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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나, 나를 여기까지 ===
2022 년 09 월 27일 퇴고
기름뭉치/김 광호
- 첫 구경 서울 나들이
집 나이 8살, 어머니 김 옥분 여사를 따라 나섰던 서울 나들이길. 서울로 출가한 딸집에 다녀오려던 어머니는 43살에 얻은 막내인 나를 두고 가시는 것을 고심하시다가 맏형님께서 “데리고 다녀오세요.” 말을 하셔서 나를 데리고 서울에 올라가게 되셨단다. 나는 좋아라. 하며 엄마 손잡고 졸졸 따라 나섰으며, 그때 맏형님은 결혼해서 아이가 둘이셨는데 첫 딸은 나하고 세 살 터울이었고, 둘째는 남자였으며 내가 형수님 드시는 미역국을 뺏어 먹기도 했던 철부지 막내 개구쟁이로
맏형님은 고향 양평 기차역에서 역무원으로 일하시던 중이셨는데 나는 동무들과 역에 자주 놀러가 동무들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술래잡기 하다보면 어느새 아버지 같은 형님이 나타나 어린 내가 다칠까? 집으로 가라며 어르고 달래다 말 안 듣자 회초리를 들고 나오셔 때리려고 들면 나는 겁이나 동무와 함께 웃고 떠들면서 집으로 깡충깡충 가던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기억도 새롭다. 아들 같은 어린 막내 개구쟁이 동생이었으니 집에 혼자 두기는 걱정이 되셔서 어머니께 나를 데리고 서울에 다녀오라고 하셨을 것이다.
엄마 손에 이끌려 처음 타보는 석탄 때는 칙칙폭폭 기차에 오르니 처음에는 마냥 즐겁고 신기하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하고 싫증이 난 나는 짜증내고 칭얼거리며 집에 가자고 보채기도 한 기억이 새롭다.
그런 나를 어머니께서는 어르고 달래다 나의 칭얼거림에 결국 나를 꼬집다가 윽박지르기도 하셨는데 나의 칭얼거림 속에 어느덧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하여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여기 어디야” 하니 엄마가 청량리역이야 하신 말이 생각난다. 다시 어머니 손에 이끌려 넓은 길 위 철길을 달리는 차(전차)를 타고 어딘가를 가는데 기차에서 내다보았던 풍경과 다른 전차 안에서 내다본 서울이라는 풍경은 색다르고 신기함을 안겨 주었다.
창에 바싹 달라붙어 밖을 내다보니 모두가 처음 본 건물, 처음 본 모습들뿐이었다. 가다 보면 여기는 어디 역 하는 소리에 사람들이 무언가 바쁜 듯 오르내리고, 밖에서는 다른 큰 차( 지금 버스를)에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고,……. 바깥 요란한 소리에 멍하니 서서 가는데 어머니가 이제 내리자며 손을 잡아 이끌려 내려와 서니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웅장한 돌대문 위 큰 집이 보였는데 그것이 지금의 남대문(숭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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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엄마 손에 이끌려 한참을 비탈길을 오르며 걸어가던 나, 나의 잊지 못할 한 장의 부끄러운 기억이 생겼다. 긴 시간 기차에 시달림, 전차에서 내다본 세상, 길 주변 늘어선 집인지 건물들도 처음, 오가는 사람 구경에 신이 났던 것도 어느 순간 없어지고 가야 할 큰 누나 집이 어디인지 모르는 나는 지쳐 버린 것이다. 한참을 길(지금의 남산 길)을 올라가는데 다리도 아프고 심술이 난 나는 엄마에게 무턱대고 나 못가 하고 떼를 쓴 것이다. 엄마가 어서 오라 하면 안 간다고 우기고 울다가, 어머니께서 화가 나 먼저 앞걸음 하시면 놀라 따라 가고, 다시 엄마와 가까워지면 뒤로 한발 안 간다고 울고 우기고…….
