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의 한국 시문학사
2. 이행기 한국시문학의 근대성
근대 이행기의 문화적 목표는, 우리 스스로(주체적) 우리 문화의 전통을 지켜내면서도(반제) 낡은 틀을 벗고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반봉건) 새 시대에 걸맞은 문화적 틀을 창출하여 이 땅에 연착륙시키는 일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개화와 자강을 한 줄에 꿸 방법을 찾는 일이었으며,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조화시킬 수 있는 문화적 모형模型을 제시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목표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표면적으로 조선 역사를 담당해왔던 집권 양반층의 유연하지 못한 수구적 민족주의로는 급속한 변화를 주도적으로 헤쳐나갈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새롭고 다양한 욕망들이 자연스레 분출되어 서로 길항해나갔다.
이 시기의 역사적 연표를 대략적으로만 훑어보아도 서로 충돌하여 경쟁하던 당대인들의 고민의 내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860년의 동학창시創始, 1876년의 개항,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1894년 갑오농민운동과 갑오경장, 1897년의 대한제국 수립, 1905년일제에 의한 군사 · 외교권의 침탈, 1910년의 국권 강탈, 그리고 이어 일어난 1919년 3·1운동 등 숨가쁘게 흘러온 역사의 갈피들은 모두 서로 밀고 당기는 팽팽한 힘들의 장이었다. 그런데 복잡하고 다기多歧한 이 모든 과정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불러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을 매개로 한 서구 체험, 곧 타자의 발견⁴⁾이 우리 민족 구성원 개인의 차원으로부터 집단, 나아가 민족 전체에 이르기까지의 자기 발견을 유도했다는 뜻이다. 그 자기 발견의 끝에 근대 시민국가 건설이라는 목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의 경우 이러한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일제 침략을 당해 나라 찾기와 만들기를 병행해야하는 터무니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목표가 사회 제도적 근대화의 핵심에 해당한다면 당대의 문학은 그것의 가장 예민한 문화적 형식화에 해당한다. 즉 우리 문학의 근대성이야말로 이 사회의 제도적 근대화라는 토대 위에서 진행된 문화적 근대화의 고갱이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그 한가운데 소설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지만, 시문학 역시도 그러한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소설의 성립이라는 서사문학의 근대화에 비견되는 서정문학의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유시형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자유시라는 개념은 순전히 형식적인 범주로 간단히 환원될 수가 없다. 전근대적 질곡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명제는 시의 형태적 자유로움, 그리고 개인 주체의 계몽적 자기 발견이라는 양 측면에서 한국시의 근원적 변모를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세계(내면)를 가진 개인의 발견,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개인과 사회의 관계 발견이라는 근대 주체의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반영된 자유시형의 성립 과정은, 무엇보다도 시기로부터 시가 분립하는 과정이라는 특징적 면모를 갖는다. 모든 정형률이 곧바로 노래인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의 전근대적 시가들은 전부 노래로 불리어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음악과 문학이 비분리 상태에 놓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이 오히려 문학을 압도하는 형국이었던 것이다.⁵⁾ 그런데 자유시는 그 어떤 특징적 노래형에 맞춰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쓴 개인의 감정 상태, 그리고 그때의 호흡에 걸맞은 내재적 리듬에 의거하여 만들어질 뿐이므로 더 이상 시가詩歌일수가 없었다.
시가詩歌로부터 가歌가 분리되어 시만이 독립되는 과정을 자유시형의 성립 과정이라 했을 때 이를 달리 말하면, ‘노래하는 시’가 ‘읊는 시’ 혹은 ‘눈으로 읽는 시’로 변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정의 멜로디와 리듬에 가사를 실어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읊거나 눈으로 따라가며 읽는 것이라는 이 조건이 성립함으로써 비로소 한국의 시는 다양한 공간적 조직, 시각적인 구성 등을 통해 회화성을 띨 수가 있게 되었다. 1930년대들어 김기림이 현대시의 지배소支配素라고 주장해 마지않았던 회화적 기교란 바로 이 읽는 시라는 조건이 이미 성립되어 있었기에 제창 가능한 방법이었다. 물론 ‘읽는 시’가 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겉으로 보아도 뻔히 드러나는 외형률, 곧 몰개성적으로 시에 앞서 통용되던 집단적 용도의 율격적 장치가 배경화 되고 개별 시를 읽을 때마다 그 시에서만 구현되는 개성률, 곧 내재율의 형태가 전면에 도드라지게 된 것이다.
이행기 한국 시문학사에는 이 시詩와 가歌의 분리 과정을 오해해서 전근대 시가형詩歌型은 버리고 새로운 시가형을 만드는 것이 시문학의 근대성을 달성하는 길이라고 믿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육당 최남선의 신시 운동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그는 6.5, 7.5, 8.5라는 음수율에 기초한 새로운 정형률을 만들어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실험은 후대에 안서 김억, 김소월 등에 의해 승계되면서 1920년대에 민요조 서정시라는 시형을 낳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히 안서는 자유시의 율격적 기초를 호흡률 혹은 개성률로 정의함으로써 자유시론 전개에 중요한 공을 세우고서도 스스로는 자유시를 전에 없던 새로운 정형시라고 생각하는 혼선을 빚기도 했다.⁶⁾ 그의 영향을 받은 김소월의 시를 두고 한국근대시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예거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에서 비롯한다. 이 모든 착오가 근대시에 대한 최남선의 이해/오해로부터 발단했던 것이다. 정형률에 대한 생각의 차이뿐만 아니라 음수율을 우리 율격의 근간으로 오해하여 널리 퍼뜨린 점도 분명히 짚어두어야 할 육당의 문학사적 문제일 것이다.
