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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숨결 7
화쟁(和諍)을 향하여
도비산 부석사 (1)
원효 의상
간월도에서 이제부터 우리가 가려고 하는 부석사가 있는 도비산(352m)을 바라보면, 산이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섬처럼 보인다는 말은 들었지만, 시계(視界)가 충분하게 확보되지 않는 날씨 때문에 확인할 수가 없었다. 도비산은 서산 지역에서 고북면의 연암산(441m)과 팔봉면의 팔봉산(362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도비산의 한자 표기가 다양하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도읍 도에 날비를 사용하여 도비산(都飛山)이라 하였고, 한때는 그곳에 복숭아나무가 많아 봄이 되면 복숭아가 살찌는 곳이라 하여 복숭아 도(桃) 자와 살찔 비(肥) 자를 사용하여 도비산(桃肥山)이라고 했었다는데, 현재는 도비산(島飛山)이라 표기한다. 천수만 쪽에서 보면 도비산이 바닷물 위로 떠서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섬 도에 날 비자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도비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다. 우리나라 서해안 일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었다. 도비산이 천수만과 태안 안면도 등 서해안을 감시하기에 매우 좋은 자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그곳에다 봉수대를 만든 것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1416년 조선의 태종이, 뒤에 세종이 되는 아들 충녕과 함께 7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와서, 도비산을 중심으로 사냥몰이를 한 적이 있다. 사냥몰이는 군사훈련의 일종으로 강무(講武·조선조에서 임금의 주관으로 벌이는 군사훈련)라고 했었다. 태종은 왜구에 대비하여 바다를 감시하기 좋은 도비산에서 주위 상황을 살피며 강무를 했던 것이다. 이런 등등으로 미루어 볼 때 도비산은 서해안 일대에 대한 조망권이 매우 뛰어난 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명찰이 세워질 입지조건이 충분한 셈이다.
도비산 중턱에 가람을 배치한 부석사의 사명(寺名)은 뜰 부(浮)자와 돌 석(石) 자를 사용한 것으로써 영주에 있는 부석사와 절 이름도 같고, 창간연대와 창건주, 창간설화가 모두 일치하여, 어느 것이 진실과 부합하는지, 이리저리 꿰맞추어 보아도 알 길이 없다. 신라 문무왕 17년(677년) 의상대사가 창건했고, 창건설화에 선묘낭자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데, 같은 해 다른 장소에서 동일 인물이 두 개의 절을 동시에 지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어느 한쪽은 허위일 것이 분명하나, 진위를 기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서산 부석사의 창건주가 의상대사라고 할 수 있는 증거는 많은데, 아니라는 정황을 찾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태다.
간월도는 원효대사가 피안사라는 이름의 기도처를 만들면서 처음 불교와 인연을 맺은 땅이다. 도비산 부석사의 창건주는 의상대사다. 그렇다면 우리 성지순례 팀은 경허의 숨결을 찾아다닌 것이기 이전에 우선 원효에서 의상으로 옮겨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를 태운 봉고는 해변을 끼고 달리다가 얼마지 않아 도비산 자락으로 접어들었다.
원효는 617년에 태어났고, 의상은 625년생이다. 원효가 9년 연상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대를 살면서,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날 정도로 가까웠으니 도반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거기다가 우리나라 불교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따진다면 우월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선각자들이다. 그러나 두 스님의 족적은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요즈음 말로 하면 원효스님은 국내파고 의상스님은 유학파다. 처음 두 사람은 당나라 유학을 같이 떠났었다. 육로를 택했었다니 요동 땅으로 해서 당나라로 갈 생각이었던 것 같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삭막한 요동 땅 여기저기에는 객사(客死)한 사람들의 시신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두 사람은 황량한 벌판을 걸어가다가 시신을 만나면 시다림을 해주며 당나라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발에 차이는 것이 죽검이니 무상이 도처에 깔려 있던 길을 따라 갔었던 셈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나라에도 득도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변방을 지키던 고구려 국경수비대에 붙들려 옥고를 치룬 다음 ,신라로 되돌아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전열을 가다듬은 두 사람은 다시 당나라 행을 감행하였다. 아무래도 선진 불교문물에 대하여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모양이다. 원효의 나이 45살 때의 일이다. 두 사람은 당성 부근에서 밤길을 가다가 비를 만났는데, 마침 사당이 눈에 띄여 안에 들어가서 곤히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을 자다가 갈증을 느껴 눈을 떴던 원효는 바가지에 물이 담겨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마신 다음 아침까지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당성은 현재 지명으로 남양 또는 당진이라고 한다. 날이 밝으면서 눈을 떴던 원효는 견딜 수가 없었다. 사당이라고 생각하고 찾아 들었던 곳이 실제는 무덤 속이었고, 바가지라고 여겼던 것은 해골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장마철이었던 모양이다. 해골에 빗물이 떨어져 고여 있던 것을 마신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데,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데다가, 길이 질퍽하여, 한 걸음도 옮길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더 묶는다. 그런데 밤이 되자 이번에는 귀신들 등쌀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원효는 탄식했다.
