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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헌공(휘 감찬)파 |
국사대사전(이홍직편) |
강씨 종사(宗史) |
790출생(추정) |
인헌공(감찬)의 5대조 餘淸(여청) 문하시랑(門下侍郞) 역임, 신라 때부터 금천(시흥)에 살았다. |
897년 출생 |
弓珍(궁진) <인헌공의 아버지> 여후(呂侯)로 있다가 고려 건국을 도와 중대광 삼한개국 벽상공신이 되었다 |
아버지 |
弓珍(궁진) |
邯贊(감찬, 함찬) 948년 금천(지금의 관악구 낙성대)에서 출생,
초명은 은천 (殷川),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략이 뛰어나고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가산을 모으지 않았다. 체구가 외루하나 대사(大事)에는
결단력이 우뚝하여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 983년 (성종 2)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부시랑을 지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통주도통사 강조(康兆)가 30만 대군을 이 끌고 나아가
맞서 싸웠으나 패하자 조신들은 거란에 항복하자고 주장 했으나
강감찬만이 오랑캐에 항복할 수 없다고 주장, 왕을 남쪽으로 보
내고 하공진, 고영기를 적진에 보내어 거란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후 국자좨주, 한림학사, 승지, 1018년 (헌종 9) 6월 서경유수(지금의
평양시장),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 平章事)를 역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침공하자 10월 서북면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20만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흥화진(지금의
의주 威遠)에서 적을 무찔렀다. |
배위 |
함양군부인 오씨(吳氏)이며 아버지는 숙(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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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
충북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 구암 뒷골 계좌 언덕. 1963년 후손들에 의해 지석이 발견되어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분묘를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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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
行經(행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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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 인헌공 공적 기념 3층 석탑> |
유적지(遺跡地) 서울 신림동에 있는 낙성대 |
낙성대(落星垈)-"별이 떨어진 터"라는 뜻으로 인헌공이 태어나던 날이 곳에 큰 별이 떨어졌기 때문에생긴 이름이다. 사후에 3층 사리석탑을세우고 그의 보국안민(輔國安民) 정신을흠모했다. 1973년 5월에 인헌공의 슬기와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나라의 안보(安保)의 표상으로 삼기 위해 봉천동 산 48번지에 장군의 출생지를 유적지로 조성, 1974년 6월 10일에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위치:서울 관악구 봉천동 228번지 *시설개요:안국사(安國祠 장군의 영정 봉안), 내삼문, 3층 석탑, 사적비, 안국문, 기념휘호석, 4궤석담장 등이 있다. 특히 3층 석탑(서울지방문화재 제4호)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탑에는 "姜邯贊落星垈"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
국사대사전(이홍직편) |
강씨 종사(宗史) |
1018∼1019년 현종9∼10 ◇1월 글안병 개경에 박도, 시은현에서 회군 ◇2월 귀주에서 글안군을 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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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찬(邯贊), 민첨(民瞻) 1019년 거란의 소배압이 다시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서북면행영도통사 강감찬이 상원수가 되고, 강민첨이 부원수가 되어 군사 20만 8천 명을 이끌고 흥화진에서 적을 무찌르고 이듬해 퇴각하는 적을 귀주(龜州)에서 글안군을 대파했다.(귀주대첩) 이때 적의 시체가 황화천에서 팔영령에 이르기까지 들을 덮었다고 한다. 3군을 이끌고 개선하자 현종은 친히 영파(지금의 의흥)역까지 나아가 근처에 비단으로 누각(綵棚)을 만들어 음악을 갖추고 장수와 병사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강감찬의 머리 우측에 금화팔지(여덟 가락의 금으로 된 꽃)를 꽂아주고 왼손으로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에 술잔을 들어 위로하였다. 이때 부원수 및 장수와 병사들에게도 이에 버금가는 상을 내렸다. 영파역의 이름을 "의를 일으켰다"는 뜻의 흥의역(興義驛)으로 고치고 이곳 역의 관리도 주현(州縣)의 관리와 같이 관대(冠帶)를 사용하게 하였다. 이 전쟁이 민족사에 찬란히 빛나는 귀주대첩이다. |