그 후 10년 서울에 있는 서울 철도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남대문 전철역에서 내려 후암동 누님 댁을 찾아 가니 그곳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옆으로 흐르는 개천가 집이었으며, 돌이 많다고 후암동으로 불리고 있었다. 남대문에서 후암동 큰 누님 댁으로 가던 그 길은 첫 서울 구경에 머릿속 남아있는 기억의 남산 길 어머니와 함께 떼쓰고 울고, 쫒고, 쫒기고 했었던 첫 나들이 눈물 기억이 남아있는 추억의 장소며, 아련한 추억이 깃든 길이었다.
- 쓰라린 가슴 알이
나는 글방에 다니며 한문 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내가 엄마랑 서울 누님 집 다녀오고 얼마 안 되어 6.25란 전쟁을 겪게 되었다. 우리 집, 이웃 집 모두 짐을 싸 이고 지고 피난길에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 지게 짐 위에 같이 앉혀 짊어져 가다가 지게애서 내려 걸어갔으며 오랜 시간 걸어 피난처인지 온 가족이 새로운 집에 짐을 풀게 되었다. 피난 시 하루는 겁 없이 집을 나와 들에 놀러 가던 중 하늘에서 이상한 처음 듣는 소리에 쳐다보며 손가락질 하는 때 느닷없이 하늘에서 무언가(총탄) 쏟아져 내리니 나 살려라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던 기억도 있고, 얼마 후 피난처 집에서 옛 살던 우리 집에 다시 돌아와 살던 중 새해 초 한겨울 엄동설한에 다시 도망 아닌 피난하여야 한다며 피난길에 먹고 살기 위한 보따리 짐을 싸 피난 준비 중 느닷없이 집을 급습한 낯모르는 사람들, 뒤에 알게 된 빨갱이라는 자들이 집안을 가리지 않고 뒤지고 뒤 터에 있는 광에서 쌀가마니 등 온갖 먹거리는 물론 각종 집기, 특히 식구들 밥그릇 놋쇠그릇 등 온갖 것을 이고 지고 들고 나와 이 나쁜 놈 새끼 윽박지르며 쌍욕하며 아버지를 대청마루 앞에 세워 마구 때리고 발길로 차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것은 70년을 훨씬 지난 지금도 가슴이 떨리는 장면이었다. 아픔과 무서움을 피해 우리가족은 새해 추운 겨울 또 다시 집을 나서 피난길(후에 안 1.4후퇴)을 나서야 했다. 지금 커서는 왜 그때 빨갱이들에게 덤비고 아버지를 때리지 못하게 막지 못했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아프게 하며 나를 후회하도록 한다.
( 2 )
새해 추운 겨울 때 아닌 1.4후퇴란 피난길에 겪었던 일이 떠오른다. 강 건너고 산 넘어 피난길에 철없이 무엇이 그리 좋은지 새로운 주위에 놀라고 신기해 이리자리 뛰고 앞만 보고 가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엄마, 아빠는 물론 형, 형님네 식구, 이웃에 사는 고모네 가족들도 모습이 보이지 않아 놀란 마음에 “엄마 아 엄마 아” 울며불며 오던 길 되돌아 한참을 가는데 저 멀리서 “광호야, 광호야” 외치는 소리에 달려가니 형님이 달려와 “ 야 이놈아” 하며 나의 머리통에 꿀밤을 주시며 엉덩이를 한데 때리셨으며 나는 손을 꽉 잡혀 형님의 손에 이끌려 엄마, 아빠, 가족들과 만남을 할 수 있었던 시간 또한 너무도 아찔한 순간으로 기억 되었다.
