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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고린도전서 3장 10-15절
금, 은, 보석으로
먼저 오늘 본문을 보시면 14절과 15절 때문에 주로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시면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공적이라는 말은 쉽게 일, 노력과 같은 말인데, 일한 바 그리고 노력한 바가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불타버리면 해를 받는다고 말하니까 마치 상급론에 대한 구절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상에 대해 이야기 하긴 하지만 그런 의미가 핵심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일단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3장 5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5-9) 여기 보면 지금 사역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그라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8절에서는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는다고 말씀하시지만,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초점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께 그 초점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사역자들 스스로 심고, 물줄 수 있는 게 아니라 5절 중반부에 보시면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사역한 것밖에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5절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읽은 본문이 상급론에 대한 말씀, 다시 말해 우리가 일하고 노력한 만큼 어떤 대가를 받는다는 것을 중심으로 한 본문이라면 앞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리 없습니다. 오히려 8절이 중심이 되어 풀어지는 그런 말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은 상을 중심으로 풀어지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상에 대해서도 분명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급을 주신다고 할 때 그 상의 의미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상의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다 내 노력, 내 열심, 내 공로에 대한 보상적인 차원이 큽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많은 부분 이런 내용으로서 가르칩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이 여기서 상급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그런 차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내 노력, 내 열심의 출처는 어디인가 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상급을 말할 때도 공로에 대한 상급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상급도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때문에 본문을 상급론에 관한 내용으로 보는 시각은 다소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후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을 보시면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내 노력, 내 열심을 말하겠습니까? 당연히 노력에 대한 상급, 열심에 대한 상급을 말할 수 있는 건 아닌 겁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도 보시면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우리는 다 받은 것으로 일하는 겁니다. 내게 있는 것은 다 받은 것입니다. 욥의 고백처럼 주시는 분이 여호와이신 겁니다. 결국 이런 말씀들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말미암았기 때문에 주로부터 받은 것으로 일을 하고, 또 노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자랑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자랑할 수 없는데 공로에 대한 상급을 운운할 수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따라서 본문 안에는 분명 상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이 중심이 되어 풀고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또한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 일한 만큼 그리고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그런 개념으로 고린도전서 3장 8절이나 오늘 본문, 그리고 성경의 다른 본문들이 나오고 있지 않다는 걸 반드시 염두해 두시고 오늘 본문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10절 초반부를 보시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이 하는 모든 일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전제된 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뿐더러, 하나님의 은혜 없이 뭔가를 했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바울의 고백이 있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런데 9절은 사도 바울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말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이었기 때문에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사도라는 직분까지 주셨다. 그래서 그 은혜에 너무 감사해 다른 사도들보다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을 내 삶을 돌아보니 열심을 낸 것도 실제로는 내 열심이 아니더란 겁니다.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요,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 직분을 따라 열심을 낸 것도 하나님의 은혜더라. 하나님의 은혜 없이 된 일이 하나도 없더라. 이것이 지금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5절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전3:21)는 것도,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가 전제되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랑거리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이 신앙과 그 삶에서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는 바울이 항상 전제하고 있는 이 사실, 그리고 성경 전체가 전제로 하고 있는 이 사실을 믿음의 내용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뭔가를 했다는 게 다가 아니라 그렇게 한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여름 홍수철이면 홍수에 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미리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겨울이면 불조심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은 강조하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조하고 강조해도 항상 물난리와 불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선행성을 강조하고 강조해도 우리의 본성은 항상 우리의 자리를 마련해 두려고 하기 때문에 주객이 전도될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교리적인 부분에 있어 감리교는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인간의 결심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말하는 장로교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조차도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는 뒷전이고 인간의 자리를 마련해 둔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감리교의 교리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바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 안에서조차 감리교적 색채를 지우기가 어려운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행성을 결코 삭제하거나 뒷전으로 밀쳐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어도 내 실력으로 하는 게 아니다. 그 실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분명 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애쓴 바가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신 분도 실제로는 앞서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말할 것이 없다.” 이 사고가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불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래도 좋다는 쪽으로 가면 그것 역시 정당한 신앙의 내용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간혹 은혜를 말하면 꼭 “우리 마음대로 살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은 탓이겠네요!”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방향의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은혜 때문에 정당한 열심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으로 가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 그리고 오늘 본문이 전체적으로는 이런 방향 가운데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따라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따라 충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충성할 수도 없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충성하는 쪽으로 밖에 갈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충성 자체가 내 쪽의 자랑거리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바울은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그리고 11절에 보시면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말씀하십니다. 