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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불가사의- 진시황릉1)
김경은(중앙대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1차)
진시황릉은 20세기의 고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의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세계 불가사의와 기적이라고까지 여겨지는 진시황릉에 대해서 살펴보자.
1장- 지하로부터 들려온 메시지
1974년 봄, 중국 서부 8백리의 진천(秦川)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여산(鱺山) 자락에 위치한 서양촌(西楊村)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서양촌의 생산대장 양배언(楊培彦)과 부대장 양문학(楊文學)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물을 찾아 여산의 골짜기 입구와 이어진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땅을 판지 일주일 후 1974년 3월 29일, 그들이 원하던 물은 나오지 않고 도용의 파편과 같은 이상한 것들이 계속 나타났다. 내화 벽돌이 깔린 평면이 나타나는가하면 녹 슨 청동 화살과 쇠뇌가 발견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벽돌을 부적삼아 베개로 삼고, 청동기는 폐품 회수처에 팔기도하였다. 출토된 도용을 이상하게 여긴 것은 수리시설 건설과 수원에 대한 이용을 책임지고 있는 방수민(房樹民)이었다. 그는 출토된 유물을 보고 이곳이 고대 유적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작업을 중지시키고 현 문화관에 이를 보고하였다. 이에 임동현 문화관 직원들이 서양촌을 방문하여 유물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도용들이 과연 어떤 용도인지 확신하지 못하였다. 도용이 진시황릉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면 진용(秦俑)이 확실할 것이나 진시황릉에서 1.2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문화원 직원들은 일단 출토된 도용과 도기파편, 청동기들을 거두어 문화관으로 옮겼다. 두 달 뒤 고향에 와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신화사 기자 린안온(藺安穩)은 문화관을 방문했다가 전시실 귀퉁이에 있는 이 유물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던 린인온은 이것들이 진용임을 확신하고, 출토된 서양촌을 답사한 뒤, 북경으로 돌아와 1974년 6월 24일 <진시황릉의 출토품- 진나라의 무사 도용>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인민일보』에 발송하였다. 인민일보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 기사를 공개하지 않고, 내부에서 편집․발행되는 『정황회편(情況匯編』에 이 글을 실었다. 이것이 진시황릉 병마용 발굴상황에 대한 첫 번째 보고이다. 이글은 곧바로 모택동과 주은래를 비롯한 최고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6월 3일 국무원 부총리 이선념(李先念)은 문물국에 유물들을 적절하게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해서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는 2천년의 봉인을 뜯고 마침내 처음으로 자태를 드러내게 되었다.
2장-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고고학 발굴
1974년 7월, 국무원과 국가 문물국의 허가를 거쳐 섬서성 위원회는 ‘진시황릉 진용갱(秦俑坑) 발굴지도소조’를 조직했다. 동시에 성 문화재관리회, 성 고고학 연수고, 임동현 문화관의 표본조사 전문 위원으로 ‘진시황릉 진용 고고학 발굴팀’을 구성했다. 고고학 발굴팀은 곧 현장에 도착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처음 발굴이 진행된 용갱을 1호 용갱이라고 불렀다. 용갱이 진시황릉 울타리에서 1.5킬로미터 이상이나 떨어져있어 진시황릉과 용갱의 관계를 확정짓기는 어려웠었다. 그러다가 조각난 도용의 몸체 앞에 아직 녹슬지 않고 새것처럼 빛나는 구리 극(戟)이 발견되었다. 구리 극 머리 부분의 안쪽에는 선명하게 ‘삼년상방여불위조사공구(三年相邦呂不韋造寺工口)’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이는 “여불위가 승상이 되고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라는 뜻으로 ‘사공구’는 아마도 구리극을 주조한 공장 이름인 듯하다. 여불위는 원래 양책(陽翟:河南)의 대상인(大商人)으로 조(趙)나라의 한단(邯鄲)으로 갔을 때,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로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를 도왔다. 그의 도움으로 귀국한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그 공로에 의해 그는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장양왕이 죽은 뒤 『사기(史記)』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정(政)이 왕위에 올랐다. 이 태자 정이 바로 시황제(始皇帝)인 것이다. 이로써 용갱이 진시황릉의 일부분임이 증명되었다.
