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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囊中之錐) 13
라혼은 설로촌(雪露村) 모석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상대로 근처에 전에 없던 꼬리가 달라붙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라혼은 그들의 처리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
‘단순한 이익을 위한 놈들이라면 곧 경계를 풀 테지만, 비밀 결사 비슷한 것이라면 위험 요소를 제거하려 들 텐데…. 안 좋아. 하지만 두고 보면 알겠지….’
라혼은 그들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아마 비밀스러운 자신들의 정체를 눈치챈,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정체를 캐기 위해 무리한 접근을 시도한 것은 무언가 조심스런 일이 진행 중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모든 일에 그렇게 대응하도록 훈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혼은 그들이 뭘 하건 무슨 짓을 벌이건 관심 없었다. 다만 자신의 부주의로 설화나 모석의 가족이 받을 위협이 주요 관심사였다. 최악의 경우 그 비밀 결사의 수장이 앞뒤 가리지 않고 ‘위험 요소 제거’라는 패를 빼들면 일은 아주 복잡하게 흐를 가능성이 컸다.
‘일이 터지면 설화만 데리고 그냥 튀어?’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 라혼은 모석의 가족에게 너무 큰 마음을 받았다. 그래서 라혼은 꿀맛 같았던 잠의 행복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동안 라혼은 무인(武人)으로서, 무사(武士)로서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의 일부를 전장(戰場)에 남겨두는 그런 무사의 마음을 말이다. 모든 것을 경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최악의 경우 모든 것이 적으로 돌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가장 효과적인 대응을 위한 몸과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무(武)의 극의(極意). 한마디로 라혼은 쓸데없는 행동을 한 덕분에 모든 것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피곤한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꼴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하루해가 저물어 노을이 지는 무렵 설로촌에 들어선 라혼의 마차는 최종 종착지인 모석의 집으로 들어갔다. 라혼이 수레에서 말을 풀어주자 말은 자신이 알아서 주인 없는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모석은 처음 라혼이 말을 다루는 모습에 놀랐고, 나중에는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사실 라혼은 [토크 애니멀Talk animal : 짐승과의 대화] 주문으로 말에게 [챰 몬스터Charm Monster : 몬스터 매혹] 주문을 걸어두었다. 그래서 사람이 고삐를 끌고 마구간에 넣지 않아도 말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 라혼은 마구간 옆 창고에서 사료로 쓰는 마초를 꺼내 말구유에 넣어준 다음 말의 머리를 쓰다듬고 툭툭 쳤다.
―푸릉….
말은 라혼의 손길이 좋은지 푸르릉거렸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눈은 그런 정체를 모를 사내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설로촌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설로촌의 마을 제사를 지내는 토지신(土地神)을 모시는 사당으로 스며들었다. 이젠 해가 완전히 떨어져 유난히 청명한 하늘에 별이 빛나고 밤은 깊어 해시(亥時 : 밤 9~11시??)가 다 될 무렵 인적 없는 사당 안으로 일단의 그림자가 들어섰다.
“커험~!”
그렇게 헛기침을 한 사내는 지나가는 듯이 중얼거렸다.
“니미럴, 돼지고기에 따땄한 술 한 잔이 그립구나.”
그리고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에 대꾸하는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돼지고기는 없지만 용고기는 대접해드리지요.”
그러자 어둠 속에서 ‘돼지고기’ 운운하던 사내가 태도를 바꾸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절도 있게 말했다. 사내의 말은 그가 속한 곳의 흑화였던 모양이었다.
“설로촌 향주(鄕主) 채집(採集), 사자(使者)님을 뵙습니다.”
“수고가 많으신데 이렇게 불러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수고랄 것까지야.”
“그럼 시작해볼까요?”
“예, 송구스럽게도 저희 향(鄕)의 인원은 변함없습니다. 향원들 중 특출한 재능을 가진 이도 없어 추천할 자도 없습니다. 다만 근간에 마을에 새로 들어온 자가 있사온데, 저희 마을에 사는 군졸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여인이 분명한 사자(使者)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말해보도록 하세요.”
채집은 사자가 그에 대해 관심을 갖자 의아해하면서도 자신이 아는 바를 소상히 말해주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갓난아기를 자기 마누라라고 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아기 서방이라 불리고 있으며, 이름은 ‘라혼(喇混)’이라고 했다. 그가 군졸의 집에 머무는 이유는 군졸의 아내에게 마침 아이가 있어 젖을 얻어먹이기 위해 그 집의 일을 돕고 있었다.
“그리고, 전에 무얼 하던 사람이었는지 자신을 거둬준 군졸에게 무예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무예?”
“예, 특별한 것은 없고, 그저 군사들이 쓰는 궁기술이나 마상 무예 같은 군사들이 쓰는 무예였습니다.”
“군사들이 쓰는 무예?”
사자는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끌고 다니는 마차의 말은 군마(軍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향주라는 직책을 가진 채집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무릎을 치며 그 사실을 고했다.
“그러고 보니 그자가 데리고 온 계집아기가 수인(獸人)이라는 말을 언뜻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수인? 자세히 말해보세요.”
“다름이 아니라, 군졸의 내자도 첫아이를 낳은 터라, 두 아기를 먹이기에는 젖이 충분치 않아 마을 아낙들의 젖을 빌리고 있는데 그네들 사이에서 아이의 눈동자가 가끔씩 묘안(猫眼)으로 바뀔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자는 설로촌 향주 채집이 말꼬리를 흐리자 그의 말을 재촉했다.
“향주에게 고견이 있다면 말해보세요.”
“그래서 저의 짧은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20여 년 전 멸문한 묘가(猫家)의 후손이 아닐까요?”
“상경묘가?”
사자는 그렇게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이내 결론을 내리고 채집에게 치하의 말을 했다.
“고맙습니다. 공과 같은 분이 인세(人世)를 이끄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좀더 많은 것을 알아보도록 하세요. 정립천지(正立天地)!”
“만인의 힘을 모아 하늘과 땅을 바로 세우세.”
***
설화가 이제 세 살이 되어 아장아장 걸어다닐 시기가 되자 라혼은 모석의 집에서 나왔다. 주인 없는 집에 객이 머무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기에 비어 있는 집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최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병장(兵長)인 모석이 집에 없는 시간이 많아지고 농사도 지을 수 없게 되자 라혼은 모석의 논을 소작하는 형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치안이 강화된 황진성을 드나들기 위해 모석의 도움으로 호패를 만들었다. 모석은 라혼에게 조련받은 역량으로 승진이 더욱 빨라져 장군(將軍)의 바로 및 반열인 참령(參領)의 지위에 올라 상경의 서문인 백호문 주변 치안을 책임지는 자리까지 올랐다. 보통 때라면 어마어마한 초고속 승진이었지만 근 3년 간 각지의 반란이 일어나 원주(元州) 전역에서 대대적인 징병이 이루어지다 보니 원주의 병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래서 원래 있던 경험 많은 병사들이 모두 두어 단계 승차해 새로 보충된 병사들 조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야흐로 천하는 난세(亂世)로 접어들 조짐이었다. 아니, 이미 난세였다.
라혼은 어느 순간 자신을 감시하던 눈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그동안 자신을 감시하던 설로촌 채집이란 사람이 마을 젊은이들을 이끌고 마을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마을을 떠나자 설로촌은 상당히 한산했다. 라혼은 모석이 구해준 호패로 확실해진 신분으로 그동안 떠난 사람들이 소작하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라혼은 설로촌 사람들이 소작하는 것을 합친 것보다 넓은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지만 작년에 거둬들인 곡식의 양은 그들의 다섯 배가 넘었다. 그것은 라혼이 볍씨에 생명력을 강화하는 마법 주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벼농사가 끝나면 땅을 쉬게 하던 다른 사람과 달리 라혼은 벼농사가 끝나면 보리를 심고, 보리농사가 끝나면 수확과 동시에 벼를 심었다.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 거의 그대로 방치하는 듯 보일 정도로 땅을 내버려두었다. 비료도 주지 않고 논이 거의 말라가는데도 땅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럼에도 생산량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많아 설로촌에선 라혼을 농왕(農王)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라혼이 농사짓는 방법은 평생 땅을 바라보고 산 농부들조차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그것이었다. 그들 입장에선 씨만 뿌려놓고 땅을 버려놓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백미로만 160섬이라고요?”