비슷한 의미로 에베소서 2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 그러니까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초를 잘 닦아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뒤에 올 사람이 그 위에 건물을 세운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삼았지만, 그러나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기 때문에(골2:3) 사실 터라고 말하고 있지만 터가 신앙의 모든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터를 닦아 두고 그 위에 뭔가를 세운다고 하니까 마치 터 자체로 부족하고 뭔가 보자란 듯 생각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미 터 자체가 모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바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터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라면 터 위에 건물을 세울 때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좀 어려울 수 있는데, 집중하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터라고 할 때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진리의 내용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 진리의 모든 것입니다. 그 진리의 내용을 하나님께서는 몇몇 사도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성경으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록된 성경은 결코 오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을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성경 기록자들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체로 볼 때는 오류가 있지만, 적어도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내용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을 지키셔서 오류가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도 이후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폐하셨을 때 그 기초를 가르치는 일에 있어 정당한 해석을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소위 이단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나, 역사적으로 교리적인 논쟁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말할 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방식 안에서 오류 없이 진리만을 가르쳤다는 그런 의미가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 후로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는데, 그때 세우는 것은 기초 이상을 세운다는 것이 아니라, 기초에 근거하여 기초가 모든 것이 되게 하여 세운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 이미 기록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게 되는데, 그때 어떤 해석을 하느냐의 문제가 대두되게 되는 겁니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진리이지만, 그것을 해석할 때 역사적으로 이단이 나오고, 교리적 논쟁이 나온 것처럼 이미 터가 있는데, 그 터 위에 어떤 해석을 하여 세우느냐 이 문제에 대한 걱정이 바울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 당시 만해도 그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런 문제를 여기서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 소위 한 교회를 담임하는 그런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를 가르치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진리의 내용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 이후 그 교회를 와서 사역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바울의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사도 바울의 가르침까지 의심하게 되는 그런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고린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동일한 문제로 드러났습니다.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 사도들의 서신을 받아 보던 많은 교회들이 이런 문제로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지금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용의 핵심은 10절 중반부에 나오는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는 말씀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초와 상관없는 가르침이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시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터로 삼고,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그 위에 건물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건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와 상관없는 가르침일 수는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금이나 은, 보석으로 짓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나무나 풀, 짚으로 짓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뜻하신 날에 그 공적을 밝힐 때 불이 나와 타는 것과 타지 않는 것으로 나뉘게 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결국 터이신 그리스도 위에 상부공사를 하여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일, 어떤 노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르침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떤 가르침인가?” 바울은 여기서 금, 은, 보석과 같은 가르침이 있고, 나무, 풀, 짚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고 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불이 나와 그 공력을 시험하게 될 때 금, 은, 보석과 같은 가르침은 남아있게 되지만, 나무, 풀, 짚과 같은 가르침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것이 지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막13:31; 눅21:33) 뿐만 아니라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15:13) 그러니까 우리가 가르치는 바 하나님께서 심고자 하시는 것을 심지 않으면 뽑힐 것이고, 하나님께서 심고자 하시는 바 그것만 영원히 남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시대를 통해 하나님께서 오류 없이 성경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셨지만, 그 뒤에 세움 받은 자들이 성경을 가르칠 때 어떤 가르침으로 가르치느냐,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것만을 남기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것으로 인간의 것을 남기느냐, 없어지지 아니할 말씀만을 가르치느냐, 아니면 천부께서 심지 않으신 내용을 심어 결국 뽑힐 말씀을 가르치느냐 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금, 은, 보석 그리고 나무, 풀, 짚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좀 길지만 주의 깊게 들으시길 바랍니다. “만일 전체적인 상부공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기초를 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금으로 다져놓은 기초 위에 값싼 재료들로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의 터 아래 매장시키는 악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그는 ‘금이나 은’, 그리고 ‘보석’의 교훈으로써 그리스도를 방어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기초와의 조화에서 상부구조를 의미하고 있다. 더구나 이 교훈이 그리스도 아닌 다른 근원에서 끌어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며, 오히려 그 건물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가 계속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할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다른 한편, 나무나 풀, 짚으로 묘사되어 온 그 가르침은 기초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귀결이 나온다. 말하자면 그 가르침은 인간에게서 날조되어 나온 것이며,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우리를 압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인간의 날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선포에 의하여 이룩되기를 원하신다.” 결국 인간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은 나무, 풀, 짚이요, 다 사라질 것으로 있는 겁니다. 무엇만이 영원히 남느냐? 하나님의 말씀만 남습니다. 천지는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이 말씀에 합당한 가르치만 남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선포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세움 받은 사역자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은 단지 사역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말씀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도들이 이 말씀의 대상이라고 할 때는 적어도 무엇이 금, 은, 보석이지, 그리고 무엇이 나무, 풀, 짚인지 분별하기를 바라고 이 말씀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14절과 15절에 보시면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여기 보시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 그러나 구원 얻는 것에는 지장이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로 보건대 지금 금, 은, 보석의 가르침이나 나무, 풀, 짚의 가르침은 분명 그리스도를 터로 삼고,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가르침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소위 알고 있는 이단적 가르침, 즉 그리스도를 부인한다거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등의 그런 가르침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서 건축하기는 하되, 그러나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인간적인 견해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고, 혹은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한 순수성에서 빗나가 곁길로 가기도’(칼빈) 하는 그런 내용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맨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마치 상급론 중심으로 푼다든가,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우리의 공로에 의한 상급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열심을 부추긴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한 순수성에서 빗나간 그런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하나님 앞에 남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닌 겁니다. 비유적으로 하자면 나무, 풀, 짚과 같은 가르침인 겁니다.
