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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이 오십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천국중개사
오늘은 방언기도에 대한 오해와 그 실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 믿음안에서도 방언기도에 대해서 오해들이 있고 주관적이고도 인위적인 체험으로 인하여 주님 밖에서 행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부디 바른 마음으로 양식삼아 영적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임하기를 간구하는 마음입니다.
방언기도의 개념
고린도전서 14장 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성경에는 방언기도에 대해서 여러 체험들과 이야기들이 있지만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말씀구절이 방언기도의 개념과 실체를 정확히 표현해주고 있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풀어보겠습니다.
방언기도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예를 들어, 책상앞에서 책을 보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때 방언기도를 한다고 합시다. 비록 내 몸은 책상앞에서 공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방언을 말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지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고 합시다. 이 때에도 방언을 말하게 되면 이것은 식구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된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육이 어떤 환경과 처지에 놓여있든가에 방언을 말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는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방언기도를 할 때에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사람을 제지하거나 중간에 끼어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개야 전화왔어", "그만 집에 가자", "언제 기도 끝나니", "조용히 좀 해", "나 먼저 갈게"
이런 말들로 하나님과의 대화를 저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그다지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다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상대와 대화를 하고 있는데 주변사람이 불쑥 끼어들어 대화를 저해하고 자기 하고픈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교양이 없다, 무례하다, 비상식적이다 생각합니다.
때로는 기분이 언짢을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기도하는 사람을 저해하고 중간에 자신이 끼어드는 것은 그다지 나쁘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사람을 방해하고 저해하는 것은 하나님과 담을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영혼이 영적 소양을 배우도록 연단해 가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런 방언기도는 누가 하는 것이냐. 바로 내 영이 하는 기도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다시 말하면, 방언기도는 내 마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이 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으로 볼때 기도에는 마음의 기도가 있고 영의 기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의 기도란 자신이 하고픈 말을 입술을 통해 하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묵상으로 할 수도 있겠구여.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도 보듯이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셨지요.
이로 보건대 방언기도와 마음의 기도는 영적으로 다르다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기도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비밀이란 육적인 뜻에서 오는 은밀하고도 누설금지의 그런 의미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방언기도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아들으시는 기도라는 의미에서 비밀스럽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이 말을 두고 많이들 오해들이 있고 통역은사에 대해서 오남용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두 자매가 있습니다.
A자매는 영적인 것을 사모하지만 아직은 영적 개념이 부족합니다. 아직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시는 분입니다.
B자매는 담대하기도 하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루는 B자매가 A자매에게 그러지말고 방언기도를 해봐라. 영은 비밀을 말한다고 했으니 내가 너의 속 마음을 알아보고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주겠다 합니다.
A자매는 평소 B자매가 믿음이 좋고 하나님과 밝히 기도하는 것처럼 보여서, 자기 혼자 있을 때 나쁘게 생각하고 때로는 야한 생각도 한거, 누구 좋아하는 거, 남몰래 죄 지은거 등등 자기의 은밀한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날까봐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방언기도와 통역함에 대한 영적 혼탁입니다.
영이 말하는 비밀이라함은 나 혼자 있을 때 은밀히 죄 지은거, 자기 혼자만 아는 자기 생각과 마음의 비밀스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말씀으로 혼이 다스려지고 마음이 영으로 일구어져야 하는 신앙의 과정일 뿐이지,
영이 말하는 비밀이라 함은 지금껏 체험으로 볼때,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
둘째로, 내 영적 상태를 하나님께 고하고 도움을 구하는 기도
셋째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리는 기도
넷째로, 중보기도
다섯째로, 악을 물리치는 기도,
여섯째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흘러나오는 내 영 자체의 기도
일곱째로, 하늘의 천군 천사로 막을 치는 기도
등등 하늘의 신령한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하는 것인데, 도대체 내 자신 조차도 내 영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인지 모른다라는 것이 바로 방언기도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살아오면서 이성과 지식, 교양등으로 얼마든지 포장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화인맞은 사람이라해도 얼마든지 지식이 출중하고 교양있고 마음이 선한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조차도 내 마음을 모른다 하지만서도 한편으론 내 마음을 내가 얼마든지 포장하고 위선적으로 치장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만큼은 그리하지 못합니다.
