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어려서 함께 살던 노부부였다. 우리가 세 들어 살던 바로 옆방에 살았는데, 할아버지는 늘 아팠고 할머니 혼자서 일을 했다. 하루는 그 집 댓돌 마루에 먹고 물린 상이었는지, 아니면 들여가려고 놓은 상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밥상이 놓여 있었다. 밥상 위에 묵 한 접시가 유독 눈에 띄었다. 어찌나 맛깔스러워 보이는지 침이 꼴깍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빈 공간에 나와 밥상뿐이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발꿈치까지 들고 밥상 앞으로 다가가 묵을 한 덩이 집어 입에 넣었다. 야들야들한 묵이 혀에 툭 떨어지는 감촉을 느끼면서 물컹하고 축축한 것을 덥석 베물었는데, 동시에 입 밖으로 뱉어내고 말았다. 상했던 것인지 그 묵의 원래 맛이 그런 것인지 쓰고 텁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얼른 맹물로 입을 헹구고도 쓴맛이 가시지 않아 흰 거품 버글거리며 양치질까지 해야 했다. 그렇게 법석을 떨고 나서야 겨우 떫은맛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녁에 엄마는 일터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말했다. 옆방 노인네 아침에 돌아가셨다고 하대. 그 말을 듣자 떫고 씁쓸한 맛이 다시 목구멍을 타고 역류했다. 나는 방문을 열고 토하기 시작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뭘 먹고 체했누 하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일곱 살 때였고, 그것이 내가 만난 최초의 죽음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누구의 부고를 받든 제일 먼저 목구멍을 역류하는 그 떫고 쓰고 지독한 맛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버지한테는 죽기도 전에 그 맛이 느껴졌다. 쓰러지는 순간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일까.
일어나 봐라. 느이 아부지 가실라나부다. 진짜로.
새벽, 나를 깨운 것은 엄마의 낮지만 다급한 목소리였다. 진짜로, 라는 말에 귀가 번쩍 트였다. 방이 두 개뿐인 열 평 남짓의 임대 아파트 마루는 세 걸음이면 다 가로지를 수 있었다. 그림자처럼 걸어가는 엄마를 따라 작은 방에 들어서니 주말 내내 몰아쉬던 아버지의 숨이 턱에 치달아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가실까. 잠깐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금세라도 떠날 것처럼 숨을 몰아쉰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최근 몇 달 사이 아버지는 자주 숨이 목에 걸렸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제일 먼저 나를 호출했고, 나는 자다가 깨워지든 회사에서 조퇴를 하고 달려나오든 해야 했다. 아버지는 힘껏 숨을 삼켰다가 그대로 멈추고, 어렵게 숨을 토해냈다가 다시 그대로 멈춰 번번이 보는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 그 때마다 엄마와 나는 번갈아 가면서 아버지의 가슴을 주먹으로 톡톡 두드렸다. 가래가 목에 걸려 호흡곤란을 보였을 때 병원에서 가르쳐 준 응급조치 방법이었다. 친척들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할지, 병원에 먼저 연락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 보면 어느 새 아버지는 예의 편안한 호흡을 되찾고는 했다.
새벽에 아버지가 보였던 호흡도 이전의 몇 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난스러운 건 오히려 엄마의 호들갑이었다. 옷장에 넣어두었던 하얀 한복을 꺼내 입히기 시작한 것부터가 그랬다. 깨끗한 마로 지은 그 한복은 돌아가실 때 옷차림이 정갈해야 한다며 일 년 전에 엄마가 우겨서 장만해둔 것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살아도 한참을 더 살 것 같은 상태였고, 또 사실 돌아가실 때 입을 옷이라는 게 정말 필요한지 나는 의심스러웠다. 수의라면 또 모르겠는데, 그건 아니라고 했다. 평소에 입힐 환자복도 아니라고 했다. 그럼 무슨 옷인데? 물으니 숨을 거두고 병원으로 옮길 때 입을 옷이라고 했다. 입성은 말끔하게 하고 가셔야지. 하는데 어이가 없었다. 병원비 때문에만 이미 적금을 두 개나 깼고, 집으로 옮겨오면서 깨진 돈은 카드 빚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는 상황이었다. 들어둔 보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생활비 지원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비용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꼭 필요한 것만 사도 어깨가 빠질 지경이었는데, 당장 급한 것도 아닌 그 옷을 장만하려니 눈물이 날 만큼 아까웠다. 나는 가능한 한 최대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엄마를 이길 도리는 없었다. 만약 내가 주머니를 열지 않으면 엄마는 늘 그랬던 것처럼 또 파출부 사무실에 나갈 것이다. 그깟 돈 내가 벌면 될 거 아니냐는 억지에 시달리느니 지갑을 여는 게 빠르다. 하기야 세월을 멈추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 시간 속에 나를 가둬 평생을 살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싸우고 싶지도 않고, 대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직 숨을 다 놓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영안실 갈 옷을 입히는 일은 영 내키지 않았다. 관절이란 관절은 이미 죄 뻣뻣해져서 그 동안도 옷을 갈아 입힐 때마다 두 모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환자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가며 겨우 해치웠는데, 숨까지 몰아쉬는 양반을 이리 틀었다 저리 틀었다 하려니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옷을 갈아 입히다 말고 철퍼덕 주저앉아 냅다 소리를 질렀다.