“그렇소.”
모석은 재작년부터 나라에서 받은 군인전을 소작 형식으로 라혼에게 빌려주었다. 이미 지위가 지위인지라 원래 대대로 붙여먹다시피 한 평군사 시절 땅보다 거의 열 배나 넓었지만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짓던 때에는 고작 백미 여덟 섬을 얻는 데 불과했다. 단순 계산하여 땅이 열 배로 늘었으니 80섬이 고작일 텐데, 라혼은 지금 백미로만 160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땅주인인 모석의 몫은 80섬이란 말이 나오게 되니 입이 쩍 벌어질 만도 했다. 거기다 이번에 보리를 심었으니….
“아니, 도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기에 그리 많이 거두실 수 있었습니까?”
“단지 볍씨에 기운을 북돋워주었을 뿐, 내가 한 일이란 물대기를 조절한 것뿐이오.”
“그럼 제가 준 땅 말고 다른 땅에서도 수확했을 텐데, 도대체 얼마를 거두어들인 겁니까?”
“백미 3000석.”
“사, 삼천 석!?”
모석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은 평년작에 그쳤는데 홀로 풍년 수확을 거둬 놀라게 하더니 흉년이라 말할 수 있는 올해엔 작년의 세 배의 소출을 올리자 모석의 눈에는 라혼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관엔 벼 2000석이라고 신고했으니 다른 곳에 가서는 입 조심하시오.”
“에?”
“나라를 속이는 짓은 나쁘나 속이지 않으면 설로촌 사람들이 죽어나가니 어쩔 수 없었소.”
모석은 라혼의 말을 이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벼를 백미로 탈곡하면 양은 거의 반으로 줄어든다. 즉 탈세를 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올해 농사가 평년작보다 못한 수준이라 그것도 많은 축에 속했다. 라혼이 홀로 대풍을 이뤄 곧이곧대로 신고하면 썩은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 관리들이 설로촌에 라혼이 거둔 곡식을 기준에서 세금을 먹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농민들은 파종할 씨앗까지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비록 조정의 녹을 먹는 모석이었지만, 아니 그랬기에 더 잘 아는 일이었다.
“에휴~!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그리고, 여기 소작료요.”
크게 한숨을 쉬던 모석은 라혼이 내민 400 냥의 은자를 받아들고 겸연쩍게 웃었다. 백미 한 섬이 은 다섯 냥이니, 160섬 중 80섬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허허허, 허 참!”
“내게 소작료를 제대로 받는 사람은 모형뿐이오. 관을 속였으나 땅주인도 속일 수밖에 없어서….”
“알았습니다. 내 입 꾹 다물죠. 그리고 보리를 심은 건 소작료를 받지 않겠습니다.”
“허, 수지맞았군.”
“내가 그 말 안했으면 큰일 날 뻔했군.”
―허허허허허….
―하하하하하….
모석과 라혼은 서로 얼굴을 보고 웃었다. 모석은 라혼을 무척 존경하고 따랐다. 모석이 보기에 매사 하는 행동이나 처신을 보면 라혼은 도덕적인 사람은 못 되고 항상 이(利)를 추구했지만 사람으로서의 도리는 버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니, 뭐가 그리 좋아요?”
“그럴 일이 있네.”
모석의 아내가 술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다가 묻자 모석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설화 서방, 그런데 괜찮은 거유?”
“뭘 말씀입니까?”
“농사에는 관심 없고, 장사하기 바빴으니 올해 농사 망친 거 아니우?”
“아닙니다. 그럭저럭 거둬들었으니 걱정 마십시오.”
“거, 여편네 왜? 소작료 못 받을까 봐?”
모석의 처는 남편 모석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무안한 듯 중얼거렸다.
“아니, 난 그저 흉년이라…. 설화도 이제 다섯 살인데….”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모석은 부인이 밖으로 나가자 물었다.
“장사? 스승님, 장사도 하십니까?”
“그저 소소하게 하고 있을 뿐이오.”
작년 겨울 원단(元旦)이 가까워올 무렵 설화의 설빔을 구하기 위해 상경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변방사역(邊方四域) 중 하나인 대륙 북부 흑막(黑漠)에 ‘갱’이라는 무서운 자연 재해 때문에 피해가 막심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역시 천하의 중심인 상경은 아무리 먼 변방의 일이라도 빠르게 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라혼이 주목한 것은 ‘갱’이라는 대초원의 혹한(酷寒) 때문에 길이 끓어져 그곳에 중심이자 천하 7대 성시 중 하나인 제평(齊平)에 생필품이 태부족이란 사실이었다. 처음 가졌던 직업이 상인(商人)이었던 라혼은 거기서 어마어마한 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라혼에게 금전적인 욕심은 없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라혼에게 장사를 시작할 계기를 만들어준 건 버려지는 차(茶)였다. 한 상인이 중급 차를 대량으로 매입해 싸게 박리다매(薄利多賣)를 하려다 중급 차가 사실은 하급 차라는 사실이 드러나 팔지 못하고 창고에 1년을 묵혀두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내 쉰 냄새가 나기시작하며 변질되는 기미를 보이자 그것들을 천호(天湖)에 버리는 것을 라혼이 본 것이었다.
제평이 있는 흑막은 대륙에서 가장 넓은 지방이었지만 농사를 짓지 않고 유목(遊牧)을 했다. 당연한 결과로, 육류 중심의 식생활을 했다. 잡식성인 사람이 채소를 먹지 않고 고기만 먹으니 탈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채소는 채금(菜金)이라 부를 정도로 비쌌다. 아니, 구하기조차 힘들다는 말이 맞았다. 그러나 그 채소를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차(茶)였다. 차(茶)는 보관이 쉬운 식품이었다. 게다가 서늘하고 건조한 흑막 같은 곳에서는 보관 기간이 더욱 늘었기에 차는 제평, 아니 흑막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게다가 추운 날씨에는 누구나 따듯한 것을 먹고 싶어 하고, 차는 가장 손쉽게 만드는 따뜻한 음료였다. 당연히 차의 소비는 급격히 늘었고, 흑막에서 가장 필요한 생필품이 떨어졌는데 혹한은 차의 소비를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제평으로 가는 길을 끓어놓았기에 문제가 컸다. 그러나 차를 가지고 그곳으로 가려는 상인이 없었다. 차는 생필품이고 소금과 같이 아예 썩지 않는 물건이 아니라 오래 보관하면 상하는 물건인지라 관(官)에서 전매하진 않지만 그곳에서만큼은 달랐다. 인위적으로 찻값을 비싸게 받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해놓아 차를 가져가도 목숨을 걸 만큼의 이문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인혼(商人魂)을 가진 라혼은 이러한 사실을 안 이상 팔 수 있는 멀쩡한(?)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까워 계약금만 치르고 그것을 전부 인수했다. 하급 차를 버린 주인은 1년 간 그것을 팔지도 못하고 묵혀두었다가 썩어 들어가자 그제야 마음을 비우고 차를 처리할 결심이 섰는데 헐값이지만 그것을 가져간다는 작자가 나서자 곧 창고를 비워주는 조건으로 차를 라혼에게 계약금만 받은 채 헐값에 넘겼다. 라혼은 그것을 모두 이공간 에텔 스페이스에 넣고 제평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그리고 하급 차를 제평 성주가 제시한, 약간 값이 오른 공시가(公示價)에 금세 팔 수 있었다. 차를 판다는 소문이 돌자 차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라혼이 머물던 객잔에 사람들이 서로 사겠다고 몰려들어 하루 만에 전부 팔아치울 수가 있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이, 최하급의 묵은 차를 품질이 좋다며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 속사정을 알고 보니 그곳에선 차를 몇 년씩 묵혀두었다 마시다 보니 조금 쉰 건 문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묵은 차맛이 기가 막히게 좋아 일부러 묵혀먹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혼이 가져온 차는 호반의 도시라 비교적 습한 상경의 기후에 통풍이 잘된 창고에서 알맞게 숙성되어 이곳 사람들의 입맛에 딱 맞는 차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인연을 트자 다음부터는 쉬웠다. 상경이나 중경에서는 팔리지 않아 창고에 쌓인 하급 차를 헐값에 사서 애초에 찻값이 싸게 되어 있어 하급 차만 주로 마시던 제평에 가져다 파는 것을 반복하자 비교적 큰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날이 풀려 맹위를 떨치던 혹한이 물러나자 상로(商路)가 열려 차를 바리바리 싸고 온 상인들이 제평에 도착하고서야 라혼은 차 사업을 접었다. 어차피 이제 수지를 맞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상경과 중경의 차상(茶商)들이 차를 헐값에 넘긴 건 어차피 팔리지 않는데다 창고만 차지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시 하급 차를 가져다 팔 이유가 없었다. 즉 지속적인 공급처가 없어 자연스레 사업을 접게 된 것이었다. 라혼이 가져다 판 차는 어마어마했지만 거대한 제평에 안정적인 공급을 하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러나 날이 풀리면 제평으로 차를 구하려고 흑막(黑漠) 전역에서 사람들이 올 것이 분명하기에 상인들이 제평에 가져온 차 또한 필요했다. 그리고 라혼은 장사하는 데 맛들려 요새는 상경과 중경 근처에서 생산되는 신선한 채소를 제평에 팔고 있었다. 라혼의 말처럼 소소한 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모석에게 말해보았자 믿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에 대해선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말을 꺼내 모석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호패가 있어서 신분이 확실해진 것은 좋은데, 이것저것 잡다한 부역이 생겨 피곤하니 힘 좀 써주시오.”
