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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학규(金學奎) 1900.11.24~1967.9.20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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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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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평남 평원 |
주요활동 |
1919년 봉천성 유하현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문회고급(文會高級)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1927년에 졸업한 그는 곧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의 동명(東明)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시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지대본부 견습사관으로서 삼원보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 흥경현 왕청문(旺淸門)에서 현익철(玄益哲)·현정경(玄正卿)·양세봉(梁世奉)·고이허(高而虛) 등과 같이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1930년에 동삼성(東三省)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그는 한중합작 항일투쟁을 협의하였으며 조선혁명군을 기동부대로 개편하여 양세봉(梁世奉)·양하산(梁荷山) 등과 유격전을 지휘하였다.
1931년 12월에는 신빈현(新賓縣)에서 조선혁명당대표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그는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2년 3월에는 조선혁명군의 참모장에 임명되었는데 조선혁명군 3개중대는 중국 의용군과 연합작전으로 신빈현(新賓縣) 남쪽에서 일본관동군을 격파하고 영릉가(永陵街)전투 등에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1933년 2월에도 한·중군 합작항일공작을 위해서 전권대표로 환인성(桓仁城)에 파견되는 등 만주에서의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소극적인 자세와 일군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동삼성에서의 무장항일투쟁을 더 계속할 수 없게 되자
1933년 12월 그는 이청천·황학수·오광선·박명진 등 독립군 장성들과 함께 산해관을 넘어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그는 남경(南京)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가하였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으로 통합한 후에는 중앙간부로 활약하였다.
1936년에는 남경에서 현익철·양기탁(梁起鐸) 등과 민혁당 비상대회를 열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분리되어 나가자 조선민족혁명당이라 개칭하였다.
1939년 사천성 기강( 江)에서 다시 한국독립당을 만들었으며, 이듬해에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참모에 임명되었다.
1940년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서안(西安)으로 이동됨에 그는 참모처장 겸 참모장에 임명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그는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어 1940년 10월 김붕준(金朋濬)의장 탄핵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후 제3지대장 겸 징모제6분처 주임위원에 임명되어 1942년 2월 임지인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일본군 점령 치하에 광복군의 공작거점을 확보하고 광복군의 활동을 선전하였으며 적의 군사기밀을 탐지하는 외에도 중국 유격대와 같이 일본군에 대한 게릴라 작전을 감행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에 임명되어 활동하는 한편 오직 조국광복을 위한 애국충정의 일념으로 만난을 무릅쓰고 초모공작을 지휘하였는데, 그 결과로 제3지대의 초모인원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그의 이러한 공적은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군무보고서에 『부양 초모위원 김학규부(部)의 성적이 최가(最佳)하여 51명의 제1기 한광반 필업생을 산출하였고 (후략)』 라고 표현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를 중심으로 한 3지대 기간요원들의 활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초모청년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그는 종래의 개별적인 교육훈련을 지양하고, 1944년에 집단교육훈련계획을 총사령부에 보고하는 동시에 현지의 중국군 제10전구 사령관과 교섭하여 중국 중앙 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반에 한광반(韓光班)을 특설토록 하였다.
그는 직접 훈련주임이 되어 주로 정신훈련과 사상선도에 주안을 두어 한국독립운동사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연혁, 광복군창군의 의의, 건국강령, 세계혁명사, 국제정세, 연합군의 동향 그리고 한광반의 설치목적을 명백히 밝혀 주었다. 1945년 5월부터는 광복군 제2·3지대에 대한 한미합작 특수훈련(OSS훈련)이 계획되었다.
제3지대는 지대장인 그의 책임 하에 미국인장교 윔스(Chrence B.Weems)가 교육을 담당하도록 계획되었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우리의 힘에 의한 조국광복"의 숙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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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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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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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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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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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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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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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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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출처 |
(네이버 지식) 註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53면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22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49 356 357 358 366 370 371 372 373 374 378 379 380 381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9면 ·무장독립운동비사 154 163 165 166 168 171 195 201 206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15 537 540 594 603 1089 1090 1100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457 514 553 558 805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279 612 832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241 243 244 250 258 259 261 262 266 267 269 270 274 300 535 559 561 566 567 574 633 634 636 689 772 777 821 826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1권 465 489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2권 82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3권 210 234 386 387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66 75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자료 1권 476 48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670 94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638 69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08 186 202 206 207 221 223 227 281 417 418 419 422 492 547 54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53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34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334 335 33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289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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