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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겸손
강금성 목사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예언사역에 대하여 물어옵니다. 대부분 자신은 예언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그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고마운 편에 속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예언사역을 하는 교회나 목회자들에 대해서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가벼운 정도이고, 상당수는 이단으로 단정하여 막말을 해대기 일쑤입니다. 물론 예언사역을 시작하기 전 이런 반응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용한 성경구절을 보면 실소의 차원을 넘어 암담하기까지 합니다. 그로 인해 이 글을 올립니다. 예언사역을 정죄하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몇몇 성경 구절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1. “성경은 완전하고 그러므로 더 이상의 계시나 예언이 필요치 않다.” 즉 계시의 종결성을 말하고, 그 근거로 다음의 성경 구절을 예로 듭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2. “점을 치거나 길흉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고 하였는데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선지자 노릇을 하며 점을 치고 길흉을 예언해 주고 있다. 이 사람들은 결코 성령의 역사로 함이 아니요 거짓된 영의 역사이므로 가증히 여겨야 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 근거 구절로 다음의 말씀을 제시합니다.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0-11) 그러므로 예언사역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3. “예언은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지 어떻게 훈련을 통해 예언사역자들을 만들어내는가?” 따라서 ‘선지자학교를 두어 사역자를 훈련시키는 것은 인위적이고 잘못된 것이다.’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이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선포하는 목사님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고, 이러한 주장들에 의해 예언사역을 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서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일까요?
1. 인용한 성경 구절의 바른 해석
가) 계 22:18-19절의 해석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 구절을 근거로 ‘성경은 완전하고 더 이상의 계시나 예언이 필요치 않다.’는 주장을 폅니다. 그러한 주장은 이 구절의 ‘이 책의 예언’이란 말을 신구약 66권으로 보고, 따라서 예언은 신구약 66권으로 종료되었고, 더 이상의 예언사역을 하면 이 책에 기록된 것 이외를 더하는 것이 되므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주장은 19절의 말씀에 의해 잘못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19절은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성경은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고전 14:1, 5). 또한 성령은 예언의 은사를 교회에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언사역을 부정하면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제하는 것이 되므로 그는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는 말씀에 해당됩니다. 곧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은 앞으로 예언사역을 반대하지 마십시오. 재앙을 받는 것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모순(矛盾)이 어디 있습니까? 예언 사역을 하면 이 책에 기록된 재앙을 받고, 예언사역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니... 따라서 계 22:18-19절의 말씀에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은 단순히 요한계시록을 의미하며,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을 예언하고 있는데, 그것에 더하거나 제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신약은 아직 정경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구약도 주후 90년에 정경화 작업이 완료되었을 뿐 신약은 요원했습니다. 따라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말씀은 여전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회가 특별히 해야 할 사역입니다. 예언사역은 교회의 사역 중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종해야 할 필수사역입니다. 계속해 읽으면 제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신 18:10-11절 해석.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이 구절을 근거로 많은 이들이 ‘예언사역은 용납해서는 안 되며, 예언사역을 하는 이들은 이단이다’는 주장을 폅니다. 한술 더 떠 이들은 주장하기를 구약 시대 같았으면 예언사역자들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이 주장이 사실일까요? 그러한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면 이 구절 이후의 이스라엘 종교사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신명기는 모세가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 이후의 예언자는 있어서는 안 되며, 그들은 가증히 여겨야 할 사람들이었으며, 돌로 쳐 죽였어야 합니다. 그런데 역사는 어떻습니까?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문서화되지 않은 때의 예언자뿐만 아니라 이사야, 에스겔, 예레미야, 호세아, 요엘, 아모스 등등의 수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했고, 우리는 그들이 선포한 예언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여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모순 아닙니까? 모세는 예언자를 용납하지 말라 하고, 모세의 후예들은 예언자들을 용납하고 있고...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것은 신 18:10-11절에 나오는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를 예언자로 잘못 해석한 결과입니다. 예언자는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와 다릅니다. 즉 예언사역을 반대하는 이들은 예언과 예언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2. 예언과 예언사역의 의미
예언과 예언 사역은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점쟁이처럼 미래를 점치고 길흉을 말하는 사람일까요? 전문적인 학술 용어로 설명하기보다 예언서를 예로 드는 게 낫겠습니다.