“뭐가 그렇게 급한데? 이왕 기다린 거 조금만 더 기다리지. 혹시 안 가실까봐 옷부터 미리 입히는 거야? 이게 뭔 난리야. 다시 살라다가도 민망해서 못 살겠잖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눈에 뭔가 불이 번쩍 일었다. 따귀를 맞은 것이었다. 니가 아냐, 내가 아냐. 엄마는 주저앉은 나를 야멸차게 밀쳐내더니 혼자서 아버지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차분히 해도 안 되는 일이 독 오른 손에 될 리 없었다. 나뭇가지처럼 팔과 다리가 옷 속에 뻣뻣하게 걸려 빠지지 않자, 엄마는 서랍을 뒤져 가위를 꺼내왔다. 그리고는 조각조각 저러다가 살점이라도 잘라지지 않을까 옆에서 보기 무서울 만큼 뎅겅뎅겅 옷을 잘라냈다. 마지막으로 오줌을 받기 위해 생식기 끝에 묶어둔 비닐봉지까지 풀어버리자 아버지는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됐다. 손끝 발끝이 다 뻣뻣해지도록 유일하게 보드랍던 생식기가 가랑이 사이로 툭 떨어졌다. 엄마는 뭐가 분한지 숨을 씩씩 몰아쉬며 아버지의 생식기를 손바닥에 쥐고는 나를 잡아끌었다. 봐라, 자지가 이렇게 딱 올라붙었잖냐. 남자가 죽을 때가 되면 생식기가 쭈그러든 번데기 마냥 고환 속으로 푹 파묻힌다는 게 엄마의 설명이었다. 그 놈의 자지가 오늘만 올라붙었나. 싶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자지 이야기만 나오면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엄마가 그 말을 처음 꺼낸 건 수술을 마친 아버지를 처음 면회하고 나서였다. 눈이 퉁퉁 붓도록 서럽게 울며 나온 엄마가 꺼낸 첫 마디가 그랬다. 느이 아부지 자지가 올라붙었어. 느닷없는 말에 처음에는 엄마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했다. 얼굴이 확 붉어져서 나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엄마를 잡아끌었다. 무슨 소리야, 민망하게. 엄마는 답답한 듯 손으로 시늉까지 하며 설명을 했다. 느이 아부지 자지가 이렇게 붕알 속으로 착 올라붙었다니까. 자지가 그렇게 올라붙으면 죽는 거란 말이다. 그러면서 또 꺽꺽 울기 시작하는데 느낌이 아주 묘했다. 그 상황에서 엄마가 확인한 것이 아버지의 생식능력은 아니었을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우는 엄마의 모습이 영락없이 짝 잃은 한 마리의 암컷으로 보였다. 엄마가 여자로 보이는데 불쌍하지 않을 수 없다. 자지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시키는 대로 한복이나 갈아 입혀야 했다. 그 사이 아버지의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숨을 멈추는 시기도 길어졌다. 바지를 입히는 동안 전혀 숨을 쉬지 않아 진짜 가셨나 싶어 잠깐 쳐다보면 갑자기 으어허 하며 숨을 다시 내뱉는 바람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 내가 옷을 갈아입히는 걸 보고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엄마는 이제 119로 전화를 했다. 여기 위독환자요. 돌아가실라고 하니까 얼른 좀 와요. 가시는 길 돕자는 건지, 가시라고 산 고사를 지내는 건지 엄마한테는 말도 못하고 아버지의 뻣뻣한 몸만 억지로 당기고 젖히며 힘을 쓰는데 한순간 아버지의 몸에서 모든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르렁, 꺼억 숨을 참던 소리도 일시에 다 사라졌다. 작은 새 한 마리만 내 팔 안에 폭 안겨 있었다. 언제 아버지는 이렇게 작아진 것일까. 강보에 쌓인 아이처럼 하얀 한복에 쌓인 아버지가 내 두 팔에 온몸을 다 맡겨두고 있었다. 죽음이 이렇게 고요할 수도 있구나. 경탄하느라 내 몸에는 오슬오슬 소름이 돋는데, 눈을 절반은 감고 절반은 뜬 아버지는 그러나 오랜만에 보는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에고, 먼 길 가느라 욕봤소. 엄마가 거친 손으로 아버지 눈을 쓰다듬었다. 동시에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구급차가 도착한 것이다. 끝났다. 이제야 겨우 끝났다. 나는 이동침대에 실려 나가는 아버지를 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장례는 조용하고 빠르게 치러졌다. 영정도 수의도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화장을 하고, 뼈는 납골당에 모시기로 했다. 엄마와 나는 소복 대신 검은 정장을 입었다. 예상 비용과 연락해야 할 사람들, 모든 일이 예행 연습이라도 했던 것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크게 우는 사람도 없고,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었다. 낮에는 친척들이 왔고, 저녁에는 친구들이 왔다. 밤을 새우며 고스톱을 치고 판돈을 벌이는 이들조차도 상주들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운구가 나가는 날에는 소풍이라도 갔으면 싶게 더없이 화창했다. 날씨가 서러워 잠깐 눈물이 났으나 그뿐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져 있는 동안 내내 쓰던 입맛도 말짱했다. 떫지 않으니 죽음도 죽음 같지 않았다. 장지에 다녀온 오후에 동사무소와 구청에 들러 사망 신고서를 제출하고, 세대주와 호주 변경 신청을 했다. 의료보험조합에서 지급하는 장례비용을 어떻게 받아야하는지를 몰라 허둥댄 것이 혼선이라면 혼선의 전부였다. 모든 절차를 하나도 빼먹지 않고 차례대로 끝낸 후 엄마와 나는 모처럼 나란히 목욕을 하고, 자장면과 짬봉을 시켜 사이좋게 나눠먹은 다음 오랜만에 길고 단 낮잠에 빠졌다. 이 순간이 오기를 우리는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지난 몇 년 간 끝없이 갈구하던 휴식을 비로소 맞게 되었으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부디 행복하시라.
