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익 시조집, 『팔공산 가는 구름』, 그루, 1999.
多富院 激戰地에서
겨레의 가슴팍에
못을 박은 이 격전지
조용히 깃을 접고
목을 뽑은 유학산(遊鶴山)아
그날의
전상(戰傷)은 어디로
초목 이리 무성한가.
포성이 무너져서
산이 되고 골이 되어
죽어서 묻힌 넋이
되살아나 들꽃 됐네
사랑도 미움도 저만치
물어나와 앉은 세월
나직한 산골 마을
승전지(勝戰地)로 이름 높다
떠돌던 구국 충혼(求國忠魂)
비(碑)에 새겨 잠재우고
팔공산
가는 구름을
불러, 여기 앉히네.
겨울 강
살얼음
잡혔다고
함부로 건너지 말라
재어 보고
짚어 봐도
깊이 모를 이 강심(江心)
손잡고
마음 맞잡고
건너야 할 겨울 강.
<최승범> 해설에서
일반적인 처세훈으로 삼을 만도 하다. 그러나 ‘깊이 모를 이 江心’은 바로 오늘의 우리가 겪고 있는 IMF의 암담함과 남북 문제에서 오는 아픔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임진강에서
휴전선 아픈 한 금
세월 따라 다 묻혔다
오십 년 끓는 용암
분화구로 넘친 오늘
그 누가
지맥(地脈)을 눌러
이 열망 잠재우리.
철조망 녹슬어도
피 흘려 아픈 상흔
흩어진 가을바람
서걱이는 억새풀과
한 줄기
강물을 두고
못 건너는 배가 하나.
눈발이 실렸는가
무거운 북녘 하늘
산하도 허리 굽어
일으킬 줄 모르는데
언제면
쇠북이 울어
동심원(同心圓)을 그릴꼬.
인생살이
사람의 한살이도
어찌 보면 한해살이 꽃
꽃 피는 봄 한철은
꽃같이 살다가도
시샘한
비바람 앞엔
미련 없이 흩진단다.
사람의 한살이도
어찌 보면 한해살이 풀
풀 푸른 여름 한철
짙푸르게 살다가도
갈바람
섭섭히 불 제
누우렇게 물든단다.
사람의 한살이도
어찌 보면 한 개 낙과(落果)
넉넉한 가을 들녘
탐스럽게 영글어도
한 서리
추명(秋明) 흔들면
어쩔 수 없이 뚝뚝 진다.
사람의 한살이도
어찌 보면 하나의 귀근(歸根)
잎 지운
앙상한 가지
삭풍(朔風)이 휘몰아치면
뿌리로 돌아온 수액(樹液)
혼곤히 잠든단다.
삶
세상이
뒤틀렸나
내가 이리 모가 났나
힘겨운 짐
굽은 허리
가슴마저 멍이 들어
거친 손
정 끝으로도
다 못 캐낸 이 옹이.
정재익
본관 : 청주, 아호 치운(致雲)
1930년 12.1 경북 청송 진보 출생
1965.4.25. 영남시조문학회 창립 회원
1974년 시조집 『無花果』 출간 등단
1977~1984년 영남시조문학회 회장
첫 시조집 『無花果』(‘74)
제2시조집 『가시에 걸린 紙燈』(’87)
제3시조집 『아침 山行』(‘94)
제4시조집 『팔공산 가는 구름』(’99)
<수상>
제8회 정운 시조문학상
제11회 대구광역시 문화상(문학 부문)
제8회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제12회 한국예총문화상(공로상)
<해설>
律調의 典範과 敍情, 觀照의 美學
-정재익의 시세계
崔勝範(시조시인, 문학박사, 전북대명예교수)
1.
치운 정재익 사백은 칠순 기념으로 제4시조집 『팔공산 가는 구름』을 상재한다고 했다.
시백은 이호우, 정완영 시인께 직접 사사하여 우리의 시조시를, 조지훈 시인에겐 4년 동안 방학철을 이용하여 자유시를 공부하였다는 이야기에 나는 더욱 친근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맥주잔을 기울이며 술술 자작시를 낭송하는 사백의 기품에서도 나는 이호우, 조지훈, 정완영 시인의 풍모를 눈앞에 떠올리곤 하였다. 그 어른들도 생전 문학 담론일 때면 흔히 자작시를 줄줄이 외워 가며 이야기를 잇곤 하였었다.
자작시 한 편 제대로 오롯이 외우지 못하는 나로서는 어쩌면 이 재주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 제3시집 『아침 山行』(94)을 받아 읽던 중, 자작시 암송의 비결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한갓 재주에 있다기보다도 탁마하는 시작 工程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사백은 한 편의 시를 이루는 데 있어 많은 퇴고의 과정을 거치는 시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하매, 자연 얼없이 닦인 구슬처럼 이루어진 작품은 외워질 수밖에,자작시의 암송을 어찌 재주만이라 할 것인가. 이 점에서도 이호우, 조지훈, 정완영 시인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사백의 시작품을 읽자면 ‘위인성벽탐가구(爲人性僻耽佳句) 어불경인사불휴(語不驚人死不休)’라 한 杜甫의 저 성벽까지를 느끼게 한다.
2. 『팔공산 가는 구름』에는 65편이 수록되어 있다.
3. 李奎報는 그의 『백운소설』에서, ‘시가 이루러지면 반복해 보아야 한다. 자기가 지은 것으로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이 지은 것, 또는 평생 미워한 자의 시를 보듯하여, 하자를 찾아도 하자가 없을 때, 그 시를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의 실천을 사백에서 본다. 다 같이 본받아야 할 바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