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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운봉-인월)
여행일 : ‘21. 10. 2(토)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운봉읍과 인월면 일원
여행코스 : 운봉읍→서림공원(0.2km)→북천마을(0.8km)→신기마을(1.1km)→비전마을(2km)→군화동(0.8km)→흥부골자연휴양림(2.9km)→월평마을(1.5km)→구인월교(0.2km)(거리 및 시간 : 9.9km, 실제는 10.23km을 2시간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2구간인 운봉-인월 구간을 걷는다. 4개 코스로 이루어진 남원권역의 두 번째 구간으로 운봉고원(해발 500m)의 너른 들녘과 마을길을 걸으며 즐기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조망이 자랑거리이다. 특히 걷는 도중 만나게 되는 비전마을은 2구간의 하이라이트, 판소리 동편제(東便制)의 창시자인 송홍록 선생과 국창(國唱) 박초월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 들머리는 운봉읍사무소 앞 사거리(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광주-대구고속도로 지리산 IC에서 내려와 국도 24호선을 타고 남원 방면으로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운봉읍’에 이르게 된다. 운봉읍행정복지센터 바로 직전의 사거리가 지리산둘레길 1, 2구간의 경계이다. 만일 승용차로 왔다면 서림공원 앞으로 가면 된다.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100m쯤 들어가면 나오는 서림공원 앞에 널따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 남원시 권역의 두 번째 구간으로 운봉읍 서천리와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9.9km 길이의 둘레길이다. ‘통영별로(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과 한양을 잇는 옛길)’와 람천의 둑길을 따라 걷게 되는데, 이때 좌우로 펼쳐지는 고리봉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과 고남산·수정봉 등 백두대간의 준봉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황산대첩비, 송흥록 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은 덤이라 하겠다.
▼ 지리산둘레길 2구간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은 읍사무소에서 인월면(引月面) 방향으로 첫 번째 사거리에 세워져 있다. 장승을 형상화한 이정표(인월 9.9㎞/ 주천 14.7㎞)도 이곳이 1, 2구간의 경계임을 알려준다.
▼ 첫 번째 만남은 ‘서림공원(西林公園)’이다. 운봉 읍민들의 휴식처이자 문화공간으로 당산(느티나무 숲)을 중심으로 운동장과 충혼탑, 그리고 식수대·모정·화장실 등의 편의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이 가운데 당산(堂山)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을 모시고 마을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문화적 가치(국가민속문화재 제20호)와 아름다운 경관(남원의 숨은 보석 10선)을 동시에 인정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서림공원에는 남녀 한 쌍의 ‘돌장승’이 있다. 장승은 민간 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 입구에 세워 경계를 표시하면서 잡귀를 물리치는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한다. 보통은 나무로 만들어 사용하는데 이 장승은 오랫동안 사용하기 위해 돌로 만들었다고 한다. 각각의 가슴에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男)과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女)을 음각했는데. 벙거지를 쓰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자유 분망한 표정이 매우 재미있다.
▼ 축구장과 테니스장 등의 체육시설도 서림공원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귀촌이 장려되는 추세이어선지 요즘은 저런 체육단지 하나쯤 갖지 않은 읍·면은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 됐다.
▼ 2구간의 스탬프보관함은 ‘서림교’ 앞에 있었다. 지리산둘레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스탬프보관함을 매 구간마다 하나씩만 세워놓았다는 점이다. 완주를 인증 받으려면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옆에는 2코스 안내판과 ‘벅수’도 세워놓았다. 장승의 다른 표현이 벅수인데, 우직하거나 바보스러움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단다. 그 우직스러움 덕분에 ‘지리산둘레길’의 이정목이 되기도 했다. ‘지리산둘레길’의 우직함과 묵묵함을 잇고자하는 마음에서란다. 세상은 촌각을 다투듯 바쁘고 정신없지만 지리산에 깃들어 보면 참 우직하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과 숲이 있다면서 말이다.
▼ 람천(濫川)의 둑길을 따라 걸으면서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 벚나무가 숲을 이루는 이 길은 ‘전북천리길’도 함께 쓴다. ‘달을 끌어당기는 마을을 향한 여정’이라는 부제를 달아선지 동일한 여정(운봉→인월)인데도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참고로 전북천리길은 전라북도가 열네 개 시군에 놓인 길 중에 빼어나게 아름답거나 옛 선인들의 발자취가 각별한 길만을 따로 모아 놓은 길이다.