가) 전기 예언서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 상, 사무엘 하, 열왕기 상, 열왕기 하. 이렇게 여섯 권을 ‘신명기 사가의 역사서’, 혹은 ‘신명기적 역사서’라고 부릅니다. 여호수아의 지휘로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부터 사사 시대와 왕들의 시대를 거쳐 이스라엘의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역사서로 분류한 것입니다. 학자들 사이에서 이 역사서는 이스라엘의 포로기 때 완성된 것으로 합의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서는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전이 불타고 이스라엘이 죽임을 당하거나 사로잡힌 상태에서 “하나님은 열방의 신보다 약한 분이신가?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신 것인가?”라는 신학적 회의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를 역사적으로 살피면서 성전의 파괴와 백성들의 사로잡힘은 첫째, 그들이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이요 둘째, 그들이 율법 준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역사서를 통해 사가(史家)는 “그들의 멸망은 그들이 범한 죄 때문이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는 여전히 하나님이시며, 그들은 돌이켜 하나님을 경외하고 율법을 준수해야 하고, 그리할 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는 본래 이 책들을 ‘전기 예언서’로 분류했습니다. 평범한 이 개론 이야기 속에 ‘예언이 무엇인가’가 규명돼 있습니다. 예언은 미래를 점치는 것이며 길흉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는 이 여섯 권의 책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언서로 분류했을까요?
이 역사서를 쓴 사가는 분명히 과거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역사를 통해 사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너희가 멸망한 것은 너희의 죄 때문이요. 하나님의 능력이 약함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그리하면 소망이 있을 것이다.”고 외칩니다. 이를 통해 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고, 하나님과 연합을 시킵니다. 그러므로 그 여섯 권의 책은 역사서가 아니라 예언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예언’은 하나님의 영이 한 역사가에게 임하여, 역사의 형식을 통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하고, 그들을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있습니다.
나) 요나서
저는 제가 섬기는 교회에 성령세례가 광범위하게 임한 후, 꿈과 환상과 예언이 급속하게 증가되는 것을 보고 예언 사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언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구약의 예언서를 꼼꼼히 읽었습니다. 앞서 말한 전기 예언서도 그 경우입니다. 예언은 미래를 알아맞히고 길흉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를 말하는 것도 예언임을 전기 예언서를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언은 미래만이 아니라 또한 ‘현재’를 말하기도 합니다. 요나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어떻게 요나서가 예언서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의아해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 역시 예언의 성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요나서는 “니느웨를 쳐서 외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했던 요나가 우여곡절 끝에 니느웨로 가서 쳐서 외쳤고, 그의 외침을 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킴으로 하나님도 돌이켜 내리기로 한 심판을 돌이키셨다는 내용입니다. 어떤 이들은 요나서가 예언서인 이유를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예언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데서 나오는 오해입니다. 요나서가 예언서인 이유는 요나서의 주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나서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배양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4:10-11) 이스라엘은 그들의 대적 니느웨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도 돌이켜 구원 받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요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이고, 요나서 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 하여 하나님의 뜻에 돌이켜 복종케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언서입니다.
3)예레미야서
여호와께서는 ‘북에서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의 환상’을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셨고, 그 이후 예레미야는 끊임없이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예레미야는 미래의 길흉을 말하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관심은 미래에 있지 않고 늘 현재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심판을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유다 백성에게 늘 ‘돌이킬 것’을 촉구합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미래에 있다기보다 현재에 관심이 있으며, 확정된 미래이지만 현재의 돌이킴의 여부에 의해 그 미래는 항상 열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예언서 중에 미래에 대해 말을 하는 예언자들이 많은 것을 보지만, 예언서를 주의 깊게 읽으면 실제 그들의 관심은 ‘언제나’ 현재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미래의 흉한 소식을 전하면서도 예언자들은 지금 그 백성들로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과의 연합을 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회는 단순하게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 복술자나 점쟁이는 가증히 여기면서도 선지자는 높였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한다고 박해를 받는 예언자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신명기 18장의 말씀을 근거로 예언사역을 부정하는 행위는 예언과 점의 차이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언 속에는 미래의 길흉을 말하는 행위가 포함되지만 점쟁이가 길흉을 말하는 그런 저급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에서 보듯 히브리 사람들이 이해한 예언은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은 그들의 과거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시각으로 다시 말합니다. 이를 통해 과거에 형성된 쓴 뿌리를 치료하여 내적 치유가 일어납니다. 예언은 또한 그들의 현재를 하나님의 마음과 시각으로 말합니다. 이로써 현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합니다. 예언은 미래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확정된 것을 알아맞히는 것이 아니라 확정된 그 미래를 미리 선포함으로써 현재를 결단하게 하고 분발하도록 합니다. 그 결단에 따라 미래는 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래는 하나의 환상(vision)이며 꿈이고, 예언자는 그것을 예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틀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언의 관심은 바로 오늘에 있습니다.
