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신선을 찾아 헤맨 기록'이라 소개하는 책. 제목에 끌려 살폈다. 막상 표지를 넘기니 실소를 부를만큼 부실한 함량으로, 그저 사람들을 모아 단편적으로 소개할 뿐이었다. 그래도 사진이 많아 '사람구경'하는 마음으로 제법 읽어보았다. 나로 하여금 민간자격증이지만 '침구사 자격증'을 따도록 해주신 구당선생도 반가웠고, 17년 승마를 하고 있는 가야금 병창고수 강정숙, 45살에 '술/담배/바둑/골프/포커/고스톱/여자 등을 '단박에 무자르듯' 잘라 버리고 공부로 약해진 몸을 '선비춤'으로 다스리기 시작했다는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 "김유신이 애마의 목을 단번에 잘랐다는데, 일본 검법으로는 아무리 해도 그렇게 되지 않아(-그 때가 '검신'이라 부르는 검도 8단이었다고 한다) 기록과 방법을 찾아 다니다 조선의 전통검법 '조선세법'을 발굴, 지금까지 연마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분, 이름도 낯선 민족전통무예 '두람'(-'너르다'는 뜻이란다) 수련자 등을 소개하였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경주 골굴사 주지스님도 아는 얼굴이라 반가웠고, 귀화한 재중동포로 합천에서 "난강기공연구소"를 운영중인 기공지도사 윤금선(87세)도 소개하고 있었다.(어느 TV광고에서 덤블링을 하던 할머니로 나왔던 듯)
"화가나면 흰 사발에 맑은 물을 담아 눈 앞에 놓고 지그시 바라보세요. 화(火)를 물(水)이 끄는 것을 10분 내로 느낄 수 있습니다"는 백발 기공사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아내와 일찍 사별, 이윽고 얻은 둘째 아내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고, 아들도 앞서 보낸데다 타고난 몸도 건강체는 아니었다는 퇴계 선생. "69세 생일을 한 달 보름 넘기고 큰 집 제사에 다녀왔다가 배탈이 나 한 달을 누운 뒤, "나를 앉혀달라"고 부탁하고는 편안한 표정으로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책 속에 소개된 퇴계 선생의 15대 직계 자손이 전하는 말이다. 대단한 가문이라 생각되는 게 지금까지도 퇴계선생의 <활인심방>을 할아버지, 아버지가 하시던 그대로 하고 있다고 했다. (이 책도 중국의 양생술에 기반하여 퇴계선생이 쓴 책이다)
시간을 마냥 쓸 수 없어 일어났지만, "단련은 千日하고, 연습은 萬日한다. 그러나 승부는 일순간"이라는 검도고수의 말이 귓전을 내내 맴돌고, 치악산 기슭에서 은거중인 주역학자 김성욱씨가 소개한 '무팔단금(武 八段錦-여덟가지 비단처럼 부드러운 동작)'에 흥미가 일었다. 강원대 최상익 교수로부터 전수받은 무팔단금은 중국 도가의 비밀스런 양생술로, 중국인 스승이 최교수에게 여덟가지 동작은 가르쳐줬지만, 외국인이라고 호흡법은 일러주지 않은 것을, 최교수가 오랫동안 혼자 연마하고 터득하여 완성했다고 한다. 역시 '비인부전(非人不傳-인성을 보고 전한다는 뜻)'의 계와 함께 김성욱씨에게 가르쳐 주었다는데, 이 분이 스승과는 조금 다른 걸음을 걷는 듯 하였다. 주역학자로서 <예언>이란 책의 저자이기도 한 김씨는, 이 무(文팔단금도 있다고 한다)팔단금을 익힌 후, 바늘을 유리창에 던지니 바늘이 유리에 꽂히고, 5cm 이상 두께의 차돌을 기자의 눈 앞에서 격파시키기도 하였다니. 인간의 계발가능성, 몸의 비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 싶었다.
