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형제 사랑'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결 법전과 연
결되는 것으로(레 19:18)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형제와 자매를 연결하여 연대감을 갖
도록 하는것이다(22,23절; 2:11,12,17; 3:1,12; 10: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속적
으로 지녀야 할 독특한 특징이다(Lane). 저자는 당시의 수신자들 사이에 신앙이 약해
진 자들을 결속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다(Bruce, Hewitt).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앞절에서 권면한 '형제 사랑'을 더 확대하여
'손님 대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손님 대접'에 관한 권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
르침을 반영한 것이다(마 25:3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 여
행과 그 여행을 위한 숙식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행 21:4,7,16,17,
Thuren, Morris, Hewitt). 그러기에 손님 대접에 대한 권면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중
요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다(딤전 3:2; 딛 1:8; 벧전 4:8,9, Bruce,
Lane).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본문은 아브라함의 일을
암시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대접
하였을 때 세 손님은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에 대해 예언하였다(창 18:1-21). 본문은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하는 덕
목임을 시사한다.
=====13:3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
를 생각하라 - 본문에서 저자는 '형제 사랑'에서(1절) '손님 대접'으로(2절), '손님
대접'에서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에 대한 대접'으로 확대하고 있다. 당시 '갇힌 자
들'은 심한 대우를 받아서 음식이나 의복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음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다면 그들은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
야만 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들을 도와주면 그들 역시 갇힌 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이 갇힌 것처럼 생각하여 도와주라고
한다(고전 12:26, Morris, Bruce). 한편 '학대받는 자'는 신앙 때문에 악한 대우를 받
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11:36,37, Lane).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앙 때문에 고난
을 당하는 소외된 자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 학대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그
들과 교제를 나누어야한다(10:32-34; 11:36-38, Filson).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하나님이 심판하시
리라 - '모든 사람'의 헬라어 '엔 파신'(* )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Morris, Hewitt). (1) 중성으로 이해하면 단순히 성적인 순결 뿐만 아니라 모든
형편 속에서 결혼을 중시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2) 남성으로 이해하면
모든 남자들이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타당
하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단순히 남자에게만 해당
되는 문제가 아니며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결혼 생활 속에서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
니하고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하기 때문이다. 한편 '침소'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
테'(* )는 성적인 정결(淨潔)과 함께 사용된 용어로 성생활에 대한 완곡
한 표현이다(Morris, Lane). 성적인 범죄를 통해 침소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
정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결혼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
나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17절). 저자는 성적인 죄를 범하는 자
에 대해 두 부류로 묘사한다.
(1) 음행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2)간음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시에 표현한 서원에 불충실하여 이를 어기며 성적
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이러한 두 부류의 행위는 불법적인 성 행위를 가
리키는 것으로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Bruce, Lane, Hughes).
=====13: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
인들에게 자주 강조된 금지 명령이다. 돈에 대한 탐욕은 타인의 권리를 생각지 아니하
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두 주인을 섬기게 하여 결국 하
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범죄하게 만든다(마
6:24; 눅 16:13; 딤전 6:10, Bruce, Thuren). 그 결과 우상 숭배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저자는 본절에서 현재 주어진 여건과 물질에 대해 만족할 것을 권면한다. 저
자는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본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용문은 없으며 단지 필로
(Philo)가 동일한 인용문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On the Confusion of Tongues, p.
