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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의 서막
햇살이 뜨겁고 강해서 길바닥에 부딪히고 튀어오르는 반사광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쪽의 눅눅한 습기를 품고 있는 햇살과 더위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중동 쪽은 모든 것을 바짝 말려 버릴듯한 마른 더위였다. 흘러내린 땀은 금방 말라 버리는 통에 드러난 피부에는 하얀 염분이 분을 바른 것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12시가 가까워졌으므로 시장과 도로에는 눈에 띄게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었다. 곧 상점들은 셔터를 내리고 오후 5시까지의 점심 휴식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장은 다르다. 이제 이곳 제다의 시장은 인터내셔널 마켓(International Market)이 되어 있었다. 12시에서 1시까지의 점심 휴식시간에도 영업을 한다. 가게문을 닫는 집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수출업자들과 수입업자들로 언제나 벅시글거리고 있는 것이다.
홍성구 과장은 시장의 입구에 들어서자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의 땀을 닦았다. 그가 선 쪽의 바로 옆 가게에서 흘러나온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게 피부에 와 닿았다.
시장은 수십 개의 길과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붕이 있었기때문에 햇살이 내리쬐지 않는다. 그리고 양쪽 가게에서 뿜어대는 강력한 일제와 독일제, 미제의 에어컨 바람이 더위를 몰아내고 있다.
이윽고 홍성구는 정신을 차린 듯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발을 떼었다. 인도인 노동자 한 명이 손수레에 가득히 커다란 박스 더미를 올려놓고 다가왔다. 검은 얼굴에서 번들거리는 흰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비껴서는 홍성구의 코앞으로 박스 더미들이 지났다. 아래쪽에 영문으로 표기된 'MADE IN KOREA'가 뚜렷했다.
알 아지크의 가게는 길모퉁이에 있었으므로 자리가 좋았다.
"오오, 홍. 어서 오게."
40대 초반의 아지크가 들고 있던 옷가지를 내려놓으며 활짝 웃었다. 무성한 콧수염 밑으로 흰 이가 드러나 보였다.
"대만 제품을 많이 들여놓았군요."
그의 손을 잡으면서 홍성구가 말했다. 가게의 한쪽에는 갓 들여놓은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 전에 내가 얘기했던 유아용품이야. 그걸 대만에서 가져왔네."
그들은 가게의 끝쪽에 있는 조그만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이 책상에서 아지크는 도매로 물품을 넘기기도 하고 소매상에게 서너박스씩 팔기도 한다. 저녁때면 쇼핑나온 사람들에게 대여섯 장씩 셔츠를 팔 때도 있다. 그러나 연간 3천만 불 가까운 물량의 수입상담도 대부분 이 지저분한 철제 책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머리에 지저분한 터번을 두른 늙은이가 다가왔다. 얼굴은 주름살투성이로 흰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나 있다.
"무얼 들겠나?"
철제 금고를 열면서 아지크가 물었다.
"콜라."
"펩시 두 개."
디나르 지폐를 받아 쥔 늙은이가 몸을 돌렸다. 시장의 가게에 마실것을 공급하는 가게의 심부름꾼이었다. 한국의 다방 역할쯤 될 것이다.
"아지크, 겨울용품 셔츠와 바지를 준비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가게를 둘러보며 홍성구가 물었다. 겨울용품은 석 달 후인 9월말까지 물품 입고가 끝나야 한다. 그러려면 두 달 후인 8월까지는 생산이 끝나 제다로 오는 배에 실어야 하는 것이다. 생산은 2개월쯤 걸리는 것이 보통이므로 지금이 오더를 할 적기였다.
아지크는 빙긋 웃을 뿐 말없이 책상 한쪽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붉은 색 리얄지폐를 끌어당겨 헤아리고 있다.