아버지가 쓰러진 건 구정을 보내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연락을 받고 병원에 달려갔을 때 이미 의식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24시간이 고비라고 했다. 24시간 안에 돌아가실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는데, 엄마와 나는 처음에 그 말을 24시간만 넘기면 회복이 가능하다는 말로 이해했다. 달리는 생각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24시간은 무척 긴 시간이었다. 한 초, 한 분, 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시계 바늘의 미세한 움직임이 심장박동에 꽂혀 함께 쿵쿵거렸다. 그렇게 어렵게 24시간을 보내고 나니 두고보자는 시간이 12시간 뒤로 연장되었다. 12시간 후에 또 12시간 그리고 또 12시 간. 그렇게 서너 번쯤 더 연장된 후에는 엄마도 나도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죽든 살든 이제 그만 한쪽을 택해줬으면 싶었다. 사망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제라도 수술해서 살려보자, 의사가 말했을 때 엄마와 내가 바로 동의했던 것도 그것만이 둘 중 하나를 가늠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0시간이 넘는 긴 수술을 마친 후 퉁퉁 부어서 나오는 아버지를 보자 아차 싶었다. 의사는 수술이 잘 되었다고 했다. 이제 재출혈로 인한 사망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깨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사망은 없을 거라고? 마음이 심하게 덜컥거렸다. 아무리 봐도 아버지의 얼굴은 의식 따위 이미 저 먼 곳으로 보낸 얼굴이었다. 다시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사망도 없을 거라고? 아, 나는 아버지가 떠날 수 있는 길을 막았구나. 이 무겁고 막막한 상태를 벗어날 기회를 잃었구나. 참담했다. 내 뒤에 남은 한없이 길고 막막한 생이 팔짱 끼고 나를 조롱하며, 어서 오너라 커다랗고 어두운 아가리를 한껏 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식물인간’이라는 말이 얼마나 함축적이고 적합한 표현인지는 직접 겪어봐야 안다. 움직이지 못해서만 식물인 것은 아니었다. 화분처럼 누군가 돌보아야하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누워만 있는데 살까지 찌면 곤란하다고 섭취 열량을 줄이라고 하는 병원 측 권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는 불쌍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에게 고단백의 유동식을 하루에도 다섯 번씩 공급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몸은 점점 마르고 뻣뻣해졌다. 더 이상 병원에 있을 의미도 없겠다 싶어 집으로 옮겨온 후에 몸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날마다 관절 운동을 시켰지만 몸은 점점 나뭇가지처럼 딱딱해졌다. 나중에는 잘못 건드리면 우두둑 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몸이 굳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욕창이 피어났다. 붉은 반점이 툭 튀어나온 꼬리뼈 사이에 꽃봉오리처럼 맺히더니 만개한 꽃처럼 등판에 번져나갔다. 열 평 아파트에서 그 꽃이 피우는 냄새는 또 얼마나 짙던가.
처음 얼마간은 기적을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곧 세월만 어서 가라 체념하게 됐고, 그 다음부터는 어서 당신 갈 길 가시라 엄마와 나는 기도하고 있었다. 회사에 출근해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틈틈이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식물인간의 평균 수명을 알아냈다. 1년 내외라는 주장을 보면 반가웠고, 15년 이상의 생존 사례가 나오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개는 1, 2년밖에 못 살았다더라 하면 결승선을 발견한 마라토너처럼 눈이 반짝였고, 그렇게 20년 가까이 산 사람도 있더라 하면 구들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에 대한 희망을 잃자 엄마와 나의 머리 굴리기가 시작되었다. 선제 공격은 늘 엄마가 맡았다.
“너 그때 선생인가 뭔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냐?”
“이 상황에 내가 임용고시 준비하게 생겼어?”
“안 될 건 또 뭐가 있냐. 이 참에 그냥 회사 관두고 집에 앉아서 공부하면 되지.”
“돈은? 약값은 누가 댈 건데?”