▼ 엿새만 더 있으면 한로(寒露)이다.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날이니, 농부는 더 추워지기 전에 추수를 마쳐야 한다. 특히 운봉고원 들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모내기를 하는 곳이 아니겠는가. 그래서일까 들녘에는 추수를 마친 논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익숙한 풍경은 아니다. 바닥에서 말라가고 있어야 할 볏짚 대신에 하얀색 ‘곤포 사일리지(일명 공룡알)’만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2분 만에 ‘신기교(이정표 : 인월 9.0㎞/ 운봉 0.9㎞)’를 건넌다. 두 번째 다리이나 첫 번째 다리인 ‘협동교(인월 9.3㎞/ 운봉 0.6㎞)’는 건너지는 않고 스치듯이 지나쳤다. 참고로 협동교에서 시작된 북천마을은 이 다리를 끝으로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신기교를 건너면 신기마을이 시작된다.
▼ 다리 아래로는 ‘람천(濫川, ‘넘칠 람’자를 쓰는 걸 보면 옛날 속깨나 썩였던 모양이다)’이 흐른다. 지리산의 고리봉에서 발원하여 남원시 운봉읍·인월면·산내면을 지나 함안군 마천면에서 임천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람천은 중간에 소하천(주촌천·운봉천·준향천·풍천·만수천)을 보태 몸집을 불린 다음 임천으로 흡수되고, 이어서 남강과 낙동강을 거쳐 남해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이제 반대편 둑길, 그러니까 람천을 오른쪽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이곳은 늦게 심어선지 벚나무가 자잘하다. 그늘을 만들어주지 못해 오뉴월 삼복더위에는 힘들 수도 있겠다.
▼ 하지만 보여주는 경관이 빼어난데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오른편은 운봉고원의 젖줄인 ‘람천’이 흐르고, 그 너머로는 고리봉에서 출발한 지리산 서북능선이 고리봉을 거쳐 덕두산으로 헌걸차게 뻗어나간다.
▼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이번에는 풍요로움으로 넘치는 너른 들녘이 나타난다. 뒤로 보이는 고남산과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북풍의 바람막이가 되어주니 어찌 풍요롭지 않겠는가.
▼ 신기교를 건넌지 15분 화백나무(花柏, 난 측백나무인줄 알았다) 가로수가 멋을 부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사반교(인월 7.8㎞/ 운봉 2.1㎞)’가 다리를 건너란다. 이어서 탐방로는 오른쪽 둑길을 탄다. 참! 다리를 건너기 전, 왼편으로 가면 신기마을이 나온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아직도 탐방로는 운봉고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런 너른 들녘을 놓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가 지리산을 경계로 영토다툼을 치열하게 벌였다. 그래서 운봉 주변을 둘러싼 지리산 줄기엔 산성터가 여럿 남아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수원, 밀양과 함께 벼개량사업, 소 종자개량사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만에 동편제마을 방문자센터에 도착했다. 이곳 전촌마을과 람천 건너에 위치한 비전마을을 합쳐 사람들은 ‘동편제마을’ 즉 동편제의 태동지라 부른다. 판소리 중시조인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이 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 운봉은 국내 3대 악성 중 하나이자 거문고의 달인인 ‘옥보고’가 거문고를 크게 발전시킨 곳이기도 하다. 국악 전통유물 400점을 모은 ‘국악의 성지’가 이곳에 들어선 이유일 것이다.
▼ 브런치 하우스를 겸하고 있는 센터의 곁에는 ‘길 따라 소리 따라 동편제’라는 부제를 단 상설 무대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무대에는 추임새를 넣는 고수(鼓手)뿐이다. 그럼 판소리는 어디서 누가 부른다는 얘기일까? 참고로 판소리란 소리광대라고 하는 가수가 북재비라는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민족가요의 한 형식이다. ‘타령(打令)’, ‘광대소리’, ‘창조(唱調)’ 등 다양하게 불리는데,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도지방에서 태동과 발전을 했다. 그러니 당시 판소리명창들이 남도지방에서 배출되었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오늘날 판소리를 ‘남도창’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판소리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이르러 음조가 점차 지역적 특색을 띠게 되면서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등의 유파로 갈라지는데 이곳 운봉에서 태어난 송홍록이 주가 된 유파가 곧 ‘동편제’이다. 또 하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완성시킨 이는 아전출신인 신재효(1811~1884년)이다. 그가 정리한 ‘춘향가’, ‘심청가’, ‘횡부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의 판소리 여섯마당이 전해지고 있다.