그들이 돈을 책상 위에 쌓아 두고 자리를 비운다든가 아귀가 맞지 않는 서랍 속에 쓸어 넣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괜히 조마조마해지기도 했다. 불안해서 자리를 떠나고 싶은 때도 있었다. 돌아와서 돈이 모자라면 누명을 쓸까 염려도 되었고 몇천만 원이나 되는 돈이 버려진 것처럼 놓여진 것이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은행에서도 그렇다. 그들은 100리얄짜리 뭉치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값싼 비닐 봉지에 쓸어 넣고는 덜렁덜렁 흔들면서 은행을 나와 거리를 걷는다. 몇천만 원이 넘는 돈이 덜렁거리는 것이다. 한국같으면 오토바이 치기배나 또는 별놈이 다 나서서 그 돈을 강탈할 것이고 그렇게 방심한 사람도 견물생심의 방조죄로 욕을 먹을 것이다.
중동은 도둑의 손을 자른다. 두 번 도둑질을 하면 두 팔이 잘린다. 세번째는 남아 있는 다리 한쪽이다.
"아지크, 날 보자고 한 건 무엇 때문입니까?"
참다못한 홍성구가 돈뭉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아아, 잊었구만."
돈뭉치를 손에 쥔 아지크가 머리를 들었다.
"겨울용품 가격을 내려주게. 자네 말대로 오더를 할 때가 되었어."
"아니, 지난 주에 오퍼시트를 드렸지 않습니까? 가격도 좋게 해서 말이요."
아지크는 웃는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건너편의 알리한테 준 가격하고 똑같더구만. 자네는 아마 알리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겠지. 네 가격이 베스트라고."
그를 바라보던 홍성구는 머리를 돌렸다. 건너편으로 50미터만 가면 알리 아지드의 가게가 나온다. 알리도 아지크와 마찬가지로 그가 개척한 바이어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이유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원수지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이는 비슷한 40대 초반이고 재력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길을 다닐 때도 상대방의 가게 앞을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다. 곱절을 걷더라도 다른 길로 돌아서 간다. 그러다보니 종업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가게 밖에 나와 서면, 상대방의 가게가 훤히 보이는 상황이었으나 홍성구는 그들이 한번도 상대방 가게를 바라보는 것조차 본 일이 없다.
홍성구는 그들 관계가 알리는 예멘인이고 아지크는 사우디인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본토박이인 사우디인들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식으로 일찍부터 이민와서 특유의 근면성으로 사업의 기반을 굳힌 예멘인들을 증오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제다 시장은 예멘인들의 기반이 굳다.
"그건, 도대체 아지크, 누가 그럽니까?"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홍성구가 물었다.
"홍, 난 장사를 한 지 30년이 되었어. 그 정도도 모르고 있을 것 같나?"
아지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자네가 알리하고 거래하는 것은 괜찮아. 하지만 전에 나하고 약속한 대로 내 가격이 알리보다는 낮아야 돼."
"아지크, 당신 가격은 베스트요."
"천만에, 알리하고 같아, 베스트가 아닐세."
홍성구는 머리를 돌렸다. 실제로 알리와 아지크에게는 똑같은 가격을 주었다. 오퍼시트의 받는 사람 이름만 바꾸었던 것이다. 다른 가게들이라면 품목들을 조금씩 변형시키면서 가격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주의를 했겠지만 알리와 아지크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이 서로 상대방의 오퍼시트를 바꿔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홍, 다시 검토해 주게. 겨울제품의 오더를 하려면 말일세."
아지크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위로하듯 두드렸으나 홍성구는 잠자코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하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스,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문이 닫혀져 있는 지사장실을 턱으로 가리켜 보였다.
"누구?"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방문이 열렸다.
"아니, 이사님."
놀란 홍성구는 입을 쩍 벌렸다. 박재호가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웬일이십니까? 연락도 없이?"
다가간 홍성구가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이 사람아. 내가 자네한테 연락할 처지가 아니지 않아?"
"아니, 그래두......."
그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소파에 마주앉았다.
"시장 돌아보고 오는 길인가?"