“병원비처럼 많이 드는 것도 아닌데, 뭐가 걱정이냐. 내가 파출부 나가서 조금 보태고, 너도 공부하면서 전에 하던 것처럼 애들 과외 한두 개씩 아르바이트로 하고 그러면 산 입에 거미줄 치겠냐.”
그러니까 내용인즉 나보고 집에서 아버지를 대신 간병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리 없다. 경제 불황 탈 때마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회사에 목을 매다드니 임용고시를 준비해서 평생 직장을 마련하고 싶다고 날마다 노래를 불렀지만, 지금은 그 노래를 부를 때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온 이후 장만해야 했던 물침대와 휠체어 그리고 각종 의약품에 소요된 비용을 조목조목 따졌다. 일이 있다가도 없는 파출부로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님을 상기시키자 그 모든 물건의 실 구매를 담당했던 엄마는, 사실 그게 그렇게나 많이 든 건 아니었고.... 하며 꼬리를 달다가, 그렇게 든 게 아녔어? 날카롭게 반문하자, 그 정도 들기는 했지, 하고 얼른 말을 바꾸었다. 이 암울한 와중에 이문을 남기는 계산 속에 화가 치밀었지만 나도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잘못 비위장을 건드렸다가는 정말로 내가 아버지를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 몰랐다. 엄마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고, 살지도 죽지도 않은 환자를 24시간 수발 들며 청춘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나 춤이나 배울란다. 지루박하고 탱고하고.”
춤? 이건 또 뭔 소린가.
“갑갑해서 그래. 허공에 눈만 굴리고 있는 양반 쳐다보고 있으면 아주 갑갑해서 그래.”
하기야 엄마는 환갑이 넘었어도 목소리만 들으면 삼십대로도 속아줄 만큼 젊었다. 성질도 그만큼 급해서 진득하니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루 종일 허공을 향해 초점 없는 눈만 굴리는 환자하고 있으면서 덩달아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니 오금이 저릴 법도 했다. 심심하고 답답하니 틈만 나면 드는 게 수화기였다. 상대는 늘 나였다. 엄마는 친구도 없어? 화를 내면 내 사는 꼴 남 보이기 싫다고 중얼거렸다. 시간마다 집에서 전화가 걸려오니 회사에서도 눈치가 보였다. 아버지를 돌보는 일 말고 뭔가 다른 일이 필요하기는 했다. 갑갑해서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역할 바꾸자고 손 들어버리면 나만 낭패였다.
“학원 알아봐 줘?”
“영감 눕혀놓고 딴스학원 가면 욕 먹지. 그냥 비디오 테이프나 하나 사오든지.”
당장 다음 날로 청계천 골목을 돌았다. 나이 먹은 이들을 위한 댄스 교습 비디오는 찾기 어려웠다. 춤 교습 비디오는 많았지만, 살사, 라틴, 맘보처럼 젊은 사람들이 배우기 좋은 격렬한 춤들이 대부분이었다. 겨우 어렵게 하나를 구해 가지고 엄마에게 바쳤다. 그러나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회사로 또 전화가 왔다.
“얘, 이게 지금 어떻게 하라는 거냐.”
처음에는 비디오 작동하는 법을 모르겠다고 전화가 왔다. 테이프를 넣고, 오른쪽에 파란색으로 그려진 화살표가 있는 버튼을 눌러. 비디오 켜는 걸 가르쳐주고 5분이 지나자 또 전화가 왔다. 텔레비전에는 다른 프로그램이 나오는 중이라고 했다. 채널을 4번으로 맞추라고 했잖아. 시간마다 오던 전화가 10분 간격으로 오고 있었다. 얘, 동작이 너무 빨라서 그냥 지나갔어. 그 부분만 다시 따라 하려면 어떻게 해? 테이프 되감기에 대한 설명까지 하려니 약이 올라서 눈물이 다 나왔다. 하루종일 전화로 씨름을 하다가 퇴근해보니 엄마는 그때까지도 비디오 앞에서 뒤뚱뒤뚱 몸을 놀리고 있었다. 회사로 자꾸 전화하지 말란 말이야. 악다구니를 쓸 참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니 차마 말이 안 나왔다. 눈치도 없는 건지 엄마는 반색까지 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동작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뭘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비디오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 줘 봐. 자 팔 얹고, 발 들고, 그 다음에 도는 거 맞지?”
“아니, 팔 허리에 얹고, 발 끝 세우고, 앞에 찍고, 뒤로 돌고, 아니 뒤부터 돌지 말고, 앞에 찍고!”
솔직히 나도 비디오가 가르치는 동작이 무얼 어쩌라는 건지 정확히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우리가 무언가 다른 걸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비디오 속에 나오는 남자처럼 엄마 어깨에 팔을 걸었다. 그리고 손을 돌려 엄마를 한바퀴 턴을 시켰다. 비디오 속 배우들과 우리의 동작이 일치했다 어긋났다 다시 일치했다. 뭔가 조금씩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엄마가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춤추니까 좋아? 어이가 없어 묻자 내가 말이다, 이래봬도 어려서 발레를 배운 적이 있거든. 하며 통통하게 오른 발끝을 살짝 세우는 엄마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아버지는 작은 방 화분에 담겨 시름없이 자라고, 엄마와 나는 옆방에서 뱅글뱅글 어깨에 손을 걸고 춤을 추던 저녁과 저녁들.
