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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4:1)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영광스런 죄인]
우리는 주님 안에서 갇혀있지 마귀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참새도 죽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이 박하시기 전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이 박히시는 것이 수치요 곤욕인지 알았는데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다가 옥에 갇히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위하여 옥에 갇히거나 순교하시는 분을 보면 존경하게 됩니다.
바울의 손, 발 에 차인 착고는 임금님이 들고 있는 금홀 보다 영광스럽습니다.
바울이 앉아 있는 감옥은 어떤 왕궁보다 가보고 싶은 곳 입니다.
우리주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종들이 큰 복을 받게 하게 하시기 위하여서 이런 고난을 주십니다.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제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인하여 바울을 배나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
나라에서 군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군인으로 합당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군인이 군인으로서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군기가 해이하여 지고 백전백패 할 것입니다.
군인은 열심히 훈련을 받아야 전쟁이 일어나도 겁을 먹지 앟고 전쟁할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목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목사로서 합당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성령님을 모신 그릇입니다.
성도는 성결한 삶을 살라고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거룩한 열매를 맺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도의 부름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서는 일치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 서로 돕고 세워 줄 때 이 부르심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되는 요건은 무엇 입니까?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교제의 4가지 덕목 -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겸손]
기독교 공동체를 깨는데 가장 이것만큼 무서운 죄악도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상대방을 비방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엄격하여야 하는데 상대방에 대하여 엄격합니다.
가혹합니다.
그래서 일치되는 것을 깨트립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겸비하게 낮아져서 온유합니다.
또한 그 사람은 타인의 실수를 용납합니다.
여러분 곡식을 보십시오.
곡식은 알맹이가 차면 고개를 숙입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고 시끄럽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높여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교만하면 받은 복도 잃어버립니다.
마귀는 교만하여 타락한 천사입니다.
천사 중 하나님의 영광을 맡은 그룹이 타락한 것이 사탄입니다.
(사 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
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사 14: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아담이브도 교만하여 에덴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겸손하여 지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자랑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랑하다 보면 교만하여 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자랑하고 못 났음을 자랑하고 연약함을 자랑하였습니다.
[2]예수 믿기 전부터의 과거의 자기의 잘못을 생각하고 자주 회개의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3]우리가 겸손하여 지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겸손하여 진다.-이사야의 예
(사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
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
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
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
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
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겟네사렛 호수의 베드로 의 고백들
[자기의 실체를 보기 때문이다.]
겸손은 진실이다. 자기에 대한 정확한 지식,-나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 만나면 겸손하여진다.
성 프라치스코 이야기
★ 프랜시스 회중 가운데 한 경건한 수도사가 영 안이 열려 천국 보좌 가운데 빛난 좌석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저 보좌를 차지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천사가 대답하기를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어 쫓겨났는데 하나님께서 겸손한 프랜시스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너무나 신기하여 프랜시스를 시험하려고 하였다. 하루는 선생과 같이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신은 스스로 어떤 사람으로 생각합니까?"
"나는 세상 사람 중에 제일 악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말이 진실치 못합니다. 세상에 악한이 많은데 어찌 그런 자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악한이 적지 않지만 내가 받은 은혜를 저들이 받았다면 나보다 만 배나 주를 사랑하고 봉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어찌 그들에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을 들은 제자는 프랜시스의 겸손에 감탄하였다.
#뼈대가 있다고 , 그래서 하나가 목됨
하늘과 땅차이 이건 골통을 바꾸어야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는 언제나 전반부에는 교리를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성결한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결한 삶을 사는 비결은 바른 믿음을 기초하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을 가졌다면 그 믿음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 되게 한 것을 유지하기위한
기독교인의 최고의 덕 4가지 요소 중 두 번째인 온유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온유]
[온유란?]
①온유란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말합니다.
②온유란 하나님을 위하여 쓰시고자 하는 대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온순하게 순종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대하여 적용이 된다면 진리에 순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컨트롤을 잘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온유의 대표자 하면 모세를 듭니다.
하루는 모세가 구스여자를 취하였습니다.
그때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비난을 합니다.
모세는 그 비난을 잘 참습니다.
이렇게 참는 것을 온유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온유해야 하는 이유]
[1] 온유한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습니다.
사납고 무서운 호랑이나 사자는 이 땅에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온순한 양이나 사람들은 이 땅에 편만 하게 퍼져 삽니다.
이빨과 잇몸을 모십시오!
단단한 이빨이 더 오래 갈 것 같은데 부드러운 잇몸이 더 오래갑니다.
성경에서 말한 데로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 할 것임이요 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
[2]온유한 사람이 쉼을 얻습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온유한 사람들이 일치를 가져옵니다.
교회생할을 할때 우리는 두가지 극단을 피하여야 합니다.
하나는 성도들이 죄를 짓는 것을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고 하여서 한쪽 눈을 감아버리고 삽니다.
잘못에 대하여 눈을 감고 귀머거리가 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 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2)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한 짓지 못하는 벙어리 개라고 책망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간에 죄를 눈을 감아주어서는 안됩니다.
또 하나의 극단은 성도의 죄를 책망하되 너무나 엄격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둥처럼 고함을 질러대며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극단은 피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자존심을 먹고사는 것입니다.
그 자존심이 무너지면 잘못을 고치기보다는 악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고쳐주는 최상위 방법은 온화함입니다.
그래서 스펄젼은 권사님들에게 권면을 하기를 여러분들이 남을 꼭 책망하여야 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혀에 꿀을 잔뜩 바르고 가장 부드러운 언어로 책망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4]온유하여 지려면?
온유는 속은 전쟁터이면서 겉으로는 온화한 표정을 짓는 가장된 온유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온유할 수 있을까요?
저도 좀 온유하였으면 좋겠는데 온유하지 못하여 괴로울 때가 참 많습니다.
①너무 피곤하고 지치면 온화함이 사라진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그의 사역에 지치고 성과가 없다고 생각이 되어질 때 죽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사람이 너무 피곤하다보면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냅니다.
②하나님이 다루어 주셔야 합니다.
야생말이 처음에는 얼마나 다루기 힘이 듭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데려다가 길을 들이면 더 없는 명마가 됩니다.
코끼리, 호랑이는 야생동물입니다.
그러나-조련사가 훈련을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합니다.
③겸손은 온유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깨어진 사람은 하나같이 온유 합니다.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
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오래 참음]
[1] 오늘 우리가 조심하여 살펴 볼 것은 하나되게 하소서가 아니라 이미 하나된 것을 지키라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는 것을 나누어지게 하는 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으로 용납함 입니다.
오늘은 오래 참음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오래 참는 것을 말합니다.
환경이야 무어라 하여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사람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언젠가는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고 참는 것 입니다.
[2]오래 참아야 하겠습니다.
①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면서 온유하지도 못하고 겸손하지도 못하고 참아주지 못하는 것은 성령이 많이 충만하지 못한 상태 입니다.
성령 충만 하면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 합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충만하면 불쌍히 여기고 참아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사람에게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내하지 못하여주면
예전에는 성령이 충만하였는데 용서와 사랑이 부족한 것을 보니 성령의 재 충만함을 받아야 하겠구나!
생각 하십시오!
② 하나님이 성품이 오래 참으시는 성품입니다.
예수님을 닮기를 소원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려면 오래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만 하시지 않으시고 오래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 얼마나 오래 오래 참아주셨습니까?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 옥에 가둡니다.
거룩한 스데반 집사를 돌에 맞아 죽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대하여 참으시고 회개시켜 이방의 사도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를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자비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 받아 구원 받아야 할 전도대상자에 대하여서도 오래 참아야 하겠습니다.