좀 더 합당한 분별을 위해 로마서 12장 6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여기 보면 ‘예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예언은 베드로후서 1장 20절과 동일하게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럼 그 말씀을 믿음의 분수대로 한다는 것은 뭐냐?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사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이 믿음이라는 자리는 참으로 독특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믿음만큼 많이 말하는 건 없는데, 믿음에 대한 이해를 너무도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거기에 넌지시 믿는 자에게 초점이 되는 경향이 다반사입니다. 물론 복음서를 보면 ‘믿어라’는 말씀을 있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마9:28), 그리고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9:2) 어떤 일을 행하시기도 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9:22)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다보다 믿음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마치 우리 편에 어떤 결정적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더란 겁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믿음을 말할 때 여기까지인가 묻고 싶습니다. 믿으라고 하면 그냥 내 쪽에서 믿음을 발휘하는 그런 것으로 끝이냐?
우선 믿음이라고 말할 때 성경이 무엇을 제거하고 있느냐?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시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기 보면 예수를 믿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그 믿음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혈통, 육정, 사람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방식이란 적어도 혈통도 아니며, 육정도 아니며, 사람의 뜻도 아닌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찾지는 않겠지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믿음이라고 말할 때 행위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것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행위가 아닌 것,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라고 말할 때조차 인간이 그렇게 믿기로 했다는 식의 행위가 들어갑니다. 믿음 자체가 마치 공로입니다. 이게 넌센스인 겁니다. 에베소서 2장은 그래서 더욱 분명하게 못을 박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가장 먼저 나오는 게 뭡니까? ‘그 은혜에 의하여’ 은혜가 나오면 당연히 행위는 아닙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인데, 그것도 너희에게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행위에서 난 것, 인간에게서 출발한 것이 아닌 것, 이게 믿음입니다. 당연히 복음서를 푸는 것도 이것이 전제되어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믿음 할 때 믿는 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믿음의 대상이 지금 그에게 어떤 분으로 계시는가? 그리고 그분의 뜻은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로 와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이 로마서 12장 6절과 관련하여 어떻게 말하느냐?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라고 말할 때 인간에게 돌려지는 모든 영광을 제거하는 것이 믿음의 분수대로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돌려지는 모든 영광을 제거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분수대로의 해석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성경을 믿음의 분수대로 보고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많은 부분 인간에게 초점을 두고 가르치고 배우는 가운데 있습니다. 소위 대형교회라고 칭해지고 있는 많은 교회들이 복음의 순수함을 저버리고,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마치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듯 그렇게 설교를 하고 있고 또한 배우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본성에 잘 맞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펠라기우스적이고, 알미니안적입니다. 초점이 다 인간에게 있습니다.
한 예로 교회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많은 부분 ‘비전’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얼마나 인간적 요소가 있느냐 하면 항상 비전하면 뭘 하는 사람, 다시 말해 기능적 사람이 되는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비전이 어떤 위치에 오르는 것으로만 가 있지,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대해서는 뒷전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비전을 말할 때 우리의 존재됨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비전뿐만이 아닙니다.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항상 인간적 요소를 덧칠합니다. 그래서 역사 안에서는 찰스 피니와 같은 인물도 나온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부흥은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그래서 직접적이지는 않겠지만 오늘날 교회성장학이란 과목이 생겼고, 대형교회들의 많은 부분이 이런 길을 따라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과연 그렇게 말하더냐는 겁니다.