파트너 없는 춤은 일주일이 지나자 금세 지겨워졌다. 그 다음에는 자전거를 사달라고 했다. 자전거를 갖는 건 엄마의 오랜 소원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엄마는 자전거를 탈 줄 몰랐다. 자전거를 배우고 싶다고, 아버지가 건강할 때는 주말 저녁마다 온 가족을 공원으로 끌어내고는 했다. 그래놓고는 막상 자전거를 배우는 일에는 겁을 먹었다. 아버지가 옆에서 그렇게 잡아줘도 땅에서 발을 떼는 순간 늘 넘어졌다. 페달을 밟으면서 앞으로 바퀴를 굴리라고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너무 뚱뚱해서 균형을 못 잡는 거라는 변명만 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도 못 배우는 자전거가 무슨 소용 있으랴 싶었지만 나는 그 부탁만큼은 톡 쏘지 않고 들어줬다. 혼자 빈방에서 춤을 추는 엄마보다는 자전거를 타고 뒤뚱거리는 엄마를 보는 게 맘에 더 편할 듯 싶었다. 물론 뭐든 해 드릴 테니 제발 어디 도망가지 말고 아버지만 맡아달라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자전거는 사흘도 가지 못했다.
엄마가 다음에 재미를 붙인 일은 음식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건 정말 곤혹스러운 취미였다. 집에 있는 시간을 되도록 최소화하려고 애썼던 내가 집에서 식사를 할 리 없고, 아버지는 굵은 튜브로 유동식을 투입하는 게 식사의 전부였으니 먹을 사람도 없는 음식이었다. 쓸데없이 남아도는 음식도 문제였고, 먹지도 않는 음식을 만드느라 드는 재료비도 아까웠으나 가장 괴로운 건 냄새였다. 아버지가 집에 오면서 안 그래도 불쾌한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가래를 뽑아내기 위해 뚫었던 목의 구멍은 수술로도 봉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푹푹 삭은 가래가 몽글몽글 피어올랐고, 몸에 욕창이 생기면서부터는 살이 썩는 냄새도 섞였다. 치료를 위해 몸에 바르는 각종 소독약과 연고들의 냄새, 식사를 위해 각종 생식과 채소를 갈아대는 냄새, 그 냄새들 속에 엄마가 새롭게 취미를 붙인 음식 냄새가 섞였다. 현관을 열고, 창문을 열어도 냄새들은 쉬 지워지지 않았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한 달쯤 계속되다가 중단되었다. 기저귀를 갈다가, 환부에 드레싱을 하다가, 음식을 버무리는 일은 어떤 순서로 해도 비위생적이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실은 집에 가만히 앉아 몇 걸음 이내의 동선을 종종걸음치며 음식을 조물거리는 일이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돌보는 일과 많이 닮았다는 걸 금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 사실에 진저리를 쳤다. 대신에 엄마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괜찮은 걸 하나 발견했는데, 바로 장보기였다. 그 전까지도 엄마는 아버지만 두고 집을 비우는 걸 몹시 불안해했다. 집안에 같이 갇혀 있는 걸 갑갑해하면서도 잠깐이라도 집을 비울 일이 생기면 그 사이 무슨 일이 날까봐 안절부절이었다. 정 답답하면 휠체어에 아버지를 억지로 앉혀 함께 동네 한 바퀴를 돌더라도 혼자서는 여간해서 집을 비우지 않았다. 그런데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들을 사러 나가면서 엄마는 그것이 매우 합법적이고 타당한 외출의 구실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가 장을 보러 다니면서 음식 대신 음식 재료들이 냉장고에 채워졌다. 여름에 삶아내서 국물 만들면 시원하게 국수를 말 수 있는 콩, 살짝 데쳐서 소스에 찍어먹으면 몸에 좋은 유기농 채소, 곱게 갈아서 국물 내면 뼈에 좋은 생선.... 그냥 재료만 사다놓기는 그랬는지 재료마다 필요한 이유는 다 붙었다. 그러나 식탁은 말로만 풍성할 뿐이었다. 재료들은 늘 원형 그대로 냉장고에 있다가 버려졌다. 장 보는 취미는 꽤 오래두고 계속되었다. 찾아가는 시장도 점점 더 먼 곳에 있었다. 과일도, 채소도, 말린 생선도 산지에서 사야 더더욱 좋은 법. 인근 농협 매장에서 옆 동네 할인마트로, 할인마트에서 서울 외곽 농수산물 도소매 시장으로 그리고 산지로 엄마의 외출 반경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겁이 났다. 그렇게 점점 멀리 가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어느 날 집 근처에 다 왔는데 창문에 불빛이 보이지 않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만 아버지 옆에 두고 혼자서만 도망친 건 아닐까. 집에 있는 동안 엄마가 회사에 있는 나에게 했던 것처럼 엄마가 장보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디야? 언제 들어갈 거야? 전화를 끊고 한 시간만 지나면 또 궁금했다. 지금은 어디야? 아직 안 들어갔어? 그러면 엄마는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짜증을 냈다. 왜 자꾸 전화를 하고 지랄이냐, 내가 어디 도망이라도 갔냐. 가끔은 여유 있게 농담도 했다. 뭐가 걱정이냐. 너네 아버지니까 네가 맡으면 되지. 그러면 나도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싫어. 엄마 서방이니까 엄마가 책임져. 나는 낳아달라고 한 적 없어! 그러면서 은근히 불안해졌다. 정말로 엄마는 도망치려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헤어진 애인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놀아 줘. 위로가 피로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으면 누구든 한 명 잡아서 결혼할 걸 그랬다, 그래서 가끔씩 들여다보며 아버지는 좀 괜찮아지셨는지 물어나 보며 살 걸 그랬다, 하루에도 열 번씩 후회했다. 그래서 나는 뒤늦게나마 그들에게 매달렸다. 내게는 그들 하나 하나가 춤이요, 음식이요 그리고 구원으로 보였다. 헤어졌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모닝콜을 하고 잠들기 전에 문자를 보냈다. 일과를 세세히 보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어디에서도 응답은 없었다. 나는 그게 좀 분했다. 분하면서도 여전히 다른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전 기억에 기대고 또 기대는 동안 엄마는 나보다 한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하루는 자정이 다 되어서 집에 왔는데 창문이 컴컴했다. 그날 오후 엄마가 전화했었다.