“예? 하지만 아무리 저라도 부역을 빼는 것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그러자면 돈이 필요한지라….”
라혼은 모석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것을 관리하는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라혼이 농사를 지어주어 살림에 걱정이 없는 모석은 재물에는 별 욕심이 없어 청렴했다. 그리고 그가 속한 금군(禁軍)의 장(長) 또한 강직한 인물이었기에 다른 곳에 비해 깨끗한 인사가 이루어졌다. 즉, 모석은 뇌물을 써본 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뇌물을 쓰란 이야기가 아니라 일을 하나 만들라는 것이오. 일이 힘든 것은 상관없지만 먼 곳으로 불려가 설화를 돌보지 못할까 그러는 것이니, 가깝고 마음 편한 곳에서 일하고 싶은 것뿐이오.”
“흐음! 그럴 것이면 차라리 출사를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출사?”
“스승님의 역량이면 차고도 넘치실 텐데?”
“글쎄?”
모석은 고개를 내젓는 라혼을 보고 아차 하는 생각을 했다. 설화가 묘가의 자손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역적의 자식을 데리고 몸을 숨기려는 그에게 출사(出仕)는 어려운 일이 분명했다. 그래서 급히 말을 바꾸었다.
“출사라 해도 별것 아닙니다. 제가 권하는 것은 둔전병입니다.”
“둔전병이면 농사를 짓는 병사가 아니오? 이미 사라진 병과로 알고 있는데?”
“그냥 저희들끼리 부르는 호칭입니다. 일종의 예비병으로 사흘에 한 번 훈련만 받으시면 됩니다. 그것은 내 소관이니, 그저 장부에 이름만 올려놓으면 됩니다. 원래는 안 되는 것이지만, 스승님의 역량에 군사들이 받는 훈련은 그저 시간만 뺏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이거 내가 청렴한 참령 하나 버려놓았군.”
“그러고 보니 오늘 주신 소작료라는 것이 뇌물이 되어버렸습니다그려!”
―아하하하하….
그때 방문이 살짝 열리면서 소동(小童) 하나가 머리를 내놓으며 말했다.
“아부지….”
“들어오너라!”
아버지 모석의 허락이 떨어지자 소동 모초는 냉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라혼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백부님.”
“그래.”
모석은 비록 이제 다섯 살 난 소동이지만 의젓하게 인사하자 아들을 대견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방문이 열리고 너무 깜찍해서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의 소녀가 머리만 빠끔 내밀더니 라혼이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어? 서방님!”
소녀는 바로 설화였다. 라혼은 처음 저 소리가 설화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놀랐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왔다. 그전까지는 말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로 라혼이라고 이름을 부르게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서방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을 알고 보니 설로촌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는 설화에게 마을 아낙이 서방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된다며 놀리는 소릴 한 모양이었다. 설화는 라혼을 발견하더니 쪼르르 달려왔다. 당장 안기고 싶은데, 그러지는 못하고 라혼의 얼굴을 보며 헤 웃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아이구! 형수님은 스승님이 가장 좋은 모양이오.”
“왜? 마누라에게 사랑받는 것이 부럽소.”
“부럽소. 무척!”
어른들의 농을 알아들을 나이가 아닌 설화는 얼굴을 붉힐 뿐이고, 모초는 자꾸 아버지 등 뒤로 숨었다. 그런 모초를 보고 라혼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설화에게 베풀어두었던 벌모세수(伐毛洗髓)의 효과로 설화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총명하고 힘도 세었다. 그래서 설로촌의 또래 아이들은 설화가 거의 이끌다시피 했는데 그중 모초는 설화의 밥이나 다름없었다. 아마도 모초는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몸을 피했는데, 설화가 이곳까지 쫓아오자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아버지 모석의 넓은 등 뒤로 숨는 것이리라…. 그러나 모초는 이미 설화의 관심 밖에 있었다.
라혼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모석과 회포를 풀고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라혼은 하루 종일 동네가 좁다 하며 뛰어다니느라 먼지투성이인 설화를 뜨거운 물로 씻기고 자신도 목욕을 했다. 방금 목욕을 끝낸 설화의 발그레한 볼이 귀여워 라혼은 가만히 설화의 볼을 꼬집었다.
“아파!”
“우리 공주님은 아무리 봐도 귀엽구나!”
“아잉!”
라혼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설화가 애교를 부리며 품으로 파고들자 설화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설화는 누구 집 아들 누구가 누구 집 딸 누구를 좋아하는 것 같다느니 누가 자신에게 까불어서 때려줬다느니 하는 이야기와 그때그때 떠오른 질문을 했고, 라혼은 설화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며 설화의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라혼은 옛날이야기나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렇게 설화를 재우고 나서 라혼도 그 옆에서 잠을 청했다.
***
천하가 술렁대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천하 도처에서 일던 소요는 이제 반란이 되어 대륙을 들불처럼 휩쓸었다. 그러던 차에 중외오성 중 앙신성(央信省)이 수인 천하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앙신성주(央信省主) 거정(巨政)이란 자가 앙신성 내에 있는 친(親) 수인 세력을 일소하고 스스로 만인왕(萬人王)이라 칭왕(稱王)하며 국호를 ‘보(保)’라 했다.
보(保)의 건국으로 천하는 완전한 난세의 수렁 속으로 접어들었다. 천하가 수인들에 의해 하나로 통일된 지 450여 년이 흐르면서 기본적인 치안을 위한 군대 외에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 않던 천하는 보(保)가 건국되면서 50만 대군을 보유하자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경(上京) 용궁(龍宮)에서는 용황(龍皇)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용황을 대신해야 할 호제(虎帝)는 그 세(勢)가 약했다. 그러나 인세천하(人世天下)를 외치며 일어선 보(保)의 존재는 천하를 지배하는 수인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에 중원십일주(中原十一州)의 진골십가(眞骨十家)의 제(帝)들은 앙신성과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갑주(甲州) 서제(鼠帝)를 정인대장군(征人大將軍)으로 삼아 30만 정병으로 앙신성의 반역자들을 토벌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무리한 출병은 각 제(帝)의 세력을 약화시켰고, 천하에서 약속이나 한 듯 정립천하(正立天下)를 외치는 무리들이 수인들의 천하에 반기를 들며 봉기를 주도하고, 무림도 수인가(獸人家)에 적대하는 인세(人世)라는 세력이 기세를 드높이고 있었다. 바야흐로 난세 중 난세(亂世之亂世)가 도래했다.
