등 전혀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소멸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여러분이 겨자씨같이 비록 작고 하찮아 보여도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임을 잊지 마시고 어떠한 환경과 형편에서도 날로 믿음이 자라가는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성도과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믿음이 자라 예수를 닮아 더욱 더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자랑스런 교회는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 있는 교회"인데 "서로 사랑함의 풍성함"의 열매는 십자가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충만하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그 풍성한 사랑을 확증하시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희생과 사랑, 그리고 섬김의 표상입니다. 자신을 닮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구원하심이 십자가요, 사랑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섬기고자 하심이 십자가요, 인간을 섬김으로 구원하시고자 하심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선생으로 제자를 섬김과 의인으로서 죄인을 섬김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담임목사가 아무리 실력이 없고 보잘 것 없어도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교인들 중 아무리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그 하는 일이 천하여도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지혜있는 자들이 미련한 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이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한 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약하고 무능하고 병들고 미련한 자들을 도태시키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곳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대형 교회>는 담임목사로 장애인 목사나 실력과 학벌이 없는 목사가 청빙되어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하여 서로 하나되어 서로를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때 진정한 대형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아무리 교세가 강해져도 세력화되어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아무리 교인수가 많아지고 헌금액수가 불어나도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예수의 모습을 잃어서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실력과 능력과 학벌 등을 고루 갖춘 목사가 농어촌 시골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겠습니까? 알버트 슈바이쳐 박사는 신학박사 외에 서너가지의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어디 대형교회에서 목회하고자 하면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 오지로 달려가 병든 흑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대형 교회라서 십자가는 높이 세워져 가도 정작 십자가의 정신과 십자가의 삶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 위에 세워진 것이지 교회 위에 십자가가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과 섬김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교회가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인들이 무슨 철만 되면 큰 절간이나 높은 성당, 대형 교회 앞에 득실거리는 것은 종교가 세력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종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사랑으로 백성을 섬기고 있다면 그러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교회가 되어 정치인들이 어느 때고 가장 작은 교회에 찾아와 예수의 겸손을 배우고 나라 백성을 위한 희생과 사랑의 십자가를 하나씩 지고 나가는 그러한 교회가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랑스런 교회의 모습은 "핍박과 환난중에 인내하는 교회"입니다. 여기 <환난>이라함은 시련을 받아 고통당하는 것을 뜻하고 <핍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하며 그러한 연단된 믿음을 정금같이 여기십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당하는 핍박과 환난의 고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같은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소망 중에 인내하였던 것입니다. 주어지는 고난을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을 깨닫고 그것들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이겨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애매한 고난을 당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만이 하나님의 상급과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 동아일보 기사에서 한국인 두 사람이 필리핀을 사업차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서는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는데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여섯 명의 필리핀청년들에게 몰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필리핀 공항경찰에 신고를 해서 여섯 명이 체포되어 경찰에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6명은 한결 같이 우리가 한국에서 이제 일하고 막 돌아오는 길인데 그 동안 한국에서 당했던 수모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진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진술을 듣다 못한 경찰이 화가 나서 한국인 사업가 두 사람에게 재차 폭행을 가했다는 것입니다. 필리핀 주재 한국대사관에 신고를 하고 필리핀 정부당국에 항의도 했지만 일도 처리하지 못한 채 강제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 동아일보의 큰 기사입니다. 그 기사 맨 마지막에는 오로지 단하나 한국인 이유 때문이라고 적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네팔을 여행하던 대학교수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몰매를 맞았다거나,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는 '한국놈 개새끼'라는 제목의 책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법무부 공식통계에 따르면 외국인 노동자수는 36만5천명입니다. 이들 대부분이 밤낮없이 뼈빠지게 죽도록 일을 해주었는데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으며,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다 잘려 나간 손가락만 수십가마니는 될 것이라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의 집에서 일주일에 평균 3,4명씩 장례를 치루는데 대부분 임금체불과 상해로 인한 비관으로 자살하는 경우라는 것입니다.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라지고 팔뚝이 잘라지는 고통은 생활의 불편에서 끝나지 않고 평생 범죄자나 전과자로 오인 받고 평생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슬람권 국가인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지금도 코란 율법에 따라서 범죄형량에 따라 손가락이나 팔뚝을 잘라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받게 하는 자는 환난으로 갚으시는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의 눈물을 씻어줄지언정 이웃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자의 환난과 고난을 함께 나누어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서 받는 고통은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의 상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복음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랑과 영광이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천문학자 아이엔 쉘톤은 생물계만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계도 때가 되면 죽는다는 것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가 발견했었던 '수퍼노바'라는 별이 죽을 때 태양의 1억배 정도의 빛을 한꺼번에 발산하면서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신비스러운 것은 별들이 빛과 열을 발산하면서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 해체 또는 자기 폭발 등의 고통스런 죽음으로 또 다른 새로운 별이 창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별이 죽는 그 마지막 순간에 분출하는 자기 폭발과 자기 해체의 죽음은 새로운 에너지 입자를 거대하게 생산해 내는데 바로 그 입자들이 새로운 별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온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었고 그 빛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곧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40년이라는 길고 긴 광야의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고 연단하시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8.15광복이 아무런 고난없이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국 땅 해란강, 일송정, 청산리, 상해, 하와이 등지에서 피맺힌 눈물로 독립과 해방을 노래하며 피를 토했던 안중근, 윤봉길, 이준 등 이름도 빛도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순국 선열들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이 땅 구석 구석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피를 뿌린 수많은 순교자들의 그 고난과 죽음, 그리고 나라 민족의 고난을 대신 걸머지고 정신대로 끌려갔었던 우리의 선조 할머니들의 한 서린 울부짖음과 탄광촌으로 끌려가 돌아올 수 없는 해골이 되었던 수많은 젊은 가장(家長)들이 불렀던 고난의 '신고산타령' 등 이 모든 것들이 나라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거쳐야 했던 고난의 발자취였던 것입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과 생명의 영광을 바라보셨던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3-24)
그러므로 고난과 희생, 죽음을 새로운 창조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인내하는 교회와 성도야말로 장차 하나님의 자랑과 영광이 될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8:18) 하나님의 자녀로서 날로 믿음이 자라가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며, 핍박과 환난 중에도 인내하므로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