아버지 |
邯贊(감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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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經(행경) 사재경(司宰卿) 역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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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 |
군부인 강양 이씨(李氏) 아버지는 참일(參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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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
元(源)廣(원광) |
국사대사전(이홍직편) |
강씨 종사(宗史) |
1030년 출생 (추정) |
元(源)廣(원광) <인헌공의 손자> 추밀원사 증태자태사, 1047년(고려 문종 원년) 4월 문과급제, 1060년(문종 14) 어사대부 추밀원사, 1070년 경술 문종 24년에 어사대부 재임중 별세, 이듬해 증태자태사 |
1070년 출생(추정) 1070년 경술 문종 24 ◇6월 흥왕사에 성을 쌓음 |
公幹(공간) <인헌공의 증손> 소부감(小府監) |
1110년 출생(추정) |
臣謹(신근) <인헌공의 현손> 태자소사(太子小師) 역임 |
1150년 출생(추정) |
遇昌(우창) <인헌공의 6세> 도염서령(都染署令) 역임. |
1190년 출생(추정) |
克沖(극충) <인헌공의 7세> 문하시랑(門下侍郞) |
1230년 출생(추정) |
永年(영년) <인헌공 8세> 첨의정승(僉議政丞) 판선도사(判選都事)역임 |
1270년 출생(추정) |
渭卿(위경) <인헌공 9세> 판도판서(版圖判書) 역임 |
1310년 출생(추정) |
眞保(진보) <인헌공 10세> 공조전서(工曹典書) 역임 |
1350년 출생 |
揚(양) <인헌공 11세> 경기좌도 수군첨절제사로 재직중 1397년(태조 6) 휘하의 병선과 풍해도 병선을 이끌고 장산곶에서 노략질을 하고 달아나던 왜구를 서북면에서 격파했다. 조선조에서 가선대부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을 역임, 1417년 별세했다. 배위는 군부인 남원 윤씨(尹氏)이며 아버지는 전서 문하평리 황(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 수균(守均), 증조부는 합무지후 영찬(英贊), 외조부는 안주지사 신평 이요필(李堯弼) 묘는 시흥시 아방리 영회원 백호 제2언덕 네번 째 묘좌 언덕에 쌍분이며 비갈이 있다. |
1371년 출생 |
匪虎(비호) <인헌공 12세> 사정 |
1378년 출생 |
匪熊(비웅) <인헌공 12세> 산음현감 |
1384년 출생 |
匪龍(비룡) <인헌공 12세> 낭장 |
1390년 출생 |
匪이(비이) <인헌공 1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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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감찬 장군을 존경해여~~
저도요~
저두요~~~~ ^^ 강씨의 긍지가 되시는분~
인헌공파 30대 입니다. 그런데 인헌공파는 현재 우리나라에 1,000세대 미만으로 거주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더욱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으니, 관련자료를 소장하고 계신분은 자료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저 역시 30세손 입니다. 그리고...1.000여 세대???... 지금은 그 수준은 넘었구요...저희 일가들이 보믄...서울 쪽이랑...매년 시제나 사 금초때 광첩읍 장곡면 대현리에 종산 으로 모이시는 걸 보믄...다들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대개가 충남 지역 홍성 광천, 화양, 예산, 온양천안...그리고 저는 청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두 강감찬장군의 후손으로 존경해요~
인헌공파인데 몇대손인지는 모르겠어요
저도 인헌공파라고 들었는데 정확히 모르겠어요..ㅠ.ㅠ
저도 강감찬이라고햇는데 잘모르겟어요
저도강감찬이라고햇는데 잘모르겟어요
유일하게도 위인전 보면 당당하게 진주 강씨의 이름을 올리게 해주신 유명하신분.물론 훌륭한 분들도 더 많지요.강이신장군님도 하지면 저에겐 강감참 장군님이 가장 친근감이 느껴지네요.^*^
수원 팔달산에 있는 강감찬장군 동상을 철거하여 광교신도시로 이전한다고 지랄부르스를 치고! 옮기기로 결정했다는군요 . 참여한 사람들 누군지 ?
낙성대...우리의 조상님의 터였군요.
나는 파를 모르겠어요
좋은자료 고맙습니다 퍼갈께요^
강감찬 장군님의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_____()_____ 강 감찬 장군은 민족의 영웅 이십니다
대원수 별 다섯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