1,4 후퇴로 후에 알게 된 지금의 경기도 여주에 피난 시 후에 알게 된 이천에 주둔한 우리 아군이 쌀을 배급 준다하여 내가 가서 받아 메고 오면서 “오늘은 쌀밥을 얻어먹겠구나!” 하며 기뻐하던 순간도, 또 형님이 땔나무를 한 짐 하여오면 나는 오늘은 입이 좀 하는 기대에 함박 되어 큰 기대로 나무를 쪼개시는 형님 옆을 서성이다 쪼갠 나무 그 속에서 굼벵이가 꿈틀하면 아 좋아라하고 그 굼벵이 주어 들어 구워먹던 피난시절, 피난길 머물던 그 추억과
머물고 있는 피난처 동내에 어느 날 갑자기 군이 몰려 들어와 이웃집 여자를 덮치고 다치게 했을 때 웅성거리며 아우성치던 소란한 풍경. 어린 나이에도 이놈들이 왜? 지금은 알 것 같기도 한 이런 전쟁의 아픔을 겪은 모든 부모들이 어린 나이에 전쟁으로 겪은 고생, 눈으로 목격한 빨갱이 못된 짓 등의 한을 담고 앞으로 새싹 어린 자기 자식들에게는 이런 아픔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배 고품과 싸우며 오늘의 풍요를 위해 열심히 살아와왔건만, 오늘의 풍요를 즐기며 마음껏 입을 열며 하고픈 모두를 즐기며 사는 50~60대의 정치, 위정자, 학계 등 또 다른 위치에서 맘 놓고 사는 자 모두 극우니,극좌니,, 편 가르지말고 오늘을 있게한 지난 날의 쓰라린 아픔을 이겨낸 지난 시절의 아픔이 어떻했는지 과거를 잊고 사는 너들 지금 당장 집에가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에게 보릿고개가 무엇인지 그 시절 얼마나 힘들고 배가 고팠는지 물어보라고 큰 소리로 외쳐본 나만의 아픔이 아닌 6.25를 모든이의 아픔도 있었고 한편 비록 과거가 어떻했던 여기 대한민국 땅에 살면서 반성하고 뜻있게 살라 외친다. 왜 그 좋은 머리로 편만 가르지 말고 선민을 위한 마음을 담아 너희가 정말 대한민국을 생각한다면 "이만갑" 이제 만나러갑니다 을 원하는 탈북인의 아픔에 안타까워 하는 말 한마디라도 전 국민이 다 듣도록 " 이제 남북이 자유로히 만나 봅시다" 웨처보라 권하고 싶은 마음이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집에 먹을 것 없어 울타리 댑싸리 잎 뜯어 호박잎에 싸 불에 익혀 먹었던 기억도 새롭다. 어느 때는 느닷없이 피난길 헤맬 때 형님 손에 잡히지 않았다면 그때 길 잃은 고아로 미군 부대에 끌려가서 후에 미국으로 입양 되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있었을 것을 하고 후회 아닌 부끄러운 부러움의 일기도 했다.
아울러 나의 가슴 속에는 서울 첫 나들이 후 겪게 되었던 전쟁, 빨갱이들에 아버지가 당한 폭행과 양평기차역에서 역무원으로 일 하는 맏형님을 이웃의 친구가 무슨 원한이 있는지 어 느날 갑자기 개인 복수로 마음에 빨갱이로 몰아 언제 어디서 죽임을 당하고 시신도 못 찾은 한이 서린 앙가슴은 이제는 잊어야 할 큰 아픔으로 자리 잡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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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생활의 시작
60년대 서울 고등학교를 진학하여 후암동 누님 집 다락방에서 지금은 사라진 남산굴길거처 매일 아침 일찍 을지로 6가에 있었던 을지국민(초등)학교 까지 걸으며 뛰며 어린이 신문인 ‘소년조선’을 다른 아이보다 더 팔으려 자리싸움도 하며 팔았다. 많이 팔릴 때는 얼굴은 함박이지만 별로일 때는 시무룩하여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져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힘들고 짜증이 일었다.
방학 때는 남대문 시장에 있는 문구 상회에서 자전거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용돈을 보태었다. 나는 동대문 청계천 옆 옛날 고양 군청이 있던 옆자리에 있는 고등학교는 덕수상고(현 덕수고)였고 야간 학생으로 다니던 그 시절 격은 4.19혁명 과 5.16 혁명 (한편 쿠데타라고도) 격은 격동의 시절 그 이야기는 또 다른 건더기로 남겨 놓으련다.
