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신안의 비금, 9월 14일에 네 번째로 들어왔다. 이번에 들어오면서 계획했던 것은 저 번에 도초에 왔을 때 사진을 못 찍어 간 소금창고를 찍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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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 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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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갑환 |
| 너른 광야의 염전, 여기에 띄엄띄엄 서 있는 빛바랜 판잣집의 소금창고, 또 바닷물을 끌어들여 저장한다는 지붕만 달랑 지면에 얹어 놓은 것 같은 해주가 이 곳 비금·도초에서만 볼 수 있는 인상적인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금에 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디카가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해도 ‘카드에러’라는 문자만 뜨지 찍으려는 화면이 나오지를 않았다. 사용법을 찾아 봤더니 ‘카드에러’는 카드를 교체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화가 나던지. 지난번에 못 찍어 간 소금창고를 이번에야 말로 꼭 찍어 가겠다고 벼르고 왔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화산 폭발처럼 분출하는 화를 참고 있다가 괜히 집에 전화를 해서 아들이 받자 죄 없는 아들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너 아빠가 디카 잘 준비하라고 했잖아.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큰 소리를 질렀더니 중학교 1학년인 아들도 황당한 모양이다. 조용히 듣고만 있더니 “웃기고 있네”하며 낮은 목소리로 내어 뱉는다. 그 말을 들으니 화가 절정을 이루었다. “ 너 , 뭐라고 했어. 너 집에 가면 가만 안둘 거야.”
아들이 나중에 “아빠, 잘못했어요”하고 또 핸드폰 메시지로 ‘아빠, 죄송해요’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서 화는 풀어졌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들 말이 맞긴 맞다. 갑자기 홍두깨 식으로 아무 잘못이 없는 아들에게 화를 내니 아들 녀석한테는 웃기는 일이다. 잘 못은 내가 했다. 미리 점검하고 또 이런 일을 대비해서 카드를 하나 더 준비를 했어야 했다.
사진 찍는 것을 포기하려고 하니 더 아쉽다. 이제 또 비금에 들어 올 기회가 평생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행히 일행 중에 디카를 가져온 사람이 있었다. 다행히 그 디카가 내것과 같은 기종이었다. 자기는 사진을 안 찍을 테니 자기 카드로 찍으라는 것이다. 다행이었다.
비금에 있는 동안 바빠서 사진 찍을 시간을 따로 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비금을 떠나는 날 아침에 찍겠다고 작정을 하고 전날 저녁부터 준비를 했다.
비금에서의 마지막 날, 17일 아침 6시 30분경에 밖에 나갔다. 염전을 향해 걸었다. 빗발이 뿌렸다. 빗발은 갈수록 굵어졌다. 소금창고와 나는 참 인연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데 비가 또 방해를 했다.
드넓은 염전에 새벽부터 사람들이 나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긴 갈퀴 같은 도구로 염전을 밀고 다녔다. 아마 빗물을 쓸어내기 위한 작업 같다. 염전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완전 고체 상태다. 위에 사람이 밟고 다녀도 전혀 발자국이 나지를 않았다. 검은 고체상태의 소금은 마치 검은 갱엿판을 연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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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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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조갑환 |
| 비가 개이기에 소금창고 및 해주를 찍었다. 해주는 지면을 파고 그 위에 지붕만 달랑 올려놓았는데 여기에 바닷물을 저장한단다. 소금창고는 마치 핀란드의 통나무 사우나 시설을 연상케 했다. 나무판자로 지어져 아래 공간은 넓게 위는 좁게 지어져 있다. 철제를 쓰면 부식하기 때문에 나무판자를 쓴다고 했다.
한 곳의 소금창고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작업하는 풍경이 신기해서 가까이 가 보았다. “ 저 광주서 왔는디 소금 작업하는 것 구경 좀 할랍니다, 잉”했더니 좀 나이가 드신 분이 흔쾌히 승낙을 했다. “ 그러쇼. 마음대로 사진도 찍고 하쇼.” 소금창고에 소금이 그대로 쟁여져 있었다. 그 소금을 30kg 포대에 담고 있었다.
그 분께서 여러 소금이야기를 해 주셨다. 현지 비금에서 상인들에게 30kg 1포당 6200원에 파는 데 서울 등 소비처에서는 포당 1만5000원에 팔린다고 하니 생산원가보다 유통마진이 배 이상이 붙는다. 그래서 그 분은 본인이 생산한 소금을 직접 판매까지 겸한다고 했다. 본인이 직접 소비처에 팔더라도 운송비, 검사비 해 봤자 1포당 2000원 정도밖에 더 안 든다는 것이다.
소금도 중국산이 많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질이 우리 국산을 못 따라 간다는 것이다. 만져보면 우리 국산은 보슬보슬하게 부스러지는 데 중국산은 불순물이 많이 섞여 촉감이 좋지 않고 잘 부스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타일소금이라는 소금도 있었다. 이는 소금을 만들 때 개펄 흙이 많이 섞이면 소금색깔이 하얗지 않기 때문에 바닥에 건축자재인 타일을 쓰기도 하는 데 타일 소금은 결정이 더 굵어 가격을 더 쳐준다는 것이었다. 또 소금의 물을 빼기 위해 옷 탈수기처럼 생긴 소금탈수기에 돌려서 물을 뺀 소금을 탈수소금이라고 도 했다.
그 분과 함께 있으면 한 없이 소금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오면서 보니 도로 옆에 소금창고가 하나 있었다. 다른 창고들은 비가 와서 그런지 소금창고들을 부직포로 겹을 씌워 놓았다. 그래서 본연의 회색빛의 빛바랜 판잣집의 소금창고를 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 소금창고는 판잣집 그대로여서 소금창고 앞에 앉아 있는 세 분에게 먼저 허락을 구했다.
“어르신들, 소금창고 사진 하나 찍을랍니다” “그러쇼. 많이 찍어서 가쇼” 한 분이 흔쾌히 허락을 하는 데 옆에 있던 한 분이 말을 거들었다. “사진 찍어서 어따 쓸라고 그라요.” “아따, 어따 붙이기도 하고 그랄라고 그러것제.”
소금의 섬, 비금도. 섬의 형상이 매를 닮았다 하여 비금이라 했다한다. 소금과 시금치가 유명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 순박한 인심과 우리 전라도 말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섬, 비금도는 좋은 환경과 자연이 잘 보존 된 청정의 섬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