- 나 인천 간다.
- 인천?
- 거기 포구에 새우젓이 좋단다. 살이 토실토실 여문 것이 짜지도 않고 그렇게 싱싱하단다.
- 한여름에 새우젓은 뭐 하러?
- 뭐하긴. 가을에 김장 담가야지.
국철을 타고 움직이는 중인지 덜컹거리는 소리가 중간중간 섞여 들어왔다. 세상에 이제는 인천까지 장을 보러 가다니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딸년 속은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당신 하실 말씀만 하고는 툭 끊더니 다시 걸어도 받지를 않았다. 그러더니 두 시간쯤 후에 또 전화가 왔다.
- 배를 타야한단다.
- 배? 무슨 배?
- 여기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장이 서는데, 배가 하루에 한 번인가 두 번 온단다.
- 그런 배를 타고 들어갔다가 언제 올라구!
다른 날 같으면 안 돌아갈까 봐 겁나서 지랄이냐 욕이 몇 사발은 쏟아졌을 텐데, 더위에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마냥 엄마의 대답은 휘적휘적 늘어지기만 했다.
- 오겠지. 온다고 했으니까 오겠지. 금세 온다니까 오겠지.
뭐라고 대꾸를 하든 따지든 해야 하는데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인천까지면 자가용을 타고 가도 먼 거리였다. 국철로는 1시간 30분이 넘게 걸렸다. 사람 많은 국철에 빈자리야 당연히 없었을 것이고, 연중 최고 더위라는 불볕이 시야까지 아른거리게 하는 날씨에 새우젓 하나 핑계로 휘적휘적 도망쳐나간 육십 노인이 내 엄마라고 생각하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하기는 내가 엄마라도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돌아가 봐야 곰팡이 꽃처럼 핀 영감 혼자 좁은 방에 누워 초점 없는 눈만 사방팔방으로 굴리고 있을 텐데, 죽지도 살지도 않는 시간만 날 잡아먹자고 문지방에 퍼 질러 앉았을 텐데, 하루에 한번 오는 배 아니라 사흘에 한번 오는 배라도 기다리고 싶었을 것이다. 가슴이 퍽퍽하게 미어지는데, 저쪽에서는 암튼 그리 알고 있어라 하더니 다시 전화가 툭 끊겼다. 다시 걸자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그러나 이해는 해도 현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루종일 내내 마음이 불안했는데 결국 불꺼진 창을 보고야 만 것이다.