부드러운 얼굴로 박재호가 물었다.
"네. 하루에 한 번씩은 돌고 있지요. 이사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가 회사를 떠나기 전까지 매일 업무보고를 해왔다. 이제는 하기철이 그의 대신으로 들어왔지만 직접 김영남에게 보고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홍 과장, 내가 갑자기 회사를 떠나게 되어서 미안하네."
남자 직원인 알람이 생수병을 들고 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니, 뭐 저야......."
홍성구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지는 것을 박재호는 놓치지 않았다.
"본사에서 나에 대해서 이야기 많이 하지?"
"네? 아닙니다. 그저 떠나셨다는 이야기밖에. 저야 쫄병인데 누가 저한테, 그리고 바빠서요."
그러나 하기철과 장일수로부터 샅샅이 이야기를 들어온 참이다. 박재호가 이제는 세영무역과 원수지간이 된 것이다. 장일수 이사의 말대로라면 회사를 배신한 더러운 자식이었고 하기철 이사의 말은 회사의 약점을 제일 많이 아는 가공할 만한 경쟁자였다.
홍성구는 잔을 들어 벌컥이며 생수를 마셨다. 박재호는 이제 진일무역의 이사로 출장을 나왔을 것이다. 작년 말에 그가 출장을 나왔을 때는 같이 묵으면서 라면을 끓여 먹고 김치볶음밥도 만들어서 나눠 먹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상관없겠지만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홍성구의 입장이 지독하게 될 것이다. 당장에 귀국조치가 될 것이 틀림없다.
"난 출장 나왔네. 자네도 알다시피 진일무역 사람으로."
홍성구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는 놀람과 흥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회사를 옮긴 것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았을테니까 이야기를 하지 않겠네. 어쨌든 그것은 나와 김영남 씨 둘의 문제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입에서는 김영남 씨라는 호칭이 나오지 못했었다. 홍성구는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장일수가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부자재비용을 할인받아서 나는 모두 김영남이한테 주었어. 그것이 그 사람하고 나하고만의 묵계였지. 부자재업체의 사장도 모르게 말이야."
"......."
"나는 끝까지 의리를 지켰네. 회사를 나오고 나서도 내가 뒤집어쓰고 있었어. 이제 외국에 나오니까 내 규제가 풀린 모양이야. 자네한테 털어놓는 것을 보니까."
박재호는 입술을 비틀면서 웃었다.
"내가 김영남 씨에게 결정적으로 실망한 것은 여자문제야."
담배를 꺼낸 박재호는 라이터를 찾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라이터는 탁자 한쪽의 신문뭉치 옆에 놓여져 있었으나 홍성구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한테서 받은 돈으로 여자에게 집을 사주었어. 딴 살림을 차린 거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 장일수도 알고 있을 걸?"
"이사님."
홍성구는 담배를 꺼내 물고 탁자 위에 놓인 라이터를 집어들어 불을 붙였다. 라이터를 내려놓자 빈 담배를 들고 있던 박재호가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세영 사람입니다. 그런 말씀을 듣기가 거북합니다."
"알고 있어. 자네가 의리 있는 사내라는 걸 말이야. 난 출장 나온 김에 자네가 보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웃음 띤 얼굴로 박재호가 말했다.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자네하고 나 사이마저 원수지간이 될 필요가 있겠나? 안 그래?"
"그건 그렇습니다."
홍성구는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2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무실 안쪽의 살림집으로 들어가서 아침에 끓여놓은 김치찌개를 데우고 밥을 말아 먹고 심었다.
"난 제다에 사나흘 있을 예정이야, 숙소는 만다린호텔로 정해 놓았네. 어때? 오늘 저녁에 식사라도 같이할까? 사업을 떠나서 그저 형님이나 동생관계처럼."
"제가 오늘 시간이......."
홍성구는 팔목을 들고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앗따, 이 사람, 빼기는. 내가 떠났다고 이렇게 당장에 안면을 바꾸기야?"
