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10여 년 전, 미국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국내에 개봉되었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 새롭게 부임해 온 국어 교사 키팅 선생님과 학생들과의 교감을 그린 이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키팅 선생님이 휘트먼의 시를 갖고 학생들에게 감화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시라는 것이 성경 구절만큼이나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깨달음을 줄 수 있음을 그 영화는 말해주고 있었다.
키팅 선생님은 고리타분한 이론이 적힌 교과서의 몇 페이지를 찢으라고 하면서 시 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시라는 것이 거의 무용지물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나는 아직도 시인이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이기도 하다.
속된 말로 살맛이 나지 않는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되고 만 것이 무엇 때문인지 내 나름대로 진단을 내려보고, 어설프게나마 처방전도 제시해볼까 한다.
1. 베스트셀러만을 찾는 독자에게 말하고 싶다
교보문고에서 집계한 2005년도 시집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개인의 창작 시집은 한 권도 없다.
2006년도 상반기 베스트셀러 10위 안에는 다행히도 김용택의 신간 시집인 {그래서 당신}이 8위에 랭크되어 있다.
상반기 9위인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은 신간 시집이 아니다.
2006년도 상반기 베스트셀러 시집 1위에서 6위까지의 면면을 살펴보면 개인의 창작 시집이 아니라
다 남의 시를 갖고 편집한 시집이다.
편저자는 류시화(1, 3위), 장영희(2위), 편집부(4위), 도종환(5위), 정호승(6위)이다.
정호승이 남들이 쓴 시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가려내어 짧은 해설을 붙인 {이 시를 가슴에 품는다}가 6위에,
자신의 기간(旣刊) 시집에서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시를 골라낸 시선집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가 7위에 랭크되어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베스트셀러 시집을 내는 '5인방'의 면면이 일부 정통문학권의 시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10년 전에는 베스트셀러 시집을 내는 시인이 류시화·원태연·용혜원·이정하·이해인 5명이었는데
지금은 류시화·이해인·정호승·김용택·안도현으로 바뀌었다.
원태연·용혜원·이정하의 시집보다 정호승·김용택·안도현의 시집이 월등 나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집 초판으로 통상 3000부를 찍던 굴지의 출판사가 2000부로 줄이더니 다시 1500권으로 줄여서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른바 '정통문학권'에서 내는 시집이 워낙 안 나가자 이런 고육지책을 쓰게 된 것이다.
몇 개 출판사를 제외한 대다수의 시집 시리즈를 내는 출판사에서는 자비출판을 유도하고 있다.
초판 1000부 정도를 찍고, 400∼500권을 저자가 사 가게 하는 것이다.
나머지 500권이 서점가에서 소화가 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대형서점이 아닌 경우 시집과 문예지는 아예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정말로 죽은 시인의 사회이다.
소설의 경우 독자의 편식은 더욱 심하다. 2006년 상반기 소설 베스트셀러 20위까지를 살펴보았더니
국내 작가 공지영의 소설이 1, 3위를, 박현욱의 소설이 9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한 국내 작가의 이름이 20위 안에는 없다.
댄 브라운의 소설이 2, 14, 15위를,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이 6, 10위를,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5, 8, 13, 18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카엘 엔데의 {모모}가 4위를 차지한 것은 텔레비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덕분이니 우스운 노릇이다.
제아무리 열심히 시와 소설을 써 책을 출간해본들
독자는 '재미'만을 추구하며 책을 사니 재미있는 책을 못 쓰는 나 같은 사람은 맥이 빠진다.
하지만 독자의 수준을 갖고 나무랄 수는 없다.
이미 서구에서는 시집이 상품적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려 저자가 1000부 정도를 자비로 찍어
공공도서관과 아는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고 하니까.
베스트셀러 시집에 대해 몇 가지 지적은 하고 싶다.
시단에서 인정받고 있는 유명한 시인이
출판사의 상업주의에 호응, 감상적인 연애시 중심으로 시를 편집하여 내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
그리고 애송시가 반드시 좋은 시라고 할 수는 없다.
애송시집과 연애시집이 지속적으로 출간되어 서점가를 석권하고 있는 탓에
상대적으로 시인의 고뇌가 배어 있는 좋은 시집들이 사장되고 있다.