★ 태평양 가운데에 있는 [되지]라는 섬나라에 벌리 부쓰라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전도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느 집에 가서 전도를 하다가 집 주인에게 질그릇으로 머리를 얻어맞았습니다. 벌리 부쓰는 전에 훌륭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에는 그가 군에서 차고 다니던 큰 칼을 벽에다 걸어 놓고 예수 믿기 전에 자기가 얼마나 포악했던가 하는 것을 늘 반성하고 그 앞에서 성경을 읽곤 했습니다.
이 사람이 전도하다가 질그릇으로 머리를 얻어맞았으니 어찌 되었겠는가.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머리도 아프지만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그 나라에서는 여자들이나 질그릇으로 얻어맞지 남자들은 질그릇으로 때리지도 않고 질그릇으로 맞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벽에 걸려 있는 칼을 붙잡고 쫓아가서 복수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참아야지 참자하고 참으면서 마침 칼 밑에 펴있는 성경을 읽어보니까 이런 성구가 나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이 말씀에 그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복수심이 없어지고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엌에 들어가서 제일 좋은 그릇을 하나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그 집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리니 그 집 주인이 싸우러 오는 줄 알고 무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때 벌리 부쓰는 그 사람을 보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질그릇이 내 머리를 때리다가 깨어졌으니 그 질그릇을 내가 변상하겠습니다.
이것을 받으십시오.
성경에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는데 당신이 나를 질그릇으로 때려서 내가 그것 때문에 천국에 가게 됐고 하나님 앞에 상을 받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질그릇을 받고 크게 감동을 받고 그도 예수를 믿고 전도해서 그 동리가 복음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후에도 우리는 죄를 물마시듯 마시면서 용서하여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언젠가는 성결한 삶을 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또 용서하시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늦게 재림하시는 이유도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여 회개하시길 기다려 주심이 아닙니까? 성경은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 몇 번하고 권면 몇 번하고 회개하고 열매 맺지 못한다고 비난하여서는 안 됩니다.
나무열매도 당장에 맺어지지는 않습니까?
★ 어떤 사람이 고구마 농사를 짓겠다고 생각하고 집에서 밭에다 고구마 순을 심었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주면서 며칠도 되지 않았는데 얼마나 열매를 많이 맺혔는지 하도 궁금하여 고구마를 파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열매가 달릴 것 뭣있습니까. 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또 얼마 있다가 열매가 이제는 열렸을 것이다. 생각하고 땅을 파보았더니 열매가 없습니다. 또 파보고 얼마 있다가 파보았더니 열매는 고사하고 고구마는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고구마를 심었으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가을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필자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며칠이 멀다 하고 뿌리를 파헤치니 고구마뿌리 내릴 겨를도 없이 말라 죽어버린 것입니다. 인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살아있습니다.
(사 55: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사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그러므로 인내하며 열매를 기다립시다.
③하나가 된 교회가 그 단합됨을 깨트리지 않는 방법은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오래 오래 참아 주는 것입니다.
④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얼마나 사랑으로 인내하여 줍니까?
스스로 생각하기를 언젠가는 변화되겠지 언젠가는 더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하며 참아준다면 타인을 대하여서도 인내하여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말씀으로 권면하고 위하여 기도하여 주고 참고 또 기도하여 주어야 합니다.
한그루의 나무를 심고 열매 맺기 위하여 이런 노력을 하건만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우리 형제를 정죄하고 잘라버려서는 안되는 것 입니다.
⑤또 하나의 오래 참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도 심판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왜 심판 합니까?
하나님이 지금 작품을 만드시고 있는데 조급한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여 판단하고 정죄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3]오래참지 못한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함 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조급함 입니다.
금세 열매를 보려고 하는 것 입니다.
[4]오래 참으려면?
① 내 신앙 기준에 타인의 신앙을 강요하지 맙시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채소만 먹을 믿음이 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구제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 안내는 사람을 판단하고 강요하고 정죄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 입니다.
건축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도 있고 못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이 내는 사람은 겸손하게 감사하면 되었지 다른 사람을 강요하고 정죄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 입니다
② 하나님의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고 인내 합시다.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
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서로 용납함]
남을 변화시켜 자기에게 맞추려함에서 교제가 깨어집니다.
용납이란 못난 모습, 개성적인 모습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용납의 반대말은 비판입니다.
순 복음교회는 장로교회를 비판하여서는 안됩니다.
순 복음교회는 장로교회가 기도가 부족하지만 교회로 인정하고 그들도 성령과 기도로 충만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장로교회도 순 복음교회를 비판하여서는 안됩니다.
장로교도 자기와 달리 생각하면 무조건 배격만 할 것이 아니라 교회로 인정하고 장점은 칭찬하여주고 단점은 용납하며 기다려 줄 때 교회의 일치됨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은 장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점을 가지고 정죄하고 나에게 맞추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장점을 인정하고 단점은 아파하여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부모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산과 사람은 멀리서 보아야 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산은 멀리서 볼 때가 좋습니다.
멀리서는 더 없이 아름다워 보여도 가까이 가면 짐승의똥도 있고 나누 썪은 것도 있고 지저분 합니다.
사람도 멀리서 보면 아름다워 보여도 결혼하여 가까이 살다보면 발 고린내도 나고 단점들이 보이기 마련 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 오래 참고 용납한니다.
운다고, 똥싼다고 혼내지 않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용납하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처럼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용납하여야 한다.
용납하려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 앞에서 깊이 깨어져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모두를 불쌍히 여긴다.
깨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깨트리시기도 하지만
깊은 회개를 할 때 깨어집니다.
[결론]
1.겸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겸손함. 깨어진 사람
과거를 회개, 못났음을 자랑
2.온유- 따듯하고 부드러운 성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3.인내 -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님은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남자 여자 동양 서양 지식인 비지식인 노인 아이 젊은이 부자 가난한자 등 일치가 되기 힘든 것들을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가 된 것이 7 가지나 됩니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 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렇게 하나가 되었는데 하나가 된 것을 힘써 지켜야 하겠습니다.
세상사람들이나 사악한 자들은 자기들의 당을 짓습니다.
여당, 야댱, 민주당, 자민련, 한나라당, 전라도 패, 경상도패, 이북사람, 진보, 보수.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오직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힘쓰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하나됨을 힘써 지킵니까?
평안의 매는 줄입니다.
여러분 불은 마른 나무를 보면 하나로 만들어 태웁니다.
그러나 젖은 나무를 만나면 하나가 되지 못하고 꺼져 버립니다.
이처럼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는 하나됨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사랑으로 인내하며 용납하여 주는 사람이 하나가 됩니다.
이런 사람은 형제의 잘못에 비판적 자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측은히 여겨 인내하며 사랑으로 용납하고 참아주며 온전하게 되도록 도와 줍니다.
성령님의 능력과 의도로 하나됨]
성령님의 의도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사람이 하나로 만드는 운동입니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도교 등 모든 종교가 하나가 되자는 운동입니다.
그러나
어둠과 빛이 하나가 못됩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평화라는 미명아래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따라 분리시켜 거룩하게 하신 교회를 평화하자는 이유로 다시 세상 적인 것과 연합하여서는 안됩니다.
이는 극히 적 그리스도의 간계입니다.
교회는 따로나와 하나님이 순결하게 하신 것을 순수하게 지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평화 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하나가 되게 하는 것도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몸이 하나이요]
우리 성도들은 모두 공동적으로 머리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한 몸입니다.