봄기운이 완연한 상경(上京). 천하가 난세에 접어들었다지만 천하의 중심인 원주(元州) 황진성은 비교적 평온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각지에서 파발이 바쁘게 성문을 지나다녔으나 지금은 한산했다. 천하가 뒤숭숭했지만 상경의 시전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전보다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혼은 수레를 천천히 서문(西門)인 백호문(白虎門)으로 몰았다. 성문에는 드나드는 사람들과 짐을 검문하느라 나가는 쪽도 또 들어오는 쪽도 줄이 길었다. 라혼은 수레를 한쪽에 두고 검문이 한창인 금군에게 걸어갔다.
“안녕하시오.”
“어서 오시오, 라혼 사부님.”
“모 참령은?”
“위에 계시오. 지나가려거든 내 편의를 봐줄 수 있습니다만.”
라혼은 참군의 은근한 말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요. 그러다가 문제 생기면 나나 자네나 골치 아파지니까 내 순서가 되면 물품 확인하시고 성 밖으로 내보내주시오.”
“알았소이다. 라혼 사부님의 말은 참으로 명마입니다. 어찌 주인이 없어도 자기가 알아서 움직이는지…. 매번 보면서도 신기하오.”
“그럼 부탁하리다.”
라혼은 그렇게 말하고 성문 위로 오르는 계단 쪽으로 갔다. 주변에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라혼은 모석이 있는 성문 위로 올랐다.
“스승님, 어서 오십시오.”
모석이 경갑주 차림으로 라혼을 반겼다.
“모 참령, 오늘따라 검문이 심한데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어느 미친놈인지 대원부사를 도모하려다 참수되었는데, 지금 그 도망친 잔당을 쫓는 중이라오.”
“그런 일이 있었소?”
라혼은 모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이번에 또 징집을 실시한다는데 사실이오?”
“맞습니다. 아마도 그리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나는 어찌 되는 것이오?”
“장부상 이미 병졸이니 스승님은 별 상관없을 겁니다.”
라혼은 모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마을엔 젊은 사람이 자신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계속 이렇게 지내다 보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어차피 농사짓던 것을 포기했으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모석의 밑에 있는 것이 나았다.
“내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무슨?”
“모 참령 밑의 금군이 되려면 어찌해야 하오?”
“아니, 출사를 하시겠단 겁니까?”
“출사랄 것까지야….”
모석은 라혼의 의중을 알 수 없었지만 방법을 말해주었다.
“스승님은 이미 군졸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힘을 쓰면 내 휘하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가능합니다.”
“그럼 군복을 준비해야 되겠군요.”
“그것도 제가 챙겨드릴 테니 그저 기다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라혼은 모석과 헤어져 설로촌으로 돌아왔다. 라혼이 군졸이 되기로 한 이유는 설화도 이제 열한 살이고, 소작하던 것도 각종 명목의 세금이 너무 많아 포기했기에 적당한 직업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때를 보아 거처도 성안으로 옮길 계획이었다. 라혼은 집으로 돌아오자 말을 풀어주고 수레에서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찬거리하고 서책 몇 권이 전부였다. 라혼은 따뜻한 봄 햇살이 내리쬐는 훈훈한 느낌이 좋아, 마루에 누워 책을 펼쳐들었다.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보리 추수와 볍씨 파종을 하느라 한창 바쁠 시기였지만 지금은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빙기옥골(氷肌玉骨), 침어낙안(侵魚落雁). 벌써부터 그러한 조짐이 보이는 설화는 오늘 친구들과 함께 소풍 겸 봄나물을 캐기 위해 산에 올랐다.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의 다른 아이들은 설화의 하얀 우윳빛 살결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래서 시집갈 때가 된 처자들은 부러운 눈으로 설화를 바라보며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문득 이제 곧 시집가게 되는 숙연이가 은근한 어투로 물었다.
“설화야!”
“왜, 숙연 언니?”
“너 서방님이랑 어떻게 자니?”
“잠? 그야 서방님 품에서 자지.”
“어머머머머….”
“몰라!”
처자들은 설화의 말에 자기들끼리 호들갑을 떨며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하다가 다시 설화에게 물었다.
“좀더, 자세히 말해줘! 여기서 유부녀는 너뿐이잖아!”
“그야, 해가 지기 전까지 글공부하다가, 해가 지면….”
“꼴깍, 해가 지면?”
“목욕을 한 다음 잠옷으로 갈아입고 서방님이랑 이야기를 나누지.”
“아이, 뭐야! 그 다음엔?”
처녀들은 설화 주변에 모여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뭐야? 언니들….”
“설화야, 그러지 말고 얘기해줘라!”
“첫날밤 이야기 말야?”
“어머, 애두 참!”
설화는 그제야 언니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뭔지 깨달았다.
“미안하지만, 나도 아직 첫날밤은 안 치렀어!”
“에? 정말!”
“그래!”
“에이, 뭐야!”
“니네 서방님 참 대단하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아니고, 이렇게 예쁜 설화를 아직까지 독수공방하게 하다니….”
“독수공방은 아니지, 서방님 품에서 잔다잖아.”
처녀들은 아직 열한 살의 설화를 앞에 두고 저마다 입방아 찍기에 바빴다.
“뭐야! 우리 서방님 욕하면 가만 안 둬!”
“알았어, 지지배야. 지 서방님 챙기기는….”
“지 백일잔치 때도 자기 서방님 옷자락을 잡았다잖아.”
“맞아! 나도 엄마한테 그 얘기 들었어.”
“뭐니!”
―까르르르르르….
결국 설화가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설화는 다른 처자들과 떨어져서 나물을 캤다.
“우리 서방님, 얼마나 멋있는데? 흥!”
그런 설화를 훔쳐보는 눈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여인들이 가마를 메고 그 앞에 공손한 태도로 검은 무복의 보기 드문 미모의 여무사들이 시립해 있었다.
“저 아이냐?”
“그렇습니다. 궁주님!”
“정말 예쁘게 생겼구나. 어린 나이인데도 저렇게 미색이 엿보이니, 자라서는 천지에 향기를 가득 채우겠구나.”
“알아본 바로는, 저 아이에게 남편이란 자가 있으나 별문제는 안 될 겁니다.”
“저 아이를 데려오너라! 근골이 보기와 같이 뛰어나다면 내 저 아이를 제자로 삼으리.”
“명 받들겠습니다.”
궁주의 명이 떨어지자 몇 명의 여무사가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녀들은 깜찍하게 깨물어주고 싶은 나물 캐는 소녀 앞에 섰다.
설화는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가 검은 무복에 검을 멘 여무사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경계하며 소리쳤다.
“누, 누구세요?”
그러자 그녀들 중 지위가 가장 높아 보이는 여인이 앞으로 나서더니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야, 우리는 널 해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인천궁의 제자들이다.”
“그런데요?”
“우리는 너를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한단다. 우리를 따라가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우리를 따라가자!”
설화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도망갈 구멍을 찾았다. 그러나 저 여자들은 완벽하게 도망갈 구멍을 차단하고 있었다. 서방님에게 약간의 무예를 배웠지만, 실제로 써먹어본 적이 없어 싸우는 것은 자신 없었지만 기습을 하여 길을 만들면 도망은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말이 없느냐! 너는 여인천궁의 궁주님의 제자가 될 것인데….”
“싫어요!”
―챙~!
“이얏!”
설화는 손에 들고 있던 호미를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주절거리는 여무사에게 던지고는 신법(身法)을 전개하는 한편 길을 막고 있는 다른 여인 무사에게 발길질을 했다. 갑작스런 소녀의 기습에 놀라 검을 빼들어 날아오는 호미를 쳐냈지만, 호미에 실린 경력(經力)이 상당해 호구가 찢어질 듯 충격을 받아 잠시 주춤했다.
