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 박필순 여사
- 어머니 제사에 부쳐 -
1993년 12월 14일(화) 6시, 무등산 온천 관광호텔 부페에서 박종달 형수님 회갑연이 있었다. 형님이나 형수님 모두 반가워하셨다.
종달이 형님은 국제 예식장을 경영하는 사장님이지만, 우리 외가의 가정행사를 지켜보며 사뭇 마음이 엄숙해지고 자부심도 있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행사를 통하여 하객들로 하여금 상당한 금전적 이득(?)을 얻으려 하는 세태인데, 우리 외가는 정말이지 그런 점에서 초연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참석한 사람들이 조촐했다. 외부 인사는 일체 초청하지 않아 일가친척들만의 조촐한 잔치였다. 형제분들(종철, 종일, 종칠, 충덕, 순덕)이 축하금으로 준비한 금일봉을 전달하려 했지만 모두 거부하고 받지 않았다.
이 자리에 참석한 분은 형제분들 외에도 회갑연에 참석한 분들은 절골 세째집 종효 종숙 어머니, 둘째집 장규 아저씨 내외분, 장성 이모댁 경서형님, 해남 이모댁 송자 누나 자매, 장등이 이모댁 갑석이 형님 내외 등 40 명 정도였다.
이처럼 혼탁한 사회의 의식을 개혁해 가는데 솔선수범하는 우리 외가,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우리 어머니 ‘박필순’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해남 이모의 송자누나였다. 아무도 알지 못한 이야기, 6․25 전쟁으로 인한 일말의 비극이었지만 나에게는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때는 6․25가 일어난 후, 그러니까 ‘여․순 반란 사건’으로 세상이 뒤숭숭할 때였다.
어머니는 해남 연동에 계신 이모댁으로 피난을 갔다.
당시 제 2대 국회의원이신 고영완씨 가족(고영완씨와 우리 어버지 고영묵과는 8촌이다.)이라는 이유 때문에 당하게 될 반란군들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나와 병열이를 평화에 남겨 두고 병덕이를 등에 업고 해남으로 갔다.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해남으로 가셨을 것이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한 때도 아니며, 자동차란 볼 수도 없었을 때다. 길은 멀고 세상은 험하고 무서운데 그 고생이 얼마나 컸을까? 더구나 등에는 어린 생명을 업고 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가다가 배고파 보채는 병덕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먹였을까? 주린 당신의 배는 무엇으로 채웠을까? 장흥에서 강진까지 40여리(16Km정도)이며, 강진에서 다시 해남까지 60여 리(24Km정도), 거기서 다시 연동까지 걸어야 하니 얼마나 먼 길인가? 하루 동안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인데 밤은 어디에서 지샜을까?
머리에 보퉁이를 이고 등에는 아기를 업은 시골 아낙네 피난민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어째든 어머니는 이모댁에 도착하여 며칠을 지냈다.
당시의 6월, 7월이면 ‘보릿고개’라고 한다.(보릿고개 : 지난 가을에 거둔 쌀은 거의 바닥이 나고 새로 익은 보리는 아직 수확을 하지 못해 식량이 없을 때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때를 넘기기 위해 산에서 나물을 캐 죽을 끓여 먹기도 하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하였다. 이처럼 어려운 시절이 6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새마을 운동으로 소득 증대 사업을 벌여 지금과 같은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절에 언니 댁에 얹혀 있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구나. 세월이 하 수상하니 이웃사람들의 눈치까지 보아야 하는 처지였을 테니 그 불안한 형편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 때 송자 누나는 13살이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어머니를 데리러 왔다. 송자 누나는 떠나는 어머니를 배웅하러 동네 밖에까지 나왔다가 어머니를 따라 평화로 왔다. 어머니는 송자누나를 어르고 달랬지만 기어이 따라오려는 어린 질녀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당연히 돌려보냈어야 했었다. 모질지 못한 어머니, 세상 형편이나 가정환경에 대한 상황 판단이나 결단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머니의 천품은 이어받은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손해보고 살 때가 너무 많아서 안타깝다.
우여곡절 끝에 평화로 왔다.
할머니는 질녀를 데리고 온 어머니께 역정을 내신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남의 자식을 데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식량이 부족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정치인의 가정에 언제 불행이 닥칠지 모르는데 사돈댁의 어린 소녀가 해를 당하기라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조금만 너그럽게 대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 때 아버지는 무엇을 하였을까? 어디에 있었을까?
어린 소녀였지만 송자누나는 할머니의 역정을 듣고 있는 어머니의 처지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애를 태웠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도 불안하여 무척이나 안절부절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송자 누나는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할머니에 대한 민망함 때문에 외평(평화 2구)에 있는 아는 사람 댁에서 한나절을 지내고 왔다.
이것이 또 문제가 된 것이다. 어디에서 누구를 만났는가?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할머니는 불안한 마음을 거침없이 토로했다. 당시의 상황이 어수선하니 그럴만도 하였다. 지금 이런 상황이 전개된다면 과연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의 공포가 엄습해 온다.
다시 어머니는 절골로 갔다. 송자 누나를 데리고 등에는 병덕이를 업고 또 피난 길을 떠난 것이다.
절골은 해남보다 훨씬 멀다. 더 배고프고 더 험한 길이었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비포장길을 가는데, 길옆에 게딱지만한 집에서 흰 연기를 내뿜으며 보리개떡 냄새를 풍겼다.
“이모, 우리 저 집에 가서 얻어먹고 가요.”
배는 고프고 다리는 아파 주저앉고 싶은데, 보리개떡 냄새가 코를 자극하니 어찌 참을 수 있었으랴!
밤이 되어 어느 민가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해남 송지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찌 그게 쉬운 일인가? 어떤 사람이 검문을 했다.
“어디서 왔오?”
“해남 연동에서 왔어요.”
“아니 해남 송지라고 써 있는데.”
이때는 정말로 피를 말리는 순간이었다. 잘못되면 뒷감당을 할 수 없으니 어쩔 것인가? 어머니의 지혜는 위험한 상황에서 번득였다.
“예, 연동에서 송지로 이사간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래요.”
‘휴----.’
송자 누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의 이야기는 끝난다.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 어려운 세상에 참으로 힘들게 사신 우리 어머니, ‘박필순’여사의 행적이기에 이렇게 적어본다.♣
1993년 12월 18일
큰아들 秉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