마치 손에 손가락이 붙어있듯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몸을 일자고 하여 이룬 것이 아닌 성령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 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잘났어도 못났어도 나의 지체입니다.
발가락이 고린내가 나도 나의 지체인 것처럼
손가락이 못 났어도 나의 지체인 것 처럼
비롯 모자라고 미성숙한 개인 성도도 우리 지체요
부족한 교회도 예수님의 몸 입니다.
또한 교단과 교파도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교단이나 교파는 같은 지체입니다.
우리 교회 같으면 기도의 사명이 있고 특별히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못하는 교회를 무시하여서는 안됩니다.
전주 안디옥 교회는 기도는 부족한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개 교회로 최고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하는 특별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개인 성도나 개 교회나 각 교파는 장점과 강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교파 교단을 초월하여 우리는 한 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몸을 이룬 지체는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면 궁극적으로 우리 손해입니다.
입안에 밥을 먹으면 몸 전체가 활력을 얻습니다.
그러나 몸의 한 지체가 아프면 몸 전체가 아픕니다.
이러지 못하고 지체가 아픈데 무감각하거나
영광된 일이 잇는데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성령이 덜 충만한 탓이며 주님을 적게 사랑하는 연고입니다.
우리는 한 몸을 이루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비밀은 창세기에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룬 신비와 일치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합니다.
그 둘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니까 내가 아파하면 제 아내가 함께 아파하고요
제가 기뻐하면 아내도 기뻐합니다.
유대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머리는 둘이요 몸은 하나인 사람을 하나로 셀 것인지 둘로 셀로 칠 것인지
그때 지혜로운 랍비는 한쪽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보라 한쪽 머리가 마저 비명을 지르면 한 명이요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둘 이라고 하더랍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면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성령도]
연합과 일치된 마음은 성령님이 주십니다.
성령님이 충만하면 하나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므로 아직 하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성령이 덜 충만한 것입니다.
어느 대 집회에서 초 교파적으로 모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교파끼리 앉아 함께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날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재하시고 모임 위에 거대한 축복이 임하였습니다.
모두 방언을 하고 성령이 충만하여지자 교파도 교단도 사라지고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김씨네 오리 이씨네 오리 서로 울타리를 만들어 키우다가도 장마비가 와서 덮어버리면 울타리는 사라지고 함께 물위에서 노는 것입니다.
[한 소망]
성령님이 하나로 만들어 주신 사람들은 같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동일한 소망은 어떤 것들입니까?
[1]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가야될 하늘나라는
(계 22: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 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2]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
(고전 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3] 하늘나라 상급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 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한 주님]
교회 안에서 성도가 하나가 된 증거로 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교파가 많고 교단도 많지만 섬기는 주인은 한 분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장로교든 순 복음이든 침례교든 성결교든 하나입니다.
[1]한 주인을 섬기면 협력하여야 하지 다투면 망합니다.
중국사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 적수를 국무장관으로
링컨이 미국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였다. 그가 내각의 국무장관을 임명해야 했을 때 국무장관으로 발탁한 인물은 윌리엄 수워드라는 공화당내의 거물이었다.
그는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처음에는 링컨보다 표를 더 많이 받았던 인물이다.
링컨이 지명전에서 승리하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응당 수워드를 멀리해야 한다고 남들은 주장했지만 링컨의 생각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렇게 유능하여 공화당 내에서 그만한 지지를 받는 인물을 제외하고 누구를 내각에 앉힌단 말인가?
"그가 나보다 훌륭하고 유식한 정치인으로 자처한다 하여도 좋습니다.
위기에 처한 유니온을 구출하는 것 이외는 우리들의 사명이 무엇인가?"
링컨은 이렇게 믿고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을 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의 적수였던 수워드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정치인다운 정신을 지닌 인물임이 틀림없다(○○○교수).
[2]이 말씀은 한 주인 아래에서 통치를 받는 한 몸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어느 나라에 한 무리가 사사건건 다투고 싸우려 든다면 임금님은 그것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 문제를 해결하여 주실 것입니다
어느 몸이 있는데 팔이 제 마음 데로 움직이며 사방 군데를 치고 꼬집고 칼로 자해하게 하면 그대로 방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발이 제 마음 데로 다니며 온몸을 상하게 한다면 발을 통제할 것입니다.
또 교회를 떠나서 혼자 믿으려 하는 무 교회 주의자들이 이 말씀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지체에게서 덜어져 나가는 것은 주인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적용]우리가 섬기는 주님은 같은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하나가 된 것을 굳게 지키기 위하여 주인에게 집중하고 주님의 통치에 복종합시다.
그럼으로 하나가 되기 위하여 주님을 생각함으로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용납하여야 하겠습니다.
도 우리가 하나가 된 증거로
[믿음도 하나요]
이제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이 하나라고 말합니다.
현대교회에서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유감입니다.
신앙고백은 우리가 믿는 도리가 같다는 증표입니다.
이 고백을 통하여 이단과 사이비가 구별됩니다.
그런데 이런 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하는 박사들은 어리석은 박사들입니다.
또 하나가 된 증거로
[세례도 하나]
세례는 무엇 입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표식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몸에 할례를 통하여 표식을 가지고 있듯 우리도 믿는 믿음의 표식이 세례입니다.
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믿는 믿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물에 잠김으로 예수님과 함께 장사지낸바 되고 또,
함께 일어남으로 부활되었다는 이해를 더 잘하게 됩니다.
침례든 세례는 세례의 의미는 같습니다.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한 아버지]
하나가 된 증거로 아버지가 같습니다.
여러분 종종 장난기 심한 사람은 너는 주워 왔다. 라고 하여
놀려데는 어른들을 봅니다.
그 아이가 형제 됨을 증명하는 법은 아버지가 같으면 됩니다.
혈액형을 조사하고 유전자를 조사하여보면 명백하여 집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하나다 하는 증거로써 지금 까지 일곱까지를 말씀하고 잇습니다.
일곱이란 성경에서 완전수를 말합니다.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이 완전한 증거들 ....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주 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아버지도 하나이니 하나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오늘 우리에게는 생소한 단어인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라고 말씀하고 게십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눌 안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만물이 생명을 얻고 활력 있게 사는 이유가 하나님이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힘입어서 살며 기동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행 17:28)
그러다가
(시 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말씀처럼 생명을 취하시면 죽는 것입니다.
[2]그런데 에수 믿는 우리는 훨씬 이 보다 더 좋은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분리되어 나가는 것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몸을 찢는 중대한 범죄행위인 것입니다.
(엡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각 사람에게]
원문에는 그러나 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교회의 일치성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교회의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은사를 골고루 나누어주십니다.
[1]사람의 타락한 본성은 홀로 떨어져 있을려는 경향이 잇습니다.
개인주의요 이기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치료하는 치료 책으로 더불어 살게 하셨습니다.
자기혼자는 살 수 없게 하셨습니다
남을 돕고 나도 남의 도움을 입으며 살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2]하나님은 교회에서도 은사를 골고루 나누어주심으로 인하여 혼자는 성화 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은사를 혼자 독차지 한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은사를 혼자 받은 사람이 있다면 교만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게 하심으로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3] 어떤 사람이 그러므로 혼자 따로 떨어져 나간다면 떨어진 지체가 되어 썩어 갈 것입니다.
[4]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연약한 자들을 생각하여 주어야 합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기존 신자들을 생각하여 설교를 하다보면 초신 자는 별천지 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야곱 하면 믿는 신자는 아 하지만 처음 믿는 사람이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은 야곱이 사람이름인지 땅 이름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상세히 설명을 풀어하여 줍니다.