무명시인의 좋은 시나 지방 거주 시인의 좋은 시를 찾아내어 따뜻하게 조명하려는 작업을
문학평론가들도 문예지 편집자들도 하지 않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독자들에게도 감히 말하고 싶다. 베스트셀러 시집에 현혹되지 마시라고.
어떤 시인의 사색의 깊이와 인식의 폭을 만나고 싶다면 베스트셀러 시집은 오히려 멀리 하시라고.
시가 단지 위안의 기능만을 갖는다면 강장제 한 병과 다를 것이 무언가.
1년에 단 몇 권의 시집이라도 사서 읽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독자가 한국 시문학의 고사를 막아줄 수 있을 것이다.
2. 지방 문예지의 분발을 촉구한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문예지들은 대개 콧대가 높다.
수원에 사는 경인일보 신춘문예 출신 시인의 작품 가운데 괜찮은 것이 있어 문예지 계간평을 쓰면서 언급하였다.
그분은 지역에 있어 사실상 불이익을 많이 당하고 있기에 잘 아는 문예지 주간에게 이 시인의 시세계를 말해주면서
청탁을 해보라고 말을 건넸다.
문예지 주간 왈, 지방지 신춘문예 당선으로는 정식 등단을 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실어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기에 깜짝 놀랐다.
지방에서 발간되는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소설가들도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것으로 안다.
개탄해마지 않을 일이다. 지방에 거주하고 있건 유명세를 누리지 않고 있건 작품을 보고 마음에 든다면 청탁하면 되지 않는가.
반대로 아무리 유명한 시인일지라도 최근에 발표되는 작품이 영 신통치 않으면 청탁을 하는 데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문예지 편집권을 갖고 있거나 문학상 심사위원 등을 하면서 파워를 발휘하는 문인의 작품에 대해서는 찍소리하지 못하면서
지방 거주 문인이라고 홀대하는 문단 분위기는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노대가이건 원로이건 중견이건 작품에 미흡함이 있으면 말해드려야 하지만 나부터도 그런 말은 웬만하면 삼간다.
어떤 사건 이후부터이다.
평문 비슷한 글을 쓰면서 강력하게 비판한 시인이 문단의 원로에서부터 신진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이 된다.
박재삼과 이성선 시인의 그 당시의 최근작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각기 다른 글이었다).
박재삼 시인은 내가 그 글을 쓴 지 3년 뒤에, 이성선 시인은 그 다음해에 돌아가셨다.
"이성선 시인이 자네가 쓴 글을 읽고 많이 괴로워했다고 하더군." 이성선 시인의 친구인 어떤 분이 훗날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아아, 얼마나 송구스럽던지. 하지만 비평적 글 쓰기를 하면서 칭송 일변도로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주례사비평'이라는 모욕적인 용어가 나온 것도 따지고 보면 일리가 있다.
요즈음 들어 지방 문예지가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각 지역마다 대표 문예지가 있는데 대도시만을 대상으로 살펴보자면 부산의 {오늘의 문예비평} {시와 사상} {신생}, 대구의 {시와 반시}, 광주의 {시와 사람} {문학들}, 전주의 {문예연구}, 대전의 {애지} {시와 정신} {문학마당},
제주의 {다층}, 인천의 {황해문화} {학산문학}, 춘천의 {시와 세계} 등이다. 거의 다 계간지로, 현재 10종이 넘게 나오고 있다.
이 가운데 {오늘의 문예비평}은 비평 전문 계간지라는 특징이 있고, {신생}은 생태환경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애지}는 문단의 대가들을 각개격파 식으로 처형하는 것으로, {황해문화}는 문예지는 아니지만 인천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을
세계적 보편성으로 확장시키면서 나름대로 자기만의 독특한 성격을 확보하였다.
그렇지만 다른 문예지는 서울에서 발간하고 있는 문예지와 대동소이하다.
아니, 특별히 다른 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작품을 발표하는 사람의 절대다수가 서울 사람이고, 특집이라고 한들 한두 사람 문인에 대한 집중조명 정도이다.
서울의 문예지와 변별되는 점이 거의 없다.
지역 문단의 특장점, 개성적인 지역 문인의 활동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것에 대한 조명이 거의 없다.
발행하는 주체만 지역의 문인일 뿐, 그 문예지의 성격이 무난하기만 하여 보관할 값어치를 느끼기 어렵다.
지역 문인에 대해 배려를 하지 않고 중앙을 바라보면서 문예지를 만든다면 종이 낭비가 아닐까.