박재호가 눈을 부릅떴다.
"아니, 그게 아닙니다. 저녁에 팩스를 받을 것이 있어서요."
"직원더러 받으라면 되지 않아? 내가 외로와서 저녁을 사겠다는데, 재워 주지는 못할망정......."
입맛을 다신 홍성구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녁에 뵙죠."
"8시에 로비에서 보세. 난 709호실에 있어."
자리에서 일어서던 박재호가 그를 바라보았다.
"참,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내가 자낼 찾아왔단 이야기는 하지 않는게 좋아. 내가 김영남 씨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야."
"......."
"그 양반은 겉은 대범하고 폭넓게 보이지만 지독할 정도로 세심해. 양면성을 가지고 있네. 그런 말이 들어가면 일단은 넘기지만 내가 찾아온 것을 깊게 생각할 사람이야."
"......."
"그런데 어쩌겠나? 홍 과장이 보고 싶은 것을?"
그러면서 박재호는 씨익 웃었다. 그를 위해 문을 열어 주던 홍성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하란과 알람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판매담당자들은 오후에야 돌아올 것이다. 박재호는 그들에게 아는 척도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홍성구의 눈에도 그들은 박재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전에 사흘 간 묵고 갔지만 그들의 눈에는 한국인이 모두 비슷하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방으로 돌아온 홍성구는 다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2시면 한국시간으로 저녁 8시다. 한동안 시계를 바라보던 홍성구는 수첩을 꺼내어 펼치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버튼을 누르자 신호가 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신호음이 10번쯤 울리자 홍성구는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수화기를 바꿔 쥐었다.
박재호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사장도 곧 제다에 도착할 예정이다. 가슴이 뛰면서 짜증이 났다.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는 그것을 들여다보는데 발신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홍성구는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전 사우디의 홍 과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귀에 익다. 그 동안 몇 번 사장의 집으로 전화를 했었기 때문이다.
"사모님, 사장님 퇴근 하셨습니까? 보고드릴 일이 있는데요."
"없는데요."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럼 회사에 계실까요?"
"모르겠어요."
"네?"
그러자 다시 박재호의 말이 떠올랐다.
"아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사모님."
"네."
전화를 내려놓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홍성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마음은 한결 홀가분해져 있었으므로 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넥타이를 매면서 안방으로 들어선 김영남은 침대 앞에서 멈췄다. 알몸의 상반신을 드러낸 오희주는 아직도 깊게 잠들어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얼굴의 한쪽을 덮고 있었으나 화장이 지워진 맑은 피부가 매끄럽게 보였다.
코에서 내뱉는 가볍고 고른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 왔다. 김영남은 손을 뻗쳐 그녀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걷어내었다. 반듯한 이마 밑에는 가늘고 긴 속눈썹이 가지런히 깔려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진회색의 속눈썹이다. 그것을 입으로 불면 어지럽게 흔들릴 것같이 보였다. 곧은 콧날 밑으로는 윤기를 잃은 입술이 조금 벌려져서는 흰 베개를 입으로 무는 모습이 되었다.
김영남은 입술 끝으로 소리 없이 웃었다. 베개를 들춰보면 틀림없이 얼마쯤 침을 흘려 놓았을 것이다. 마악 몸을 돌리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그녀가 시트를 젖히고 다리를 뽑아내었다. 맨다리가 온통 허벅지에서부터 드러났다. 그리고는 베개를 고쳐 벨 듯이 머리를 젓다가 눈을 떴다.
눈을 깜박이며 딴 사람을 바라보는 듯이 김영남을 바라보았다. 초점이 잡히는지 이윽고 깜박임이 멈췄다.
"지금 몇 시예요?"
잠긴 목소리로 물으면서 손등으로 입가를 닦는다.
"7시 반."
"어마, 벌써."
그녀는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다가 자신의 벗은 몸을 보고는 시트로 가슴을 가렸다. 그러자 엉덩이에 깔린 시트는 당겨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시트가 그녀를 침대 위에 묶어 놓은 형국이 되었다.