한편, 김성욱씨가 권장한 생활 속 연마법이' 3-3-3 걸음'인데, 걸을 때 숨을 세 번은 들이쉬고, 세 번은 참고, 세 번은 내쉬며 걷는 방법으로, '4-4-4'나 '5-5-5'도 가능하다고 했다. 이번 서울과 원주에 다녀오며 걸을 때마다 해 보았는데, 과연, 단전에 축기가 되는 느낌이 금방 왔다. 천천히 걸을 때는 5-5-5도 너끈하다 싶었는데, 기차 시간을 맞춰 역내를 걷는 등 걸음이 빨라질 때는 숨이 차서 3-3-3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공부할 때는 앉아 있을 때도 해 보았다. 호흡을 붙잡고 있어선지, 서울 가기 전날부터 잠을 설쳐 거의 이틀을 못자고, 밥도 거의 안먹었는데도 월요일인 오늘 회복이 빨랐다. 체력이 전같지 않음을 유난히 느끼는 요즘, 이게 웬 복음인가 싶다. 마침 유투브에 중국인 여성이 하는 무팔단금 동영상이 올라 있어 섭생비법으로 천천히 독학을 해 볼까 싶다.
서울 장숙에서 '라깡'을 공부한다기에, 어깨너머로 귀동냥이라도 하려 했더니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한 달 째 미루어졌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펼친 <라깡의 루브르-정신병동으로서의 박물관>(백상현, 위고, 2016). 김영민 선생의 책이 아니면서 문장마다 밑줄을 긋고 싶은 책을 얼마만에 만나는지. 그동안 책에 관한 탐색을 등한시한 까닭이 크겠으나,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저자의 글솜씨가 워낙 빼어났고, 라깡과 서양미술사를 접목시켜 풀어내는 접근법도 대단히 조직적이라 마치 진중권의 '미학오딧세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좋은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젊은 학자일 것 같은, 어쩐지 내게는 잘 입에 붙지 않는 이름을 가진 저자의 책은, 촘촘하고 패기 있는 문장과 학문적 열정 뿐 아니라, 미스테리를 풀어가는 듯한 전개방식도 어찌나 유려한지, 몇 시간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대출받아 왔지만, 집에서는 그처럼 밀도있는 독서가 잘 되지 않는 것이 내 오랜 고질병이라 완독할 자신이 없기도 하다. 라깡과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훌륭한 독서체험이 될 듯 하다. 몇 몇 대목을 채록한다.
" 누구에게나 역사는 필요하고, 이를 통한 정체성의 고정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라깡학파의 정신분석이 규정하는 정체성은 언제나 도래하는 시간 속에 있으며, 과거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으로 개인사 박물관은 메타적 고고학의 작업장이 되고, 도래할 새로운 '나'의 이미지를 생산해 낼 가능성의 공장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분석이라는 특수한 과정이 추구하는 특권적 목표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기억에 관하여, 개인사 박물관에 관하여 취하는 권리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누구도 타자(부모)에 의해 새겨진 과거의 흔적을 숙명으로 짊어져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 존재가 가진 유일한 의무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각자의 차원에서 '재발명하는reinventer 것이다.만일 개인사 박물관의 유물들을 선택하고 배치하며 명명했던 언어가 타자의 언어였다면, 성인이 된 우리의 의무는 그것을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로 다시 배치하고, 다시 명명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에 대한 소외를 넘어서는 새로운 '나'의 창안. 이것은 프로이트에서 라깡으로 이어지는 정통 정신분석의 흐름이 정신분석 임상이라는 협소한 범주를 넘어서 인문학 전체의 차원에 넘겨준 윤리적 명제이다."(41쪽)