지난밤에는 사당이라 생각하여 편안하더니, 무덤 속인 것을 알고 나니, 오늘은 귀신들까지 극성을 부리는구나. 원효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침내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이 마음 안에 다 있는데, 법이라는 것도 마음 안에 있는 것인데, 별도로 구하겠는가. 원효는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그 자리에서 견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나라에 가서 배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서라벌로 돌아오는 결단을 내린다. 이때 일을 송고승전의 「당신라국의상전」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前之寓宿謂土龕而且安. 此夜留宵託鬼鄕而多崇. 則知 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又 三界唯心萬法唯識. 心外無法胡用別求
원효의 깨달음은 대승기신론의 다음과 같은 구절과 통한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
위 말은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귀결된다. 더 간단히 사자성어로 하면 유심소조(唯心所造)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 것이라는 말이다.
의상 역시 두 번째 시도에서도 당나라까지 가지를 못했었다. 그는 세 번째로, 당나라에서 신라에 왔다가 돌아가는 상인들의 배를 얻어 타고, 기어이 유학을 떠난다. 서기 661년, 그의 나이 37세 때의 일이었다. 의상이 밟은 중국 땅은 산둥 반도 북쪽의 등주라는 곳이었다. 삼국유사 의상조사편에 보면 당시 그곳을 다스리던 유지인(劉至仁)이라는 지방관은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일대에는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신라방이 있었고, 법화원이라는 신라절도 있었다. 유지인은 법화원에 머물고 있던, 신라에서 온 학처럼 고고하게 생긴 의상스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공양을 올렸다. 의상대사는 답례로 좋은 법문을 해 주었다. 문제는 유지인에게 선묘라는 무남독녀가 있었는데, 의상을 한번 보고 덜컥 연모하게 되었다는데 있었다.
선묘낭자는 의상의 주위를 맴돌며, 자신의 사모하는 마음을 전하려 했으나, 의상은 눈길도 한번 주지 않았다. 얼마 후 의상은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長安)으로 떠났으며, 근처 종남산에서 중국 화엄종의 태두로 추앙받고 있는 지엄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10년간 화엄학을 공부한다. 1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의상을 사랑하는 선묘낭자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었고, 일구월심 의상이 잘 되기만을 빌었다. 종교보다 더 강한 것이 사랑이다. 의상의 불교에 대한 향학열보다, 선묘의 의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간절했다. 10년이 흘렀으니 의상의 나이는 47세가 되었다. 30대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의상의 마음이, 불혹의 나이가 다 지나가는 터에, 새삼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는 끝내 선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새벽에 신라행 배에 몸을 싣고 만다. 선묘는 자기가 손수 지은 법복을 들고 바닷가로 달려갔다가, 의상을 태운 배가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 동동 발을 구르다가, 법복이 무사히 의상에게 전달되도록 마음속으로 빌면서, 배를 향하여 던졌다. 한 올 한 올 의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만든 법복은 허공을 가로질러, 무사하게 의상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그 직후 선묘는 용이 되게 해 달라는 서원과 함께 바다로 뛰어 들었다.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가 풍랑을 견디고 무사히 신라에 도착할 수 있도록 호위했다. 의상이 부석사를 지으려고 할 때 그곳을 선점하고 있던 다른 종파의 스님들이 크게 반발했었다고 한다. 그러자 바위로 변한 선묘낭자가 3일 동안 공중에 머물면서 반대하는 무리들을 내리칠 듯 위협하였다. 