아르바이트는 아르바이트고 서울의 덕수 상고 야간 학생으로 입학 후 1학년 2학기부터 고2학기 까지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 보조도 받았다. 주위에서 네 성적으로 하는 눈여겨보심에 나는 장래 무엇을 하여나 하는 장래의 나를 고민을 하던 차 어릴 때부터 장래 희망은 법관이 되고 싶은 진한 마음이 있어서 차제에 대학 진학을 법대로 정하고 나니 상고 주과목인 주산과 타자기 배움을 게을리 하니 학자금 보조가 취소되어 3학년의 학자금 조달이 문제가 되었다. 어쩔 수 없어 고향 시골 우리 앞집에 과자가게를 하시는 나를 무척 아니 좀 아끼는 형님이 계셔 그 형님을 찾아가 나는 무턱대고 “졸업 후 갑을 것이니 학비 좀 빌려 주세요” 하고 머리 숙이니 한참을 나를 내려다보시더니 웃으시며 “그래”하고 서슴없이 학비를 빌려 주시어 무사히 학교 졸업을 하게 되었다. 한편 원하던 법대시험에 아깝게 불합격하고 나니 당장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 고민 끝에 취직 길로 전향 당시 유명한 보험회사에 경리 사원으로 취직 후암동 누님 댁 다락방에서 청진동 회사로 출퇴근을 시작 월급모아 나름 집을 얻어 누님 댁에서 나와 열심히 살아 오늘에 이른 지금 방향 전환엔 후회도 없다. 시골 이웃 형님께서 준 학자금은 취직으로 번 돈으로 돌려드렸다.
추억을 뒤로한 지금의 나
신문팔이 을지로 6가 까지 걷던 남산과 남산 길, 남대문 길. 지금 생각하면 내 생에 아름다움을 새롭게 한 서울 초행길과 서울로 올라와 내 생의 기초인 학비를 위한 첫 발길을 디딘 남대문시장부터 남산의 둘레길, 옛 남산 굴길이 머릿속 생생한 한 폭의 그림으로 떠오른다. 아울러 다니던 고등학교는 서울 운동장 앞이었으며 조금 나서면 동대문(흥인지문) 이었고 뚝섬 가는 전차길 과 전차길 주변 판자집촌, 청개천변에 차곡차곡 허리를 맞대고 “어서 오세요” “없는 것은 없고 있을 건 다 있습니다,” 허리를 맞댄 점포 사람들, 청계천 건너 얼굴을 마주한 가게들 오가는 정은 사랑하며 사는 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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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느닷없는 청계천을 길로 만들며 고가도로가 생기면서 청계천 변의 오가는 삶의 정이 사라졌으며 오늘에 와 다시 청계천의 물 흐름길을 걷게 되니 서울의 변화와 더불어 삶의 아픔도 격은 서울은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과 한편 서울 여행 후에 바로 겪게 되었던 전쟁의 아픔으로 연결되어 지금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한편의 추억이기도 하다.
온 마음 다한 서울의 생활은 나를 위하고 시골의 가족을 위한 힘찬 발걸음 이었으며 한편 남들이 말하는 역마살 이 역마살이 많아선지 직장 생활은 서울 청진동에서 시작 강원도 춘천, 부산을 거쳐 서울로 다시 대전을 거쳐 서울, 역마살은 나를 경기 김포시 하성으로 오가는 생활을 거처 마송(통진읍)에 발을 드려놓으니 역마살 바램 은 만남을 더, 더 하다 보니 어서와 나를 반겨 맞이하는 ‘문학’이라는 친구를 만나 나의 삶의 새로운 길을 더해 걷게 되어 마음을 주고받으니 그 큰 터전의 친구의 본명은 ‘통진문학’이었다. 더불어 친구 통진문학의 아낌과 사랑의 마음을 받은 나 새로운 친구 "통진문학" 너를 사랑하며 마음을 열어 나의 남은 여정 길에 어느 누구보다 비유 할 수없는 사랑하는 절친 친구 ‘기름뭉치 광호’가 되리라 마음 다 잡으니 하루하루가 뿌듯하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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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아래글은 내가 너무 극우같아 윗 글에서 뺌
북을 칭하는 용공성 발언과 행위에 화가 치밀때는 북한의 3대 세습에는 입을 꼭 다물고 있는가? 북을 응징하는
응징 해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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