먼저 믿는 사람은 알아도 기도하며 들어주어야 합니다.
기도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요 예배나 주일 예배에 기도를 너무 길게 하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기도에 질려버립니다.
기도는 하기 쉽고 간단하고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다는 정도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하여 질려서 기도를 멀리하게 하여서는 안됩니다.
은혜 받는 데로 점점 기도가 깊어지고 기도시간도 자연스레 길어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선물을 나누어주심]
은사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 문제로 심히 진통을 앓았고 에베소 교회도 은사문제가 약간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방언문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운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네 방언이 쌔다 내 방언이 더 쌔다.
이 정도면 무식이 판을 치는 교회지요.
[1]성령의 은사는 교회 안에서 지체들을 도우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잘난 체 하기 위하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도우라고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은사를 주신 것은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2]은사는 내가 사모한다고 그 은사를 주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당신의 뜻대로 나누어주십니다.
나는 신유의 은사를 간절히 구하여도 예수님은 다른 은사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사모하여야 다른 은사라도 주십니다.
은사는 간절히 구하여야 합니다.
몸이 병든 사람은 신유의 은사를 받습니다.
그것에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빈곤에 있다가 부유하게 된 사람은 복 주시는 하나님을 증거 합니다
영혼이 어려움을 겪은 사람은 영혼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체험중심으로 은혜를 받는다.
[3]예수님이 은사를 주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셨는지가 다음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1] 구약의 인용입니다.
다윗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승리하고 주님이 올라가셨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약간 말을 바꾸어 인용하고 잇습니다.
먼저 인용한 말을 찾아봅시다.
(시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어디론가 내려 왔었다]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적군에게서 전리품과 포로를 끌고 옴]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2]구약의 자기 체험을 하나님은 예언으로 성취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언하게 된 것입니다.
[3]바울이 이 말을 인용하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적극적으로 은사를 나누어주시려고 오셨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로잡힌 자- 사탄을 때려잡고 주님은 각종 은사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려고 하늘에 오르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다가 승천하신 이유는 무엇 입니까?
내려오신 이유는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구출하여 내시기 위하여 내려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승천하신 이유는 무엇 입니까?
성령을 교회에 풍족하게 부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또 하나의 목적을 말씀하고 게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 받는 것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그런 사건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 받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성령 충만 받는 것도 동일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불을 던지로 왔노라 이불이 붙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풍성히 부어주시는 성령을 받기 위하여 초대 교회 사도들처럼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성령충만을 구하십시다.
저들은 성령을 받기 위하여 열흘동안 밥도 언먹고 전혀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엡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엡 4: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어냐.
[7절- 10절을 끼어 넣은 이유]
어제 말하였듯 7절 원문에는 그러나 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과
그러기 위하여서 겸손, 온유, 인내, 용납이 필요하다.
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7절 부터는 교회의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 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서로 돕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7절과 8절은 은사를 골고루 나누어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셨고 승천 하셨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귀를 때려잡고 승천하심으로 은사를 골고루 나누어 주셨음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9절은 주님이 은사를 주시기 위하여 얼마나 비하 하셨는지를 말씀드리십니다.
그 말씀을 안하고 11절로 바로 들어가도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9절을 기록한 이유는 소위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은사를 어떤 자세로 사용하여야 하느냐를 설득시키고자 하시는 것 입니다.
고린도 교회나 에베소 교회 심지어 현대 교회도 은사를 받은 사람이 영적인 우뤌감에 젖어 군림하고 자랑하려고 하기때문 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나오는 말입니다만 예수님의 겸손하게 되심을 말함으로 성령의 은사와 직분을 받은 자들의 자세를 가르치고자 합입니다.
(엡 4: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 이냐
여기서 예수님이 땅 아래로 내려오신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겸손 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본 받아 살아야 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 중에 은사 자는 예수님의 겸손을 늘 생각하며 본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비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낮아지셨습니다.
5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심]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함으로 우리는 겸손으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종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종의 겸손한 자세로 성도를 섬김으로 본 받아야 합니다.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여야 합니다.
★ 거룩한 희생 : 북미 일대에서 나는 고기 가운데 연어라는 고기가 있다. 이 연어는 매해 2월을 전후해서 산란하고 부화를 하게 되는데 새끼가 태어나게 되면 어미 연어는 곧 죽어 버린다. 그 이유는 어린 새끼 연어가 새끼 연어가 어미의 살을 먹고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형상은 거미에게서도 볼 수 있다. 여러 마리의 자식의 생명을 위하여 어미의 한 생명은 죽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미물이지만 자기 새끼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신 예수가 십자가에 희생하신 것을 기억하라〈찬송해설 3권〉.
(엡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우주 만물의 통치자로 승귀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성도의 심령 속에 충만히 임재하여 계시고 온 우주에 충만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십니다.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러시기 위하여 마귀를 사로잡아 박살을 내셨습니다,
만물 속에 생명을 넣어 주십니다.
만물 안에는 천사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만물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느냐
믿는 성도들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천사도 성도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자 ! 이제 예수님은 만유안에 충만히 거하십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예수님이 충만히 계시도록 성령의 전의 사명을 감당하십시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미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살이 우리에게 흘러들어 왔습니다.
우리가 불 신앙으로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그 분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 매일 공급이 됩니다,
예수님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자라기까지 모든 것을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성도들은 서로 돕고 상합함으로 사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 내 잘못이요 : 일본에 있는 동지대학을 창설한 신도양 선생님의 미담이 있습니다.
그 대학은 기독교 계통의 하교입니다. 그런데 학장인 신도양 선생님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교수들과 학생들간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수들은 학생들더러 틀려먹었다고 비난하고 학생들은 교수들을 불신임함으로 기독교 학교가 불교의 틈바구니에서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많은 불교 신자들은 이 땅에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고 비웃었습니다.
학장을 미국에서 불렀습니다. 그가 교수들의 말을 들으니 학생의 잘못 학생 대표의 말을 들으니 교수들의 잘못이라서 어떻게 수습할 기이 없었습니다.
그는 10일간의 여유를 달라고 말하고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10일 지난 후 산에서 내려 와서 학생들과 교수들을 대강당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불교계의 지도자들도 기독교 학교가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모였습니다.
신 학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단상에 오라 왔습니다.
손에는 긴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몇 날 동안 기도하고 깨달은 것인데 우리 학교가 당한 문제는 학생들의 잘못도 아니요, 교수들의 잘못도 아니라 나의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하고서 자기 팔을 걷고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팔을 힘껏 내려 쳤습니다.
살이 터지고 피가 흘러나옵니다. 지팡이가 부러져 나갑니다. 교수들도 뛰어 오르고 학생들도 뛰어 올라와서 학장님 우리의 잘못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학교문제를 수습했다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은 자기 희생에 있습니다.
특히 성도의 몸을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직분 자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나 사도나 선지자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합니까?
바로 성도들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만물이 성도를 위하여 존재하듯이 이 직분 자들도 그래서 존재합니다.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구름이 비를 내리게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도 은혜를 베푸시는데 당신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을 위하여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디 엘 무디]
[1] 교회 직분을 세우신 것은 성도들을 위하여 세웠습니다.
[2]하나님은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칼과 명령으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과 말씀으로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의 은밀하신 역사를 통하여 말씀으로 세워주시고 길러주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음성으로 직접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직통으로 하나님에게 나가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직접 연구하고 하나님에게 받아 살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의 사역 자를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운 설교자의 설교와 가르침을 받는 것이 곧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마 10;40)
(마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라는 말씀이 잇습니다.
