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랴는 북쪽 지중해 해변에 있으며, 갈멜산에서 남쪽으로 37km지점에 있고 악어강과 하데라강 사이에 위치하는 항구도시이다. 가이사랴에 최초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페르시아 시대(BC 568-332)에 페니키아 사람들이 지중해 해변을 따라서 한 마을을 건설하였고 헬라 시대(BC 332-37)에 번성하였다. BC 259년 문서인 ‘제논 파피루스’에 처음으로 이 도시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스트라톤 망대’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BC 103년 하스모니안 왕국의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이 도시를 정복하였고 로마 시대(BC 37- AD 324)에 헤롯(BC 37-4)에 의해서 BC 22-10년 사이에 12년에 걸쳐서 건설하였다.
벼랑 궁전 유적
가이사랴는 거대한 항구 도시이었으며 그 당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로마의 오스티아 안티카와 함께 지중해의 3대 항구였으며 아테네의 피레쿰 항구보다 더 큰 항구를 건설하였다. 가이사랴는 자연 항구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공항이며 깊이가 36.6m나 되는 바다를 돌로 채웠으며 돌 하나의 크기가 가로 15m, 세로 3m, 높이 2.7m 가량 되는 큰 돌도 있었다. 이 인공항의 너비는 61m에 달했다. 헤롯은 로마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 거대한 항구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칭호를 따라서 '가이사랴(Caesarea)' 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도시는 발전을 거듭하여 큰 상업 중심지가 되었고, AD 6년 이후로는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로마 총독들이 거주하는 수도가 되었다. AD 66년경에 일어난 제1차 유대인 대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로마 군단들의 전초 기지였으며, 제2차 유대인 대반란(바르코크바 반란) 때에는 반란을 진압하기위한 중심 도시가 되었다.
AD 3-4세기에는 여러 종교의 사람들이 섞여서 살았고, 그 중에는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오리겐과 유세비우스가 살았다. 초대 교부였던 오리겐(AD 185-254)은 AD 231-250년 까지 머물면서 이곳에서 수많은 기독교 서적을 수집해 도서관을 설립하였고,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AD 260-340)는 ‘교회사(Ecclesiatical History)’등 많은 책을 저술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십자군 시대의 성채
AD 640년 아랍의 정복과 파괴로 폐허만 남게 되었고, AD 1101년 5월 17일 프랑스 십자군인 루이 9세 왕에 의해서 가이사랴 성벽이 다시 건축되었고 성벽 밖의 주위로는 해자(성 밖으로 둘러서 판 못)를 파서 바닷물을 채워 넣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비하였다. 현재 가이사랴에 남아있는 성벽은 십자군 시대의 성벽이 남아있으며, 헤롯 시대의 가이사랴는 십자군 시대의 가이사랴보다 3배가 더 컸고, 비잔틴 시대의 가이사랴는 무려 8배가 더 컸다고 한다. AD 1265년에 회교도인 이집트의 맘룩 왕조에 의해서 가이사랴는 정복되고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AD 1873년 PEF(The Palestine Exploration Fund)에서 처음으로 과학적인 조사를 하였고, 1959년-1964년 사이에 이탈리아 조사단이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벌였다. 현재 가이사랴는 국립공원이며 거대한 고고학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현재도 발굴되지 않은 지역이 많이 있다.
※ 가이사랴에 남아있는 중요한 유적
(1) 극장(The Theatre)
가이사랴의 야외극장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모든 극장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헤롯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그 후 수백 년간 사용되었고 약 4,000석 가량의 관중석을 가지고 있다. 이 야외극장 무대에서 연극이나 노래를 부르면 지중해 바다 바람이 불어서 뒤쪽까지 깨끗하고 선명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현재도 좌석 번호가 있고 사용되는 야외극장이다.
(2) 벼랑 궁전(Promontory Palace)
바닷가 쪽으로 돌출하여 왕궁이 건축되었으며 서쪽 편에는 저수지도 발견되었다.
(3) 원형 경기장(Herodian Amphitheatre)
헤롯의 원형 경기장
거대한 ‘U’자 형으로 헤롯 시대에 만들어 졌으며 전차 경주나 운동 경기, 검투사와 맹수와의 싸움, 오락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원형 경기장의 길이는 250m, 폭50m, 원래는 12줄의 좌석이 있었고, 약 10,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다. 관중석에 앉으면 경기장이 한 눈에 들어오며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으므로 시원한 바다 바람과 아름다운 지중해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으므로 전망이 아주 좋다. 경기장 북쪽에는 철로 만든 전차와 말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4) 십자군 시대 성채(Fortified Medival City)
AD 9세기(아랍 시대)에 요새화된 도시가 항구를 둘러쌓았고 아랍시대 성벽은 후에 루이 9세 왕에 의해 십자군 시대에 요새화된 성채에 합쳐졌다. 이 성채는 길이가 900m, 높이 13m, 9m 깊이의 해자로 만들어졌으며, 북쪽, 동쪽, 남쪽의 성문과 몇 개의 비밀 통로가 있었다.
