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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세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할 수 밖에 없었고, 해야만 했던 개발이지만, 이 개발로 인해 비둘기는 삶의 터전을 잃었다. 사람 곁에서 사랑을 알고, 평화를 즐겼던 비둘기는 더 이상 사람 곁으로 오지 않고 늘 쫓겨만 다니는 집 없는 신세가 되었다. 개발이란 것이 이렇게 비둘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난장이 식구들의 삶의 터전을 없애가면서 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난쏘공이나 성북동 비둘기나 핍박받던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구나 난쏘공은 우리 사회가 인간의 비인간적인 모습, 더불어 살지 않고 자기의 이익만 챙기며 남의 고통은 돌아볼 줄 몰랐던 현실들을 깨닫게 해준다.
난쏘공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뫼비우스의 띠‘ 다.
교사는 두 손을 교탁 위에 얹었다. 그는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끝으로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입체는 없는지 생각해보자. 내부와 외부를 경계지을 수 없는 입체, 즉 뫼비우스의 입체를 상상해보라. 우주는 무한하고 끝이 없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간단한 뫼비우스의 띠에 많은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내가 마지막 시간에 왜 굴뚝 이야기나 하고, 띠 이야기를 하는지 제군은 생각해주리라 믿는다.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이제 나의 노력이 어떠했나 자신을 테스트해볼 기회가 온 것 같다. 다른 인사말은 서로 생략하기로 하자. |
이 사회는 꼬이고 꼬인 뫼비우스의 띠 모양이다. 즉, 내가 생각하기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쳤던 난장이의 모습은 실패한 인간으로서 사회로부터 소외를 받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여 부를 갈취한 은강 그룹은 사회에선 성공한 모델이 되어 칭송을 받는, 선악이 구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사회의 모순이다. 교사는 대학에 가서 올바른 생각과 말을 하며 사는 사람이 되도록 제군에게 당부한다. 즉, 사회에 편협되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뫼비우스의 띠가 되지 말라고 당부한다고 생각한다.
이 난쏘공은 결코 작품이 쓰여지던 1970년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재 2006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는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대립은 지속될 것이다. 어쩌면 더 심화될 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회의 모순 속에서 여전히 안주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 남을 착취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장이 가족처럼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 속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지섭과 윤호처럼 이 사회의 모순점에 대해 깊이있게 성찰하고 고민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도 다해야 하지 않을까.
난쏘공은 내게 많은 과제를 남겨주는 책이다. 책에 대해 나름 평을 했지만 아직 작가의 뜻을 관철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초심의 자세로 책을 읽고 또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