(마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신약p16]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사역자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밖에 세워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사역자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사역 자를 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눅 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적용] 하나님은 말씀의 사역 자를 세워 주시고 그를 통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것 필요 없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주신 은혜의 도구를 무시하는 교만을 배격하여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물론 은혜로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지만] 성령님을 의지하여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 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 변함이니라
[여러 가지 사역 자]
[1][혹은 사도로 ]
예수님을 따라다닌 12 사도와 바울을 사도라고 합니다.
복음서에서는 사도라는 말이 없고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도시대에 와서 성도를 제자라고 하고
11 사도와 갸룟 유다 대신 뽑은 맛디아와 바울을 사도라고 합니다.
그 후 사도제도는 폐지가 되고 사도의 제자를 속사 도라고 합니다.
속사도 후에는 감독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교회를 개척하여 골격을 세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 곳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세운 뒤 또 다른 곳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혹은 선지자로 ]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혹은 목사와 교사로]
목사는 일정한 한 지역에서 성례를 베풀고 가르치는 교사의 일을 합니다.
목사가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목사가 아닙니다.
또한 교사로
교사는 이단과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하는 일을 하는 요즘으로 하면 신학자를 의미합니다.
[복음 전하는 자]
사도들은 보조자로 복음을 전하는 전 도인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전 도인은 어느 한 지역에 머물러 잇지 않고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경에 전도 인은 빌립 집사님 그리고 디모데등이 나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인의 일을 부지런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2]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처럼 위의 직분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시키신 것입니다.
이러한 직분을 맡은 자의 도움으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 가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직분 자를 하나님이 세우셨으므로 하나님이 책임을 져 주십니다.
도저히 목사 감이 아닌데도 세우실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재판관을 세운다든지 혹은 무슨 직분을 투표를 통하여 부여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능력은 공급할 힘이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직분과 아울러 능력을 주십니다.
불학무식한 어부들이 사도의 직분과 선지자의 직분을 성령의 능력으로 잘 감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보면 부족한 사람을 직분을 주는 경향도 있는 듯 합니다.
탁월한 인격인데도 하나님이 직분자로 세우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예를 많이 봅니다.
그래서 당신이 목사하면 좋았을 것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가끔 도저히 인격이 안 되는 사람을 목사로 세우는 경우도 잇습니다.
불순한 사람을 통하여서 연단과 고난을 통하여 진주 같은 신앙인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을 사람이 어찌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부족한 사람을 택하여 중책을 맡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삼손의 나귀 턱 뼈를 보세요
그 뼈 중에 가장 연약한 뼈를 사용하여 일천명의 적을 무찔렀기에 그 전쟁이 유명하고 하나님이 더욱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모세의 양을 치던 지팡이가 하나님이 쓰시니 능력의 도구가 되듯이 전혀 무익한 사람도 하나님이 쓰시면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직분자는 교만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내가 훌륭하고 잘나서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또한 사명자는 그 일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포기하지도 말아야
★ 사명을 소홀히 한 교역자
박정근 목사님의 대학 동창이었던 목사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16세 때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방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방에서 8년 동안 목회를 했답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너무 고통스럽고 어려워서 목회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와서 사업에 손을 댔다고 한다.
그런데 시작한 사업이 그런대로 잘 되어서 재산이 늘었다. 그러자 중앙대학 대학원을 마치고 서울신문 대학원을 거쳐 매스콤에 투신해서 매일 경제 중역을 맡아 수고하게 되었다.
이렇게 세상적인 사업이 번창하고 잘 되다 보니 그만 신앙 생활하는 것이나 사명자란 의식조차 잃고 주일날이 되면 새벽 기도회만 마치고 골프치기에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관절염을 앓게 되었다. 아무리 약을 쓰고 병원에 다녀도 낫지를 않았다.
그러자 그는 깨닫고 하나님께 서약 하고 주의 종이된 사람인데 주의 일을 팽개치고 이처럼 세상에 빠져 주일까지 범하는 자리에 있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그대로 두시겠느냐 해서 교회 나와서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기적으로 관절염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명자는 깨닫고 주의 일을 해야 하겠는데 인간은 나약해서 어려움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회개하지만 어려움이 지나가니까 내가 언제 아팠더냐 식으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갔다.
인천에다 대동정밀 주식회사를 만들어 공장을 크게 운영하였다.
많은 물건을 수출하고 사업이 잘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전기 누전으로 공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큰 공장을 전소되었다.
그제야 다시 깨닫고 주의 종의 길에 서겠다고 다짐하면서 기도를 부탁했다고 한다(박정근목사 설교에서)
합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도구와 수단을 무시하지 맙시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좋은 제도를 세우셨는데 무시하며 기도하기를 이성의 유혹을 이기게 하옵소서 하며 기도하는 거와도 같습니다.
밥통을 안고는 밥을 안 퍼먹고 배부르게 하게하소서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머리는 그리스도다.
하나님은 교회의 다양성을 말씀하시면서 주의 종들이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온전하게 하며]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영적인 몸을 장성케 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드실 수 없으셨을 까요?
아니요!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의 사역 자들을 통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1]온전하게 {카타르 티죠}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앞에서 바로잡아 줍니다.
온전하게 라는 말은 의학용어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①부러진 뼈를 바로 맞추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러진 뼈가 팔이라면 지체 입장에서는 그 팔이 없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꿀 수만 있는 것이 가능하다면 새로운 팔로 갈아 끼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몸의 팔을 갈아 끼우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성도가 온전하여 질 때까지 참고 용납하여 주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부러진 뼈를 온전하게 맞추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합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②깁다
그물을 깁다 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교회는 하나의 어망입니다.
그러나 어느 사람으로 인하여 찢어진 그물과 같은 때가 됩니다.
그 그물은 교회 차원에서는 없는 것이 더 낳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그물을 찢어진 것은 찢어 버릴 수 없습니다.
그 그물을 깁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워지는 것입니다.
③ 범죄자를 바로 잡다 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몸의 모든 지체는 몸을 세우기 위하여 있습니다.
팔은 몸을 위하여 봉사를 합니다.
코도 실세 없이 몸을 위하여 봉사를 합니다.
코가 하루만 호흡하는 것을 쉬면 몸은 죽고 맙니다.
입도 몸을 위하여 음식을 섭취합니다.
어느 것 하나 놀거나 필요 없는 지체가 없습니다.
한때 진화 과정에서 퇴화된 것으로 여기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한 맹장을 떼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작용이 얼마나 큽니까?
많은 사람들은 사람의 인체에는 엉덩이 위에 꼬리뼈가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엉덩이 위의 이 뼈는 모든 사람에게 다 있습니다. 그러나 진화론 학자들이 말하기를 이 뼈는 옛날에 원숭이의 꼬리였는데 사람의 진화되면서 꼬리는 없어지고 끝에 뼈만 남게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과연 정말 이 뼈가 원숭이의 꼬리뼈일까요? 그럼 이 부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진화론 학자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인체에는 180여개나 되는 흔적기관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흔적기관은 사람이 진화된 증거라고 말합니다.
흔적기관이란 동물이었을 때 사용하다가 인간이 된 다음에는 없어져서 흔적만 남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로는 맹장같은 것을 말하는데 소처럼 풀을 먹고 살던 옛날에 있던 것인데 이제는 필요 없어졌다면서 떼어내도 상관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할수록 이 이론이 거짓임이 밝혀졌습니다. 맹장은 외부의 평균으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하는 항체를 생산해내는 장기임이 밝혀졌습니다. 특히 창자가 균에 감염되는 것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하는데 만약 맹장을 제거한다면 백혈병, 흡킨슨씨병, 결장암, 난소암 같은 무서운 병에 걸릴 확률이 훨씬 더 높아질 정도로 중요한 기관이라고 말합니다.