영은 이 세상의 지식과 이성, 논리, 교양, 체험, 감정, 성격, 기질, 유전등으로 포장하고 치장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이는 순전히 사람만이 가지는 근본의 존재로서 영만큼은 자신조차도 포장하고 감출 수 없는 근본의 영역이기에,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볼때 외모에 집착하지말고 마음에도 속지말고 영을 봐야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영분별 은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0절 "...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 "
세상에서도 말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지만서도 많이 배우고 교양을 쌓은 사람은 얼마든지 자기 나름대로의 선한 양심을 갖고 있고 주변으로부터도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인격있는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영을 분별해 볼때는 밝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상태가 진짜로 그 사람의 상태이기 때문이요, 그 사람의 근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방언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가
그렇기에 영이 죽은 사람은 영의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시 말하면, 방언기도를 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위에서도 언급을 드렸듯이 성령의 은사중 하나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을 받은 사람에 한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성령이 내주하시지도 않았는데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일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 방언을 하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방언기도를 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성령을 받은 사람에 한해서 나타나는 은사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죽은 듯 고요히 잠들어 있던 우리 영은 깨어납니다. 성령을 받아 영이 깨어 살아움직이는 자들에 한해서 방언기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보면 <저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은 것 같은데 방언을 해요. 저 방언은 가짜인가요. 마귀가 준 방언인가요.>
이런 문의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요. 영의 세계와 그 체험을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으로 몰아가다보니 이상한 해석들과 짜집기가 있는 것이지, 의외로 영의 세계와 그 법칙은 단순 명료하고 정확합니다.
저 사람이 성령을 받지 않은 것 같다라는 것은 자기 주관적이 해석일 뿐입니다. 그 해석에 자신이 매몰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본인 스스로도 이런 말들을 하곤 합니다.
<저는 성령을 받지 않은 것 같은데 방언이 나와요. 이것은 제가 임의로 하는 말일까요. 아님 누구 말만따라 마귀가 저를 속이는 걸까요>
이런 분들은 성령체험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보니 이런 혼탁스러운 개념을 갖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제로 체험을 했어도 분별이 안되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성령체험이 되지 않아 자신이 성령을 받은 것을 왠지 의문스럽고 부인하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고린도전서 14장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보시면 방언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후절에 가서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며 구하라 하였지요.
사도바울의 이 말의 영적인 의미와 그 의도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은사주의에 빠지거나 신비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은사 구하다가 사단의 미혹에 빠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방언 은사보다 큰 은사를 구해야 하는가
각종 방언을 말하는 능력이 출중했던 사도바울은 방언을 은사중에 큰 은사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각종 방언을 더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그리 언급을 한것은 있어도 방언 하나를 말하는 것을 갖고서 큰 은사, 능력있는 은사라고 표현하지는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씀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능력행함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등을 방언말하는 은사보다 더 높이 크게 두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방언 말하는 자는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여 더 큰 은사를 구하라고 하고 있지요.
이 말의 의미를 바로 아셔야 합니다. 내가 방언을 말하니까 이제는 산기도다니면서 더 큰 능력을 받기 위해서 으샤으샤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고 간구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는 마음이 임해 있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4장 1절)
이런 것 없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단순히 더 큰 은사인 예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 능력행함의 은사들을 구하는 것은 영적으로는 젖먹은 아이가 되는 것임을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을 통해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가보면 은사를 구하러 다니시는 분들을 종종 보곤 합니다. 남들이 받은 은사를 열심히 경청하며 자신도 따라해보는 분들이 있고, 자신이 받은 은사체험에 대해서 후배들에게 나눠주시는 분들도 있고, 무언가 사람들에게 드러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은사가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서 쓰임받고 싶다고 부르짖는 분들도 종종 보곤 했습니다.
이런 분들의 이런 행함은 그만큼 믿음이 되고 더 잘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십분 이해가 되나,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사도바울의 영적 마음은 아직 이해를 하고 있다라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더 큰 은사는 노력과 열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을 말하는 은사보다 더 큰 은사를 구해보신 분들은 제 말의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방언은사는 의외로 쉽게 받았는데 그보다 더 큰 은사는 그런 식으로는 주어지지 않을 뿐더러 별도의 공의를 쌓아야 하고, 공의만 쌓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의위에 주님의 은혜가 덧입혀져야 임해지는 것임을 말입니다.
공의가 부족한데 더 큰 은사를 받았다라고 떠들어대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짜입니다.
오늘날 시대가 혼탁하다보니 각종 예언를 하시는 분들이 많아졌지요. 인터넷에도 종종 보이던데요, 결국 그들의 예언이 맞았습니까? 안맞았지요. 실컷 추종하다가 그 결과를 보고서야 속았네 미혹이었네 하시는 분들이 또 인터넷에 각종 그 사람을 비난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구여. 어떤 분들은 자신이 죽느냐 사느냐 으샤으샤 해서 무언가 체험을 하나 하면 그것으로 원하는 은사가 임한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들도 있곤 합니다.