대처의 무리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난 후, 사뿐이 땅으로 내려앉았다. 그것이 떠다니던 돌 즉 부석(浮石)이다. 의상대사께서 화엄 도량을 짓고, 선묘의 뜻을 기려 부석사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 부석사 창건설화다. 영주 부석사는 의상의 고향인 서라벌에서 가깝다는 면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고, 서산 부석사는 의상이 유학시절 당나라를 가고 올 때 지나갔을 길목이라는 점이 자랑이다. 부석사가 창건될 당시 도비산은 백제 땅도 아니었기에, 신라인이 절을 세우는데 규제를 받을 일은 없었다. 의상이 세웠다는 화엄 10찰이 사실은 의상대사가 직접 창건했다기 보다는 제자들의 작품인 것이 대부분이니, 둘 중 어느 하나는 제자에 의해 세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석공주는 무열왕의 둘째딸이다. 남편은 백제와 싸움을 하던 중 전사했다. 청상과부가 된 요석공주는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과부가 된 것은 그리 서럽지 않았으나, 자랑스러운 신라인이 될 아들을 낳을 수 없게 된 것이 늘 한이었다. 신라의 여인들은 누구나 아들을 낳아 훌륭한 신라인으로 기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큰 보람이요 행복이라고 여겼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으니, 요석공주의 한이 깊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무열왕이 딸을 위해 원효대사를 요석궁으로 유인하였고, 대사가 요석공주의 한을 풀어준 것이었다. 원효스님은 한결같은 선묘의 마음을 끝까지 냉정하게 거절한 의상과는 달리, 아들을 원하는 요석공주의 한을 풀 수 있도록 해 준 것이었다. 원효의 피를 받아 요석공주가 낳은 설총은 과연 자랑스러운 신라인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두문자를 만들어 향가를 보존시키는 국문학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계행을 끝까지 수지했던 의상이 원효보다 훌륭한 스님이라고 하기에는, 원효와 설총이 남긴 위업이 너무나 위대하다. 원효는 100여개의 테마로 2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만한 업적을 남긴 사상가 또는 종교인을 찾을 수 없다. 원효는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위대하고, 니체보다 훌륭하다. 그러나 그 모두를 합해도 설총을 이 땅에 떨군 것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원효가 남긴 빛나는 업적 중에 가장 빛나는 것이, 설총이라는 사리를 남긴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상고문학이 송두리째 유실되었을 것이다. 누가 무슨 잣대로 계를 어겼다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의상대사는 중국에 유학하여 지엄대사로부터 화엄을 공부한 다음, 신라로 돌아와서 화엄을 이 땅에 정착시키는데 앞장섰던 큰스님이며, 계행이 청정하기가 추상같았던 분이다. 10년을 자신이 온몸을 받쳐 몰두한 종교보다도, 더 깊은 염원을 담아 사랑을 받친 여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스님이다. 그러니 그를 추종하면서 가르침을 배우려는 학인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직계 제자들이 3천 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초라했던 원효에 비해 해외 유학파인 의상문중의 위세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가 있었기에 한국 불교에 화엄이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불교사적 위업은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유학을 해서 공부를 많이 했고, 높은 도덕을 갖춘 스님이기는 하지만, 의상이 견성을 했다는 흔적은 찾기 힘들다. 적어도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지금의 낙산사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이전에는 학문은 깊었고, 스님으로서도 한 치의 흩어짐이 없이 여법했지만, 견성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쪽에 더 무게가 실린다. 그래서 낙산사와 홍련암 시절을 통해 그가 깨달음의 세계로 거듭나게 됐는지, 아닌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낙산사는 추후 꼭 돌아볼 순례 여정지다.