서울에서만도 100종이 넘는 문예지가 나오고 있다는데.
3. 문학상이 왜 해마다 욕을 먹는가
상을 탄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대단히 쑥스러운 일이고 부담도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이라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다.
지방에 사시는 어느 원로 시인을 만났을 때(그때가 서너 번째의 만남이었다)
시종일관 내게 몇몇 문학상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듣고 내심 혀를 찼던 적이 있다.
자신이 서울에서 산다면 이렇게 홀대를 받겠냐는 것이 이야기의 요지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분이 그 뒤 2개의 문학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내가 40대로 접어든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 내 또래의 소설가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형은 그 동안 변변한 상 한 번 탄 적이 없지요? 이제 곧 문학상 심사할 나이가 될 테니 참 딱하오."
이 말을 듣고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상이란 것은 받으면 기분이 좋을 수도 있고 안 받으면 그만이지
받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작품을 열심히 쓰는 것 외에 상을 타기 위해 노력을 하고, 그 결과 상을 탄다면 난센스가 아닌가.
내게 이 말을 한 사람은 그 다음해인가 현대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자가 되었다.
이제는 어느 작가나 시인이 한 해에 두세 개의 문학상을 받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다.
작품에 대한 공정한 평가보다는 '잘 나가는 사람을 확실히 밀어주자'는 문단의 분위기 때문이라는 말들을 한다.
문학상 수상자 결정은 수상자와 후보자의 작품을 모아 단행본으로 냈을 경우 판매 부수까지 고려가 된다고 하니
수상자의 대중적인 인기까지도 수상자 결정을 위한 기준이 되고 있다.
모 소설가가 신문사와 관련이 있는 어떤 문학상의 수상자로 결정이 되었다가 문화부 기자의 결사반대로 취소된 사건은
문단에 소문이 나지 않고 묻혀버렸는데 전모는 이렇다.
문단에서 난다긴다하는 소설가와 문학평론가가 모여서 그 해 어떤 문학상의 수상자로 이 아무개 씨를 결정하였다.
그런데 신문에 수상자 발표 사고(社告)가 나가기 전 문화부의 기자가(혹은 기자들이) 수상자의 상당히 많은 나이와
'한물간 인기'를 들먹이며 수상작품집이 안 나갈 것이니 재고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최종 후보에 오른 다른 소설가는 아닌게아니라 그 당시에 꽤 대중적인 인기까지도 누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주최측의 반대가 워낙 심하여 그랬겠지만 심사위원들은 생각을 돌렸고,
결국 이 아무개 소설가의 작품은 후보 작품으로 들러리를 섰다.
나중에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이 아무개 소설가에게 이 사실을 말했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태였고 증거도 없으니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인가.
더군다나 '그 문학상, 내가 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가 기자가 억지를 써서 번복되었다고 합니다'라고
스스로 나서서 말을 할 수도 없어 벙어리 냉가슴만 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무튼 문학상에 있어서도 빈익빈부익부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
한 번 받은 사람은 계속해서 받을 수 있고 한 번도 못 받은 사람은 계속 못 받는데,
지역의 문인, 메이저급 출판사에서 펴내는 문예지로 등단하지 못한 사람,
지방 문예지나 지역 신춘문예로 등단한 사람, 유명 출판사에서 책을 못 낸 사람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문학상은 많은 경우 심사위원이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 준다.
심사위원이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이유는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의 작품, 내가 관여하지 않는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
내가 모르는 출판사에서 책을 낸 문인의 작품은 아예 읽지를 않기 때문에 관심이 안 가는 것이고,
읽어도 좋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폐습이 사라져야 우리 문학의 발전이 있을 것이다.
4. 시인들이여 소통을 꿈꾸며 시를 쓰고 있는가
시인 겸 문학평론가인 권혁웅이 2005년 봄호 {문예중앙}에 [미래파]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장석원·황병승·김민정·유형진 네 사람은 원군을 얻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들 시인이 시집을 냈지만 널리 거론되지 않고 일부 독자들만이 시가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 시단의 차세대 주역이라는 자부심이 막 깨어지려는 찰라 권혁웅이 이 글을 발표하고
또 2005년 10월에 같은 제목으로 문학평론집을 발간하자 이들 네 시인은 순식간에 매스컴의 표적이 되었다.
