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학교>
1. 인도여행을 끝내고 경유지인 홍콩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다 잠시 휴대폰을 보다 깜짝 놀랐다. 이번에 학교를 옮기는데 12지망이 다 탈락이 되어 오늘 3시까지 교육청에 다시 희망지를 적으러 오라고 하는 학교에서 보낸 문자였다.
2. 1시에 서울에 도착하는데 3시까지 교육청에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갈 수가 없다고 문자를 보내니 대신 가 줄 사람이 있으면 된다고 했다. 급히 친구처럼 지내는 동학년 선생님에게 전화해서 부탁을 했다. 고맙게도 대신 가 주겠다고 해서 우선 한시름은 놓았다.
3. 희망지를 쓰는 곳으로 들어가면 연락을 못하게 휴대폰을 압수하기에 우리는 미리 기준을 정했다. 집에서 가깝고 학급수가 많은 학교로 결정을 지었다. 학급 수가 커야 업무를 나눠서 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큰 학교를 선호한다.
4. 비행기를 탔으면 연락도 받지 못해 주어지는 학교로 그냥 가야만 한다. 선택이고 뭐고 없는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5. 교직생활 중에 한 번도 없던 일이 일어나다니. 12 희망지에서 다 탈락할 줄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더군다나 마지막 근무지가 될 학교인데.
6.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내 머리가 아프고 화가 났다. 겨울방학 전에 교장 선생님이 하신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명퇴하는 줄 알고 근무 평가를 못 줘서 미안하게 됐어요”
황당했지만 이제와서 뭐 하겠나 싶어서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몰랐다. 학교를 그만두는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점수를 보태줬다는 뜻이다. 퇴직하는 사람은 근무 평가 점수가 의미없기 때문이다.
7. 퇴직할거라고 떠들어 댄 내 잘못이지 싶다가도 서운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마지막 근무지인데 어디로든 가면 뭐 어떠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에게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네가 복을 받을 사람이니 좀 나눠서 좋은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했다,
8. 드디어 다시 적어낸 두 가지 희망지 중에서 1순위마저 탈락되어 마지막 순위가 근무지로 배정되었다. 울산에서도 조금 외진 곳이었다. 북구의 끝, 동구의 초입에 있는 학교로 발령이 났다. 이런 학교가 있었는지 이름도 생소했다.
9. 사실은 오래된 첫 발령지 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학교는 재건축 개발에 의해 사라져 새로운 곳에 다시 지어져서 의미가 없어졌다. 역사가 오래된 학교들이 개발에 밀려 이전되어 새로 지어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옛 모습이 사라진 학교는 더 이상 추억이 되지 못했다.
10. 이런 저런 걱정에 심란한 마음을 안고 처음으로 학교를 찾아가던 날, 네비게이션을 켜고 갔는데도 학교를 찾지 못해 몇 바퀴를 돌았다. 학교는 보이는데 들어가 보면 막다른 길이 나왔다. 학교로 들어가는 입구가 너무 작아 찾지를 못한 것이다. 겨우 찾아서 들어가 보니 오래된 작은 학교였다.
11.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이 아직도 있는 옛날의 교정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첫 발령지 학교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학교는 낡고 오래되어 보강공사가 한창이었지만 현관 앞에 매화나무 두 그루가 예쁘게 꽃망울을 피우고 있었다.
12. 전입교사 모임에 들어가 보니 교장이 학교 두 해 후배였다. 대학 노래패 동아리 후배여서 더욱 반가웠다. 베이스 기타를 치던 녀석이었는데, 마지막 학교에서 만나다니 희안한 인연이다 싶었다.
“ 선배님, 우리 학교 괜찮습니다.” 라며 커피를 내려주었다.
후배가 내민 커피 한잔이 참 따뜻했다.
13. 아산로를 달리며 바다를 보며 출근하는 느낌도 좋았다. 며칠 근무를 해보니 대략 이 학교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교육을 받지 않는 아이들과 다문화 학생들이 많아서 그런지 학습 부진이 많았지만, 아이들이 착하고 순진했다, 작은 학교라 그런지 가족적인 분위기에 사람들이 친절하고 따뜻했다. 배정받는 교실은 남향으로 햇빛이 아주 잘 들고 운동장이 환히 내려다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교실이다,
14. 마지막 근무지까지 가 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오래된 학교를 꿈꾸었고 아이다운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했던 소망이 뜻밖에도 이루어진 것이다.
15. 고단한 인생에 뜻하지 않게 받게 되는 선물같은 일들이 있다. 그런 시간들이 있기에 인생은 또 견뎌볼 만한 게 아닐까? 물론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16. 교사의 사랑과 돌봄이 더욱 필요한 아이들을 만나려고 먼 길을 돌아왔구나. 쓰일 곳이 있다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내게 남은 사랑과 열정을 다 주리라. 주고 또 주어도 받을 생각이 없는 짝사랑처럼 그렇게.
17. 나 대신 희망지를 써 준 친구에게 맛있는 저녁을 사줘야겠다.
첫댓글 마지막 근무지 잘 선택되셔서 축하 드립니다. 좋은 추억 쌓고 퇴직 하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소중한 시간이 될 듯 합니다.
의미 있는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이들 가르치고 시간내서 글 쓰고
많이 바쁘시죠?
시간을 소중히 쓰는 선생님을 보니 마지막 학교에서 행복하게 퇴직 할것 같네요.
응원합니다.
발령 난 학교, 교장, 배정 받은 학년과 교실, 아동들 성향 등등,
교사들의 희비가 교차하는 계절의 글이라 칼럼 같아요.
오래 전 이맘때, 애들 엄마가 뱉었던 푸념이 떠올라서 가깝게 느껴졌어요.
'울면서 들어갔다가 울며 나왔다.'는 어느 교사의 경험처럼
새 학교가 '울며 헤질 학교'가 되기 바랍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