▼ 다리(대첩교)를 건너면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사적 제104호)’다. 황산대첩은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다. 전투는 1380년 왜구가 오백척의 대 선단을 이끌고 진포(군산)에 침입하면서 시작된다. 이때 최무선이 만든 신무기 화포로 배를 불태우고 왜구를 무찌르니 이게 ‘진포대첩’이다. 여기서 살아남은 왜구들이 옥천을 거쳐 경상도 지역으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왜구와 합류하여 다시 약탈을 시작하면서 성주·함양을 약탈하고 북상하기 위해 인월에 주둔하게 된다. 이를 이성계 장군이 황산에서 무찌른 것이 황산대첩이다.
▼ 안으로 들어가면 세 개의 비각(碑閣)을 만날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이다.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섬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선조 10년(1577년)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왕명을 받아 고려사와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고증해 세웠다고 한다. 호조판서 김귀영이 글을 짓고, 중종의 사위 송인이 썼으며, 운봉 현감 박광옥이 비를 세웠다. 하지만 1944년 9월 패망을 직감한 일제가 비문을 폭파해버렸고, 현재의 빗돌은 1957년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운 것이다.
▼ 일제가 파괴해버린 비석을 모아놓은 곳이 ‘파비각(破碑閣)’이다. 글자도 인위적으로 훼손된 흔적이 역력하다는데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 맨 위의 비각에는 ‘황산대첩사적비(荒山大捷事蹟碑)’가 들어앉았다. 고종19년(1882)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를 1958년 중건한 것이란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건립 취지가 적혀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황산대첩은 변방의 무명 장수에 불과하던 이성계를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황산 싸움의 승리는 결국 그에게 ‘새로운 꿈, 새로운 세상 조선 건국’이라는 희망을 품게 한 발판이자 꿈을 이룬 요새로 작용했다.
▼ 밖으로 나오니 공연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격년제로 열린다는 황산대첩을 재연하는 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했으니 이를 위한 무대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배치된 악기는 ‘동편제 국악축제’로 적고 있었다. 국악의 고장 ‘운봉’을 대변하는 축제라 하겠다.
▼ 사적지를 빠져나오니 길가에 북이 하나 놓여있다. 곁에는 판소리에 한창인 남녀도 보인다. ‘동편제 마을’, 그 가운데서도 가왕 송홍록과 국창 박초월이 태어난 탯자리인 비전마을임을 알리는 조형물이다.
▼ 몇 걸음 더 걸으니 초가집이 보인다. 판소리 동편제의 창시자이며 가왕(哥王)으로 불리는 송흥록(宋興祿, 1801-1863)선생과 국창 박초월(朴初月, 1917-1983)의 생가이다. 이 마을에서 송흥록과 송만갑 선생이 출생하였고 명창 박초월 선생이 성장했다고 한다. 10여 가구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그 자리에 송홍록이 살던 당시의 초가를 복원(2000년)해 놓았다.
▼ 어린이를 위한 안내가 돋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딱딱한 어조의 문구로 가득 채워진 빗돌을 읽어볼 어린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를 대비해 송홍록에 대한 얘기를 만화로 꾸며놓은 것이다.
▼ 안으로 들어서서 맨 뒤쪽의 초가부터 둘러본다. 송흥록과 박초월이 살던 당시의 초가를 2000년에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누군가 뒤의 것이 ‘송흥록’,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게 ‘박초월’의 생가라던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마당에서는 판소리 공연이 한창이다. 고수의 장단에 맞춰 노래 삼매경인 송홍록 선생을 재현해 놓았는가 하면, 이에 발이라도 맞출세라 마침맞게 판소리 가락까지 울려 퍼진다. 덕분에 흥겨움에 어깨춤을 한참이나 들썩일 수 있었다. 이밖에도 판소리와 관련 된 듯한 조형물들을 여럿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비전마을은 황산대첩비와 전각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색다른 무엇인가라도 있을까 해서 마을로 들어가는데, 초입의 ‘말뚝박기 놀이’ 벽화가 시선을 붙든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우리 세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간혹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특별한 날 즐기고 있는 민속놀이인데 어찌 눈길을 끌지 않겠는가. 무너져 내리라며 날쌔게 날아 힘껏 올라타던 어린 시절의 치기...