궁극적으로 네 시인에 대한 옹호와 상찬의 글인 [미래파]에 대해서는 여기서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이들 네 사람을 포함한 몇몇 30대 시인들의 최근 작업에 대한 것이다.
이들의 시는 이상(李箱)의 작품만큼은 아니지만 꽤 난해하다.
요즘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시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기성세대가 이해 못할 구석이 조금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자신이 이미 신세대가 아니고 기성세대이다.
30대인 같은 세대의 독자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일반 독자대중한테도, 동시대의 문학인들한테도, 같은 세대의 시인들한테도 그다지 큰 공감을 못 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시 쓰기 행위인지라 기성세대의 질서의식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별다른 공감을 주지 못한다면
앞으로 '미래파'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래파'의 생명력이 과연 지속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회의적이다.
'새롭다' 혹은 '낯설다'는 것으로 독자와 평론가들에게 어필한 시인의 그 다음 작업은 대개 '더 새로운 것'이어야 했다.
더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없을 때 시인은 절망하고 좌절한다.
장석원·황병승·김민정·유형진의 첫 시집은 신기하기도 했고 신선하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같은 시 창작 방식을 취한다면 '늘 하던 소리 또 하고 있구먼' 하면서 독자는 등을 돌릴 것이다.
1980년대에 이성복과 황지우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지만 이들의 제2, 3, 4시집이 제1시집보다 낫다는 말을 나는 들은 적이 없다.
'실험성'으로 조명을 받은 시인일수록 위험 부담이 크다는 조언을 미래파 시인들에게 하고 싶다.
권혁웅이 말하는 '미래파'에 속하는 시인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성향을 띤 시를 쓰는 시인들은 앞으로
독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갖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독자(독자 중에는 시의 낯설게 하기 효과를 높이 사는 이도 분명히 있다)와의 공감대가 전혀 형성되지 않는
시는 발표해본들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혼자 좋아서 말을 마구 늘어놓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경우,
바로 이런 경우를 안 당하기 위해 '미래파' 시인들은 노력해주었으면 좋겠다.
5. 지역 문인의 역할의 기대하며
지역에 거주하는 문인은 각자 해야 할 일이 있다.
자기 고장의 문화유산과 풍습, 풍속 등을 연구하여 시에 반영했으면 좋겠다.
점차 사라져 가는 사투리를 구사하거나, 훼손되어 가는 것들, 오염되어 가는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시며 소설을 썼으면 좋겠다.
문학의 변방에 있다고 소외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곳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자긍심을 느꼈으면 좋겠다.
지역 문학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각자 좋은 작품을 쓰는 데 주력해야 할 것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역 문인에 대한 비평적 조명이 보다 더 밝은 빛을 띠어야 하고,
지역 문인 당사자는 무사안일로 나날을 보내는 것이 아닌지 자기 반성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상주 지역의 한 개 동인에 지나지 않는 '숲문학회'가 중국의 연변민족문학원과 자매결연을 맺어
상호 방문과 동인지 작품 게재 등을 통해 활발히 교류하는 것은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동인지를 내도 기획이 있는 것이 좋다. 지방 문예지는 더더욱 중앙 문예지와 확실히 변별되는 특집이 있어야 한다.
부산을 거쳐 간 문인들의 추억담과 문학적 흔적을 싣는 {시와 사상}의 특집 '부산과 시인' 같은 것을 좀더 자주 보게 되기를 바라는데…….
'한국문학 속의 부산'이나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부산과 대구 사투리의 차이점',
'울산·마산·포항의 도시 형성 배경과 문학적 특이성' 같은 것이 문예지에 실린다면 그 문예지는 이사 갈 때 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문학인이 지방에 산다고 자의식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지방에 살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
이 땅에서 한 명 문학인으로 살아가면서 아쉽게 생각하고 있던 다섯 가지를 갖고 잡설을 늘어놓았다.
독자가 있건 없건, 수상의 영예를 누리건 누리지 못하건, 서울에서 살건 지방에서 살건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좋은 작품에 대한 갈망이다.
문학인이 문단정치에 휘둘릴 때, 모임에 나가 문단 권력자에게 눈도장을 찍으려 할 때,
줄을 잘 잡아 도약을 꿈꾸려 할 때, 그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시민이 될 것이다.
그곳에는 독자도 없고 당대의 평가도 사후의 평가도 있을 수 없다.
그저 우직하게 일신우일신, 문학의 밭을 가는 그대에게 풍성한 수확이 있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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