“이런….”
―파바바바박….
“연환퇴?”
여무사는 자신이 데려온 부하를 허공에 띄운 채 두 발을 연속으로 쳐내는 소녀를 보고 일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저런 무공을 가지고 있으리라곤 상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연환퇴(連環腿)의 위력에 궁에서도 일류에 속하는 자신의 부하가 밀리는 모습을 보자 즉시 몸을 날려 금나수(擒拿手)를 전개했다.
설화는 목덜미가 싸해지는 느낌이 오자 허공에서 그대로 허리를 꺾으며 옥주(玉柱)를 크게 휘둘렀다.
“어림없다!”
“끼야!”
소녀의 옥봉원앙각(玉鳳鴛鴦脚)을 여유 있게 흘리며 마혈(痲血)을 제압했다. 여인은 마혈이 제압되어 쓰러진, 너무도 아름다운 소녀를 보며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아직 어린 나이에 이 정도의 무공 수위라니…. 어느 은거한 고인의 제자를 잘못 건드린 건가?”
“묘연아! 어찌 된 것이냐?”
어느새 가까이 접근한 궁주가 가마 위에서 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 아이가 보여준 몇 수는 고인으로부터 사사한 것이 분명해 보이지 않느냐?”
“….”
“되었다. 무공의 기초가 잡혀 있다면 그만큼 가르치기도 쉬운 법. 아이를 이리 데리고 오너라!”
“존명!”
여인천궁(女人天宮)의 여무사들이 소녀를 들어 가마에 실고 자리를 떠날 때 그 모습이 나무를 하고 산을 내려가던 모초의 눈에 잡혔다.
“어? 설화가 왜?”
모초는 그 자리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그대로 산 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
마을로 정신없이 뛰던 모초는 설화네 집 앞에 라혼 백부의 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것을 보고 주저 없이 설화네 집으로 들어갔다.
“백, 백부님. 큰일났어요. 설화가, 설화가….”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라혼은 한가로이 오수(午睡)를 청하다 다급한 모초의 말에 잠이 깨며 물었다.
“이상한 여자들이 와서는 설화를 데려가버렸어요.”
“언제? 어디서?”
“저기 개골산에서 나물 캐다가….”
라혼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려 대문 밖을 나서며 설화의 위치를 찾았다. 드라시안 하트를 가진 설화 특유의 기운(氣運)을 찾아내고 즉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백부… 어!?”
모초는 라혼을 따라나섰다가 라혼의 종적을 놓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
가마 안. 한 궁장 여인이 무릎 위에 천상의 천사 같은 하얀 소녀의 전신을 어루만지며 경악성을 터뜨렸다.
“이, 이럴 수가! 빙기옥골지체인 것은 짐작했지만 이 기운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천년 내공과 버금가는 힘이라니….”
여인은 소녀의 맥을 짚어보고, 관상을 확인하더니 교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호호호….
“천미지상에 천향지기의 열 제왕을 거느릴 여제의 상이로다. 가히 여인천궁의 후계자감이 아닌가!”
여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인천궁은 여인 천하를 꿈꾸는 여인들만의 단체로, 무림의 신비일세(神秘一勢)였다. 이 여인천궁의 지존무공(至尊武功)인 옥녀심공(玉女心功)은 빙기옥골지체(氷肌玉骨之體)라 불리는 특이한 체질의 여인만이 대성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그러나 빙기옥골지체를 타고난 여인이 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당금 무림은 그야말로 난세(亂世). 인세(人世)의 출현으로 그들의 수인가들에 대한 공격은 그동안 무림의 주류 세력으로 무림 천하를 지배하던 수인가들에게 타격을 주고 있었다. 그 틈을 틈타 십삼인가의 세력들이 저마다 발호하는 가운데 빙기옥골지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여인천궁에 있어 가뭄의 단비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난세를 틈타 신비일세에서 벗어나 당당히 천하에 이름을 내걸 기회가 온 것이다.
“이제 든든한 후계자가 생겼으니 수년 내에 천하가 여인천궁이 있음을 알게 되리라. 아가야! 너는 여인천궁의 조사와 전대 궁주들이 꿈꾸던 여인 천하의 여제가 되리라!”
“여제로 만드는 것은 좋은데, 남편의 허락을 받고 데려가야지….”
“누구냐!”
―쾅!
여인천궁의 궁주(宮主) 섬섬옥수(纖纖玉手) 상유란(桑楡蘭)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옥녀섬옥수(玉女纖玉手)를 쳐냈다. 라혼은 궁장 미부가 앞뒤 재보지도 않고 날리는 무시할 수 없는 경력이 깃든 장력을 [실드Shield]주문으로 방어하며 그녀의 가는 손목을 잡아채갔다.
“감히!”
호위하는 여인천궁의 고수들은 물론이고 절정 고수인 자신조차 감지하지 못한 사이, 접근해 귓가에 속삭이는 사내의 목소리에 놀라 옥녀심공상의 옥녀진기(玉女眞氣)를 머금은 옥녀섬옥수로 쳐냈는데 그것을 간단히 무력화시킨 괴인이 자신의 손목을 잡아오자 상유란은 반사적으로 손목을 비틀어 그의 손을 쳐내려 했다. 그러나 사내의 손에서 뻗어나온 강력한 경력은 상유란의 손에 실린 힘을 무산시키고 원래 목적인 완맥(緩脈)을 잡는 데 성공했다. 라혼은 궁장 미부의 완맥을 잡는 동시에 그녀의 무릎 위에 있는 설화의 허리를 잡고 그대로 가마 위에서 뛰어내렸다.
“웬놈이냐!”
설명이 길었지만, 일은 순식간에 벌어져 그제야 궁주를 호위하던 무사들이 반응했지만 라혼은 이미 그녀들의 공격 범위를 훨씬 벗어나 있었다. 라혼은 일단 설화의 마혈을 풀고 기절 상태나 잠든 상태 또는 혼란스런 상태를 깨우는 [웨이크 업Wake up]주문으로 설화를 깨웠다.
“웨이크 업(Wake up)!”
“음, 으음….”
기절 상태에서 회복한 설화는 든든하기 그지없는 서방님의 팔이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것을 보자 안심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서방님!”
“괜찮으냐?”
“예!”
라혼은 설화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나자 자신의 주위를 에워싸며 포위하고 있는 여인들을 무시하고 아직까지 완맥을 제압하고 있는 궁장 미녀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
“궁주님을 내려놔라!”
“그래, 내가 너희들을 잊고 있었어. 플레시 투 스톤(Flesh to stone)!”
[플레시 투 스톤Flesh to stone : 석화(石化)] 주문으로 궁주라 불린 궁장 미녀를 돌로 만들어놓고 그대로 몸을 띄워 천붕각(天崩脚)으로 전면의 여무사를 내리찍었다.
“옥녀거정(玉女擧鼎)!”
검선녀(劍仙女) 주묘연(朱妙蓮)은 갑자기 나타나 절정 고수인 궁주를 제압하고 여인천궁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는 소녀를 구해간 사내의 갑작스런 공세에 검을 올려쳐 막는 옥녀거정 초식으로 막아섰다.
―챙강! 퍽!
그러나 괴인의 천붕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리가 검에 닿기도 전에 엄청난 경력이 먼저 쇄도해 검이 부러짐과 동시에 주묘연을 차버렸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천붕각으로 여인 무사를 제압하고 그 기세를 몰아 백보유성격(百步流星格)을 시전했다.
―퍼버버버버버벅….
―끼야!
―챙강~!
100보를 격(隔)하고 내치는 권력(拳力)에 수십 명의 여무사들은 별 힘을 쓰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백보유성격은 허공을 격하고 물결치듯 휩쓸어가는 아라한 격투술의 충격(衝激)을 응용한 라혼의 독문수법이었다.
“엄살 피우지 말고, 전부 무릎 꿇어!”
“감히!”
―퍽!
라혼은 반발하려는 이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듯한 여인에게 호포(虎砲)를 먹였다. 호포 또한 허공을 격한 일종의 권격(拳格)으로 검부조사 조식에게 얻어 배운 기술이었다.