1호 용갱의 규모는 동서로 2백미터, 너비가 60미터가 넘었다. 용갱에서는 도용 8천여 점, 도마 수백여 필, 나무전차 1백여 승, 그리고 대량의 청동병기가 발굴되었다. 특히 진나라의 전형적인 보검 형태인 은백색의 청동검(전체길이 91.3센티미터, 너미 3.2센티미터)은 당시의 뛰어난 청동기술을 잘 보여주었다.
3장-2호 용갱의 발굴
용갱의 발굴 1년째, 중국정부는 ‘진시황릉 병마용 박물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1976년 박물관 건설이 들어갔다. 1호 용갱 전시관의 기초공사가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을 흥분과 경악으로 몰고 간 사건이 일어났다. 1호 용갱에서 북동쪽으로 약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또 하나의 병마용갱이 발견된 것이었다. 이른바 2호 용갱의 출현이었다. 2호 용갱은 1호 용갱과 달리 L자형의 지하 건축물이었다. 전체 길이는 96미터, 너비는 84미터, 깊이는 5미터로 총 면적은 6천 제곱 미터였는데, 대략 1호 용갱의 절반 수준이었다. 갱 안에는 모두 89대의 나무로 만든 전차와 2천 좌 이상의 도용과 도마, 그리고 몇 만점이나 되는 청동 병기가 매장되어 있었다. 2호 용갱은 대부분이 보병인 1호 용갱과 달리 전체적으로 궁노병․경차병․차병․기병 등 네 부분의 서로 다른 병과(兵科)로 이루어진 대형 군진이었다. 각각의 군진은 실물의 재현으로, 당시의 군사 편제․장비․전술 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4장-용갱은 왜 불태워졌는가?
용갱에는 적지 않은 병사용들이 사지가 절단되거나 머리 부분이 훼손되어 있고, 토벽으로 쌓은 대들보 위에 불에 탄 흔적이 남아있다. 이러한 용갱의 파괴 흔적에 대해서 학자마다 그 원인과 이유를 다르게 추측하고 있다. 먼저 중국 진용학 연구회 회장이며 병마용 박물관 관장인 원중일은 ‘항우의 화공설’을 주장한다. 그는 항우의 군대가 용갱을 훼손시켰다고 보는데, 용갱의 유물 중 일부가 사라졌다는 점, 용갱이 건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훼손된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점, 『한서』「초원왕 열전(楚元王 列傳)」에 “항우가 관중(關中)에 들어와 진시황릉을 발굴했다”는 구절이 나온다는 점 등을 들어 항우의 화공설을 주장한다. 이는 고고학자이며 중국 진용연구회 상무이사인 장중립도 지지하는 설이다. 또 다른 중국 진용학 학회의 상무이사인 정학화는 ‘장례식의 분소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훼손된 부장갱의 구조가가 마치 도요(가마)처럼 불에 잘 타도록 되어있다는 점, 유물의 탄화 상태가 나무가 불에 타기 전에 비교적 양호한 상태여야 가능하다는 점, 항우가 약탈과 방화를 했다고 보기에는 훼손이 그리 심하지 않다는 점 등을 들어 화재의 원인은 진시황의 장례를 지내면서 스스로 불을 질러 행하는 일종의 장의 형식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마찬가지로 중국 진용학 연구회 이사이고 미술가인 이정현은 ‘목동의 실화설’을 주장한다. 그는 용갱의 바닥에 있는 10~14겹의 진흙 침전물로 보아 용갱의 훼손이 진나라가 망한 후 한참 후에야 이루어졌다고 보고, 진나라 멸망 이후 황량한 벌판으로 변한 능원을 돌아다니던 양이 우연하게 용갱으로 통하는 구멍으로 들어가 목동이 이를 구하려고 불을 들고 들어갔다가 신화했다고 추측한다. 이는 『한서』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각각의 주장들은 모두 신빙성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허점들도 많다. 공식적으로는 ‘항우의 방화설’이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채용되나,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아있다.