166). 하지만 저자의 인용문과 필로의 인용문이 동일하다고 해서 저자가 필로의 것을
인용했다고(Moffatt, Spicq) 생각할 이유는 없으며 도리어 다른 헬라어 역본에서 인용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Morris, Lane, Michel, Delitzsch, Riggenbach).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하나
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8:15; 신
31:6; 수 1:5; 사 41:17).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
신다는 사실은 바울과 같이 현재에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게 한다(빌 4:11-13)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 본문은 시 118:6의 인용으로 앞서 언급된 인용문과 연결되
어 '약속과 응답'의 형태를 취한다(Michel). 하나님께서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며 담대해질 수 있다(2:14,15, Lane). 한편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는 부정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
를 대항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롬 8:31, Hewitt, Morris).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 '인도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헤구메논'(* )은 본장에서 본
절을 제외하고 두 번 더 나온다(17,24절). 17절과 24절은 현재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반면에 본절의 '톤 해구메논'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Hewitt,
Bruce). '톤 헤구메논'이 가리키는 인물에 대해 혹자는 '장로'라고 추측하며(Morris)
혹자는 '주의 제자'라고 주장하나(2:3, Hewitt) 명확하지 않다. 한편 '인도하는 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공동체 내에
서나 선교 사역 때에 설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행 4:29,31; 8:25; 13:46, 빌
1:14, Michel, Riggenbach) 지도자들이 청중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구원하시
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달하였음을 나타낸다(1: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속사
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 '종말'의 헬라어 '에
크바신'(* )은 매일의 생활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며(Hughes, Bruce)
동시에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Moffatt, Westcott). 그리
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심지어 죽
기까지한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잡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
고 따라야 한다.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 혹자는 본문이 이 세상의 지도자들은 죽고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께
서는 변함이 없으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예수께서 '어제'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5:7),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
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며,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계
심을 나타낸다. (2) 혹자는 본절이 7절과 9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
다(Hewitt, Lane).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어제' 과거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믿
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전파하였으며 '오늘' 수신자 공동체가 '어제' 전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상한 가르침과(9절) 바꾸려고 하는 상태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구속이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의 타당성을 지닌다.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
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마신'(*
)은 9:10에서 사용된 '먹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자들은 이
러한 식물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
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
와 연관된 혼합주의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
'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
된 예법에 블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
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뿐
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
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
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
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
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잇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
서 먹을 권이 없나니 - 혹자는 '제단'의 헬라어 '뒤시아스테리온'(*
)이 문자적인 희생 제단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Hewitt) 그것은
'희생 제사'에 대한 환유(換喩)로(Bruce, Lane)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8:1-5; 9:11-14,24-26; 10:11,12). 이것은 은유적으로 영문 밖
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암시한다(12절; 12:2, Spicq, Montefiore,
W. Manson, Andriessen).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은혜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Bruce). 그러기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이나 그에 따른 급례에 의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희생 제사
에 의해서 거룩해지며(12절; 9:14; 10:10,14) 그 제단은 레위기에 규정된 법을 따르는
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6:5, Kuss).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제사는 구약에서 규정한 제사 규례나 정결 규례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며 온전케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를 문자적으
로 신약 시대의 성만찬과 연결지어 제단을 성만찬 식탁으로 해석한다(Schroger). 그러
나 이러한 해석은 본절 내에 성만찬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때 타당하지 않다.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
어 갔으며(레 16:14,15)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렸다(레 16:27).
한편 '영문 밖에서'라 함은 다음 절에서 언급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한다.
구약의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시하는 제단에서 먹을 권리
를 갖고 있지 못하며 여전히 구약의 제의에 따라 사는 자들은 골고다에서 예수의 죽음
을 통해서 성취된 속죄 사역의 결과인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다(Lane).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
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영문 밖에서' 희생 제물을 불살라 버린 것과(11절) 성문 밖
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고난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예
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Lane).
(1) 성문 밖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속죄일의 속죄제를 나타내는 것으로(J. Jeremias).
예수의 고난이 대제사장적인 속죄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조건임을 시사한다
(10:12). (2)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당
하는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예수께서 정죄받으심은 물론 백성들
에 의해 배척(排斥) 당하심과 급기야 처형 당하심을 시사한다. 한편 '거룩케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세'(* )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제시하지 못
했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서만 거룩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13:13
그런즉 우리는...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영문 밖'에 대한 견해는 두 가
지이다. (1) 혹자는 그것이 지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천상적인 영역으로의 이동을 의
미한다고 주장한다(Thompson). (2) 혹자는 그것이 유대교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Morris, Bruce, Hughes, Westcott, Filson).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
자가 타당하다. 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
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영문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2절)
거룩한 영역에서 제외 되었으며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로 이해되었다(레 13:46; 민
5:2-4; 신 23:11; 눅 6:22). 그러나 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하
던 영문 밖은 거룩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
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Bruce). 따라서 저자는 아직도 옛 언약과 유대교의 범주인 영
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 능욕을 지고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
요한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지는 일' 즉 유대교를 떠
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
도께서 당하신 고난 곧 십자가 상의 죽음은 이방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유
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신 21:22,23; 갈 3:13,
Hewitt, Morris). 그fl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와 동일하게 수치
와 치욕으로 이해된 십자가를 짐으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
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복음서의 제자도와 동일하다(마
10:37,38; 막 8:34-38).
=====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본문은 그리스도
인들이 영문 밖에 나아가기 위해서 '능욕'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
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
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10,16) 곧 하늘의 도성이
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
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
게 된다.