"이봐, 그냥 누워 있어. 난 회사에 갈테니까, 이따가 전화하마."
김영남은 몸을 돌렸다.
"늦었어, 아침 먹을 시간이 없어."
아침을 먹겠다고 기다린다면 아마 1시간은 걸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침밥을 챙겨 먹기 위해서 오희주에게 집을 얻어 준 것도 아니다.
"저기요, 잠깐만요."
응접실로 나온 그의 등 뒤에서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지 말고 기다려요."
저고리를 팔에 걸친 김영남은 몸을 돌려 안방을 바라보았다. 그의 파자마 웃도리만 걸친 오희주가 다가왔다. 세로줄 무늬가 있는 파자마는 허벅지까지 내려왔고 한쪽 소매는 걷지 않았으므로 손이 보이지 않았다.
"왜?"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해요?"
그의 앞에 멈춰 선 오희주가 두 팔을 벌려 그의 허리를 안았다.
"아침 인사도 안 하구."
그녀의 맑은 눈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누 냄새와 그녀의 체취가 섞인 향긋한 머리 냄새가 맡아졌다. 김영남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기고는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콧등과 입술로 내려왔다.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오희주는 눈을 감은 채 그의 팔 안에 안겨 있었다.
"입가에서 침 냄새가 나."
오희주가 번쩍 눈을 떴다.
"아직도 침 흘린 자국이 입가에 나 있어."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댄 오희주는 힘껏 그를 밀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까는 네가 침흘리면서 자는 것도 보았어."
"흥."
그녀는 순식간에 마음을 바꾸고는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다.
"술냄새보다는 낫지 뭘. 난 밤새도록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술냄새를 맡고 자는데."
그녀의 머리 위에 턱을 올려놓은 김영남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자주 전화해 주실 거죠?"
오희주가 물었다.
"응."
"아침에 해주세요. 나 늦잠 안 자게, 아니, 아무 때나. 낮에도 좋고, 밤에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면서 김영남이 슬그머니 웃었다.
"내 선물, 안 사와도 괜찮아요."
그러자 김영남이 어깨를 두어 번 흔들며 웃었다. 오희주가 머리를 들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 뜨고 있었다.
"선물 사와야 한다는 말보다 더하군, 그 말이."
"그게 아닌데."
"임마, 듣는 사람한테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김영남은 팔을 풀었다. 아쉬운 감정이 남았고 그것이 좋았다.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수저를 든 채로 문에 다가간 오희주가 물었다.
"나다."
어머니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문을 열었다.
"이제 밥 먹어?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김치하고 밑반찬을 가져왔으니까."
안으로 들어선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무겁게 보이는 비닐가방을 들고 있었다.
"에이구, 집 안 청소는 언제 했니? 저기 커튼 좀 걷어라."
식탁 위에 내려놓은 가방을 풀면서 어머니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너 속에 옷은 입은 거야, 벗은 거야?"
"아이 참."
오희주는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 몇 살이라구 했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옷을 갈아입던 오희주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지난번에도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서른세 살."
거울을 바라보며 그녀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어머니한테는 열살 차이로 만들어 놓았지만 실제는 열일곱 살 차이가 난다.
"그 나이에 아직까지 결혼 안한 것도 꺼림칙해."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방을 나온 오희주는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너한테 이렇게 살림 차려준 것도 수상하고."
어머니는 플라스틱 통에 담긴 김치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놓았다.
"난 너희들 관계를 인정해 줄 수가 없다. 정상적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시작한다면 모를까."
오희주는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김치 한조각을 꺼내어 입에 넣었다.
어머니에게 김영남과의 관계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머니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탓도 있었지만 김영남의 존재가 조금씩 깊게 그녀의 가슴 속에 심어져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이와 그에게 아직도 달려 있는 사생활을 빼면 김영남은 나무랄데 없는 남자였다. 그는 사회적인 지위가 있었고 재력이 있었다. 경험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여유가 있었고 편안했다.