▼ 생가를 빠져나오니 정자 하나가 쉬었다가라며 옷깃을 붙잡는다. ‘소리쉼터’. 이름부터 그럴 듯하니 일단은 들러보자. 그리고 떠나버린 애인에 대한 송흥록 선생의 애달픈 넋두리도 한번쯤 되새겨 보자. 만갑의 맹렬아 잘 가거라... 날 버리고 가려거든 정마저 가려무나, 몸은 가고 정만 남아 쓸쓸한 빈 방안에 애를 태우니 병 안될소냐.
▼ 아련한 판소리를 뒤로하고 둑길을 따라가면 황산교(이정표 : 인월 5.7㎞/ 운봉 4.1㎞)가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군화동 마을(이정표 : 인월 5.1㎞/ 운봉 4.8㎞)’에 이른다. 이 마을은 지난 1961년 대홍수 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의 가옥을 군인이 주둔하면서 건립하였다고 해서 군화마을로 이름 지어졌다. 마을 뒤로 보이는 산은 ‘황산’이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찔렀던 황산대첩의 장소이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의 장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지리산의 자연경관은 물론이고 이 지역의 문화·역사 유적을 함께 볼 수 있다.
▼ 군화마을 어귀의 쉼터도 길손을 유혹한다. 바쁘지 않으면 잠시 쉬었다가란다. 아니 잠시 후 고갯마루를 넘어야 하니 무거운 먹거리일랑 이곳에서 비워버리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탐방로는 도로가 나면서 지금은 농로로 역할을 바꾼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이어진다. 가을의 풍취를 물씬 풍기는 코스모스 꽃밭을 양쪽 옆구리에 차고 걷는 호사스런 구간이다.
▼ 람천을 따라 내려가는데 오른편 산자락에 ‘지리산 고사리학교’라는 현판이 보인다. 이곳 지리산 남원권역은 전국 최초로 고사리 재배가 시작된 지역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지금은 맛좋고 튼실한 고품질의 고사리를 생산하고 있단다. 그동안의 노하우를 저 학교에서 전해준다는 얘기일 것이다. 또한 한잎새라는 회사에서는 우수한 품종을 분양해주고 말이다.
▼ 군화동 쉼터에서 5분쯤 더 걸었을까 부처님을 머리에 인 모전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원명대선사’의 부도탑이라는데 나에게는 그저 생소한 이름일 따름이다. 나중에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김해 원명사(금불암)의 주지였다는데, 이곳 황산벌에서 사라져간 백제 군사들의 영혼을 제도하기 위해 그가 생전에 보아둔 자리였다나? 옆에는 ‘남무대각세존석가모니불’이라는 빗돌을 세웠다. 비문은 부처의 계보를 적은 것 같은데, 78대가 ‘원명’이니 그가 부처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얘기일까? 아니기를 빌어본다.
▼ 모전탑 옆에서 24번 국도를 만난 탐방로는 ‘화수교’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다 뒤돌아보면 좁디좁은 협곡이 눈에 들어온다. 운봉고원의 너른 들녘을 흠뻑 적셔주던 ‘람천’은 저 좁은 협곡(황산과 덕두산 사이)을 지나 인월면으로 흘러든다. 그리고는 아영면과 인월면을 유역으로 하는 풍천을 보태 덩치를 부풀린다.
▼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이제 인월면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대덕리조트(‘CNKC리조트’라고 적혀 있었다)’의 앞마당을 지난다. 본관으로도 모자라 별관까지 거느린 대규모 리조트이나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다.
▼ 리조트를 지나면 산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차량통행이 가능한 임도라서 널찍한데다 경사까지도 만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평지는 아니니 너무 방심하지는 말자. 지그재그로 계속되는 임도를 따라 오르다 보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수도 있으니 말이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옥계저수지(玉溪湖)가 얼굴을 내민다.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쌓아올린 저수지로 둑의 높이가 무려 42m나 된단다. 길이도 261m에 이른다니 심심산골에 들어있는 저수지치고는 어마어마한 규모라 하겠다.