=====13:15,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맘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 '예수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아우투'(* )는 문자적으로 '그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
옛 언약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지
는 것임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
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
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
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
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되었음을 시사한다(Hewitt). 한편 '항상'은 그리스
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
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
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Lane).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옅매니라 - 본문은 호 14:2(LXX)의 인용으로 '찬
미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
대한 셈어적인 표현이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
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
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다(Lane, Morris, Bruce).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함'
의 헬라어 '유포이이아스'(* )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
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스'(*
)는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
누는 관용(寬容)을 가리킨다(Morris, Lane, J.Y.Campbell).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Thuren).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행위를
동반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
서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
마음로 열납하신다(Lane).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 본절의 '인도하는 자'는 7절의
'죽은 지도자'와는 달리 현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7,24절) 당시 배교의
위험과 이해 관계에 직면하여 지도자들을 잘 따르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었음
을 암시하는 듯하다(2:1-4; 3:7-12; 5:11-6:12; 10:23-29; 12:12-17,25-29, Hewitt,
Lane, Riggenbach).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 본
문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존경을 받고 복종함을 받는 근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부여하신 목회적 권위와 책임감이다. '경성하기를'의 헬라어
'아그뤼프누신'(* )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목자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막 13:33; 눅 21:36; 엡 6:18, Spicq, Bruce, Morris). 지도자
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영적 생활과 복리를 위해서(10:39, Morris,
Bruce, Michel) 날마다 깨어 있어 돌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
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다. 한편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는 지
도자들의 책임을 나타낸다. 참된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책임 이행에 대한 답
을 요구하실 때 응답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 교사들과 같이 이상한 다
른 가르침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인을 돌보고
양육한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히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도자들을 섬기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양떼들을 돌보
기 위해서 경성(警醒)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불순종과 고집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근
심스러운 일이 된다면 그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
지 못할 것이다(Bruce, Hewitt, Morris).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1인칭 복수인 '우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우리'가 순수한 복수로 저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다(Westcott, Kent). (2) 혹자는 '우리'가 서간체 복수로 저자 자신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Bruc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Morris).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1인칭 단수인 '내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자신을 위
하여 기도해 줄 것을 수신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
니 -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문 즉
저자가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이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더럽혀진 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되므로 하나
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9:14). 저자가 본절에서 자신
의 '선한 양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방에 대한 방어책으로
(Morris, Lane, Hewitt) 저자 자신이 지도자로서 선한 행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를 잘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Bruce).
=====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재방문을 위한 기도 요청은 저자와 수신자들간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
으며(Hewitt, Lane) 또한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를 방문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
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방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저자의 투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Hewitt, Morris, Bruce). 왜냐하면 23절에서 디모데가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방문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에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확실히 있으나 무엇인지는 분명
하지 않다.
=====13:20,21
본문은 송영이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 본문은 사 63:11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를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본문은 모
세에 대한 진술이다. 저자는 모세에 대한 진술인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미디안의 목
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부터 이끌어 낸 모세를 유형론적으로 해석하여 '양
의 큰 목자'이신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Lane, Bruce). '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메간'(* )은 본서에서 예수의 우월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며
(4:14; 10:21) 모세와 예수의 비교 또한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의 우월성을 드러내
는 저자의 독특한 논증 방법이었다(1:1-4; 2:1-4; 3:1-6; 8:1-6; 10:26-31;
12:18-29). 저자는 예수께 '큰 목자'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 사 63:11에서 모세에게
칭한 '양 무리의 목자'와 대조를 이루게하며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보다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께서 더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 - 본문은 슥 9:11(LXX)의 영향을 받았다. '언약의 피'는 그리
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희생 제사임을 시사하며(9:20; 출 24:8) '영원한'은 예수의 속
죄 사역이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1:8; 5:6,9; 6:20; 9:12,14,15;
10:12,14). 예수의 사역과 희생은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러한 영원
한 언약은 새 언약과 동일한것으로 옛 언약올 대신하였다. 본문은 다음에 언급될 예
수의 부활과 연결된 것으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신 영원한
언약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계심
을 나타낸다(9:20, Morris, Hewitt, Lane).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 본문은 본서 내에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구절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비준(批准)하신 하나
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Michel, Cranfield, Thuren). 한편 '이끌어
내신'의 헬라어 '아나가곤'(* )은 두 언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하
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나타낸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간섭은(출 6:7; 20:1,2; 레 19:36; 25:38; 26:13; 신 5:6; 사
63:11-14) 죽은자로부터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위를 예표한다(Lane). 예수를 죽
은 자 가운데서 이끝어 내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새로운 언약 즉 영원한 언약
을 맺으시는 근거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거가 된다(21절, Cranfield,
Thuren).