원효대사가 파계를 한 것이라면, 부마가 되어 영민한 아들을 낳은 사랑스런 아낙과 더불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한 다음, 저자거리로 나서서 무지몽매한 중생들 제도에 앞장선 무애행을 행했다. 박인로가 그런 원효대사의 행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넉넉한 옷을 입고서 목을 움츠리고 허리를 굽힌다. 손에는 끈이 달린 쇠 방울을 들었는데 방울 밑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비단을 매달았다. 그리고는 그 방울을 치면서 앞뒤로 나아가며, 아울러 소매가 긴 두 손을 머리 위로 휘두르기도 하고, 발을 3번씩 들기도 한다. 두 손을 휘두르는 것은 2가지 장애를 벗어났음을, 발을 3번 드는 것은 3계를 벗어났음을 뜻한다. 곧 해탈의 경지를 의미한다.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누구에게도 엎드린다는 것이니 순종이고, 허리를 굽히는 것은 만물을 받아들인다는 자세니 용납이다. 곧 이는 사람과 존재(人法)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완벽한 자유인임을 뜻한다. 쇠 방울에 비단을 매단 것은 근엄한 격식을 벗어난 것이니, 진리 탐구에는 격식이 없음을, 노래를 부른 것은 무지한 중생들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니 중생에 대한 교화를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파계를 했다고 손가락질 했어도 정작 원효대사는 포교나 저술 작업을 결코 멈추지 않았었다. 그는 절하는 무릎이 어름처럼 시려도 불을 구하지 않고, 창자가 끊어질 듯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는 자세로 기도하고, 공부하고 생각한 것을 글로 옮기는 일에 몰두한 사람이다. 이처럼 치열하게 정진했던 스님을 달리 찾기가 쉽지 않다. 당시 신라에서는 백 명의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백고좌를 개최했었다. 백고좌에는 신라 왕실과 귀족은 물론 일반인들 까지 참여한, 불교활성화에 크게 공헌한 국가적 포교 사업으로 추진되었던 법회였다. 원효는 그 법고좌에 끝내 초청되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파계승 취급을 하며 손가락질하는 데는 선수면서,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안목은 없었던 것 같다. 오늘 날 우리는 그 백고좌에 초청되었던 스님들 중 누구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원효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원효(元曉)는 처음으로 밝아온다는 뜻이니, 곧 새벽을 말함이다. 한국불교의 새벽을 연 스님이 바로 원효다. 중국 사람들은 원효의 학설을 원효종(元曉宗), 해동종(海東宗), 분황종(芬皇宗)이라 인정한 후 기꺼이 배워갔다. 자존심 강한 중국인으로서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다. 원효 저서의 대부분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연구에 의하여 유실되지 않고 계승되어 온 것이다. 후일 의천국사가 원효를 기려 다음과 같이 찬하였다.
人心南北異
佛法古今同
不壞眞明俗
還因色辨共
探幽唯罔象
失旨倂童蒙
有著斯爲諍
妄情自可通
사람 마음은 남쪽과 북쪽이 다르나
부처 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참된 것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속된 것을 밝히며
빛깔(물질)에 의해서도 다시 빈 것을 풀이한다.
그윽함을 살펴서 오직 모습을 없애며
뜻을 잃지 않고도 어린 아이를 깨우친다.
집착함이 있는 것, 이것은 다툼거리가 되나
생각(뜻)을 버리면 스스로 통하는 것이다.
원효사상은 화쟁(和諍)으로 대변된다. 화쟁이란 화합한다, 어우른다는 뜻이다. 모든 논쟁을 어우른다는 말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 별기에서 ‘백 가지 논쟁을 아우르지 못할 것이 없다(百家之諍無所不和)'고 하였다. 우리 나라가 신라와 백제 고구려로 나뉘어 끊임없이 다투던 때, 바다 건너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호시탐탐 우리 나라를 노리고 있던 상황에서, 화쟁은 대내외를 아우르는 평등과 평화의 사상이었다. 후학인 경허선사가 본받아 따른 것도 따져보면 바로 원효의 화쟁사상이다. 그래서 경허의 법을 이은 만공선사께서는 일본인이 온갖 가렴주구로 우리를 짓밟았어도, 세계일화를 외치는 것으로 화쟁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원효가 살았던 신라시대나,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고 인류를 1,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일제 강점기에도 화쟁은 꼭 필요한 것이었고, 꼭 필요한데도 실천에 옮기기는 어려웠던 화두였다. 경허선사는 도비산의 의상조사가 창건한 화엄종찰에서 보임했지만 그의 사상은 의상 보다는 원효를 표방했다 할 것이다.
우리가 도비산 부석사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 차에서 내려섰을 때 제일 먼저 맞이해준 것이 사자문(獅子門)이다. 사자가 움크리고 있는 동굴앞에 선 것처럼 머리칼이 쭈빗 선다. 화쟁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왜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일까? (계속)
첫댓글 원효 대사와 의상대사를 비교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하군요. 맛만 보고 가지만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라는 것은 깊이 새기겠습니다.
국사공부도 다시 하는 것 같습니다.원효대사와 설총에 대해 다시 한번 문헌을 살펴볼까 합니다.
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이 괴로우니, 죽지 말지어다 나는 것이 괴로우니(莫生兮其死也苦,莫死兮其生也苦). 사복의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여 원효대사가 읊은 조사입니다. 그러자 사복이 핀잔을 주었어요. 무슨 말이 그렇게 번거로운가. 몇 자 되지도 않는데 번거롭다 하니, 원효대사가 다시 지었습니다. 나고 죽는 것이 괴롭도다(死生苦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