(고전 14:3)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고전 14:31)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 예언 사역의 중요성
앞의 글을 통해 예언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자주 ‘율법과 선지자’란 말을 사용하셨음을 보셨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유대인들의 관용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용어를 통해 예언이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언은 율법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율법’(토라)은 ‘가르침’을 뜻하는 말로,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특정 시대의 특정 상황에 있는 특정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마음)을 보고 말한 것’을 뜻합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회에 율법만 있고 예언이 없었더라면 큰 혼란이 일어났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앞서 말한 요나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니느웨를 수도로 하고 있던 앗수르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에게 행한 악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앗수르에 대해 이스라엘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옳은 것이었을까요? 이런 때 적용해야 할 말씀은 율법에서 이것입니다.
(창 12: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 가운데서도 아마 3절을 적용하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이며, 이 율법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요나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악을 행한 니느웨는 그러므로 40일이 지나면 무너져야 합니다. 그러나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한 것이 요나서입니다. 그것이 예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회에 율법은 있고 예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언자 이사야는 유다를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자세히 보면 당시의 유다 백성들은 율법(레위기)에 충실했음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전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기쁨이 아니라 분노였습니다. 그의 예언 활동이 없었다면 그 하나님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예언이 중요하지만 이 시대 교회에는 율법은 있고 예언은 사라졌습니다. 몇몇 교회에서 이 예언 사역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지만 대부분 주류 교회에서는 기를 쓰고 예언사역을 정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인도하는 두 가지 수단 중에 하나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외다리 교회인 것입니다. 당신은 이 현상을 보고 깔깔대고 있는 사단의 모습이 안 보입니까? 하기야 예언과 환상과 꿈을 부인하고 있으니 어찌 그런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4. 오늘날에도 예언은 존재하는가?
사실 이 주제처럼 교회 안에서 잘못 인식돼 있는 것도 드물 것입니다. 결론은 예언 사역은 교회가 잃어버린 권능의 사역이며, 속히 그 사역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언은 세례 요한, 혹은 예수님 시대까지만 존재한 것이며, 설혹 그 이후일지라도 성령께서 오실 때까지만 존재한 은사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래 성경을 참고해 보십시오.
1)성령 강림 이후에도 선지자란 직임이 있었고, 예언 사역을 했습니다. 아가보나 빌립 집사의 딸들이 그 예입니다.
(행 11:28)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행 21: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2)신약 시대의 모든 교회에는 예언 사역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언 사역자를 통해 바울에게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언케 하였는데, 각 성에서(교회가 있는 각 성)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행 20: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3)성령의 임재는 반드시 예언 현상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으로, 성령이 임하시면 자연스럽게 그가 하나님의 마음과 시각을 갖게 됨으로 예언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 2:17-18)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4)성령께서는 교회의 덕을 위해 예언의 은사를 부어주시며, 이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로마 교회에 주지시킨 사실입니다.
(고전 12:8-11)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롬 12: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제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는 가르침 하나만으로는 교회를 교회답게 할 수 없으며, 예언 사역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목회 사역에서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다. 예언 사역을 부정하고 정죄하는 말이나 행위는 비성경적이며, 성령을 거스리거나 소멸하는 행위다. 그러한 말을 하는 이는 종교의 영에 미혹된 상태로 무지하여 용감한 자이거나 사단에 속한 자이다.”
5. 예언 사역을 하는 교회는 성경보다 예언 사역자의 말에 더 권위를 두는가?
이 말은 예언 사역을 부정하기 위해 공격하는 사람들의 주무기 중 하나입니다. 그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목사님의 설교를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흔히 목사님의 설교를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설교집들이 서점에 나오거나 제게 보내져 옵니다. 그 설교집들 가운데는 책장에 꽂아두고 오래오래 보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저자의 훌륭한 사상이나 설교형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설교집은 (실례이지만) 재활용을 버리는 날에 종이 뭉치에 넣어 버리는 책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말입니다. 그 책을 성경처럼 책장에 꽂아놓았다고, 혹은 쓰레기더미에 집어넣었다고 제가 죄를 지은 것인가요? 가르침의 은사를 통해 작성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아무도 그 설교집을 성경보다 더 권위 있게 받아들이는 이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예언은 그렇게 못합니까? 목사나 교사나 복음 전도자나 예언 사역자, 그 어떤 은사를 가진 이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성경보다 더 권위를 두는 이는 없습니다. 심지어 쓰레기 처리를 해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에 대해 아무도 나무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6. 예언 사역자를 훈련을 통해 세우는 것은 잘못인가?