평강의 하나님이 - 이 칭호는 구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
도인들이 만든 하나님의 칭호라고 볼 수 있으며(Lane) 하나님께서 평화의 근원이시며
수여자이심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수신자 공동체 가운데 배교의 위험과 지도자와의
불협화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Bruce, Morris, Hewitt). 그래서 저자는 송영에서 수신
자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서로간의 불화를 억제하고 지도자에게 순복하여 평안을 이룰 것을 강조한다(17
절, Spicq, Thuren, Morris, Bruce).
모든 선한 일에 너희들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 '모든 선한 일에'
의 헬라어 '엔 판티아가도'(* )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
이다. (1) 혹자는 '윤리적인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선한 윤리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Spicq). (2) 혹자는 선한 일을 하
나님 자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살후 2:17, Michel). (3)
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해석한다(마 7:11; 눅 1:53; 갈 6:6; 약
1:17, Lane,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
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수신자 공동체가 필요
로 하는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하여 주셔서 온전하게 함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있도륵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본문은 앞서 언급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와
상호 보완적이다. '즐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12:28) 하
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15,16절)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이렇
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중재자이시며 새 언약 공동체 내에
서 하나님의 능력을 중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Lane,
Morris).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륵 있을지어다 아멘 - '그에게'에 대해서 혹자는 문법
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와 모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고
주장하나(Morris)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Bruce).
왜냐하면 본문의 송영은 죽은 자로부터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
의 응답이기 때문이다(Lane).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
니라 - '형제들아'와 '용납하라'는 말은 저자가 앞서 기술한 배교나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격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 그리고 지도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훈계와 비교되어 부드럽고 애정이 서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
을 '권면의 말'이라고 정의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술한 것이 책망보다는 격려차 위
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다시 한번 본서의 내용에 주목해 줄 것을 암시하고 있
다. '권면의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로구 테스 파라클레세오스'(*
)는 행 13:15에 나오는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
'설교를' 지칭한다(Bruce, Morris, Lane). 한편 '간단히...썼느니라'가 가리키는 부분
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13:18-25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nox).
(2) 혹자는 13장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 Anderson). (3)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
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Lane).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썼느니라'의 헬라어 '에페스테일라'(*
)는 '편지를 썼다'라는 의미로 본 서신 전체를 가리키며, '간단히 썼다'는 것은
유대 문서나 초기 그리스도인 문서에서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
다(Hewitt, Lane).
=====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부른 것은 디모
데가 수신자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서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놓인 것을'
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렐뤼메논'(* )은 완료 시상으
로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역의 임무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E.D. Jones). (2) 혹자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
면 '아폴렐뤼메논'이 전자의 견해처럼 사용되었을 경우는 목적어를 동반하나 본절에서
는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아폴렐뤼메논'이라는 단어는 흔히 감옥에
서 풀려나는 경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Brice, Morris). 그러나 디모데가 언제 어디
에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
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먼저 알고 전하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방문할
것을 밝히고 있다.
=====13: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 저자는 본문에서 앞서 언급
한것과 마찬가지로 '인도하는 자'와의 문안을 통해서 갈등 관계가 아니라 선한 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에게 순복(順服)할 것을 암시한다(7,17절). 한편 '모든 성도'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속해 있는 도시 전체의 성도
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2)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의 성
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저자
는 수신자들에게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여 화평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화평을 이름
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의 헬라
어 '호이 아포테스 이탈리아스'(* )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당시 이탈리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이탈리아 내
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picq). (2) 혹자는 이탈리아
밖에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하거나 이탈리아가 고향인 자들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호이 아포 테
스 이탈리아스'는 이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
렵다(Morris, Bruce, Hewitt).
=====13: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림에게 있을지어다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는 비록 흔히 사용되던 인사법이라 할지라도 본서를 마감하는 종결 인
사로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저자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속
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절; 2:9; 4:16;
12:15). 저자는 마지막 인사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 배교(背
敎)의 위험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물론 지도자와 수신
자들간의 갈등관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Lane).
===============================히브리서 주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