이 참에 드리는 말씀인데요, 더 큰 은사는 말입니다. 영분별로 아는 것입니다. 어떤 예언자의 말이 그 때가서 맞나 안맞나 이걸 보고서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상황과 맞물려서 그럴듯하게 예언한다고 맞는 것처럼 보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영분별로 아는 것입니다. 영분별은 자신의 어떤 예민한 기질과 출중한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얼마나 육신의 생각이 할례되어졌느냐에 따라 그 때서부터가 시작일 뿐인지라 영분별 은사는 방언은사하고는 사뭇 다른 공의를 쌓아야 하고 그만큼 마음을 할례하는 연단과 고난이 있기도 합니다.
예언자 추종하시다가 낭패를 보신 분들, 더 큰 은사를 사모하시다가 사단의 미혹의 덫에 걸려보고 정신차리신 분들은 남의 영 분별하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영부터 먼저 분별해 보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통역의 은사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방언통역이란 무엇인가
은사중에는 방언통역이 있습니다. 방언기도는 아무도 알아듣는자가 없고 내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인지라 결국 방언기도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방언기도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때문에 하나님이 아시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 통역자가 없는 경우에는 교회에서 하지말라고 했습니다. 통역자가 없으니 주변 사람들은 무슨 말 하는것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개중에는 실족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교회에 하나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오해하시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통역자가 없으니 방언기도 자체를 금하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이 통역할 수 없으니 성도들이나 누군가가 교회에서 방언기도를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말씀을 오해한 어리석은 짓입니다. 제가 감히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방언기도를 금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대화가 금해진 교회는 어찌 되겠는지요.
사도바울이 교회내에서 통역이 없이는 방언기도를 하지말라라는 것은 통역자가 반듯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방언통역은 방언기도보다 더 큰 은사입니다.
이런 은사는 위에서도 언급을 드렸지요. 방언을 받는것마냥 쉽게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요, 누구에게나 다 임하기를 바라는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교회에서 젖먹이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아무 앞에서나 오남용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정 그렇게 방언기도가 신비스런 체험이고 표현하고 싶어서 안달이라면 통역자를 두어서 질서있게 기도하고 통역함으로 인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방언통역으로 인하여 교회내에 오해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금철예배 끝나고 2부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촛불로 분위기 잡고
다 서로 손을 잡고 분위기가 무르 익으면 한명이 방언기도를 하면 그 중에 먼저 그 방언기도가 어떤 기도인가 주관이 오는 사람이 통역해주는 것으로 하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성경을 근거로 이렇게 한다 하겠지만서도 이것 또한 통역의 은사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역의 은사가 아니라 그냥 분위기 잡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이 성령이 충만하여 남의 방언기도를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통역의 은사는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이 충만하여 거기에서 오는 성령에 의한 측량이지 은사로서 주어진 통역의 은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이 충만하면 실제로 영분별 은사나 예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가 임하지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성령으로 느껴지는 측량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은사인지 측량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측량에서 오는 것은 성령충만함이 떨어지면 이젠 측량도 아니되어지지요.
그럼에도 그 측량을 은사로 잘못 착각하여 여전히 자신에게 그런 은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단의 미혹이 되는 것입니다.
은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사를 받았다하여서 무조건 표현되어지고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는 거두어지고 표현이 안될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네 사람들은 누군가가 한번 어떤 은사가 표현되어지면 우르르 몰려가서 자기 것도 좀 알아봐달라고 헌금 내밀고 머리 내밀고 그러지요.
어떤 대형교회 다니시는 남집사님이 자신이 기도하다가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소 그 은사를 사모했고 누군가에게 기도를 해주었는데 그 사람이 나은것 같다고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님의 그 마음은 알겠으나 신유의 은사를 아직 받은 것은 아니니까 더 기도해보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더니 불쾌하게 생각하시더군요. 정말 신유의 은사를 받은 것이라면 그 이후로 제 귀나 주변에서도 알게 되었을 것인데 깜깜무소식입니다.
자 그러면 통역의 은사는 더 큰 은사임은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언기도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술로 자기말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또 사람들은 통역이 된 것으로 생각들 합니다.
한때 여기서도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의미심장한 글귀들로 활동하셨던 분들 중에도 그런 체험을 갖고서 방언이 통역된 것으로 알고 예언을 하셨던 분들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군요.
저는 분명히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방언통역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물론 방언통역중에 그런 일들도 있겠으나, 그분에게는 통역으로 주어져서 튀어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고 그 말로 예언을 하는 것은 결코 맞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권면보다는 자기의 그런 체험을 더 중히 여기더군요. 어쩔수가 없지요.