김치는 매웠으므로 혀가 얼얼했다.
"내가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반찬통을 내려놓은 어머니가 멍한 시선으로 오희주를 바라보았다.
"죄진 사람처럼 이곳으로 기어 들어와서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불안해하다니."
"엄마."
"모두 내 탓이다."
어머니는 모든 것이 아버지 탓이라고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자책하는 만큼의 비중으로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비축하고 있다고 오희주는 믿었다.
"너에게 엄마로서 자상하게 신경 써 줄 시간이 없었어."
"엄마, 엄마 탓이 아니야."
오희주는 일어서서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갔다.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어. 곧 엄마를 안심시켜 줄 거야."
뒤에서 어머니를 안은 그녀가 말했다.
"내가 혼자 있고 싶다니까 그 사람이 이 집을 얻어 주었어. 엄마를 무시하고 동거생활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이년아."
오희주의 팔을 떨어내려는 듯 상체를 가볍게 흔들며 어머니가 말했다.
"남자가 얻어 줬다고 냉큼 들어와사는 년이 어디 있어? 가치없게."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그런 것에 얽매인다는 것도 자격지심이야.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어머니는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싫으면 그만이야. 엄마, 알겠어?"
어머니의 볼에 입을 맞춘 그녀는 몸을 떼었다.
"회사가 무슨 무역이라고 했지?"
"그건 왜?"
"내가 좀 알아보려구."
오희주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엄마두, 참, 인정할 수 없다면서."
"그래두."
"내가 차근차근 알려 줄께. 이따가."
힐끗 그녀를 올려다본 어머니는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 사람 오늘 오후 외국으로 출장가니까 엄마, 여기서 자고 가."
"언제 오는데?"
그녀가 먹다 만 식은 밥을 밥통에 쏟고 더운 밥을 푸던 어머니가 머리를 들었다.
"20일쯤 후에."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영남이 출장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아파트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희주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저를 들었다. 식탁 위에는 어머니가 가져온 갖가지 반찬이 놓여져 있었다.
"엄마, 같이 먹어."
"그러고 보니 나도 시장하다."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의 찬장을 열었다.
"에이구, 정리 좀 해 놓지."
그러는 어머니의 말소리도 가벼운 것처럼 들렸다.
"연락은 다 해 놓았지?"
서류를 챙겨 가방에 담으면서 김영남이 물었다.
"네, 조금 전에 홍 과장한테 팩스를 넣었습니다. 다른 지역은 본래의 일정대로 하시겠지요?"
하기철이 샘플 가방의 지퍼를 잠그면서 대답했다.
"우선 제다에서 일을 본 다음에 일정을 조정하겠어."
"여기 걱정은 하지 마시고 부담없이 다녀오십시오. 8월까지는 걱정없으니까요."
김영남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오더를 끌어 모으면 매출목표는 달성되기는 할 것이다. 하기철은 김영남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뻔하게 속이 보이는 말이었지만 김영남은 기운이 났다.
"사고 안 나도록 해, 생산에서. 자주 공장에 내려가 보고."
"염려마십시오."
장일수가 방으로 들어섰다.
"준비 다 하셨습니까?"
"준비랄 것 있나? 샘플 준비가 끝났으니 다 된 것이지."
시계를 올려다본 장일수는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4시 비행기니까 아직 시간은 있군요. 12시 반이니까."
"왜?"
장일수가 하기철을 돌아보았다.
"하 이사, 내가 사장님께 개인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네. 그렇지 않아도 일 마쳤습니다."
하기철이 허리를 세우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무슨 일이야?"
부드러운 얼굴이 되어 김영남이 물었다.
"사장님."
이맛살을 찌푸린 장일수의 표정을 본 김영남의 얼굴도 굳어졌다.
"무슨 일이냐니까?"
"사장님 집안 문젭니다."
