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열 두 제자의 한 사람인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여 나가신 일과 이를 힐책하는 바리새인에게 자신이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셨는지를 말씀해 나가며 그들의 완악함을 지적하시는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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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를 부르심
마가복음 2장 13-17절(마 9:9-13, 눅 5:27-32)
13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5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며 그의 병을 고치시는 이적을 해하신 후 거기서 떠나 갈릴리 바닷가 부근을 지나가시면서 자신을 찾아 나온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가운데 마태가 근무하고 있는 세관 앞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관 앞을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인 마태<또는 레위라고 불리움>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어나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직후인 어느 날 마태는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 모시고 큰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 앉아 음식 잡수시는 그 자리에는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아 멸시를 받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손님으로 와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이는 이런 부류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보고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이시고 저희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2-13)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마태를 부르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세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태가 근무하고 있던 세관은 가버나움 길목-갈릴리 바닷가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가버나움은 헤롯 안디바스가 로마의 임명을 받은 영주로서 권세를 행사하고 있었는데 로마의 영을 따라 영주의 관할 하에 가버나움에서 세금을 거두어 일정액을 로마에 상납하였습니다. 마태가 근무하고 있는 세관은 시라아에서 애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상거래에 대하여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세금을 거두는 일은 세리(稅吏)가 하였는데 세리장이 여러 세리를 거느리고 징수하였습니다. 세리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세금을 받으러 다니는 자들인 고원(雇員)과 그들보다는 좀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세관의 관리(官吏)가 있었습니다. 마태는 이중 세관의 관리였던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거두어 들인 세금에서 일정액을 상납하고 나머지는 자기들이 일한 몫으로 가졌습니다. 그 일이 비록 합법적으로 하는 일이었지만 백성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판을 들었습니다. 죄인들과 같이 취급되어 멸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는 보시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의 타당한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가 곧 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사실을 볼 때 마태가 예수님을 깊이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마태를 전부터 자세히 아시고 그의 마음을 예료(예측)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셔서 열두 세자의 무리에 가담하도록 하셨을 때 그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이제까지 해온 생활 방식을 모두 포기하고 좇을 수 있었습니다. 마가는 마태 외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좇았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마태가 비록 세리로서 일하고 있었지만 그의 사상과 정신에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르는 것을 인식할 만큼 메사야이신 예수님을 바로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이 있었는데 그런 마태를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그가 충분히 이해하고 수긍하여 나를 좇으라고 하시는 말씀에 그렇게 해야겠다고 하는 마음이 자발적으로 일어날 만큼의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은 아니더라도 그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어떤 인식이 있는가를 아셨기 때문에 그가 깨닫고 좇을 수 있는 말씀을 전해 주셨으며 그 말을 들은 마태는 많은 생각을 한 결과 그 부르심에 대해 응해야겠다고 하는 마음의 소원이 생긴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견해이든지 간에 공통적인 것은 마태가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마태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믿는 믿음이 없었다고 하면 그가 가버나움의 세금의 관원으로서 그런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른다고 해서 그 즉시 따라 나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태를 예수님께서는 부르셔서 그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믿음이 그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일하시는 그 사역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좇은 직후에 자기의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그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는 송별 연회였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에서 세리의 사회적 지위는 관원이었으면서도 불구하고 매우 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리의 집과는 혼인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관념은 이방에서도 있었습니다 데오크리투스(theocritus)는 무엇이 제일 나쁜 짐승이냐? 할 때에 대답하기를 “산에서는 곰과 사자요 시가에서는 세리니라”고 했습니다. 죄인들은 세리들처럼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규정을 무시한 사람들 또는 이방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이방인은 하나님의 의가 없는 저주받은 사람들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가 그들도 불러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한 것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배불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얻은 기쁨을 그들도 얻어 그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이야기하여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를 부르신 것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시는 것에 이어서 마태가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푼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여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 - 바리새인들은 식사가 계속되는 동안 마태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비방하여 힐책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바리새인이 하는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또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있는 목적을 가르쳐 주시는 것에서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그들에게 증거 하여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한편으로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오해하고 있어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지적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의 숨은 의도를 간파하셨습니다(참조. 요 2:24-25). 예수님은 그들에게 잘 알려진 속담을 들어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속담을 들어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에 비해서 자신들을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리와 죄인들과 같지 않다. 그들과 같이 죄인이 아니다 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을 의롭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였습니다(눅 18:11).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의원이 어느 사람에게 필요한가 하는 문제를 들어서 예수님께서는 어느 사람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는가를 말씀해 줍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죄가 없는 의로운 자 곧 건강한 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을 죄인된 자 곧 병든 자로 여깁니다. 의원은 의원을 필요로 자들에게 찾아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치료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같이 있을 필요가 없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대로 병든 자입니다. 그러기에 의원이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죄인됨을 압니다. 그러기에 죄 사함 받아 구원 얻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과 그에 따라 구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듯이 예수님이 이 자리에서 이들과 같이 음식을 먹는 것은 ‘죄인된 자를 찾아 회개시키기 위함이다. 그래서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여서 구원하고자 하여 함께 하는 것이다’ 라는 사실을 말하여 주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마음을 지적하여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완악한 마음으로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하나님이 왜 제사를 요구하셨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았어야 했습니다. 제사를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기의 백성을 향하여 품고 계신 사랑을 보여 주고 베풀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독생자를 희생해서까지라도 죄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사랑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시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누구신가를 계시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