많은 이들이 예언의 은사를 성령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므로 학교와 같은 것을 두어 예언사역자를 양성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그 말을 아주 용맹무쌍하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목사나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은 성경입니다. 다음 성경을 보면 예언 사역자가 두 가지 경로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암 7:14-15)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15)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하나는 세습(?)이나 훈련을 통해서입니다. ‘선지자의 아들’(암 7:14)이나 ‘선지자의 생도’라는 말이 이를 입증합니다(왕하 2:3, 4:1, 6:1, 9:1... 등등).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돌발적으로 세워진 선지자입니다(암 7:15-아모스가 그 한 예임). 이 두 가지 경로 중 세습이나 훈련에 의한 방법이 보다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아모스의 말에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현재 교회에서는 은사가 임할 때 아무 훈련 없이 그냥 사역자로 세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가르침을 주로 하는 목사는 교단마다 다르지만 보통 7년을 훈련합니다. 전문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 개 교회에서 또 얼마나 훈련을 합니까? 여러분의 교회에서는 교사를 가르치지 않고 그냥 세웁니까? 봉사는 또 어떻습니까? 제대로 된 봉사는 훈련을 통해서 얻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역자를 은사가 있다고 해서 훈련 없이 교회에서 사역하게 합니까? 예언 사역자만 훈련 없이 세워야 합니까? 과거 우리 한국 교회에 많은 예언 사역자들이 훈련 없이 세우지고 활동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에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는데, 그렇게 된 책임에는 목회자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목회자 자신이 예언이 무엇인지 몰랐고, 예언의 은사가 임한 사람을 교회의 덕을 위해 어떻게 훈련시켜야 할 지 그 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양한 시행착오 끝에 예언에 대한 훌륭한 참고서들이 출판되어 있어서 목회자들이 관심만 가지면 얼마든지 예언 사역자를 훈련시켜 세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책을 읽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예언에 관한 책 몇 권을 소개합니다.
1. 스티브 탐슨, 『당신도 예언할 수 있다』 순전한 나드.
2. 릭 조이너, 『예언 사역』 은성출판사.
3. 케네스 해긴,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을 수 있는가?』 믿음의 말씀사.
4. 피터 와그너, 『목사와 예언자』 진흥.
5. 그래엄 쿡, 『이렇게 예언하라』 은혜출판사.
6. 빌 해몬, 『선지자와 개인적 예언』 나단.
추신 : 예언의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워낙 영향력이 강력하기 때문에 거짓 예언 사역자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나 예언 사역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 교회에 주어진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스리는 이는 그러한 거짓 예언 사역자를 색출해내고, 교회 안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감독해야 하고, 사역자들을 교회의 덕을 세우는 자가 되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감독자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가 이 글을 읽는 분들과 섬기는 교회에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출처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케 하는 신부동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 하늘
첫댓글 너무도 귀한 내용이니까. 한사람도 빼놓지말고 다읽으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싸인하세요. 이내용은 시험볼거예요 열심히 공부하세요.알았나요.
아멘!!!
아멘~~~~~~~~
싸인 합니다..
아멘
예언의 관심은 오늘이라는 말이 감동으로 옵니다

그렇습니다,,,예언은 미래를 볼수있지만,,그것이 
정된것이 아니고 주님의 계획하신 뜻을 알고 거기에 순
하며 나아갈수있도록 나를 변화시키고 인도해주는것입니다,예언에 대해 제대로 알고 설명할수있도록 더 공부하고 지혜와 계시의영을 
라고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사역자들을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덕을 세울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는 말씀 은헤가됩니다 훈련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정
히 주님을 알고 따르는 신앙인이 됩시다 
순
주님 말씀에 순
주님 지혜와 계시의 영을 저에게 부으소서 교회 덕을 쌓는자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가끔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예언사역에 관하여 어떻게 이야기 하면 좋을까

고민한적이 있었는데..그 고민이 뻥
뚫렸네요 
너무 완벽한 해석입니다.성경속 구절로 너무 시원하게 해석해주셨습니다.이제 예언사역에 관하여 부정하게 이야기하는 분들에게 시원하게
설명할수있게 되어서 너무 기쁩니다 
열심히 읽고 또 읽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