또 목 밑부분에 갑상선이라고 있는데 이 역시 필요 없어진 흔적기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갑상선은 요드라는 물질을 조절해 주는 아주 중요한 기관입니다. 갑상선은 우리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돕는데 갑상선이 잘못되면 난쟁이가 되거나 거인이 될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기관입니다.
그리고 뇌하수체는 원래 세 번째 눈이 되려다가 필요 없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뇌하수체는 성장호르몬 같은 중요한 호르몬을 분비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우리 몸의 중요한 일부분입니다.
또한 편도선 역시 주장하기를 필요없는 기관이라고 말하는데 편도선은 흔적기관이 아니라 박테리아 같은 평균으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해 주는 방패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고자 했던 꼬리뼈는 과연 진화된 증거인 흔적기관일까요?
이 뼈는 다리와 아래 뒷근육이 잘 연결되도록 하나님께서 일부러 만들어 주신 중요한 부분입니다. 골반근육을 잘 고정시켜 주고 편히 앉을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척주 끝을 보호하는 역할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쓸모없는 부분은 한가지도 없게 사람은 사람으로서, 동물은 동물로서, 식물은 식물로서 나름대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는 성도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봉사를 하여야 합니다.
몸을 위하여 협력을 하여야 합니다.
교회에 대하여 건설적이고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그럼으로 만일 하나님의 교회에서 봉사를 하지 않는 일은 하나님이 세우신 근본 목적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가 다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
[1] 교회 성도들이 추구하여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단히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이 아니면 모든 것이 해롭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
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
님께로서 난 의라
[2].참 된 신앙은 그리스도를 알 때 가능하여 집니다.
목사와 교사 등은 그럼으로 그리스도를 충실히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영적인 몸을 장성케 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드실 수 없으셨을 까요?
아니요!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교말씀을 통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 사역을 통하여 하나가 됩니다.
믿음에 있어서 하나가 되고 아는 것에 있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온전한 사람은 더 할 나위 없이 완전히 장성한 사람을 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신앙은 성장합니다.
그것도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까지 성장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 합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내가 감히 어떻게 .....
그것은 교만이야 .....
미리 포기하지 말고 그것을 모델로 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델이 필요합니다.
열심만 낸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에 대하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습니다 하는데 무엇을 믿는지 몰라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지식이 있는데 믿음이 부족하여서도 안 됩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줍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말씀 그것도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온전하여 지고 봉사의 일을 함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14절은 이렇게 변화시키는 목적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이유는 사람의 궤휼에 빠져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어린 아이의 특징들]
누구나 신자는 갓난아이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어디까지 성장하여야 합니까?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아이들의 특징이 많습니다.
갖 태어난 아이와 12세의 아이가 다르고
그 아이와 청소년과의 차이도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성경상의 영적인 아이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1]선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악한 것도 어른이 시킨 데로 합니다.
청년들도 선악에 있어서 나이를 드신 분 보다 분별력이 약합니다.
무모합니다.
지혜가 부족합니다.
흔히 한방에서 말합니다.
어렸을 때는 기운이 다리로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보면 마구 뛰어 놉니다.
조금 커서 청년이 되면 기운이 허리로 갑니다.
그래서 무거운 것도 거뜬히 드는 허리힘이 좋다고 합니다.
노인이 되면 기운이 머리로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혜롭다고 합니다.
이제 어린아이 신자는 무엇이 하나님이 싫어하고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아니 분별을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을 잘 분별합니다.
영적으로 지혜롭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2] 어린아이는 시기심이 많고 분쟁을 좋아합니다.
주일학교에 보면 어린이들을 선물하는데 똑 같은 선물을 줘도 색깔 가지고도 시기를 합니다.
똑같은 과자 내용물인데도 과자 포장지 색깔로 토라지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 앞으로 제하고 놀지 마라! 하며 당을 짓고 자기무리를 만듭니다.
고린도 교회에 영적으로 미성숙한 아이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 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 3: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 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3]어린아이는 깨닫기는 깨닫는데 유치하게 깨닫습니다.
같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봐도 심오한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독후감을 아이들에게 써 보게 하면 금방 압니다.
큰아이 사무엘 은 제법 독후감을 잘 쓰고 깨닫는 것이 어른스러운 면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주애는 독후감이 한편의 만화를 보는 것 같아요
일기를 쓴 것을 보아도 2 살 차이인데도 큰놈은 하루를 반성도 하는데 주애는 만화 하편 보는 것처럼 재미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는 잘 못 깨닫습니다.
그러나 장성하면 잘 깨닫습니다.
생각이 고상하여 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4]어머니의 젖을 먹는 갓 난 아이도 있습니다.
(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히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 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 변하는 자들이니라
조금 어려운 말을 하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신자는 어린아이입니다.
아브라함 그러면 무슨 미국 대통령 링컨을 이야기 하나보다.
이와 같이 성경에 무지한 신자 그래서 더 이상 어떻게 가르치기 참 힘든 신자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이 입니다.
[성장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성장에 있어서 우리의 배움에 있어서 끝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장은 어디까지입니까?
예수그리스도까지입니다.
이 세상에 되었다 이 만하면 더 배울 것도 없고 완전하다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바울사도도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본문의 영적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잘 속는다는 것입니다.
세상바람에 쉽게, 쉽게 요동을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동이란 바다의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궤술이란 단어는 유혹하다, 속이다 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주사위를 던져 남을 속이는 기술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통 도박은 왜 합니까?
성실하게 일한 만큼 보수를 받지 않고 일확천금을 얻으려고 합니다.
세상사람은 조금 일하고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도박을 하는 사람은 이것을 이용합니다.
우리 신앙에서도 이것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에게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성실히 일을 하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궤휼을 행하는 자는 자기에게 무슨 큰 헌금을 하면 일생을 일확천금 속에서 을 산다고 속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착취합니다.
몸에 병이 들면 철저히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치료하시길 기다리면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 있는 종이 기도하면 치료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본인에게 믿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미국에 유명한 신유의 부흥사 프라이스 목사님이 있다. 이 분이 부흥회를 하면서 안수기도를 해주고 있으려니까 한 자매가 인형같이 예쁜 딸을 데리고 딸을 고쳐 달라고 하였다.
그 딸은 다리를 잘못 쓰고 있었다. 목사님께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고 기도를 하니깐 목사님 마음 속에 믿음이 다 없어지더란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아이에게서 손을 떼니 믿음이 도로 채워졌다. 그런데 그 아이의 머리에 또 다시 손을 얹으면 여전히 믿음이 사라졌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그 모친께 "자매님 딸에게 손만 얹으면 하나님의 믿음이 나에게서 떠나는데 자매님께서 교회를 잘 다니시는지요."하고 물었다. 그제 서야 부인이 하얗게 질리면서 "목사님 교회에 안나간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은 무당 집에 드나들고 있어요."라고 하였다.
목사님께서 그의 어머님에게 회개를 촉구하자 그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한 다음 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니 그 딸의 다리가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신유보다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이 급선무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초대교회처럼 성실하게 기도를 하여 성령을 받아 성령이 일하시게 하는 것이 바른 길 입니다.
그런데 어디에 가서 무슨 안수를 받으면 특별한 능력이 잇다하여 본인은 기도를 하나도 안하고 이리저리 쓸려 다닙니다.