설마 일찍 잠드신 게지, 현관을 열었으나 아무 기척도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있는 작은 방에서만 가르랑 가르랑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내 귀가가 늦어 밖에서 기다리시나. 가끔 그런 일이 있기는 했다. 나는 불을 켜고 싱크대부터 살폈다. 아버지 저녁을 챙겼으면 설거지 거리가 쌓여 있거나 설거지도 했으면 물기라도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싱크대는 손으로 문지르면 뽀득뽀득 소리가 날 만큼 바싹 말라 있었다. 아침에 나가 여태 들어오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젠장, 엄마도 아냐. 애처럼 울음이 나려고 했다. 우선은 아버지 용변부터 살펴야했다. 다행히 똥은 싸지 않았는데 오줌을 받아내기 위해 묶어둔 비닐봉지는 넘쳐나기 직전이었다. 검붉은 오줌이 커다란 비닐봉투에 팽팽하게 차 있어서 나는 비닐을 묶은 끈을 풀면서 오줌을 쏟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하루를 묵어 냄새나는 오줌을 변기에 쏟아버리고 있자니 청승이 절로 찾아왔다. 오줌 주머니는 채우고, 위는 비웠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늦은 끼니도 드려야 했다. 끼니마다 만들기 귀찮다고 번거로워 한꺼번에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둔 유동식은 찬 기운 때문에 덩어리져있었다. 물컹물컹하고 시커먼 유동식 덩어리를 보자 문득 어려서 훔쳐먹었던 노부부의 밥상이 떠올랐다. 혹시 그 날 내가 먹었던 것이 이것은 아니었을까. 국자에 엉겨붙은 유동식 덩어리를 보자니 쓴 물이 절로 올라왔다. 그걸 한 덩이 퍼서 두유하고 섞어 믹서기에 넣고 갈았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섞인 곡물 냄새가 역하게 퍼졌다. 구역질이 나는 걸 겨우 참으며 만들고 나니 이걸 어떻게 먹여야 할지 난감했다. 식도를 통해 가느다란 호스를 집어넣어 음식물을 공급하는 방식은 오래 사용할 수 없다고, 배를 째고 위와 호스를 바로 연결하는 수술을 하자고 의사가 말했을 때 엄마는 앞으로 더는 어떤 수술도 시키지 않을 거라며 난리를 쳤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그때 의사 말을 들었어야 했다. 굵은 주사기에 유동식을 넣고 입안에 흘려 넣는 건 보기는 쉬웠는데, 직접 하자니 쉽지 않았다. 나름대로 속도를 조절해서 겨우 음식물을 입에 넣었는데, 씹어 삼키지 않으니 벌어진 입으로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강제로 아버지의 숨을 틀어막고는 했다. 그러면 숨을 쉬느라 거칠게 호흡하면서 음식물도 같이 삼켰는데 그러다가 음식물이 폐로 잘못 들어가면 폐렴으로 발전할 수 있어 내가 질색을 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닥치고 보니 그 방법밖에 없었다. 나도 엄마처럼 아버지의 숨을 틀어막는 것으로 음식물을 삼키게 했다. 그러면서 엄마처럼 중얼거렸다. 폐렴 무서워 굶어 죽이냐.
그 밤을 뜬눈으로 새웠는데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회사에 양해를 구해 휴가를 내야 했다. 그 다음 이틀은 다행히 연휴였다. 그러나 엄마가 돌아오시지 않으면 다행이 아니라 최악의 연휴가 될 게 틀림없었다. 도망간 게 틀림없어. 속에서는 뭔가 자꾸 울컥거리는데 눈물은 나지도 않았다. 정말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가출 신고도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 도망친 게 사실로 확인이 되면 그 다음에는 어찌해야 하는지 나는 무서웠다. 그래서 또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엄마가 없어졌어.
- 그런데?
- 무서워.
- 그래서?
- 죽어버릴 거야.
- 그래, 그럴 수밖에 없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때가 되면 아버지에게 유동식을 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남는 시간 동안 이렇게 흘러가는 청춘이 억울해 가슴이나 두드리면서 엄마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늘어질 게 없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웬걸 더 긴 시간도 있었다. 잠도 못 자고, 울지도 못하고, 약이 오를 대로 올라 하루 종일 아버지의 오줌 주머니나 비워내고 유동식을 주는 일은 아예 접어버린 날 엄마가 돌아왔다. 이틀 만이었다. 어디서 마셨는지 거나하게 술이 취한 상태였다. 비틀거리는 엄마를 보자니 감정이 복잡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한 와중에 빈손부터 눈에 들어왔다.
“새우젓은?”
“새우가 날 잡아먹더라. 끄억”
“김장 담글 거라며.”
“김장은 무슨, 끄억. 세월이나 담가먹었으면 좋겠다. 끄억.”
그렇게 술 취해 비틀거리면서 냉장고를 열더니 엄마는 남아 있는 유동식 양을 확인하고는 느닷없이 손바닥으로 내 등짝을 후려쳤다. 이년이 아버지 밥도 안 줬구만. 그리고는 서둘러 이것저것을 갈더니 작은 방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몸도 못 가누면서 주사기를 든 손만은 떨지도 않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꿀떡꿀떡 음식물을 삼키는 아버지와 술에 취해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주사기를 누르는 엄마를 보자니 목이 뻑뻑하게 아프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 한번도 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울지 않았다. 헤어진 애인들에게 매달리면서도 울지 않았다. 울어도 좋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참았던 울음이 그 날, 술 취한 어머니의 등을 보자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더니 아예 통곡이 되어버렸다.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이 계속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아버지 욕창 부위의 드레싱까지 혼자 말끔하게 해 낸 엄마는, 이년아, 203호 할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장례 치르러 뛰어올라. 한마디하더니 아버지 옆에 누워 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 날 이후 나는 헤어진 애인들에게 전화하지 않았고, 엄마는 장을 보러 다니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모두 이전과 똑같은 시간의 반복이었다. 장을 보는 대신 엄마가 무엇을 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영정을 준비하거나, 장례식에 부를 지인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등 죽음의 절차를 준비하는 걸로 소일하는 듯했으나 그 밖의 시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나도 묻지 않았고, 엄마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끔씩 무언가 서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엄마와 나 사이를 오고 갔으나 모른 척했다. 그게 상대를 위한 최대의 예의이기도 했다. 시간은 한없이 느리고 지루하게 흘렀고, 아버지는 일년 반을 꼬박 더 살아있었다.