▼ 지리산둘레길 2구간은 둑길과 산길이 절반씩이라고 보면 된다. 절반은 람천의 둑길을 들판을 바라보며 걸었다면 남은 절반은 이렇게 숲길을 걷는다. 덕분에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풍경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용솟음치는 젊음을 한껏 불태우고 난 입새들이 스러져가는 모습에서 내 인생을 반추해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남은 생을 보다 알차게 보내보자 다짐해본다.
▼ 고개를 넘다가 안면이 있는 이들로부터 귀한 초대를 받았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주 트레킹을, 그것도 20킬로나 되는 구간까지 완주를 하시는 분들이다. 서로 술잔을 나누다가 눈에 익은 나까지 초대를 해주신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잠시 후 도착한 다른 일행까지 합석해 술잔을 나누게 되었고, 구수한 분위기에 젖어 참으로 오랜만에 불콰하게 취해볼 수 있었다.
▼ 뒤따라오던 총무님이 열매 하나를 내밀며 식용 여부를 묻는다. 배가 고파 몇 개를 따먹었다는 것이다. 정체부터 밝히면 ‘산딸나무’다. 과육이 부드럽고 달콤한 열매는 물론 식용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그녀를 골려주고 싶은 난 식용이 불가능한 열매로 몰아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끔쩍하지 않는다. 그만큼 내 입이 헤퍼졌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 고갯마루를 넘어서면서 만난 모자가 너무 보기 좋아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했을 어린 아들과 함께 걸으며 자연을 벗 삼는 풍경이 어디 그리 흔한 풍경이겠는가.
▼ 화수교를 건넌지 40분 만에 ‘흥부골 자연휴양림(이정표 : 인월 2.2㎞/ 운봉 7.7㎞)’에 내려선다. 지리산 서북능선을 마무리 짓는 덕두봉(1,150m)의 산자락에 들어앉은 시설로, 건강·오락·휴식을 위해 지난 2002년에 개장했단다. ‘흥부골’이란 이름은 인근의 ‘흥부마을(아영면 성리)’에서 따왔지 않았나 싶다. 남부지역 최대의 잣나무숲과 바래봉 철쭉군락지까지 연결되는 등산로가 자랑거리라는데, 다녀간 이들의 평은 썩 좋지 않은 듯...
▼ 문학비도 만날 수 있었다. 마천석에 수필가 김한호의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이란 수필 일부를 적었다. 비에 새겨진 글은 그가 2008년 광주문인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할 때 제1회 광주문학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광양에서 태어난 그가 이곳 흥부골과는 어떤 인연을 맺고 있을까?
▼ 관리사무소 건물은 카페(놀부)도 함께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곳도 드라마의 한 장면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자연휴양림이 tvN에서 이달 23일에 방영 예정인 드라마 ‘지리산’의 촬영지라니 말이다. 지리산 국립공원 최고의 레인저 서이강(전지현 분)과 말 못 할 비밀을 가진 신입 레인저 강현조(주지훈 분)가 산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사고를 파헤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드라마라니 TV화면에서 확인해 볼 일이다.
▼ 이제 종점으로 향하는 마지막 구간이다. 자연휴양림관리사무소를 지나 도로를 따라 100m쯤 내려가면 표지판이 오른쪽 숲길(이정표 : 인월 2.1㎞/ 운봉 7.8㎞)로 안내한다. 숲길 구간은 개울을 건너기도 하는데, 그래선지 물이 불어났을 때는 되돌아가라는 안내판을 입구에 세워놓았다.
▼ 숲길로 들어서자 ‘무인 쉼터’가 갈 길 바쁜 나그네의 옷깃을 붙잡는다. 술과 음료가 들어있는 냉장고와 테이블 서너 개가 놓여있는 간이주막이라고 보면 되겠다. 커피포트를 비치해 컵라면도 끓여먹을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주인은 없다. 알아서 챙겨 먹은 후 이에 해당하는 금액을 돈통에 집어넣으면 된다.
▼ 개울을 건넌 탐방로는 이제 울창한 숲속으로 파고든다. 2구간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숲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조금 전 고개를 넘어올 때는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랐으니 말이다.