"......."
"요즘 댁에 안 들어가시지요?"
김영남은 머리를 돌렸다.
이것은 직원들이 알아낸 일이 아니다. 민영희가 이쪽저쪽을 쑤시는 것이다.
"어제 저희 집사람이 정 차장의 부인을 만났다고 합니다. 우연히 백화점에서 만났는데......."
정 차장이라면 전회사에서 함께 근무하던 정우식 차장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정 차장의 부인이 그러더랍니다. 사장님이 딴 살림 차리시지 않았느냐구요. 그리고......."
머리를 돌린 김영남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뭐, 남의 일이니까 함부로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리고 뭐냐니깐?"
"사장님이 회사돈을 빼내어서 회사가 어렵게 되지 않느냐고, 딴 살림 차리는 것도 그렇고."
"......."
"문제는 그런 말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그쪽에까지 갔느냐는 겁니다."
평소의 장일수답지 않게 그의 말투는 가라앉아 있었다.
"출장가시기 전에 이런 말씀 안 드리려고 했지만 사장님도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혼자 출장가시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신다구요. 마음을 정리하시는 기회라고도 하셨지요."
"......."
"저두 그 소리는 오래 전에 박재호한테서 들었습니다. 그것이 이제는 저쪽 회사까지 번진 모양입니다."
"흥."
김영남은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정리하고 말 것도 없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고."
"제가 홧김에 박재호한테 전화를 했더니 휴가를 내고 고향에 내려갔다고 하더군요. 집에 전화를 해 봐도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자식."
김영남은 연기를 뱉으며 얼굴에 웃음을 띠어 보였다.
"내버려 뒤, 이쪽에서 그럴수록 그놈 가치만 높여 주는 것이니까."
"사장님의 사생활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간단 말입니다."
김영남은 문득 민영희 쪽에서 박재호에게로 흘러갔던 이제까지의 정보가 거꾸로 박재호에게서 그쪽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내일 박재호를 형사고발할 작정입니다. 이제 자료도 다 되었으니까요."
장일수의 말을 들으며 김영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글거리며 가슴이 끓어오르고 있었으나 억눌러 참았다. 그것은 결코 박재호의 상대가 되어 주지 않겠다는 자존심이기도 할 것이다.
"하 이사를 도와줘, 오더를 생산라인과 연결시키는데 장 이사가 도와줘야 돼."
"여기 걱정은 마시구요."
그들이 방을 나오자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에게 머리를 끄덕여 보이며 사무실을 나서는 김영남의 머리에 문득 오희주의 얼굴이 떠오르자 아직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그녀는 앞으로도 이런 골치아픈 일들은 모르게 될 것이다. 그러자 박재호와의 문제들도 자신의 탓인 것처럼 느껴졌다.
언젠가는 박재호를 만날 것이다. 제 아무리 제 행동을 합리화시키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김영남은 웃는 얼굴로 사무실을 나왔다.
화분에 물을 주던 민영희는 소파에 앉아 있는 성훈을 바라보았다.
"그래, 넌 어떻게 해서든지 일류대학에 들어가야 돼. 넌 머리가 좋으니까 문제없어."
책을 바라본 채 성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업은 하지 말아라. 제발, 넌 의대나 법대에 들어가서."
"엄마, 시끄러."
머리를 든 성훈의 얼굴이 찌푸려져 있었다.
"아니, 얘 좀 봐. 엄마가 말하는데."
허리를 편 민영희가 눈썹을 세웠다.
"그런 말버릇이 어디 있어? 혼나야 고칠래?"
"나, 책 읽고 있지 않아? 헷갈린단 말이야."
성훈도 지지 않는다.
"무슨 책이냐?"
홧김에 다가간 민영희는 그의 손에 든 책을 나꿔 채었다.
외국 작가가 지은 소설이었다. 김영남이 사다가 책장에 꽂아놓은 것을 빼내어 읽는 모양이다.