"....물론 늑대인간의 정체성 형성 과정은 성충동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었으므로, 루브르 박물관을 이러한 신경증의 메커니즘과 비교한느 것은 일견 비약으로 보일 수도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비난하는 인문학자들이 특히 강조하는 것이 이러한 일반화이다. 프로이트가 인간사의 모든 현상들을 단지 성에 대한 욕망과 억압의 과정으로 환원하려 한다고 비판하는 그들은 문명과 사회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성충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현상들이 문화 속에 존재하며, 오히려 성충동은 삶의 작은 부분에서 한정된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성충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충동이란 일반적으로 생각되듯 성기대를 중심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충동이란 보다 다형적이며, 외형만으로 보기에는 전혀 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나아가서 인류의 행위를 성충동에 근거해서 바라봐야 하는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문명을 생산하는 인간의 심리적 구조가 유아기에 남겨진 흔적을 따른다는 데에 있다.....(중략) 분화되는 성충동은 유아의 마음 속에 일종의 수로들을, 충동의 '길트임 Bahnung'을 흔적으로 남긴다. 이후 인간의 행위를 지탱하는 욕망들은 그것이 전혀 성적이지 않은 내용을 표현한다고 해도 유아기에 형성된 리비도의 수로들을 따라서 흘러들거나 유출된다. 만일 문명의 다양한 현상들을 언어의 내용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의 문법이 성충동에 의해 구조화되었기 때문에 문명은 언제나 성적인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삶의 다양한 목록들을 지탱하는 욕망의 구조는 어린 시절 마음속에 흔적으로 남겨진 상실된 대상의 텅 빈 자리를 중심으로 구성된 것에 다름 아니다."(53쪽)
"정교하게 계산된 기표-연쇄는 그 논리적 일관성 속에서 사물을 효과적으로 억압할 수 있지만, 그 일관성이 과도해질 경우, 사물은 회귀한다. 이것이 바로 증상의 속성이다."
"정교한 사유에 대립되는 또 다른 사례는 대상-산물objet-Sache에 대한 광신적 고착이다. 우울증이 대상-산물의 부재로 인해 사물에 접근하게 된 사례였다면, 광신은 순환(a->a)이 정지된 특정대상-산물(a)에 대한 과도한 리비도의 투자가 고착으로 이어지고, 결국 산물 자체에 사물이 되어버리는 경우이다. 종교의 광신주의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신을 묘사하는 특정 기표는 외부의 다른 어떤 기표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립 속으로 들어가며, 마침내 신의 초월성은 기표에 의해 대체된다. 공백으로 남겨져 있어야만 했던 신의 속성이 기표-의미를 통해 틀어막히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역시 사물은 고립된 기표에 의해서 불려나오고, 사유는 사물이 불러일으키는 충동적 관계에 지배된다. 물론 이것은 단지 종교적 광신의 문제만이 아닌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적 광신주의에 해당되는 현상이다. 타협을 거부하는 고립된 담론은 필연적으로 사유의 정교한 대체(a->a)가능성을 정지시키고 폭력과 파괴의 사물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루브르가 중세적 세계관을 지배하던 종교적 광신의 고립된 담론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하는 새로운 아버지를 선택했던 이유 역시 정교한 기표 순환을 허용하는 르네상스-근대 담론을 통해 사물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60쪽)
"건축물은 삶의 편리를 보장해주는 실용적 기능을 넘어서 신경증적인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것은 편재하는 공백을 사로잡아 관찰 가능한 공백으로 전환하는 것이다....(중략) 건축의 역사가 내부에 가두려고 했던 공백은 인간의 욕망이 사로잡힌 가장 궁극적인 것(사물)을 담고 있는 동시에 바로 그것이 소멸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욕망의 지향점이자 소멸의 지점인 '성스러운 공백'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질 수 없다. 공백을 둘러싸는 방식에 따라서 사물에 대한 억압과 은폐의 실질적 효과의 수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거대한 건물의 텅빈 공간은 세속적 이미지의 소멸을 암시한다. 공백의 이미지는 동시에 무에서 새로움이 시작될 수 있는 창조론적 진리를 또한 이미지화한다. 서구의 성당 건축양식이 공백의 포획에 그토록 몰두했던 또다른 이유이다."(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