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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을 완공함 | 30-33 30 그는 또 물두멍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거기 씻을 물을 담으니라 31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기서 수족을 씻되 32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제단에 가까이 갈 때에 씻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33 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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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이
충만함 | 34-38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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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40:30-38절
제목 : 출애굽기 한 번에 설교하기
설교 작성노트
성경은 한 편의 복음이다. 죄가 들어오자 하나님은 “내가---하리라”(창 3:15)고 원시복음을 선언하셨다. 이 “복음”이 마지막 책에 이르러 “이루었도다”(계 21:6)고 완성이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고 시작이 되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니,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하고 마치고 있는데, 복음은 주님의 초림으로 성취가 되어, 재림으로 끝이 나고 완성이 되는 것이다. 만일 재림하심이 없다면 복음은 미완성에 끝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점들의 모임이 아니라 “선”(線), 즉 구속사인 것이다. 그런데 이를 끊어진 말씀으로 취급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해체(解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고,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여러분의 H.P의 뚜껑을 열과 선 하나를 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놀라울 정도로 많든 기능들이 먹통이 되고 말 것이다.
이를 인식하는 자라면 66권의 책, 각권을 한 번에 설교하는 일에 도전해보기를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이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신구약 파노라마”라는 책을 발간한 것이다. “출애굽기 한 번에 설교하기”는 이에 대한 본보기라 할 것이다.
강론
출애굽기는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자손들이 번성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이점에서 명심해야 할 점은 이들은 단순한 야곱의 자손이 아니라,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창 32:28) 하신 선민(選民)인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이 내려갈 때는 70명에 불과하였으나,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1:7)합니다.
출애굽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부분(1-18장)은 애굽을 출발하여 시내산까지의 여정이고, 둘째 부분(19-40장)은 시내산 기슭에 약 1년 간 머무르면서 율법을 받고 성막을 완성하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70명이 장정만 60만 명으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애굽으로 내려 보내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46:3) 하신 약속의 성취이고, 또한 그들이 바로의 압제를 받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고 예시(豫示)되었던 것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2:23) 합니다. 이것이 출애굽기의 문제(問題)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자들이 어떤 방도로 바로의 속박에서 구출될 수가 있는가? 출애굽기는 이에 대한 해답(解答)을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 70명을 애굽으로 내려 보내셔서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하심은 “출애굽”이라는 예표를 통해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시려는”(히 2:15) “영적 출애굽”을 계시하시려는 의도에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2:23-24)라고 말씀합니다. 이점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여주신 것이 그들이 부르짖었기 때문이 아니라, 선수(先手)적인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음을 증언해야만 합니다. 이점이 모세를 부르실 때에도,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3:6) 하신 데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라고 불가능성을 말합니다. 이는 모세만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3:11, 12) 하십니다. 이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리하여 “모세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을 어떤 방도로 구원하여 주셨는가? 무력으로 하셨는가? 아닙니다. 기사와 이적으로 하셨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6: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한 중요한 요점이 6:5-8절에 나타나는데 그들의 신분(身分)을 세 가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 본래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6상), 즉 야곱의 자손이었습니다.
㉡ 그런데 “애굽 사람이 종”(5상)으로 삼은 바로의 노예들이 된 것입니다.
㉢ 바로의 종이 된 그들을 하나님은, “내 백성을 삼고”(7상) 하십니다. 그렇다면 바로의 노예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여지는가?
㉣ “너희를 속량하여”(6하)라 하십니다.
속량이란 종으로 팔린 자를 값을 주고 사서 해방시켜줌을 뜻하는데, 죄 값에 팔린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방도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속량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떤 방도로 속량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방도가 12장에 등장하는 “유월절 양”의 죽음입니다. 흠 없는 수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그 문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12:13) 하십니다. 죽음의 천사가 대문에 뿌려진 피를 보고는, “이 집은 벌써 심판이 시행이 되었군” 하고 건너고 넘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심해야 할 점은 이스라엘 집에서도 죽음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뿌려진 “피”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만 죄가 없는 어린 양이 대신하여 죽었을 뿐입니다. 그러면 다른 재앙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출 9:26) 했는데, “이스라엘 집에는 죽음이 없었더라” 하면 될 것을, 어찌하여 어린 양이 대신 죽어야만 했는가?
장자를 치심은 죄에 대한 심판이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나으뇨”(롬 3:9)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우리들도 애굽 사람과 다름이 없는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를 보심이 없이 이스라엘 집을 넘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방도는 “속량”, 즉 구속이라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이점에서 바로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열 가지 재앙을 등장시키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해서 10재앙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구원의 방도가 오직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라는 점을 클로즈업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점이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11:1) 하신 말씀에 나타납니다. 출애굽은 1-9가지 재앙으로 가능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가능하여졌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열 가지 재앙을 등장시키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초점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점이 주님께서,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이 밤이 마지막 유월절이요, 그림자로 지켜 내려오던 유월절이 성찬(聖餐)이라는 참 것으로 개혁(改革)이 되는 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들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가를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유월절(마 26:2, 막 14:1, 눅 22:1, 요 13:1) 곧 그리스도의 죽음에 맞춰져 있습니다. 영적 출애굽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한, 대속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십자가 복음이 사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구속교리가 율법을 수여하시는 20장에도 나타나는데 20장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21절은 십계명을 말씀하는 내용이고, 22-26절은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라는 내용입니다. 율법만 주셨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신 27:26)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를 아시기에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24)하십니다.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어떻게 “복을 주리라”하시는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여”(갈 3:13)주셨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 구속교리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聖所)를 지으라”(25:8)고 명하시는 데서 더욱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은,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19:12)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聖所)를 지으라”하시다니!! “성소”는 말씀이 육신을 입고 강림하실 임마누엘에 대한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십계명만을 주시고, 성막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한 사람도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문제만 있고, 이에 대한 해답인 “성막, 번제단, 물두멍, 속죄소” 등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죄”라는 문제(問題)에 대한 해답(解答)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 식양(式樣)은 의문(儀文)에 가려 있는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성막이 완성이 되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40:34)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충만했으면,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는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한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성막에 충만한 영광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로 성취가 되었다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한 교회로 적용이 된 것입니다.
이점에서 명심해야 할 점이 있는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23)한 말씀입니다. “명하신 대로”라는 말이 39장에 10번, 40장에 8번이나 강조되어 있다는 점은 그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신약교회에 명하신 바가 성경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교회를 명하신 대로, 즉 성경대로 섬기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영광스런 교회(엡 5:27)가 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러면 현대교회는 과연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하고 있는가 하고 묻게 됩니다.
이점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구원계획의 목적(目的)이 무엇닌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끝이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지옥 형벌만을 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속하셔서 자기 백성(百姓)으로 삼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인류의 시조가 범죄 함으로 에덴에서 추방당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잃어버린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목적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찾으셔서,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출 29:46)한 함께 거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 출애굽기에서 그리스도는,
㉮ 유월절 양으로,
㉯ 중보자인 제사장으로,
㉰ 생명의 양식인 만나로,
㉱ 생수를 솟아내는 반석으로,
㉲ 인간의 장막을 입고 임마누엘 하실 성막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40년 동안 매일 같이 만나를 내려주시고, 생수를 마시게 하심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닛시” 곧 대적을 물리쳐주심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에 보호하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십계명을 주심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나안을 향하여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앞에서 인도하여주심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예표가,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계 21:3, 6)에서 완성이 될 모형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백성들이 함께 거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건설입니다.
출애굽기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어 종노릇” 하던 나 자신이 어떻게 해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요,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항상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