오히려 모든 부와 명예, 권력을 가진 솔로몬을 통해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다시 말해 부와 명예, 권력 다 가져봤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더라!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지향해야 하느냐 하면 부, 명예, 권력이 비전이 되고 부흥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하면 된다가 아니라, 바울의 말처럼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워(빌4:11)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자로 사는 것,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항상 비전, 부흥이라고 하면 “어떤 존재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 보다는 부, 명예, 권력 이런 쪽으로 훨씬 많은 부분이 가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냐? 아니면 인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덧칠한 것이냐?”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자면 철저히 인간에게 돌려지는 모든 영광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철저히 인간의 것은 볏겨 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 넌지시 인간의 자리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사라지더라도 하나님만 남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분수대로 성경을 보는 시각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이 바로 이 방향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금, 은, 보석으로 지어야지, 나무, 풀, 짚이어선 안 됩니다. 사라질 말씀을 남기는 게 아니라, 영원토록 있을 하나님의 말씀만 남겨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개척으로 시작한 이유,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도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란 신학자 가운데 바빙크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의 평가에 의하면 분명 카톨릭으로부터 개혁을 시작한 인물은 루터이지만, 루터 이후 루터주의와 우리가 지향하는 개혁주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루터주의는 인간론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신론적으로 생각한다. 루터주의의 경우 구원사 중심으로 생각하여 더 깊이 올라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반면 개혁주의는 역사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념, 곧 영원한 하나님의 성정에까지 올라간다. 루터주의의 경우 칭의가 교회의 항존적인 출발이라면, 개혁주의는 선택이 교회의 핵심이다. 루터주의는 “어떻게 인간이 축복에 이르느냐?”의 문제로 시작한다면, 개혁주의는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에 이르시느냐?”의 문제로 시작한다. 루터주의의 경우 유대주의와 행위거룩에 반대하는 싸움이라면, 개혁주의는 이교도주의와 우상에 반대하는 싸움이고, 루터주의는 현상에 만족하고 신앙을 통하여 부여받은 축복에 안락하지만, 개혁주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에 되돌리고 (만)물의 원인을 추적하며 미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되게 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이 “어떻게 인간이 축복에 이르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 제거해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에 이르시느냐?” 여기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역사하시느냐?” 성경은 그걸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어떻게 일하시고, 어떻게 자신의 영광을 위하시느냐?” 여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거기에 “무식한 것보다 똑똑한 게 낫다. 바울을 봐라. 베드로보다 똑똑하니까 더 귀하게 쓰임 받는 거 아니냐?” 이런 말이 나올 수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입니다. 앞선 말씀으로 보자면 5절에서 나온 것처럼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일할 뿐입니다. 이 시각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쉴 수 없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내용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경의 내용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 다 우리 쪽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 그런 실천적인 삶이 나올 수 있는 내용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다의 일보다 마리아의 말씀 듣는 것을 더 좋은 편이라 말씀하셨고, 심지어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던 겁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9) 어떤 일을 해서 일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자리가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분별력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분별력은 하루 아침에 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때문에 가르치는 자로 있다면 말씀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쌓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이것을 위한 준비로 이미 역사를 통해 이루어놓은 교리적 이해가 말씀사역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말씀사역자뿐 아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보면 교리는 어렵다는 이유로 등한시 하는 분위기입니다. 반면 QT와 같은 분위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물론 QT하는 것 좋은 것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거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역사적인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는데도 단순히 나 혼자만 묵상한다고 하여 다시금 이단이나 삼단, 사단으로 빠지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 그리고 신앙고백과 같은 것은 뭐와 같냐 하면 이것과 같습니다. 이미 쌓아 올려놓은 10층의 건물과 같습니다. 10층에서 내다보면 그냥 1층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그리고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그렇지 더 정확하게는 매우 깊은 시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없이 본다는 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 1층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쌓아 올려놓은 것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의 시각이 신론적으로 되길 원합니다. 이미 역사를 통해 쌓아올린 선배들의 시각이 여러분이 시각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는데, 정말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고, 그 성경을 통해 여러분의 신앙과 삶을 보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설교할 모든 내용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에 노력을 요할 것입니다. 물론 듣게 될 모든 설교를 다 기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설교 해 놓고도 잊어버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고를 가져야 하는가? 이것만큼은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일에 주체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에게서 어떤 것도 나올 수 없음을 아시고, 오로지 하나님만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산물은 다 제거할 수 있는 신앙과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