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허수아비
빈들에 혼자 남은 허수아비
공터의 약장수처럼
조무래기들은 저리로 가라는 듯
두 팔을 치켜들고 있다
혼자라는 것에 대해, 쓸쓸함에 대해
아무 식견이 없는 새들은
그를 보고도
보란 듯이 몰려와 떠들어댄다
호적에도 없는 먼 들판이 파도소릴 흉내 내면
그도 하던 일을 작파하고 어디로든 떠나고 싶을 것이다
구절초 향기에 코를 벌름거리며
구겨진 햇살이라도 들쳐 업고
등짝이 따스해질 때까지
둠벙에 제 모습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얘들아, 너희들은 부디 대처로 나가 살아라
이 한 철 지나면 겨우내 빈 들을 헤집겠느냐
어스름이 혼잣말처럼 내려오면
먼 인가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차라리
새들 날아가는 길을 배웅하듯
절은 소매를 펄럭댄다
지킬 것 없는 들판에서는
위풍당당도
근엄도
다 추상명사다
2)성묘
꽃을 피우겠다고
엄동설한에( hard snowy winter) 어머니를 땅에 심었다
어머니는 영원히 꽃피워야 마땅하다고 그날, 내가 울었을 때
얘야, 영원은 믿음 가운데도 있는 거란다
다비(茶毘)야 말로 진정한 영원일지도 몰라
나는 큰언니를 이겨먹은 기쁨으로 (어머니 곁에) 잔디를 심었다
하얀 겨울과 촉촉한 봄이 가고 여름은 자주 젖었다
핑계를 늘여가며 가꾸지 못한 사이
어머니는 엉겅퀴 꽃으로 피어났으나
삘기(갈풀)에 묻혀(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당신의 내용은 왜 쪼갤수록 커지는 걸까
지난 봄, 너 댓 평 돌밭을 주말 농장으로 일구다가
평생 돌멩이 채굴을 즐기던 당신을 만났다
키 큰 나무는 멀리서 보아야 다 보인다는 말, 믿었을까
무작정 멀리 떠나온 청맹과니 한 마리가
근동에서 가장 수줍게 피어난 풀꽃 곁에
사랑부전나비처럼 잠시 앉았다 돌아 나온다
3)메꽃
분홍 나팔에서 태교음악이 울려나온다
지렁이 굼벵이 꿈틀거리는, 두더지 혼인하기 좋은 날
와당탕탕 땅이 들썩거리면
나는 호른의 울대 속으로 서서히 빨려들어
지하 녹음실까지 내려간다
난 나레이터가 될 테야 풀뿌리 기도에 관한 이 계절 다큐멘터리, <뿌리 안테나>. 두더지 습격을 막으려면 바위 밑 반딧불이를 깨워야 해. 조명이 비취고 방송이 시작되면 외골수 정원사도 메꽃에게 가위 들이대지 못할 거야 장미에게 주려던 손길 한 줌 흘릴지도 모르지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에겐 내 목소리가 들릴 테지 꽃의 말은 본래 아무도 지나치지 못하는 노래였으니까 북향의 가지를 꺾는 생음악 나는 가끔 새의 목소리를 가다듬곤 해 그저께 숨겨둔 새알들은 부화할 수 있을까 새들이 스튜디오 개원식에 왔어 사마귀는 축하 테이프를 자르지
두더지들은 녹음실을 파먹으려 호시탐탐 노려
태교음악이 들리는 곳은 귀가 열리는 지하 녹음실
뿌리 안테나가 얽히고설켜 있지
뿌리는 아기 두더지의 튼실한 발을 기도해
두더지는 기도를 알지 못하지
욕심을 버리고 들으면
뿌리 음악이 어떤 연주보다 고결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나는 여름 동안 지하 녹음실을 청소하며, 원고 뭉치 속
껌 껍데기 담배필터 녹슨 박카스 뚜껑까지 다 내다버리고
평생 기도만 퍼 올리다 묻힌 엄마를
세상에 알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