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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13) 2024. 9. 8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3:11-26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미문’에서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장애인’이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허리를 숙여 구걸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여’ 보고, “우리를 보라”하고 말했습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베드로는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6절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
그리고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면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사와 표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 처음으로 걷게 된 이 사람이 가장 먼저 간 곳이 어디입니까? 예,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조용히 찬송한 것이 아니라 껑충껑충 뛰면서 소리를 질러가면서 그렇게 춤추면서 찬양했습니다.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은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랐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걸인이 어떻게 이렇게 치유받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감사를 표하는 걸인>
그런데 곧 누가 이 사람을 치유했는지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누가 너를 치유해 주었느냐?”, “어떻게 걸을 수 있게 되었느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제에야 정신을 차린 이 사람은 자신을 고쳐준 사람을 찾았습니다.
11절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이 걸인은 나면서부터, 그러니까 무려 40년 동안 걷지 못했습니다. 걷게 된 순간 너무 기뻐서 걸으며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누가 너를 치유해 주었느냐?”고 묻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자신을 고쳐 준 사람에 대한 감사를 해야 했습니다. 마땅히 자신을 고쳐준 분들에 대한 감사를 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두리번거리면서 찾다가 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의 행각’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고쳐주었어요!’라고 말입니다.
<솔로몬의 행각> 성전은 지성소, 성소, 유대인의 뜰, 여인의 뜰, 이방인의 뜰로 구분되어 있는데, ‘행각’은 가장 외곽에 있는 이방인 뜰 주위에 기둥과 지붕으로 이뤄진 회랑(回廊, 복도)입니다. 그중 동쪽에 있는 ‘행각’을 ‘솔로몬 행각’이라 부릅니다(지혜의 왕 솔로몬이 백성들을 가르친 것을 의미하고 공부하는 곳이라는 측면에서 붙인 이름). 이곳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후, 랍비들이 율법을 가르치거나, 순례자들이 모여 토론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도 수전절에 이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요10: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그때에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요10장). 또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곳에서 대그룹 집회를 열기도 했습니다(행5:12). 그러니까 공식적인 예배가 진행되던 성전 안과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유로운 토론과 집회가 가능했던 장소가 바로 ‘솔로몬의 행각’이었던 것입니다. |
그 걸인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기 위하여 ‘솔로몬의 행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람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자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를 합니다.
12절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의 첫 마디는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였습니다. 베드로에게 이 일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놀라운 능력과 권세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도 사실은 그들의 능력으로 한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때문임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어떤 특별한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얼마나 정직하고 신실한 주님의 종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능력으로 그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허락된 ‘권위’(authority)를 가지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power)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그들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실 뿐입니다.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던 중에 지금과 똑같은 상황에 부딪힌 일이 있었습니다(행14장). 그때에도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을 고쳐줌으로써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하고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때에 바울은 옷을 찢으면서 그것을 만류합니다. 그리고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와 요한의 태도, 그리고 바나바의 태도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전혀 다른 행동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시선을 오직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려고 골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장에서 위선적으로 기도하며 자신의 경건을 선전하고자 했으며(마6:5), 또 구제할 때에도 자신이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을 알리려고 애썼습니다(마6:2). 또 금식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했습니다(마6:16). 또 의복도 일반 사람들보다 더 경건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특별하게 꾸몄습니다(마22:5).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임을 자처하면서 백성들의 눈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로 향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자신들을 신격화, 우상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어떤 놀라운 일을 이루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통로일 뿐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은 수도관을 통해 나옵니다. 그러나 수도관이 물의 근원은 아닙니다. 수도관 자체가 물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관은 물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입니다. 진정 높임을 받을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베드로>
베드로는 이 일에 관해서 아주 단호한 태도를 보입니다. 자신들을 주목하여 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주목해야 할 분은 따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드러내는 기회로 삼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중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종, 곧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13a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의 종’으로 표현하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았습니다(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그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의 종’이라고 표현하였을까요? 여기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분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고난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이사야에 모두 4개의 '종의 노래 (42:1~4; 49:1~6; 50:4~9; 52:13~53:12)'가 나옵니다.
사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53:4~5(고난받는 종의 노래)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 예언한 고난받는 종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받는 종의 사역’을 잘 표현하신 분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인간을 섬기기 위해 기꺼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 곧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성육신).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의 종’ 예수님을 보내신 주체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1) 모세에게 주신 메시아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말씀합니다.
22~23절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베드로는 신명기를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장차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을 끄집어냅니다(신18:15-20). 그 약속의 성취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직전에 요단강 동쪽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고별 설교입니다. 그 설교 중에서 모세는 호렙산(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약을 맺던 장면을 회고하면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셨던 말씀을 대신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했고, 모세에게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중재하는 역할을 해달라고 위임하였었습니다. 바로 그 장면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겠다고 모세에게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2) 사무엘 선지자 이후의 모든 선지자의 메시아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말씀합니다.
24절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또, 사무엘 선지자 이후 모든 선지자들이 줄기차게 예언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예언임을 말씀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가 교차하던 시기의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예언자 활동을 시작한 장본인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사무엘을 비롯한 그 이후의 모든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가 출현할 것을 이야기해왔다는 것입니다.
3) 아브라함에게 주신 ‘씨’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말씀합니다.
25~26절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라는 말은 모세의 약속을 믿어왔던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상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22:18)는 약속입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이 약속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너의 씨’는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세 가지 약속 중에서 ‘후손에 대한 복의 약속’과는 구별되는 메시아 예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앞에서 이 땅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선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먼저 택하셨고 이스라엘을 먼저 택하셨습니다. 그들부터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선민이라는 이유로 구원이 자동적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여야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회개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영접하지 않으면 거듭나지 못하고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경을 받아들이는 이유> 우리는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구약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증언한 하나님이 구약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구약의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것임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별개의 하나님이 아니라,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 자신도 구약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심. 자주 구약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용하심. 그래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정리하면,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14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지만, 예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었습니다.
이 말은 고난 겪을 아무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이십니다.
15절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생명의 주’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구원의 결과를 언급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생명’(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부여자’이십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10:10(당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설명하시면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 - ‘너희가’>
그런데 바로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너희가’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13b절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신 분을 거부하였습니다(살인자 ‘바라바’를 구함).
14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너희가’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15절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베드로의 논점은 단순합니다. ‘너희가’ 넘겨주고, ‘너희가’ 거부하고, ‘너희가’ 끝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솔로몬 행각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는 설교를 합니다.
<모르고 한 일도 회개하라>
베드로의 설교가 절정에 다다릅니다. 당황한 그들을 향해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17~18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베드로는 그들을 가리켜서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예수님을 못 박게 만든 것은 ‘알지 못하여서’ 한 일이라고 위로해 줍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무리 몰라서 한 일이라고 해도 잘못된 선택과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잘못은 잘못이고 죄를 범한 것은 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명령합니다.
19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실수를 했고 잘 몰라서 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그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이켜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회개의 당위성>
베드로는 회개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말씀합니다.
19~21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회개의 당위성은 주님의 재림에 근거합니다. 만일 주님의 죽으심이 끝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아무리 회개를 한다고 하더라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행실을 고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림하시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기 ‘새롭게 되는 날’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재림, ‘만물을 회복하실 때’)을 뜻합니다.
그날은 ‘예정되어 있지만’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본래의 자리인 하나님의 우편에서 존귀한 신분으로 영광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오늘 본문의 결론을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길게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였지만,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그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허락된 ‘권위’(authority)를 가지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power)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16절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치유의 ‘기사와 표적’을 통해 속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서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새롭게 되고’,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