5장-신비한 지하 군진
1976년 5월 11일, 한 탐사 대원이 1호 용갱의 북서쪽 25미터 지점에서 3호 병마용갱을 발견했다. 의심할 바 없이 또 다시 기쁜 소식 이었다. 발굴결과 3호 용갱은 이전 용갱과 전혀 다른 지하 군영 장막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체 면적은 겨우 3백 제곱미터로 2호 용갱의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건축 형태는 특이하게 불규칙적인 요(凹)자 형태였다. 3호 용갱은 고대 군진 지휘부로 세계 고고학사에서 유일한 발견이었다. 3호 용갱의 발굴은 고대의 군사 포진도가 완전한 형태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지극히 중요했다. 1호 용갱은 전통적인 전차병과 밀집 보병으로 이우러진 방대한 군단이고, 2호 용갱은 궁노병․기병․전차병으로 이루어진 군진이다. 이러한 포진 방법은 대전진(大轉陳:안행의 진) 속의 소전진(小戰陳:방진 등)을 포함시키고, 대군단과 소군단이 서로 호응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해 말 그대로 신출귀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지시하는 3호 용갱이 존재하는 것이다. 각각의 용갱의 군진을 통해 진시황의 획기적인 군사전술사상을 엿볼 수 있고, 이는 진시황이 어떻게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6장-세 제국의 흥망성쇠
기원전 4세기 그리스 북부 마게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서방에 유럽․아시아․아프리카 3대륙의 영역을 넘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제 사후 약 1백여 년 뒤 카르타고에서 태어난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대군에 맞서 역사상 유명한 전투중의 하나인 칸나이 평원전투에서 위대한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로마제국의 카이사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뛰어난 명장이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기원전 237년 진시황이 몸소 출정해 그의 기지와 과감한 기질로 여불위와 노애의 무리를 분쇄하고 여섯 나라를 병합하면서 천하를 통일하고자하는 뜻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진시황은 뛰어난 전략가였고 영웅이었다.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와 달리 진시황제는 자신이 직접 대군을 통솔해 전쟁을 치르지는 않았다. 다만 가장 높은 위치에서 인재들을 통솔해 천하를 통일하는 사명을 이룩해냈다. 그는 군사전략 면이나 행동방침 면에서 모두 철저한 승리를 거두었다. 역사는 때때로 흥미로운 질문을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만일 고대의 서방 부대와 동방 부대가 충돌했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까. 진시황릉의 병마용의 위용을 본 사람들은 그 결과를 충분히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7장-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
안티파르토스가 말한 ‘세계 불가사의’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지진이나 화재나 전쟁으로 인해 다 없어지고 오늘날 이집트의 파라미드만이 나일 강가에 남아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사라져버린 위대한 기적의 형태를 구경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진시황릉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1976년 중국을 방문한 신가포르의 총리 리콴유는 진시황 병마용 발굴현장을 보고 ‘세계적인 기적이자 민족의 자랑거리다’라고 감탄하였다. 1978년 4월,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이를 20세기의 가장 웅장한 발굴이라고 기술하였다. 1978년 9월 프랑스 총리 시라크도 역시 발굴 현장을 참관하며 “세계에는 7대 불가사의가 있으니, 진용의 발견은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라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를 보지 않으면 이집트에 다녀왔다고 할 수 없듯이, 진용을 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으로 중국에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많은 각국의 지도자들이 진용을 다녀간 후 찬사를 보냈다.
8장-진시황릉의 보물을 찾아서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은 13세에 왕의 자리에 오른 뒤부터 진시황릉 건축을 시작했다고 한다. 건축 관련 인원수는 가장 많았을 때는 70여 만 명에 이르렀으며, 기간은 전체 39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로보아 그 규모의 방대함과 호화스러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진시황의 시신이 지하의 미궁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진나라도 역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항우는 대군을 이끌고 함양으로 쳐들어와서 진나라의 황족과 문무 관리를 모두 살해하고, 아방궁을 포한한 모든 궁전과 누각을 불태워버렸다. 항우의 군대는 돌아가는 길에 진시황릉의 능묘 또한 훼손시켰다. 이후 유방이 황제에 오른 후 진시황릉의 보호를 명령했으나 황릉의 훼손은 계속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의 침식과 무수한 전쟁의 상처로 진시황 봉분은 본디 형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만 봉분의 높이가 70~110여 미터였다는 것만 추측할 뿐이다.