(5) 항구(The Harbour)
가이사랴 항구시설
거대한 인공적 항구(Sebastos)가 헤롯 시대에 건설되었는데 바깥쪽 부두와 함께 400m 길이의 방파제가 만들어 졌다. 안쪽 부두와 정박지 구역에는 기둥들과 배를 잡아매는 돌들이 세워졌다. 방파제는 로마 시대에 붕괴되어서 가라앉았고 항구는 비잔틴 시대의 황제 아나스타시어스(AD 491-518)에 의해서 수리되어졌다. 그 후 아랍 사람들의 정복으로 항구는 버려지고 쓸모없게 되었으며 AD 9세기 무렵에 다시 재건되었다. 십자군 시대에 새로운 방파제가 지어졌고 비잔틴 시대의 돌기둥들이 사용되어졌다. 안쪽 부두는 진흙으로 메워졌고 주거지역이 되었다. 오늘날의 부두는 현대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 지어졌다.
(6) 신전 광장(The Temple Platform)
헤롯 시대에 만들어진 광장이 사치스러운 신전 기초 지대로 세워졌으며 이 신전은 로마와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것이었다. 후에 비잔틴 시대에 8각형 교회가 세워졌고 아랍 시대에는 모스크(회교 사원)가 세워졌고 십자군 시대에는 대교회가 세워졌다.
(7) 히포드롬(Hippodrome; 'Circus')
AD 2세기 무렵에 마차 경주를 위해서 만들어 졌다. 길이 450m, 폭 90m, 3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경기장 중간에 이어져 있던 기둥들은 발굴되지 않았고 27m 높이의 반암 오벨리스크가 지금도 경기장 안쪽으로 세워져 있다.
(8) 높은 수로(The High Level Aqueduct)
로마 비잔틴 시대의 높은 수로
가이사랴에는 강이나 샘, 먹는 물이 없기 때문에 로마와 비잔틴 도시는 수니(Shuni spring)샘 으로부터 먹는 물을 수로를 통해서 운반해왔다. 다른 수원지들인 상부 악어 강이 후에 첨가되었으며, 높은 수로는 세 개의 작은 수로로 만들어 졌고 두 개의 수로는 필요에 따라 추가되었다. 교각은 아치형으로 만들어 졌으며 때로는 바위 터널을 뚫어서 연결하였다. 수로의 길이는 7.5km, 높이 8m, 1km당 20cm의 표고차를 유지하면서 건설되었다.
⑼ 낮은 수로(The Low Aqueduct)
헤롯 시대의 낮은 수로
이 수로는 나할 타니님과 나할 아다의 만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며 이 수로의 길이는 5km, 높이는 5.5m 이었고 표고차를 이용해서 운반되었다. 바다 쪽의 높은 수로는 로마 비잔틴 시대의 수로이며 육지 쪽의 낮은 수로는 헤롯 시대의 수로이다.
※ 성경과 관련된 가이사랴의 내용들
⑴ 초대 교회 일곱 집사중 한 명인 빌립이 복음을 전했고, 빌립의 집이 가이사랴에 있었다(행8:40; 21:8)
⑵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할 때 형제들이 바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갔으며 바울이 다소행 배를 타고 떠난 곳이다(행9:30)
⑶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가 살았던 지역이며 베드로가 최초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푼 곳이다.(행10:1-48)
⑷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가 가이사랴에서 백성들에게 공적인 말을 할 때 사람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라고 높였을 때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므로 주의 천사가 치므로 곧 벌레가 먹어서 죽임을 당했다(행12:20-23)
⑸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 때 머물렀던 곳이다(행21:8, 16)
⑹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기까지 2년 동안 가이사랴에 갇혀 있었다(행 23:33; 24:27).
지중해 해변에 위치한 가이사랴를 보면서 사도 바울이 선교 여행을 떠났고 로마로 재판받기 위해서 떠났던 바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악한 헤롯은 지중해의 거대한 항구 도시로 가이사랴를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항구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항구로 만드셨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도시로 바꾸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