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산에서 체득한 삶의 지혜를 경영 노하우에 접목시키는 CEO가 늘고 있다. 경기 침체로 떨어진 직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등산으로 ‘스킨십 경영’에 나서고 있는 기업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3월에 취임한 이장호 부산은행장은 취임에 맞춰 전 직원 간의 허물없는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는 취지로‘등산경영’을 선언했다.
현대종합상사의 전명헌 사장은 임직원들은 물론 해외지사의 우수 현지인들과 토요산행을 실시하면서 직원들 단합 도모에 총력을 가하고 있다. 등산의 달인인 크라운·해태제과 윤영달 회장도 산에서 전 직원들에게 위기관리를 위한 경영노하우를 전수하면서 등산의 즐거움도 함께하고 있다.
이 밖에 지오인터랙티브 김병기 사장, 한국전력 한준호 사장, 한샘 최양하 부회장, 태평양 서경배 대표, SK증권 김우평 사장 등이 대표적인 ‘등산경영’예찬론자들이다.
많은 CEO들이 등산경영에 나서는 이유는 직원들의 단합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직원들과 함께 산을 오르면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 이런 대화를 통해 인성을 파악할 수 있고 체력도 키울 수 있어 일거양득의 효과를 내고 있다.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은 매주 산을 찾는 경영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산을 찾는 이유를 “산을 오른다(登山)기 보다 산에 들어간다(山入)는 마음가짐으로 산행을 한다”며 “산행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는 시간을 갖고 담대한 마음가짐으로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삶의 지혜를 산에서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윤 회장과 직원들은 매주 북한산을 오르고 있다. 사실 북한산은 등산하기에 만만치 않은 산이다. 보통 산행은 올라가서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크라운·해태 가족의 산행은 일반 산행의 3∼4배가 넘는 거리를 주파하는 게 보통이다.
이처럼 남다른 윤 회장의 등산경영이 시작된 것은 부도를 겪었던 외환위기 때부터다. 그는 당시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북한산 산행을 시작했고 점차 산의 매력에 빠져버리게 됐다. 이후 윤 회장에게 산행은 그 자체가 경영이 되어버렸다는 후문이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들어간다”
윤 회장은 “회사가 어려웠을 때 시작한 산행이 회사를 살리고 이제는 회사의 주요 경쟁력으로까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며 “직원의 산행 참여로 일단 체력에 도움이 되고 자연스럽게 커뮤니케이션도 진행되어 등산이 회사를 살리는 원천이 되었다”고 말했다.
윤 회장은 등산경영을 통해 크라운제과를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업계 2위였던 해태제과를 2005년 1월에 인수했다. 결국 크라운제과와 해태제과의 경쟁력은 등산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윤 회장은 직원 7000여 명에게 등산화와 외투를 선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윤 회장은 “우리의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며 “산행을 통해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으니 산은 기업경영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부산은행 이장호 행장은 부산은행에서 30년 넘게 일해 온 영업맨 출신이다. 그는 발로 뛰는 경영을 위해 등산경영을 선포했다. 이 행장은 지난 3월 취임 후 부산은행을 지방에서 제일 가는 은행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 전 직원들과 함께하는 ‘새 출발 산행’을 실시했다.
정상에 올라 영업 대상지역을 관망하다
새 출발 산행은 10회차에 걸쳐 600여 명이 참석하는 것으로 동래 금정산·해운대 장산 등 매회 부산지역의 산을 등정한다. 4월부터 실시한 이 산행은 현재 5회차에 걸쳐 진행 중이다.
이 행장은 “정상에 올라 영업 대상지역을 관망함으로써 발로 뛰는 경영에 대해 목표의식을 갖는 계기가 되도록 하는 취지에서 실시하고 있다”며 “임직원들이 한마음이 되어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 이 행장은 등산을 통해 CEO와 임직원 간의 허물없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스킨십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현대상사 전명헌 사장의 산사랑은 남다르다. 전 사장의 산행이력은 오래됐다. 현대자동차 재직시부터 해외 지사에서 근무할 때를 제외하고 꾸준히 북한산을 등반해 이제는 전문가 수준의 산행실력을 겸비하고 있다. 최근에는 에베레스트산 등정을 목표로 체력관리에 들어갈 정도로 등산을 좋아한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임직원들과 함께하는 북한산 토요산행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전 사장은 “직원들과 거리감을 없애고 대화를 통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이를 실제로 업무에 반영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올 초에 전 사장은 북한산 산행을 하면서 등산로 주변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를 보고 직원들이 자연사랑 캠페인을 하자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어 ‘자연사랑 환경 캠페인’을 실시했다. 이를 계기로 직원들의 단합 형성은 물론 사회공헌 활동까지 일석이조 효과를 보고 있다. 특히, 콜롬비아 보고타 지사, 러시아 모스크바 지사 등 해외 지사 임직원들도 함께 동참해 회사에 대한 애사심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산을 오를 때는 왼발과 오른발이 같이 움직여야 정상에 오를 수 있고, 나무와 바위·계곡·풀 등이 제자리에 있어야 산이 아름답다.”