마귀는 궤술의 천재입니다.
이렇게 성실히 성경 데로 정도로 가지 않을 때 언제나 사탄의 미혹을 받습니다.
또한 사단은 유혹을 합니다.
어린아이는 궤휼에 잘 속습니다.
또한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에 금새 갑니다.
박태선이 집회에 김계화 집회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이단에 왜 사람이 몰립니까?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이 발동할 정도입니다.
물고기 중에 무서운 물고기가 사자머리 물고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외모가 그렇게 멋있습니다.
가까이 기면 지느러미에 있는 독을 쏘아서 사냥을 하는 물고기입니다.
식물 중에도 파리 잡는 난상 엽 꽃이 있습니다.
처음에 욕조처럼 꽃이 피고 그위에 우산모양의 꽃이 또 피어꽃을 우산처럼 받혀 줍니다
욕조처럼 생긴 꽃은 달콤한 즙을 만들고 그 욕조에 즙을 채웁니다.
처음에 파리가 날아와 한두 번 달콤한 즙을 맛보다가 그 맛이 달콤하고 취하게도 하는지라 즙 속에 빠지면 잡아먹습니다.
이 세상은 유혹거리도 많고 사탄은 참으로 많은 울무를 놓고 믿는 자가 타락하기를 고대하고 잇습니다.
이때 유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성경을 한군데 찾아보고 결론을 맺겠습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행 20: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행 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 년을 유의 합시다.]
(행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말씀 위에 바로 서야 합니다.]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말씀 안에서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간사한 유혹에 빠져 요동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뿌리내린 신앙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비바람이 오면 뿌리가 깊이 자랍니다.
범사에 자랍니다.
뿌리가 깊이 내려갑니다.
고난 때도 무시당할 때도 자랍니다.
고난이 올 때는 질적으로 성장하고 형통할 때는 양적으로 성장한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신앙에 있어서 인격에 있어서 자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 아이 같은 신앙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탕을 줘야 따라오는 어린아이의 신앙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기 위하여 어느 정도 철든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오십이 되어도 자라지 않고
어린아이로 있으면 부모에게는 근심거리가 됩니다.
우리의 자람의 어디까지 자라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야 합니다.
예수님 에게 까지 자라려면 일평생 자라야 할 과제 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닮도록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예수님의 신앙을 닮아가야 합니다.
[2] 어떻게 자랍니까?
1. 머리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장을 합니다.
바울은 물주는 이나 씨 뿌리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식물도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
우리가 자라는 방법은 머리로부터 은혜를 공급 받습니다.
예수 안에서만 지혜와 지식과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배우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딤.후 3: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에 대하여?
예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만큼 자라갑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자랍니다.
스스로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도 닮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공급하여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자라납니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2.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사랑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1) 참된 것을 하지 않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세상 적이고 육욕적인 삶은 우리의 영적성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롭습니다.
너무나 이상스런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영적인데 도움이 전혀 되지도 않는 것들을 왜 추구하는지...
(2)사랑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 자라나기 위하여서는 사랑으로 서로 협력하고 도와줌으로 자라 갑니다.
사람의 기능이 각각 다릅니다.
팔은 팔이지 눈이 아닙니다.
눈이 할일이 있고 입이 할 일이 다릅니다.
팔이 할일이 있고 다리가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어느 때부터 자랍니까?
내가 누구인가?
내가 왜 존재하는가를 알 때부터 자라나기 시작 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보내셨는가?
이것을 아는 것이 성장의 시작입니다.
이것에 자기를 투자 하여야 합니다.
팔은 평생 노력하여도 다리가 될 수 없습니다.
팔은 팔 데로 독특한 기능이 있습니다.
이 강점을 개발하고 팔은 자기의 본문을 다 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이고 자기혼자는 신앙이나 인격에서 스스로 혼자 자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체가 자기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발이 걸어 다니는데 독특한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 존재하지 못합니다.
손이 발의 더러움을 씻겨주고 위장은 그를 위하여 먹을 것을 소화하여 영양분을 공급하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오장육부 사지백체가 서로 연결 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건물입니다.
건물이 있는데 기둥이 좀 쉬겠다고 주저앉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서로 도와주고 서로 세워주며 자라는 것 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주님은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목사 장로 집사는 교인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목사나 사도는 지체라고 보기보다는 교회성도들이 지체다.
목사는 그 지체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게 하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목사는 심부름 꿈 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음식을 성도님들에게 서빙하는 사람 입니다.
주인공은 목사가 아니라 성도입니다.
유능한 목사는 성도들이 튼튼하게 자라게 하는 목사가 유능한 목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음식을 정확히 가져다주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범사에 자랄지라]
기쁠 때도 서로 도와주고 기분이 나쁠 때도 서로 도와줍니다.
범사에 자랍니다.
경쟁자가 있으면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자랍니다.
사랑 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인품이 성장합니다.
그를 위하여 기도를 합니다.
인내를 배웁니다.
관용을 배웁니다.
(엡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교회를 통한 성화를 말한 바울은 이제 기독교인 개개인의 성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구성원인 교인들 하나 하나가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금 그릇이라도 쓰레기가 가득 들어 있으면 쓰레기통입니다.
아무리 값싼 그릇이라 하더라도 보석이 들어 있으면 보석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내용물인 구성원들이 변해야 교회가 변합니다.
교회 구성원들이 변하지 않으면 교회의 변화를 기대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가 은혜 받지 않은 이방인과 같이 되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은혜를 받았다면
이방인과 다른 무엇인가를 받았다고 주장을 한다면
이방인과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보여주라!
[허망한 것을 행함]
1.예수 믿기 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허망하고 그 허망한 것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났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허망이란 쓸모 없는 생각이나 ,행동을 말합니다.
또 허망이란 우상을 숭배하다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돼지 대가리]
새 자동차를 사고도 돼지 대가리를 놓고 무사하기를 빕니다.
그러나 그 돼지머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저들이 돼지 대가리를 놓는 이유는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윷놀아 할 때 도 할 때 도하고 돼지하고 첫 발음이 같아서 첫 사업 처음 무엇을 할때 돼지 데가리를 놓는다고 하고
돼야지를 한문으로 돼야지 돈 하여서 돈을 많이 벌기위하여
돼지가 꿀꿀꿀 하니까 벌꿀이 생각나고
돼야지가 잠이 많으니 꿈이 이루어 지라고 돼지머라를 놓는답니다.
참 내
돼지대가리 놓고 제사드리는 것은 돼지는 어리석음을 상징하니 그런 행동은 어리석은 행동인지 모르나 보지요?
가계 문지방에 마른 북어를 달아놓고 부적을 써 놓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 신자의 삶이었습니다.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3.허망이란 쓸모 없는데 시간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르기에 허망합니다.
저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이 땅에서 부귀와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 간 사람 중 솔로몬이 단연 으뜸입니다.
(전 2: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
원을 심으며
(전 2: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전 2:6)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전 2:7)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
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전 2:8)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그런 솔로몬이 모든 것을 행하고 난 뒤 종국적으로 한 말은
(전 2: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디서 왔고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목표가 뚜렷한 사람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왜 사는 것입니까?
요즘 유행처럼 번진 이혼
한국이 1 위를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우리가 결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과부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요즘 결혼을 하는 사람은 육체적입니다.
그래서 만족이 없으면 쉽게 이혼을 합니다.
그러나 결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쉽게 이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왜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 입니다.
야구선수가 공을 하나 던져도 포수의 손을 향하여 의도 데로 던지려고 전력을 다 합니다.