이행기 한국시의 이러한 특징들은 인쇄술의 발달이라는 토대 변화에 무엇보다 크게 힘입고 있다. 신지식에 대한 갈증이 인쇄술의 발전을 부르고 발전된 인쇄술이 있어 신문·잡지·단행본 등 대중들이 자신의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서책들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는 이렇게 서책으로 찍어 인쇄한다는 조건 덕에 노래의 성격을 버리고 활자 텍스트가 될 수 있었다. 노래가 보다 직접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위무慰撫한다면, 활자 텍스트는 두고두고 되짚어내는 일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주저하고 고민하고 반성하게 한다. 이 반성적 사유, 반성적 합리성이야말로 역사의 진보를 가능케 하는 힘의 원천일 것이다.
인쇄라는 조건은 또 다른 의미에서 문학적 근대화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인쇄술이 있어 비로소 평론가 · 소설가 등과 함께 자기 이름을 걸고 책을 발간하여 배포하는 사회적 제도로서의 시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로소 시는 전前 시대의 유동성, 모호한 출처로부터 비롯하는 적충성을 버리고 한 창조적 개성에 의해 제작, 생산된 언어 구성물이라는 명확한 자기 규정을 얻기에 이르렀다. 비록 발생학적으로 볼 때 최초의 시인이나 비평가에게 계관桂冠을 씌운 자가 누구인가 하는 애매한 문제가 남긴하지만, 이제 시인은 출중한 재주로 해서 다른 시인이나 비평가에 의해 뽑힌 사람이 된다. 그 결과 그의 시에는 타인들이 결코 간섭할 수 없는 배타적 지배권이 주어졌다. 자유와 민주라는 근대 시민정신의 훌륭한 대변자가 되어 주리라 믿었던 시인들이 어느새 문단이라는 배타적 폐쇄 조직에 칩거하여 지재권知財權을 휘두르는 작은 영웅이 된 것이다. 시가 민주주의를 노래하는 한 특권적 개인의 것으로 제도화되어 버렸다는 이 조건은 근대 이후 시를 둘러싸고 행해진 많은 고민과 사유들의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로 작동했다. 시인과 작품, 독자의 성격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들, 특히 독자의 지위에 대한 성찰들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파생되어 나온 고민들인 것이다. 이행기 한국 근대 시문학은 바로 그런 고민거리의 시발점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과거이자 현재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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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타자로부터의 충격이 존재하지 않으면 자기에 대한 인식도 없다. 따라서 근대 이후의 자기인식에 외래 요소가 검출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이러한 외래 요소만을 근대적인 것이라 떠받드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 많은 근대주의자들이 공통으로 범했던 오류가 바로 이것이었다. 옛것의 변모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것들이 제 나름의 형식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근대적인 것이다.
5 이때의 음악은 시적 기교의 주 요소로서의 음악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문학과 대등한 예술의 한 갈래로서의 음악을 지칭한다. 시가(詩歌)라는 명칭이 이러한 사정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이때, 가(歌) 요소는 개인이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노래가 먼저 있고 거기에 맞는 내용의 시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문학이 노래에 종속되었던 것이다.
6 육당, 춘원, 안서 등 이행기 시문학사를 선도했던 이들이 모두 새로운 정형시형의 개발에 몰두했던 까닭은 근대 이전의 우리 시문학사에 한글로 된 정형‘시’가 존재한 적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시조는 노래하는 시가의 가사(歌詞)였고 가사(歌辭)는 정형성에 이르지 못한 미정형의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새 시대의 정신에 맞게 해묵은 한시를 버리고 한글 정형시를 찾아 완성하자, 그 후에라야 비로소 자유시 운동이 시작될 수 있다는 판단이 이들의 행보를 결정 지은 인식의 기초였다. 1920년대 중반의 시조부흥운동은, 전에 없던 새로운 정형시형을 창조하겠다는 목표 대신에 시조라는 기왕의 장르에서 가창성이라는 요소를 불식하고 눈으로 혹은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 정형시적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4음보격이라는 음보율 논의의 거점을 마련한 문학사적 일대 사건이었다. 안서는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격조시형’을 찾아 1950년대까지도 한시 번역이나 대중가요 가사 창작 등에 매달리며 한글 정형시 운동을 펼쳤다. 이런 점을 고려하자면 우리 자유시 운동은 정형시로부터의 자유화 운동의 결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정형시 만들기와 자유시 만들기, 산문시 만들기라는 동시 진행된 다양한 시적 근대화 운동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좁혀 이해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근대 이전에 음보율이라 불릴 만한 것이 정말 실재했던가 하는 점에서부터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 등의 기본 개념에 대한 인식틀을 현재 우리가 제대로 공유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보다 집중적인 검토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2024. 3. 30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