한국전력 한준호 사장의 말이다. 한 사장은 산이 산다워야 하는 것처럼 경영도 모든 구성원이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사장은 직원들과 등산을 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끈끈한 정을 나누는 것을 즐겨한다. 지난 2월에는 임원들과 한라산을 등반하며 ‘산상 경영전략회의’를 가지기도 했다. 등산은 건강뿐 아니라 회사 경영 차원에서도 유익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산처럼 각자 위치에서 최선 다해야
그는 지리산·한라산 등 국내에 있는 산이란 산은 거의 다 섭렵하고 있다. 그는 평소 등산 만큼 좋은 운동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골프와 등산 중에서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한다는 그는 스스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산다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깨끗한 기업’을 추구하는 한국전력 사장답게 사회공헌 활동을 앞장서 추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등산경력 20여년, 김우평 SK증권 사장의 산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다. 가파른 오르막과 정상, 내리막에서 경영철학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지론이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더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한 그는 “자칫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치명적인 사고를 당할 수 있으므로 산행 중에는 항상 마음의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의 기업경영 방식과 일맥상통한 점이 많다.
본부장 회의 끝나면 모두 청계산으로
태평양 서경배 대표는 ‘2015년 Global Top 10’이라는 비전을 향한 전 임직원의 결의를 다지고, 6월 독일 월드컵에서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지난 5월 2박3일 동안 ‘백두대간 미와 건강 대장정’을 실시했다. 이어 백두대간 전체 13개 정맥 중 6개 정맥 구간을 총 37개 구간으로 나누고 부문 및 팀별로 종주한다.
대장정에 참가한 태평양의 모든 임직원들은 자연보호 활동도 병행하면서 등산을 통해 친환경적인 행사가 되도록 실시하고 있다.
특히 월드컵을 앞둔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모든 참가자들이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한줌씩 담아온 흙을 한데 모아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기를 모으는 합토(合土) 퍼포먼스도 펼칠 예정이다.
한샘의 최양하 부회장은 매주 월요일 본부장회의를 끝내고 다같이 청계산을 오른다. 그는 “평소 얘기하기 힘든 내용들을 산에 오르면서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으며, 산에 오를 때는 동등한 입장이 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다. 지난해 12월 30일 신입사원들과 발표회를 마치고 태백산에 올라 일출을 보며 결의를 다졌다. 회사경영도 등산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최 부회장은 등산은 비용도 적게 들면서 단합도 생기고 몸도 건강해지기 때문에 등산경영에 푹 빠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지오인터랙티브 김병기 사장은 지난해 12월 아프리카의 최고봉 킬리만자로 정상을 200m 앞두고 발길을 돌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희망원정대’의 일원으로 산을 오르는 동안 버티던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그는 두 발 대신 두 손으로 산을 오르는 희망원정대원과 생사를 넘나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다. 대자연 앞에서 사회의 지위와 명예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도 무의미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산과 인연이 닿은 김 사장은 최근 직원들과도 등산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평균 연령이 20대 중·후반대인 지오인터랙티브의 직원들에게 산행은 새로운 활력소로 다가왔다. 산행은 ‘지오코드’라고 명명한 회사의 철학을 더 깊이 공유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지오인터랙티브는 ‘창조(Creative)’‘신뢰’‘스피드경영’을 전직원이 공유하는 회사 헌장으로 채택하고 있다. 게임이라는 첨단 분야에서의 생존을 위한 창조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경영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스피드경영, 인간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뢰를 산행에서는 모두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단체산행을 하는 이유
‘스킨십에 등산 만한 것이 없어’ 지난 1월 22일 금호그룹 박삼구 회장은 금호타이어 임직원들과 함께 청계산에 오른 자리에서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인수하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날 박 회장은 함께 산에 오른 직원들 앞에서 “(금호그룹이) 성장하고 도약하기 위해선 꼭 해야 할 일”이라며 자신의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박 회장뿐만 아니다. 지난해 통합을 앞두고 라응찬 신한지주 회장과 신상훈 신한은행장, 최동수 조흥은행장은 각각 1000여 명의 직원들과 함께 백두산에 올랐고, 강덕수 STX그룹 회장은 올해 4월 그룹 창립 5주년을 맞아 직원들과 함께 북한산 등반에 나섰다. 심지어 윤윤수 휠라코리아 회장은 올해 초 관악산 정상에서 전 직원이 참여한 가운데 시무식을 열고 “한 달에 두 번 산을 오르는 등산경영을 할 방침”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CEO들이 이처럼 기업에 중요한 일이 있거나 새해가 되면 직원들과 함께 산에 오르는 등산경영에 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김지완 현대증권 사장은 “산에 오르면 평소 얼굴을 마주 할 기회도 별로 없는 사원들과 얘기 나눌 기회가 생기곤 한다. 평소 뭔가 미진해 나무랐던 사원들은 등 두드려주는 쪽으로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등산은 건강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를 위해서도 매우 좋은 레저스포츠”라고 말한다. CEO와 직원들의 스킨십에 등산 만한 운동이 없다는 뜻이다. 직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혹은 협력업체와 관계 증진을 원하는 CEO들은 함께 산을 올라 보면 어떨까.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함께 땀 흘리며 산을 오르다 보면 유대가 생기는데 하물며 같은 목적을 가진 직원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는 한 산악인의 말처럼 등산은 최근 유행하는 ‘스킨십경영’의 가장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