사람들은 한 분야에서 그래도 탁월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노력하고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정신 일도 하사불성입니다.
판소리에서 득음을 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폭포 수 밑에 가서 그 장엄한 소리를 뚫고 자기의 소리가 들려지기 위하여 각고의 고통을 감내 합니다.
심지어 똥물까지 먹습니다.
서편제에서는 한이 실린 노래를 부르라고 딸의 눈을 뽑아버리기 까지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거룩한 목표를 위하여 이렇게 전력을 기울입니까?
어떤 교회 목사는 성도가 안 나와서 심방을 하였더니 자기 돈 좀 벌게 하여 달라고 얼마 수입이 있기 전에는 교회 안나간다고 협박을 하더라고 그래서 그것을 놓고 기도한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건강의 복을 주시고 물질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목적이 된다면 헛된 일에 분주하는 이방인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 것 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일생입니다.
한번가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가서 너 무어하고 왔느냐 물으시면 허망한 것을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짧은 것을 기억하고 오직 한 목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림에 집중하여야 하겠습니다.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사람의 삶은 손바닥 넓이 만큼 작은 것을 아는 짛가 필요하고 그래서 하루하루 낭비하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하나님에게 여쭈어 보고 삽시다.
1990년 노벨평화상 후보 - 엘리나 여사 노인들의 어머니
노인들의 어머니중국선교사로 떠났지만 폐가 썩어갑니다.
선교사를 그만두고 귀국하며 하나님 나를 왜 폐결핵으로 치십니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귀환하며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귀국하여 아버지가 물려주는 넓은 불모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습니다.
그 농사짓고 남은 돈으로 선 교비를 보냅니다.
어느 날 농사를 탈곡하다가
탈곡기에 손아 딸려 들어가 손이 잘려갑니다.
손이 썩어갈 때 잘릴 때
하나님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나님 나를 왜 이렇게 팔을 자르십니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농사짓던 그곳에 건물을 짓고 오갈 데 없는 노인 양노원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키는 이 일을 위하여 또 전력을 다 하여습니다.
(엡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총명이 어두워 졌습니다.
현대사회는 지식과 정보화 시대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없습니다.
그래서 박사라는 사람들도 큰 일을 당하면 속수무책입니다.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활용할 줄 아는 지혜가 더 중요합니다.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굳어져 있다는 것은 마음이 마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합니다.
더럽고 무서운 죄를 짓고도 두려워 하거나 괴로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 이것은 가장 무서운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가장 무서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무관한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저주입니다.
(엡 4: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누군가가 하나님 없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거룩하고 절제된 삶을 산다.
#현대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아주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하여 반응을 안합니다.
영적으로 죽어 버린 시체와 같기 때문입니다.
방탕에 방임합니다.
방탕에 방임한다는 말은 기준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삶에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자는 절대적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더러운 것에 욕심을 냅니다.
애인 없는 사람이 어디잇느냐
(엡 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깊은 체험을 통하여 실제 그분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면 아는 만큼 우리는 변화합니다.
(엡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교회를 통한 성화를 말한 바울은 이제 기독교인 개개인의 성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구성원인 교인들 하나 하나가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금 그릇이라도 쓰레기가 가득 들어 있으면 쓰레기통입니다.
아무리 값싼 그릇이라 하더라도 보석이 들어 있으면 보석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내용물인 구성원들이 변해야 교회가 변합니다.
교회 구성원들이 변하지 않으면 교회의 변화를 기대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가 은혜 받지 않은 이방인과 같이 되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은혜를 받았다면
이방인과 다른 무엇인가를 받았다고 주장을 한다면
이방인과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보여주라!
[허망한 것을 행함]
1.예수 믿기 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허망하고 그 허망한 것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났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허망이란 쓸모 없는 생각이나 ,행동을 말합니다.
또 허망이란 우상을 숭배하다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돼지 대가리]
새 자동차를 사고도 돼지 대가리를 놓고 무사하기를 빕니다.
그러나 그 돼지머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저들이 돼지 대가리를 놓는 이유는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윷놀아 할 때 도 할 때 도하고 돼지하고 첫 발음이 같아서 첫 사업 처음 무엇을 할때 돼지 데가리를 놓는다고 하고
돼야지를 한문으로 돼야지 돈 하여서 돈을 많이 벌기위하여
돼지가 꿀꿀꿀 하니까 벌꿀이 생각나고
돼야지가 잠이 많으니 꿈이 이루어 지라고 돼지머라를 놓는답니다.
참 내
돼지대가리 놓고 제사드리는 것은 돼지는 어리석음을 상징하니 그런 행동은 어리석은 행동인지 모르나 보지요?
가계 문지방에 마른 북어를 달아놓고 부적을 써 놓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 신자의 삶이었습니다.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3.허망이란 쓸모 없는데 시간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르기에 허망합니다.
저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이 땅에서 부귀와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 간 사람 중 솔로몬이 단연 으뜸입니다.
(전 2: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
원을 심으며
(전 2: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전 2:6)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전 2:7)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
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전 2:8)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그런 솔로몬이 모든 것을 행하고 난 뒤 종국적으로 한 말은
(전 2: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디서 왔고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목표가 뚜렷한 사람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왜 사는 것입니까?
요즘 유행처럼 번진 이혼
한국이 1 위를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우리가 결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과부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요즘 결혼을 하는 사람은 육체적입니다.
그래서 만족이 없으면 쉽게 이혼을 합니다.
그러나 결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쉽게 이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왜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 입니다.
야구선수가 공을 하나 던져도 포수의 손을 향하여 의도 데로 던지려고 전력을 다 합니다.
사람들은 한 분야에서 그래도 탁월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노력하고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정신 일도 하사불성입니다.
판소리에서 득음을 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폭포 수 밑에 가서 그 장엄한 소리를 뚫고 자기의 소리가 들려지기 위하여 각고의 고통을 감내 합니다.
심지어 똥물까지 먹습니다.
서편제에서는 한이 실린 노래를 부르라고 딸의 눈을 뽑아버리기 까지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거룩한 목표를 위하여 이렇게 전력을 기울입니까?
어떤 교회 목사는 성도가 안 나와서 심방을 하였더니 자기 돈 좀 벌게 하여 달라고 얼마 수입이 있기 전에는 교회 안나간다고 협박을 하더라고 그래서 그것을 놓고 기도한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건강의 복을 주시고 물질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목적이 된다면 헛된 일에 분주하는 이방인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 것 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일생입니다.
한번가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가서 너 무어하고 왔느냐 물으시면 허망한 것을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짧은 것을 기억하고 오직 한 목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림에 집중하여야 하겠습니다.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사람의 삶은 손바닥 넓이 만큼 작은 것을 아는 짛가 필요하고 그래서 하루하루 낭비하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하나님에게 여쭈어 보고 삽시다.
1990년 노벨평화상 후보 - 엘리나 여사 노인들의 어머니
노인들의 어머니중국선교사로 떠났지만 폐가 썩어갑니다.
선교사를 그만두고 귀국하며 하나님 나를 왜 폐결핵으로 치십니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귀환하며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귀국하여 아버지가 물려주는 넓은 불모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습니다.
그 농사짓고 남은 돈으로 선 교비를 보냅니다.
어느 날 농사를 탈곡하다가
탈곡기에 손아 딸려 들어가 손이 잘려갑니다.
손이 썩어갈 때 잘릴 때
하나님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나님 나를 왜 이렇게 팔을 자르십니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농사짓던 그곳에 건물을 짓고 오갈 데 없는 노인 양노원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키는 이 일을 위하여 또 전력을 다 하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