"쓸데없는 책이나 읽고. 이것 읽고 싸움이나 할래?"
"아빠가 책을 많이 읽을수록 좋다고 했어."
얼굴이 상기된 성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에 든 책을 빼앗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안 돼. 읽지 마."
와락 화가 솟구친 민영희가 사납게 눈을 치켜 떴다.
"말도 안되는 네 아빠 말만 들을 거냐? 어린아이에게 어른 책을 읽으라던?"
그녀를 노려보던 성훈이 홱 몸을 돌리더니 제 방으로 들어갔다. 쾅하고 문을 닫는 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쳤다. 쫓아들어가 혼내 주고 싶었으나 민영희는 억눌러 참고는 소파에 앉았다. 종훈은 제 방에서 무얼하는지 얼굴을 내보이지도 않는다.
아이들은 걸핏하면 짜증을 내는 버릇이 들고 있다. 특히 성훈이가 그렇다. 종훈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달라진 점은 보이지 않지만 신경질이 늘은 것 같다. 민영희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어 뿜었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집안에서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아까 성훈이가 불쑥 꺼낸 아빠의 이야기는 화가 난 김에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일 것이다.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영희는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도대체 왜 이제야 전화를 받어?"
대뜸 쏘아대는 것은 언니였다.
"벨이 10번도 더 울렸는데, 뭘 하고 있었어?"
"응, 그냥."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민영희는 응접실 안의 텔레비전 볼륨을 줄였다.
9시 뉴스를 읽던 여자 아나운서가 이제는 숨이 막힌 듯이 입만 벌리고 있다.
"성훈 아빠, 외국 나갔니?"
"응, 오늘."
언니에게 김영남이 출장갈 것이라는 이야기는 해주었었다.
민영주는 이틀에 한 번 정도는 꼭 집에 들러 주었고 걱정이 되는지 하루에도 두어 번씩 전화를 해 온다.
"너, 내일 내가 들러서 이야기할려고 했는데, 그 아파트가 은행에 얼마로 담보잡혔는지 알아?"
"왜?"
"글쎄, 이것아."
짜증스런 민영주의 목소리에 민영희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 그 사람이 서류 들고 나가서는 아무 소리 안 했는데."
"세상에."
"아니, 글쎄 왜 그걸 물어?"
"너, 애들하고 어떻게 살려고 그래?"
"......."
"집도 은행에 들어가 있고, 그렇다고 모아 놓은 돈도 없고. 그놈한테 뭘 받아낼지 생각해 봤어?"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으므로 민영희는 잠자코 서 있었다.
건넌방 문이 열리더니 종훈이 쿵쿵거리며 달려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커다란 보리차 병을 기울여 급하게 마시는데 가슴 위로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다.
"더군다나 회사가 어렵다고 맨날 술 퍼먹고 엄살을 피운다면서? 만일 회사가 넘어가면 어떡하냐? 집이라도 한 채 가지고 있어야지......."
종훈이는 쿵쿵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잘 생각해 봐, 이것아."
"무얼?"
짜증난 김에 길게 빼며 물었다. 언니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그리고 지금 자신을 제일 생각해 주는 사람도 바로 언니인 것이다.
"뭐긴 뭘. 네 장래 말이다."
"상관없어. 난 애들하고 어떻게든 살 수 있어. 구차하게 그런 것 안 가져도 좋아."
"미친 년."
민영주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성훈 아빠 돌아오면 매듭을 지어야 할테니까. 너도 잘 생각해 봐. 내가 내일 가마."
전화가 끊겼다.
민영희는 수화기를 쥔 채 한동안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언니가 나무란 것처럼 이혼 후의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방법은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었고 김영남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니의 입에서 장부정리하는 것처럼 흘러 나왔을 때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났던 것이다.
소파에 앉은 민영희는 머리를 저었다. 김영남에 대한 미련은 손톱만큼도 없다. 그렇다면 이런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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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ㅂㅂㅂ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