▼ 그렇게 5분쯤 내려갔을까 아까 헤어졌던 도로(이정표 : 인월 1.7㎞/ 운봉 8.2㎞)가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도로를 따르지 않고 그냥 횡단해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 이후로도 숲길은 한참이나 계속된다. 울창한 숲과 고사리밭 외에는 특별히 눈에 담을 볼거리는 없지만, 이 구간에서는 심심찮게 시야가 열리면서 인월면 소재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 그렇게 12분 정도를 더 내려서자 드디어 ‘월평마을’이다. ‘달오름 마을’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와 싸울 때 주변이 너무 어두워 적을 분간할 수 없자, 달이 떠오르도록 하늘에 기도를 드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한자로는 ‘인월(引月)’, 우리말로 풀이하면 ‘달오름 마을’이 된다. 인월리의 옛 인월마을과 원평마을이 합쳐져 ‘달오름 마을’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는데, 지명의 유래처럼 동쪽을 향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아 달의 기운이 온 마을에 가득해진다고 한다.
▼ 마을의 담벼락은 온통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블로큰 잉글리시’를 구사하고 있는 외국인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지리산 산나물밥을 홍보하는 듯한 그림도 눈길을 끄는데, ‘산을 밥에, 몸에 담다’라는 멘트를 내건 식당도 실제로 있었다. 이곳 달오름마을에서 흥부전과 달오름을 주제로 하는 농촌전통체험 마을을 운영한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지리산 둘레길을 위한 숙소 역할도 톡톡히 수행하면서 말이다.
▼ 달오름마을을 빠져나오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구인월교가 나타나면서 지리산둘레길 2구간은 끝을 맺는다. 2구간을 걷는 데는 2시간 20분이 걸렸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0.23km를 찍고 있다. 전체 구간의 절반 정도가 숲길이었던 점을 감한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만큼 걷기가 편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참! 산악회에서는 구간 거리가 짧은 2구간에다 너무 긴 3구간의 일부(중군마을까지)를 덧붙였다.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소개는 다음 번 3구간에서 한꺼번에 하겠다.
▼ 다리 입구에 이르자 3구간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구간의 끝은 곧 다음 구간의 시작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도 이와 같을 것이다. 모든 결말이 결코 끝이 아니니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얘기이다. 또 다시 시작될 일들을 철저히 준비한다면 보다 나은 미래가 펼쳐질 게 아니겠는가.
▼ 다리 근처에는 ‘영월정(迎月亭)’이 들어서, 마을 주민들은 물론이고 둘레길을 걷는 트레커들의 쉼터가 되어준다. ‘람천’에 기대어 지어진 정자는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섬멸할 때 달빛의 도움을 크게 받았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알려진다. 1960년 터만 남아있던 곳에 지역주민들이 힘을 모아 중건했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나 돈을 덜 들였는지 예스런 풍모는 조금 덜하다. 참! 냇가에는 영월대(迎月臺)라 각서 된 바위도 있었는데 사진이 별로여서 게제는 하지 않았다. 이 바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인월8경에도 꼽힌다지만 어쩌겠는가.
▼ 이왕에 왔으니 어찌 ‘인월장’을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리를 건너 200m쯤 더 걸어 도착한 ‘전통시장’은 화개장과 더불어 영호남 소통의 장터다. 예로부터 인월은 함양과 운봉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남해에서 올라온 소금과 해산물 그리고 지리산에서 나온 산나물과 콩 등이 거래되는 장소였다. 인월과 하동을 거점으로 산물을 나르던 염두고도(鹽豆古道)라는 옛길이 있어 인월에서 출발한 콩 지게꾼들과 하동에서 출발한 소금 지게꾼들이 벽소령에서 지게를 바꿔지고 내려가 인월장과 화개장에 풀었다고 한다.
▼ 투가리처럼 우악스러운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가 섞여 오간다는 장날 풍경은 엿볼 수 없었다. 장날(매 3일과 8일)을 못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을 처마에 붙어있는 옛 풍경사진으로 달래보기로 했다. 솥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전대를 두른 생선 장사는 ‘아침에 올라온 거라며 겁나게 싱싱해요’를 외친다. 시쳇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시장은 남녀노소로도 모자라 강아지까지 꼬리를 친다. 반대편 처마도 비워놓지 않았다. 권선징악을 대변하는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민화로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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