또한 자기의 방언기도를 자신이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통역의 은사가 은혜가운데 일시적으로 임했거나 또는 위에서 언급을 한것처럼 성령이 충만하여 그 충만함으로 어느정도는 측량되어진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아니면 아예 자기 주관적인 해석일 수도 있구여. 분별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분별이 됩니다. 정말로 사심없이 정직한 마음에서 겸손함으로 되짚어보면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분명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방언통역은 공의를 좀 쌓았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실때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있고 악이 없는 마음을 이루었다면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그 영혼에게 통역의 은사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통역의 은사를 받게 되면 방언기도를 들으면 마치 한국말 듣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려집니다. 또는 자신이 남의 방언기도를 통역하게 될때에는 아무런 육신의 생각도 없이 입에서 그 해석이 나가는데 영으로 보면 빛이 그 사람의 입에서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방언은 외국말인가
그런데 사도행전을 봅시다. 사도행전 2장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방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던 각종 나라와 민족의 사람들이 자기 말로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는 것을 듣고는 놀랍니다.
위 구절로 인하여 기독교안에서도 방언기도는 각종 나라의 말일 뿐이지 영적으로 의미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오늘날 이상한 말소리로 하는 방언기도는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외국어로 하는 방언이 임한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가짜라고 하지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방언기도를 금하는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간혹 보면 어떤 사람은 영어 한마디 못하는데 영어 방언이 임했다하고 러시아 방언이 임했다 하기도 하구여.
이 참에 이 사건이 무엇인지 방언통역에 대해서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오순절날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각 나라의 민족과 말들의 외국어 방언이 아닙니다. 각종 방언 말하는 은사가 있다고 하였듯이, 당시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하나님께 영이 드리는 비밀의 기도 말 그대로 하늘방언이였고,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했던 고난의 공의도 있고 순종과 믿음이 컸던지라 그 은혜가 크게 임하여 각종 방언말하는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러하였지요.
그런데, 사도행전 2장 9~11절에서 보듯 각종 나라의 민족의 사람들이 자기 말대로 제자들이 방언하는 것을 들은 것은, 하나님께서 순간 그들의 귀를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하는 각종 방언기도가 자신들의 말로 해석되어지고 놀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방언통역은 하나님께 마음이 온전하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더 큰 은사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섭리가운데 그 영광을 위해서 간혹 이런식으로 은혜를 주시어 통역의 은혜를 주시면 상대의 방언기도가 자기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역의 은혜를 받아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라도 통역이 먼지 그 은혜를 체험해 보신 분들은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온전히 믿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엘리사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와 표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헌물을 탐하였고 저주로 인해 문둥병이 들었지요.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열왕기하 6장에 보시면 아람 군대에 성이 포위되었을때에 엘리사의 기도로 인해 영안이 열리니 하늘의 군대와 병거가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되지요. 이런 영안이 열리는 은혜는 쉽게 임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와 같듯이,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외국어 말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하는 방언기도가 맞습니다. 우리가 오늘날은 신앙을 하더라도 종교적으로 이성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쪽으로 흐르다보니 이런 은사와 은혜가 영감이 안오다보니 방언기도를 외국어로 몰아가려고 하면서 자신이 방언기도 못하는 것을 합리화 하려고 하는 경향들도 있는데요, 성령의 깊은 기도로 당시 상황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해 보십시요.
방언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
그래서, 우리가 방언기도를 하게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영적으로 가장 좋을까요.
방언기도는 고전 14:14절에서 말하듯,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방언기도와 마음의 기도는 별개인지라 방언기도 충만하다하여서 마음의 기도가 상달되어 응답이 이루어지고 그 확신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마음의 할례도 그렇구여.
우리는 주변에 방언기도를 아주 쎄게 하시는 권사님들 종종 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중에는 혈기나 욕심, 질투, 판단, 비난을 버리지 못하는 분들도 꽤 되십니다. 이것이 바로 방언기도와 마음의 기도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하여, 사도바울은 어찌 말합니까.
15절에 보시면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도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영과 마음이 하나되어 기도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사도바울은 믿음의 분량이 장성한지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분량이 장성해질수록 영이 혼을 다스리고 지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되는 사람은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다 하였지요.
일전 글에도 말하였듯이, 영혼이 잘 된다라는 것은 신앙생활 으샤으샤 열심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그렇게 열심히 하면 범사가 지킴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이 혼을 다스리고 지배하니 육신의 생각이 흐미해지는 것이요 점차적으로 영의 생각이 충만해지지요. 이런 사람이 영혼이 잘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요, 어떤 환경과 처지에 있어도 육신의 생각이 발동안하고 생각과 마음을 영으로 지킴받으니 평안하고 하나님의 의도로 이어지니 만사가 지킴받는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언기도 신나게 하면서도 마음과 생각에서는 세상적인 염려와 근심이 가득하기도 하고 잡념이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본인들 스스로도 아실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방언기도는 충만했어도 마음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혼이 잘되어 영으로도 마음으로도 같이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은 따로 정리하는 것 없이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늘의 신령한것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영과 마음이 하나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