진시황릉의 새로운 부장품은 끊임없이 발굴되었다. 살아있는 말과 동물들이 매장된 마구갱과 희귀 동물갱도 발견되어 당시의 궁정제도와 황가의 생활 풍속을 보여주었다. 또한 1976년 10월 발굴팀은 진시황릉 동쪽에서 17좌의 순장묘를 발견했다. 묘의 형태나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묘의 주인들은 황실 종친이나 귀족들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아마 진시황 사후 부정한 방법으로 황위를 이은 호해가 죽인 황실 식구들로 예상된다. 묘의 주인들은 대부분 살해당한 뒤 사지가 찢겨져 매장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호해의 학정(虐政)을 보여주는 것으로 진나라 빠른 멸망의 원인으로 이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안타깝게 한다.
9장-시간의 흐름을 넘어서
1980년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한 고고학적 발견이 일어났다. 바로 동거마(銅車馬: 구리로 만든 수레와 말)의 발견이다. 발굴된 것은 두 대의 동거마와 여덟 필의 동마 및 동어자(銅御者)로 비교적 형태가 온전하였다. 동거마는 당시의 절묘한 공예조형과 야금 주조기술을 보여준다. 진짜 말과 수레의 2분의 1크기인 이 동거마는 20세기에 발견된 전 세계 청동기 중에서도 가장 크다. 전체의 무게는 1,234킬로그램으로 이렇게 호화스런 장식을 하고 완전한 형태를 갖춘 고대 동거마의 발견은 세계 최초였다.
동거마의 발견은 시황제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다. 시황제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가운데 한사람이다.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쌓음으로서 보수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외부 세계를 차단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시황제가 대행렬을 동반하고 동족으로 순행하고 바다로 진출한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특히 시황제는 다섯 번의 순행 중 네 차례나 동쪽의 해안을 방문해 바다로 진출할 야심을 품었다. 시황제의 생애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고, 동거마는 이러한 시황제의 순행을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수 있다.
10장-방문객들
진시황릉에 출토된 유물들은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의 귀중한 보물이다. 1987년 유네스코는 진시황릉과 병마용 군진을 세계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진용 박물관에는 수많은 관람객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방문객 중에는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과 닉슨도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박물관을 방문한 후 크게 감명하였다. 이 외에 박물관 앞에서 일광욕을 하려고 했던 금발 미녀들을 감히 조상신 앞에서 옷을 벗었다고 혼내며 쫒아낸 할머니들의 일화와 20명의 맹인 외국인들이 방문해 복원중인 병마용을 만져보고 감격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1장-진시황릉 지하 궁전의 수수께끼
병마용 군진과 동거마의 출토는 진시황릉의 엄청난 규모를 짐작하게 하지만, 정작 황릉의 지하궁은 아직 발굴되지 못하고,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중국 역사서에 진시황릉의 건축과 훼손, 지하궁의 형태에 대한 수많은 기록들이 남아있지만, 실제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너무 깊은 곳에 위치한 것으로 추측되어 현재의 기술로는 발굴이 어려운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 장기간에 걸쳐 진시황릉에 관한 탐사활동을 벌이고 있는 정학화 선생의 자료에 따르면, 진시황릉 봉토 아래의 지하 궁전은 동서 너비 485미터, 남북 길이 515미터로 총면적은 25만 제곱미터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렇게 방대한 규모의 지하궁전은 세계에서 유밀무이한 것이다.
12장-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생각
유물은 인류가 남긴 자연 또는 사회 활동의 자취로 언제나 그 민족과 전 인류가 보호․연구․이용해야하는 진귀한 역사적 보물이다. 특히 진은 전란 등의 원인으로 그리 많은 문자 기록이나 실물 자료를 남기지 못하였다. 이에 진시황릉 병마용․동거마․마구갱․희귀동물갱의 발견과 발굴, 또한 진시황릉의 지하 궁전의 비밀에 대한 탐색 작업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출토된 유물은 모두 고대 중국인들의 빛나는 지혜와 창조력의 결정체이며 유구한 중국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유물의 발굴과 관리과정에서 많은 허점과 결점이 드러났다. 진용 발굴은 부족한 인원으로 인해 주변 농민들을 동원해 감자 캐듯이 작업되기도 하였고, 적절한 보호 없이 마구 유물을 드러내 씻기고 복원하여 훼손되기도 하였다. 특히 박물관 건립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유물보호를 위한 적절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지 못해 유물이 파손되고 있다. 1991년 3월에는 진용관 앞에서 한 농민이 혼인 문제로 비관해 유서를 남기고 폭약을 터트려 자살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진용관 안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유물 보호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또 병마용 박물관은 너무 외지에 있어 문화와 교육, 수원(水原)과 교통 등이 매우 열악하여 이곳에 배치된 직원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현대인이 안아야하는 문제점들이다. 분명한 것은 진용의 발굴과 박물관의 건설에 대한 새로운 계획이 필요하고, 인류는 진용의 미래를 계속 주시할 것이라는 점이다.
