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2-23
로마서는 하나님 말씀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사도를 통해 주신 말씀은 대단히 논리정연하고 치밀합니다. 그리하여
2천 년 시간의 간격을 뚫고,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인류가 죄에 대해
죽고, 새로운 삶, 영생(Eternal life), 은혜와 구원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은혜와 구원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대개 은혜와 구원의 폭넓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원을 죄에서 건져주시는 정도로, 은혜란 죄인을 향한 한없는 사랑 정도로
이해합니다. 이는 대단히 좁은 이해입니다. 의와 은혜는 우리 신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미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더는 과거의 죄가
우리를 침탈하지 못합니다. 완전히 단절된 것입니다. 교리상으로 이해됩니다만 실제 성도의 삶을 들여다보면, 은혜와 구원으로 그리 새로워진 거 같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구원과 은혜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협소합니다. 본문 12, 13절을 보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사도는 우리에게 불의의 무기가 아닌, 의의 무기가 되라고
명령합니다. 구체적으로 불의의 무기가 무엇입니까. 이는 육체로 대변되는 내게 남아있는 수없는 감정과 생각, 판단 등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를 통해 구원과 은혜를 경험해도 여전히 똑같은 가정, 직장, 관계와 시대 속에 삽니다. 그때 스스로 여전히 과거의 방식, 불의의
도구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방식, 의의 도구로 살아갈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때 성도는 적극적으로 은혜, 새로운 삶의 지배 방식
아래에 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가 된 후, 곤란한 일을 겪습니다. 사랑하라고 배웠는데, 마땅히 사랑할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악의 화신으로 보입니다. 지독히 고집 센 배우자는 결코 사랑할 대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과 시대는 결코 달라질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려는데, 안되더라고요!” 이게 성도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이때부터 성도는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저항감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포기합니다. 하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됩니다. 14절입니다.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이미 성도는 은혜 아래, 새로운 신분 아래 거합니다. 새로운 신분은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과 2대 왕 다윗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왕으로 뽑힌 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결말은 판이했습니다. 사울은 평생, 질투의 대상이었던 다윗을 잡는 데 혈안이 되어 평생을
바쳤습니다. 사울은 은혜의 영향력 아래에서 불의의 병기, 시기와 질투와 미움에 자신을 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그를 선대 하는 다윗을
통해 제지를 가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갖은 핑계를 대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한편 다윗은 기름 부음 받자마자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동, 도망자, 망명자로 살아갑니다만, 현실 속에서 하나님 앞에 의의 무기로 자신을 드립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이를 은폐하며, 불의의 병기가 되는 순간에도, 은혜 아래 있었기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를 돌이키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 아래
거하는 성도의 생애입니다. 15, 16절입니다.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사울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깊어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다윗의 선대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거절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다윗은 숙적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기름 부은 왕을 죽이는 것이 옳지 않다며 칼을 거두고 선대 합니다. 은혜 아래 있기에 사울에 대한 분노와 억울한
마음, 악을 악으로 갚아야 하는 죄의 영향력 아래에서 다윗은 자유로웠습니다. 17, 18절입니다.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사울은 죄의 종의 길을,
다윗은 의의 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마침내 사울은 왕좌에서 내려오고, 다윗은 새로운 은혜의 시대를 열어갑니다. 성도는 은혜의 영향 아래
살아갑니다. 나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성도는 살아갑니다. 19, 20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은혜 아래 있기에 의의
사고와 행동, 그리고 삶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울과 같이 행동하고자 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불의의 무기가 되려 합니다. 그러나 단호하여지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은혜와 구원 아래서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임을 알려주셨기에, 이제는 의를 선택할 힘이 생긴 것입니다. 그럼 성도는 어떻게 의를 지니고 갖추고 살 수
있나요?
현대인은 바쁜 것을 미덕이라 생각합니다. 다이어리에 약속이 가득하고, 사람이 많이 찾으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악(惡)의 헬라어 원어, ‘포네로스(πονηρὸς)’는 ‘바쁘다’라는 말에 뿌리를 둡니다. 악의 근원은 분주하게 만들어 사람을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분주함은 내 영혼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기 격리를 통해 하나님을 독대할 기회를 주지 못합니다.
악(惡)은 곧 죄(罪)가 되고, 마침내 사망(死亡)이 됩니다. 사울은 다윗을 바쁘게 쫓아다녔고 결국 죽었습니다. 같은 시간, 쫓기던 다윗은
주님을 향해 수많은 시와 찬양을 지었고 기도를 올리며 영원한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립니다. 21, 22절입니다.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사울의 열매를 보십시오. 온통 증오와 죽음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룩한 열매,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대면하고 성령 안에서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 23절을 보겠습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
23)
말씀대로 사는 열매는 대단치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하찮아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는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쉽게 포기합니다. 현실 앞에 실효성이 없어 보이고 당장의 열매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결코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며 살아야 합니다. 악에 동조하는 불친절한 직장동료, 상처만 주는 불편한 가족을 성령의 열매로
품을 수 있도록 몸부림쳐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3년간 에베소에서 사역하며 숱한 어려움에도, 많은 이들 앞에서 떳떳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삶이 곧 설교였고, 설교가 곧 삶이었습니다. 많은 이력을 자랑할 수 있었으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은혜 안에서 자신을 의의 무기로
내주었습니다.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바울이었지만, 주님 안에 새로운 영원한 이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님.
오늘도 퍽퍽한 현실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은혜 아래 있는 자답게,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주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이겼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의의 나라가 확장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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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님. 죄로 인해 죽은 우리에게 가장 고귀한 선물, 영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의 감격도 잠시 퍽퍽한 현실을 마주하여, 의의 도구로 살아가기를 얼마나 많이 포기했는지 모릅니다. 사울처럼 핑계하며 육체의 일에 분주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 아래 자신을 던졌던 다윗처럼 살아가게 하옵소서.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시고, 바울과 다윗처럼 주님과 함께 영원한
이력을 써내려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