“크윽!”
라혼은 호포에 얻어맞고도 눈빛이 죽지 않는 그녀를 보자 더 이상 힘으로 그녀를 누르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라혼은 석상(石像)이 되어버린 이들의 주인의 머리 위에 슬며시 손을 올려놓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명(命)했다.
“꿇어!”
“….”
검선자 주묘연은 괴인이, 아니 저 소녀의 남편이란 자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채고 그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단, 일수(一手)로 자신과 궁주를 호위하는 여인천궁의 일류 고수(一流高手)를 제압한 상대였다. 만약 저자가 궁주를 해하고 자신들까지 살인멸구를 시키려 한다면 그것을 피해 도망이라도 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만에 하나 궁에 알리지도 않고 비밀리에 나온 궁주가 여기서 변을 당한다면 여인천궁의 궁주의 실종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게 될지 모른다.
“너희들은 뭐 하는 것들이냐?”
“서방님, 이 아줌마들 여인천궁이란 데서 왔대요!”
라혼의 첫 번째 물음에 잔뜩 상기(上氣)된 얼굴의 설화가 깜찍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라혼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설화의 눈으로 보기에, 서방님이 손을 휘휘 저었을 뿐인데 하얀 빛무리에 부딪혀 무서운 아줌마(?)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설화의 맑고 투명한 큰 눈을 보며 물었다.
“설화가 그걸 알아?”
“저 아줌마가 그랬어요.”
“이봐, 아줌마!”
나이 차이가 많은 부부―적어도 400년…―에 의해 아줌마가 되어버린 방년 23세의 검선녀 주묘연은 고운 아미를 치켜뜨며 더욱 힘주어 괴물 같은 자를 노려보았다.
“너희들의 목적을 털어놓아야겠다.”
“흥!”
그녀의 냉소적인 코웃음에 라혼은 미소를 머금으며 궁주라는 여인의 석상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다급해진 그녀는 자신들의 목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 설화를 여인천궁의 후계자로 삼으시겠다!”
“그렇다.”
“설화야! 그렇다는데?”
“그럼 서방님은?”
라혼은 설화가 되물어오자 다시 그중에서 제일 센 아줌마(?)에게 눈길을 주며 대답을 요구했다. 주묘연은 무릎을 꿇은 채 신경질적인 어투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흥! 여인천궁은 여인들만의 성지다. 감히 사내가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나는 서방님하고 같이 살 거야.”
라혼은 다시 한 가지 질문을 더 했다.
“우리 설화가 여인천궁의 후계자가 되면, 아니 궁주가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일공이다.”
“뭐?”
“궁주의 첫 번째 남편이 된다.”
여인천궁의 여인들도 사람이다. 수도하는 비구니나 도고가 아닌 이상 욕망을 참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인천궁의 여인들 모두 요부(妖婦)처럼 아무 남자나 상대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여인도 없지는 않으나 남자가 있는 여인은 궁(宮) 밖에 남자를 두고 사는 경우가 있었다. 남자를 금지하는 궁규(宮規)가 있기는 하지만, 역대 궁주들 가운데 일공(一公)이라 하여 남자를 두는 경우가 종종 있어 이미 사문화된 궁규였다. 다만 여인 상위의 여인천궁이기에 여러 남자를 거느린(?) 여인도 있었다.
라혼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플레시 투 스톤Flesh to stone] 주문에 걸려 돌이 되어 있는 여인천궁의 궁주를 풀어주었다.
“스톤 투 플레시(Stone to flesh)!”
―화악~!
라혼이 [스톤 투 플레시Stone to flesh : 석화 마법 해제] 주문으로 돌의 형상이 되어버린 궁주의 마법을 푸는 모습을 여인천궁의 여무사들은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설화 또한 서방님의 재주에 놀라며 눈빛을 반짝였다.
“으음, 음! 너희들 게서 뭘 하는 것이야!”
석화 마법에서 풀려난 여인천궁주 상유란은 아직까지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바로 곁에 있는 헌헌장부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라혼은 자신의 외모가 너무 눈에 띄어 사실 그동안 [컨트롤 챰Control Charm : 매력 조절] 주문으로 자신을 감추고 있었다. [컨트롤 챰Control Charm] 주문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호감을 가지게 하면서도 그리 매력을 느끼게 하지 않게 했다. 즉 잘생겼지만 그것이 잘생겼다고 느껴지지 않게 하는 주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조 드래곤 하트인 드라시안 하트를 가지고 있는 설화나 옥녀심공(玉女心功) 같은 심후(深厚)한 공력을 익힌 상유란 같은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때문에 상유란은 약간의 위화감이 없지 않지만 라혼의 본모습을 보고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느끼며 내심 당황했다.
“너의 저, 정체가 무엇이냐?”
“네가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소녀의 남편 되는 사람이다.”
“…?”
“네게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다.”
“….”
라혼은 빨개진 얼굴로 계속 침묵을 고수하는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설화를 여인천궁의 후계자로 삼는 것은 좋은데, 가르치려거든 내 집에서 가르치시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려던 섬섬옥수 상유란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보기 드문 아니, 이자는 천고의 고수. 이런 자가 여인천궁을 도와준다면, 게다가 이 아이의 후견인이니 우리로선 손해날 일이 없지 않은가?’
말문을 닫고 잠시 침묵하며 염두를 굴리던 상유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뜻대로 하겠다. 대신 지금은 그 아이를 궁으로 데려가야겠다. 여인천궁의 후계자로서 조사전(祖師殿)에 구배지례를 올린 후 아이를 다시 데려오겠다.”
“좋아!”
“서방님!”
라혼은 자신의 소매를 잡아끄는 설화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설화야, 너도 이제 배워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내가 가르쳐도 되지만 나는 엄하게 너를 가르칠 수 없다. 그러니 널 가르칠 스승이 있어야 하는데 네게 스승 운이 있는 것 같구나. 척 보니 부자인 것 같은데 그걸 네게 주겠다니, 안 가면 손해다. 잠시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거라. 그곳에서 일이 끝나면 날 부르거라! 날 부르는 법을 일러줄 테니….”
라혼은 그 자리에서 설화에게 [텔레파시 메시지Telepathy Message] 주문을 가르쳐주었다. 이미 드라시안 하트로 인해 마나 제어가 뛰어난 설화였기에 처음부터 간단한 의사 전달은 쉽게 해냈다. 라혼은 신기한 듯 계속 [텔레파시 메시지Telepathy Message]를 날리는 설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인천궁주라는 궁장 미부에게 물었다.
“얼마나 걸리오?”
“100일 안에 다시 그 아이를 데려오겠어요.”
“아니, 한 달이오. 그리고 데려올 필요 없소. 한 달 후 내가 직접 설화를 데리러 가겠소.”
“그럼 궁의 제자를 남겨드리지요. 묘연아, 네가 남거라!”
“옛, 궁주!”
이미 자기 편이라 생각했는지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진 궁주는 직접 찾아오겠다는 라혼의 말에 길잡이로 쓸 검선자 주묘연에게 남으라는 명을 내렸다. 설화는 서방님과 잠시라도 떨어지는 것을 무척 불안해했지만 [텔레파시 메시지Telepathy Message] 주문은 그것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었다.
“내 이름은 라혼이오.”
“본녀는 여인천궁의 궁주 상유란이라 해요.”
“우리 설화를 잘 부탁하오.”
“그럼.”
라혼은 상승신법(上承身法)을 전개해 급격히 멀어지는 궁주 상유란의 가느다란 팔에 안긴 설화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정(情)이란 이렇게 묘한 것인가? 귀찮기까지 하던 녀석이 없다고 생각하니 왠지 허전하구나. 그건 그렇고, 한 명만 남는 것이 아니었나?’
라혼은 스스로 검선녀 주묘연이라 소개한 여검사와 그녀와 똑같은 복장의 여덟 명의 검녀(劍女)들이 남아 있자 그녀들에게 말했다.