13장, 항로에서 이탈한 역사의 흐름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중원을 통일해 봉건 전제 국가를 설립한 진시황은 2천여 년 동안 끊임없이 명예와 굴욕, 칭송과 비난의 엇갈린 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를 비난하는 대목 가운데 가장 민감하고 분명한 논쟁거리는 바로 분서갱유(焚書坑儒)였다. 몇 천년동안 사람들은 분서갱유를 예로 들어 진시황이 포악하고 잔인하여 중국 문화를 훼손시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분서갱유에서 주도한 것은 진시황제라기보다는 승상 이사였고, 정확히 말하자면 분서갱유는 법가를 대표로 하는 진나라 시대의 문화가 유가를 대표로 하는 관동(關東:함곡관 동쪽지방) 문화를 파괴한 사건이다. 또한 객관적으로 볼 때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중국문화를 단절시키거나 큰 재해를 가져다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후 유방의 전화와 한 무제가 취한 유가 독존의 문화정책이 중국 문명을 철저하게 쇠락시키고 끝내 파괴하는 지경까지 몰고 갔다. 유교는 갈수록 보수적이고, 경직화되었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었다. 유교에 의해 과학 기술은 ‘보잘 것 없는 재주’로 전락하였고, 결국 이는 20세기에 서구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중국 역사에 큰 상처를 남기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우리는 만일 진시황제가 급서거 하지 않고 살아남아 관동지역을 장악했다면 중국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을 진나라의 위대한 유물 앞에서 해본다.
읽고 나서
본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진나라, 진시황제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아마 진시황릉을 직접 보고 난 사람으로서 유물의 주인에 대한 감탄과 존경심이 솟아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진시황릉이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보물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저자는 진시황릉의 일부인 병마용갱 등의 유적의 발견과 발굴 과정을 자세하게 다루고, 역사서의 기록도 덧붙이면서 진시황릉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진시황릉을 발굴한 사람, 연구한 학자, 다녀간 방문객, 박물관을 관리하는 사람 등 유적과 관련된 수많은 현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로써 진시황릉은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고 살아있는 유적으로 다가온다. 진시황릉의 수수께끼는 아직도 무한하다. 발굴된 유적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완전하게 작업이 끝나지 못하고 다시 덮어야 했다. 현재의 기술만으로는 이 엄청난 규모의 유적을 온전히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2천여 년 동안 지하에서 빛났던 동거마는 발굴된 지 몇 년 만에 부식이 일어났다. 고대인의 뛰어난 기술력을 제대로 유지하지도 못한 것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지하 궁전은 아직 그 면모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는 진시황릉의 극히 일부분만을 본 것이다. 일부분만으로도 기적이라고 불리는데, 전체가 드러나면 어찌될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마 우리는 가장 위대한 역사적 유물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진시황릉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조심스러워야한다. 자칫 잘못하다가 중요한 유물을 훼손시킬 수도 있으니 말이다. 세계의 많은 고고학자들이 중국의 진시황릉에 주목하고 있다. 인류의 유산이기도 한만큼 협력을 통해 최상의 방법으로 발굴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진시황릉의 수수께끼가 풀릴 날을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려본다.
첫댓글 영혼불멸의 삶을 위해 거대한 지하궁궐과 병마토우들을 만들어 수많은 사열을 시켰던 진시황, 13시부터시작해 39년간을 사후세계를 위한 공사에주력하고 불노초를 찾아 동방 (우리나라 ) 까지 보냈었던 진시왕을 생각하며 죽는 날까지 버리지못하는 인간의 욕망들을 생각해본다, 비울수록 더욱 풍요로와지는 진리를 일찍이 터득할수있었던 시황이었다면 중국의 역사는 아니 동방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 까? 를 생각해본다. 물론 어마어마한 병마의 유물들은 없었겠지만...방대한 자료를 자세하게 써준 저자에게 감사를 느끼며 . 관광수입을 가져다주는 문화재만을 부러워하지말고,,비움의 정신세계를 아울러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