“사진 태울까?”
긴 낮잠에서 깨어보니 엄마는 이미 일어나 앉아서 이것저것 아버지가 쓰던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엄마의 등을 보고 물었다. 오랜만의 질문이었다. 각자 견디던 시간이 비로소 다시 어떤 접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가 언젠가 한번 싹 정리해서 태울 게 남았을라나 모르겠다.”
“그럼 옷 태울까?”
“옷은 한 번인가 두 번밖에 안 입은 새것들이 많아서 경비 아저씨들 줄라는데...”
“죽은 사람 옷인데 좋다고 하겠어?”
“아까 참에 나가서 물어보니까 좋다고 하더라. 환갑날 백만 원 주고 산 무스탕은 아껴 입느라고 세 번도 안 입었는데. 께름칙하면 말고 좋으면 입으시라니까 서로 갖겠다고 하더라.”
“그럼 뭐할까?”
“여기저기 쓸고 닦다 보니까 안 태운 사진들이랑 아부지 쓰시던 물건들이랑 좀 있던데 그거나 태우던지.”
“엄마 노래 학원 끊어줄까? 집에 혼자 있기 싫을 텐데.”
“글쎄, 배울라면 나는 춤이 좋은데, 영감 보내고 춤추러 다닌다고 수군대지 않겄냐.”
해가 저물어서 노는 아이들도 다 돌아간 놀이터는 물건을 태우기에는 아주 적당한 곳이었다. 모래사장 한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아 나는 엄마가 미처 정리 못한 사진과 아버지가 쓰시던 수첩과 몇 가지 물건들을 한 장씩 태우고 또 태웠다. 환하게 피었다가 사그라드는 불꽃을 보자니 마음이 애틋해졌다. 언제일지 모르되 빤히 보이는 죽음이었으므로, 몸만 빼고는 이미 다 정리가 끝난 집에서 몸조차 저 세상으로 건너가니 아버지가 살았던 시절이 있나 싶었다. 사람은 죽으면서 제 몸의 체취도 다 가져간다더니 어떻게 환기를 해도 가시지 않던 썩은 살 냄새조차 어느 한 구석 남아 있지 않아서 이 시간이 언제 끝날까 서슬 퍼렇게 덤벼들던 순간이 다 꿈만 같았다. 몇 장 남지 않은 흔적을 태우며 그제야 비로소 마음 한구석 시큰거리는데 쓰레기 버리러 간 엄마가 저 멀리서 나를 불렀다.
“야야, 나 좀 봐라.”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내 눈앞에 그 언젠가 엄마가 원해서 샀으되 사흘만에 베란다 깊숙이 처박힌 자전거가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자전거 위에 올라앉은 건 엄마였다. 발을 땅에 내려놓지도 않고, 시원스레 페달을 쭉쭉 밟으며 엄마가 내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초저녁 바람 때문에 숱 적은 엄마의 머리가 나풀나풀 흩날렸다. 엄마는 언제 자전거를 배웠을까. 언젠가 엄마가 지나가는 말처럼 볕 좋은 날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 나가 아버지는 해바라기를 하고, 엄마는 운동을 한다고 한 적이 있었다. 무슨 운동? 하고 물으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지. 수줍게 대답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자전거 한번 제대로 굴려본 적 없이 페달만 밟고도 자전거를 탔다고 하는 사람이 엄마라 그런가보다 했다. 잡아주는 아버지도 없는데, 엄마가 자전거를 배울 방법은 없어 보였다. 기껏해야 휠체어 탄 아버지 옆에서 제 자리 걷기나 했을 거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정말 자전거를 배웠나. 푸른 공기를 휙 가르며 자전거를 달리는 엄마를 보자니 뭐에 홀린 기분이었다. 몸만 여기 두고 정신은 이미 저승에 앉은 아버지를 양지에 앉혀두고 엄마는 어떻게 혼자서 자전거를 배울 생각을 했을까. 저렇게 가볍게 자전거를 밟고 엄마는 어디로 내달리고 싶었던 것일까.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엄마는 한 마리 나비 같았다. 그대로 어딘가 훨훨 날아가도 좋을 것만 같았다. 갑자기 목구멍 안쪽에서 떫고 쓰고 독한 그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썩은 묵을 먹은 것처럼 고약한 맛이, 죽은 아버지를 안고도 느끼지 못했던 그 떫은맛이 산 엄마를 보는 순간 목구멍을 역류해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모래사장에 고개를 묻고 토하기 시작했다. 놀란 엄마가 자전거를 팽개치고 달려왔다. 급하게 내던져진 자전거 바퀴가 허공에서 팽그르르 회전하는 것이 보였다. 오래 전 내가 맛보았던 것이 정말 죽음이었을까. 에구, 얘가 짬봉 먹고 바로 자더니 얹혀나부네. 영문 모르는 엄마가 등을 두드려주는 동안 나는 토하고 또 토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