“우리 집엔 방이 하나뿐이다.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너희들을 모두 재우기에는 너무 좁아!”
라혼의 말은 주묘연을 포함한 아홉 명의 여무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검선자 주묘연은 궁주의 의중을 깨달을 수 있었다. 라혼이란 자는 천고(千古)의 고수다. 직접 손을 섞어봤기에 그 점에 대해선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런 자는 적으로 삼는 것보다 친구로 삼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이쪽에서 조금만 양보하면 그는 자연히 설화 소궁주를 절대적으로 보호할 것이 분명했다. 함부로 이자를 이용하려 하는 것은 위험했지만 숨겨둔 한 수로 이용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궁주의 언급이 없었지만, 주묘연의 임무는 이자의 진정한 정체와 신상 내력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찌 된 것이 이토록 흔적이 없는 자가 있을까? 게다가 그러한 절세 무공을 가지고 겨우 조정의 개 노릇이라니….’
주묘연은 그가 조정의 금군이란 것에 놀랐다. 그것도 최근에야 금군이 되었고 그전엔 소작농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11년 전, 이 마을에 오기 전의 그의 행적이 묘했다. 그래서 주묘연은 그의 신상 내력을 알아보는 것은 뒤로 미루고 그를 시험하기 위해 수하들을 다른 곳에 머물게 하고 은연중 그를 유혹했다. 일부러 목욕을 하며 그를 자극하고 평소에 입지 않는 하늘거리고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가 자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도 자신이 방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이불에서 나란히 눕기까지 했는데 첫날밤, 그자는 자신을 안중에 두지 않고 온 밤을 잠을 이루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태평스레 잠을 자고 있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방과 이불을 같이 쓰는 것 외엔 자신의 몸엔 손가락 하나 대질 않는 것이었다. 한편으론 안심이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알 수 없는 섭섭함이 몰려왔다. 이른 아침, 주묘연이 차린 아침밥을 먹으며 라혼이 말했다.
“주낭자!”
“말씀하세요.”
“이 참에 성안에 집을 구해 거처를 옮기려 하오. 그 일을 주낭자가 해주었으면 하오.”
“알겠습니다. 일하시는 백호문과 가까워야겠지요?”
“그러면 금상첨화고. 부탁하오.”
라혼은 주낭자에게 일을 맡기고 백호문으로 말을 몰아갔다. 가는 길에 모석이 말에 올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모 참령님,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스승님.”
그렇게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길을 따라가다 문득 모석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저어, 스승님 댁에 머무는 그 처자 말이오이다.”
“주낭자 말이오?”
“괜찮으시다면 어찌 된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설화가 사부를 만나 사문으로 갔는데, 사문에서 주낭자를 이곳에 머물게 했소이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나는 초가 하도 호들갑을 떨기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럼 수삼 년 동안은 설화를 볼 수 없겠군요.”
“아니, 설화가 사문으로 간 건 조사전에 구배지례를 하고 정식 사승(師承) 관계를 맺기 위해 그런 것뿐입니다. 한 달 후쯤에는 다시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허 참, 우리 초가 어찌나 설화 걱정을 하는지….”
모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안심했다. 아들 초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묘령의 미모의 젊은 처자가 설화 대신 라혼 스승 집에 머물고 있는 걸 봤을 때는 라혼이 설화를 기방(妓房)에 팔아치운 줄로 오해했었다. 그래서 사흘 동안 감히 묻지 못하다가 지금에야 지나가는 듯이 물었는데 자신이 오해한 것으로 판명되자 그제야 안심하는 모석이었다. 세월이 하수상해 아무리 자식을 팔아먹는 세상이어도 자신이 내심 존경하고 따르는 라혼 스승이 그런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뭔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를 핑계대고 얼버무리는 모석이었다.
모석과 라혼이 백호문(白虎門)에 도착했지만 백호문은 그 시간까지 문이 열리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원래 백호문을 지키도록 되어 있는 금군 외에 궁을 지키는 금위위(禁衛衛)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라혼과 모석은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성문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자 밖을 담당하는 금군들이 둘을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모 참령님! 라혼 사부.”
“아니, 어찌 된 일인가? 궁을 지키는 금위위가 왜, 저기 있는 것이야? 그리고 문은 또 왜 열지 않고?”
“밤새 소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정령님도 퇴근하지 못하고 자릴 지키고 계십니다.”
“소란이라니?”
“아! 글쎄, 인세의 고수들이 나타나 파옥(破獄)을 하는 바람에 그들을 검문하기 위해 이렇게 문을 닫아걸고 있습니다.”
모석은 그제야 전후 사정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세의 고수들이라니, 일반 병졸들로 막아봐야 소용없으니 무공 고수라 하는 금위위가 자리를 지키는 것이리라.
“그래, 성문은 언제 개방한다던가?”
“그 얘기는 아직 없습니다.”
“허, 그래도 그렇지 성문을 닫아걸면 어찌하누!”
참령의 신분인 모석은 좀더 정확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떠났고, 라혼은 자신의 상급자인 신 오장(申伍長)에게 자신의 위치를 지정받았다.
“어서 오시오, 라혼 사부! 나도 라혼 사부처럼 밖에서 살 걸 그랬소. 오밤중에 불려나와서 이게 무슨 꼴인지 원. 아하압~!”
“이런, 내가 너무 미안하군.”
밤새 일어난 일 때문에 성안에서 살던 자들이 모조리 불려나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잠을 자지 못한 금군들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역력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성문이 열리지 않았고, 조를 나누어 군졸들을 쉬게 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지 사흘이 되자 비로소 성문이 열렸고, 금군들은 더욱 바빠졌다. 성문이 닫혔을 때야 자리만 지키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성문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과 짐을 일일이 검사해야 되었기에 더욱 피곤했다. 제대로 쉬지 못해 신경이 예민해진 금군들의 거친 언행에 곳곳에서 시비가 일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일은 그대로 넘어갔다. 보통 때 같으면 천하의 중심인 상경을 드나드는 각지의 명문 귀족들의 등쌀에 예의를 갖췄겠지만 지금은 웬만큼 높은 양반들도 알아서 기는 실정이라 그 점 하나는 피곤한 금군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이레가 지나자 금위위는 제자리로 돌아가고, 원래 백호문을 지키는 금군만 비상 대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 달 동안은 계속 이럴지 몰랐다.
“아이구, 그 뻣뻣하기 그지없는 금위들이 안 보이니 그나마 낫구먼.”
“모 참령님, 그렇게 피곤하셨습니까?”
“아, 말도 마소. 호가(虎家) 금위위 위령이란 자가 어찌나 딱딱하게 구는지 하루에도 울화가 수백 번은 치밀어 오르더라니 까요.”
모석의 입장에서 다른 부하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지만 라혼에게만은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둘의 관계가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사흘이 흘렀다.
현 무림을 뒤흔드는 폭풍의 중심에 있는 인세(人世)의 고수들이 상경의 금옥(禁獄)을 파옥하여 구해낸 자들은 바로 인세천하(人世天下)를 기치로 내건 보(保)의 인왕(人王) 거정의 아들과 보의 신료들의 자식들이었다. 이른바 상경에 있던 볼모들이었다. 원래는 단칼에 참수해야 하나 현재는 보(保)의 40만 군대와 정인대장군 서포틈(鼠暴闖)이 이끄는 30만 정벌군이 수년째 대치하고 있어 보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목적으로 그들을 살려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덴 그들이 탈출한 것이다.
“서쪽, 백호문에서 금위의 고수들이 빠져나왔소. 지금 그곳이 가장 허술하오.”
“함정이로군.”
“그렇소.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 그곳엔 진짜 금위들이 없는 것 같소.”
“그게 무슨 뜻이오?”
인세의 호법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일권파천(一拳破天) 소달(疏達)은 같은 호법인 초상비협(草上飛俠) 조백(早白)의 말에 의문스런 눈빛을 보냈다.
“어차피 우리는 상경을 벗어나야 하오. 또 그들도 아마 우리가 스스로 종적을 드러내길 기다리는 것 같소. 우리가 백호문을 깨고 상경을 벗어나면 본격적으로 추적할 셈이겠지.”
“그렇다면?”
“도망갈 길을 열어주는데 고맙게 받아야겠지.”
“하지만 그전에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소.”
“음.”
인세의 두 호법은 백호문 주위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생각대로 고수라 불릴 만한 자는 없었다. 둘은 인세에서 데려온 수하들과 거공자(巨公子) 등 상경에 볼모로 잡혀 있던, 이제는 보가 된 앙신성의 신료 자제들을 여러 패로 나누어 상인으로 변장했다. 그대로 별 탈 없이 통과하면 다행이나 들키면 금군을 도륙하고 떠나면 그뿐이었다.
“호패 좀 봅시다.”
“여기 있소이다.”
금군은 호패에 적힌 내용을 출입록에 일일이 기재하고 그들의 짐을 검사했다.
“됐소. 가시오!”
“고맙습니다, 나리!”
그렇게 일행의 절반이 성문을 통과하자 내심 안심하던 일권파천 소달은 금군에게 인왕의 아들 거민(巨敏) 공자가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일권파천이란 거창한 명호를 가지게 한 거대한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무리의 가장 뒤에 남은 초상비협 조백 또한 암암리에 공력을 끌어모았다. 그들이 끌고 온 인세의 고수들도 내심 긴장하며 단도(短刀)를 손에 쥐었다.
“왜 그러나?”
“구 오장님, 이놈이 좀 수상해서요.”
“수상?”
“반반한 얼굴에 검댕을 묻힌 거하며 말투가?”
“됐네. 어디 그런 사람이 한둘인가? 이곳은 상경일세. 고관대작의 하인들이 많은 곳이란 말일세. 말투가 예의 바른 것은 그래서 그러네. 그러나 자네 말대로 멀쩡한 얼굴에 검댕을 묻힌 것은 좀 그렇네. 음~! 아! 그렇지 손, 손을 확인해보게. 손까지 깨끗하다면 그건 진짜 수상한 것이지….”
금군에게 잡힌 사내 거민은 그들의 말에 등골이 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초라한 행색에 깨끗하고 보드라운 자신의 손은 수상하기 그지없을 테니까.
“들었지. 네놈 손금 한번 보자.”
거민은 체념한 듯이 손을 내밀었다.
“어디 보자, 재운이 있는지 내가 봐주마! 음? 미안하지만, 너는 잠시 우리와 가주어야 겠다.”
―퍽~!
“놈들이다!”
거민의 팔을 잡고 끌고 가려던 금군은 어디선가 날아온 괴인에게 차여 피박살이 나며 허공을 날았고, 갑작스런 사태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져버렸다. 기호지세(騎虎之勢). 인세의 고수들은 볼모로 잡혀 있던 공자들을 보호하면서 금군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라혼은 그들을 진즉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심 모르는 척 눈감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그들이 있으나 없으나 보(保)는 결사의 항전을 할 것이고, 저들은 그저 볼모에 불과하기에 라혼은 나서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지금 도륙하는 금군들 또한 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라혼은 비로소 이것이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전쟁은 죄 없는 사람이 그저 전장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어가고 또 죽이는 곳이라는 것을 라혼보다 더 잘 아는 자는 드물 것이다.
라혼은 작은 수박통 만한 주먹으로 금군 병사를 피떡으로 만드는 자에게 들고 있던 창대를 휘둘렀다.
―붕~!
“헉!”
소달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금군에게 일권을 먹이려다 무시무시한 기세의 공격이 감지되자, 고개를 들어 반사적으로 창대를 잡아갔다.
“제법….”
―퍽~!
“크윽~!”
철장진기(鐵掌眞氣)로 보호된 그야말로 강철과 같은 손을 때린 창대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소달이 받은 충격 또한 상당했다. 그리고 창대를 휘두른 금군이 품속에 파고들며 그의 어깨가 가슴에 닿자 엄청난 충격에 허공을 날아 성벽에 부딪혔다.
―퍽!
―컥!
“소 형!”
일권파천 소달이 군졸에게 단 일수에 무너지자 초상비협 조백은 눈에 불똥을 튀기며 그의 특기라 말할 수 있는 초상비(草上飛) 경공(輕功)으로 난전이 벌어진 전장의 싸우는 자들의 머리를 밟고 금군에게 쇄도했다.
“이놈! 신마퇴(神馬腿)!”
라혼은 이미 자세를 잡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세의 고수들 중 하나인 일권파천 소달을 방금 날려버린 건 록 스트라이커 일명 철산고(鐵山搞)였다. 라혼은 자신의 몸통 받치기 기술인 록 스트라이커가 이곳에서는 철산고라는 이름의 일반적인 기술이라는 데 놀랐다. 하긴 무사들이 갑주나 보호구를 잘 입지 않는 곳이라 이런 기술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모든 문파에서 그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라혼은 움직이는 사람의 머리를 발판 삼아 달려와 탄력 있게 다리를 차올리는 그의 무공에 감탄하며 대각선으로 보법(步法)을 밟아 그의 퇴법(腿法)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며 그의 몸통에 아라한 격투술의 방격(放擊)을 먹였다.
―뻥~!
―크윽!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조백은 금군의 일수(一手)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 소달과 마찬가지로 기절한 채 허공을 날아 난전이 벌어지는 한복판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두 명의 절정 고수를 제압한 라혼은 바닥에 나뒹구는 창을 차올려 잡고는 아직도 저항하고 있는 인세의 고수를 휩쓸어갔다.
―퍽! 퍽! 빠각!
라혼의 활약으로 형편없이 밀리던 금군은 기세를 드높이며 적도들을 몰아갔다.
―우아~!
태반이 라혼의 창대에 맞아 바닥에 나뒹굴자 장내는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우와! 만세~! 만세~!
죽을 고비를 넘긴 백호문을 수비하던 금군은 자신들도 모르게 만세를 외치며 기세를 북돋웠다.
“라혼 사부, 참으로 대단하오!”
“암! 그러니 이 모석이 스승님이라 부르며 공경하는 것이지.”
금군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라혼을 치하했다. 그리고 싸움이 벌어진 주위를 정리했다. 그 짧은 싸움 속에서 수십 명의 금군이 목숨을 잃어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았지만 마냥 죽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쓰러진 적도들을 묶고 금위위에 사람을 보내 이들을 인수해야 했다. 백호문의 수비를 책임진 정령(正領)이 적도들의 집중 공격에 목숨을 잃는 바람에 그중 가장 지위가 높은 참령(參領)인 부수문장 모석의 지휘하에 장내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렇게 한식경이 흐르자 수십 명의 금위위들이 말을 몰아왔다.
“어찌 되었느냐?”
말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상황을 묻는 금위위 위령(衛領)을 모석이 올려다보며 보고했다.
“위령님, 적도들이 소란을 피워 금군 수십이 죽고 다쳤지만 다행히 적도들은 모두 잡을 수 있었습니다.”
“뭐라? 그들을 전부 잡아?”
“예!”
“그들을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예!”
모석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기절한 그들을 수레에 실어 끌고 나왔다.
“총, 34인, 그중 7인은 용모파기를 확인한 결과, 파옥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죽은 건가?”
“아닙니다. 전부 살아 있습니다. 단지 기절했을 뿐입니다.”
금위위의 위령 호포산(虎匍山)은 금군의 힘만으로 이들을 잡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 파옥(破獄)이 있던 날, 호포산은 도망치는 그들을 쫓다가 자신을 가로막은 주먹이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고수에게 놀림당하듯 패퇴한 적이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금군들이 이들을 제압했다면 금군들 중 무시 못할 실력자가 있다는 말이었다. 호포산은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호제가(虎帝家)의 손(孫)으로서 자존심 강한 그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했다.
“금위들은 어서 적도들을 인수해라!”
“존명!”
“그럼 우리는 가겠다!”
“살펴 가십시오!”
“공을 세웠으니 상급이 있을 것이다.”
호포산은 그렇게 한마디 던져놓고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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