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 인물 1
김 관(金琯. 자-경요, 시호-문충. 김해인)
공은 임란공신(壬亂功臣)으로 율곡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에 많은 전공을 세우고 호성하여 선무원종공신록에 오르고 금성군에 책봉되었으며,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광해조 때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귀향가게 되는 이항복과 禍를 같이 당하였다. 인조대에 영의정으로 증직되고, 시호를 文忠으로 내렸다.
김가네(金佳奈. 자-호신. 김해인)
공은 부사 瑾의 후손이고 참봉 부윤의 아들이다.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지략이 뛰어났다. 임진란 때 아들 득추와 함께 충무공의 막하에 나아가 노량해전에서 많은 적을 목 베었다.이 공으로 군수 벼슬을 받았다.
김광순(金光珣. 1811-1873, 자-사윤, 호-夢灘. 현경면 오류리 어은동. 김해인)
어은동 마을의 입향조로 볼 수 있는 사람은 김광순이다. 공은 ‘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이 높았으며 천문지리에 능통할 뿐 아니라 인물이 훤출 했다’ 고 김해김씨 족보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장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어 주변 사람들이 어려워 하였으며 세금을 걷는 등의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웃 마을인 오류동에서 태어나 1800년대 중반에 검무산 기슭인 이 마을로 분가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원래 이 마을은 한씨들 촌이었다. 입향조가 한씨에게 장가들면서 김씨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김동현(金東炫. 1936- .운남면 하묘리. 김해인)
공은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MBC 문화방송 무안 함평 주재기자와 호남매일신문 기자를 역임했다. 기자로 있을 당시 무안군민들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항일독립유공자현창회를 발기하고 직접 총무를 맡아 실질적 역할을 했다. 이어 무안군 의회에 진출하여 무안군의회의장을 역임했다.
김두천(金斗千. 자-두일. 호-인헌. 해제면 임수리 수포. 김해인)
공은 김해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효성이 지극하여 유일(遺逸:숨어있는 선비)로 선공감역(繕工監役)의 벼슬을 재수 받았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초상시마다 묘막을 짓고 시묘살이로 6년간을 묘 옆에서 기거하면서도 한 번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효성이 다하지 못했는가 하며 자신을 되돌아 봤다. 공은 늘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 하며 눈물 지으니 마을 주민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아 이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1920년에 수포마을 앞에 효자각을 짓게 되었다.
김명철(金命哲. 청계면 월선리 월선동. 김해인)
청계면 월선리 월선동 마을의 입향조는 400여년 전에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에 터를 잡은 김해김씨 金命哲이다.
김상경(호-수진제. 1544-?, 운남면 하묘리 둔전. 김해인)
공은 1544년에 탁영 일손의 현손이요, 군자감정의 벼슬을 한 치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판단이 빨랐으며 어른스럽게 영특하였다. 부모를 정성으로 섬기고 선영의 제사를 예로써 받들었다. 일찍이 하서 김인후에게서 경학을 넓히고 도학을 탐구하여 학문에 조예가 높고 깊어 스승 김인후가 자랑스러운 제자로 여겼다. 공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토는 초토화되고 임금은 의주로 몽진 길에 오르고 모든 백성은 아비규환의 아수라장 속에 허덕이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공은 ‘이를 앉아서만 볼 수 있느냐’고 하면서 분노하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 치인이 의병을 일으키니 공도 아버지를 따라 낙안 전투에 참여하였다. 의병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적을 공격하던 중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순절하였다는 비보를 들었다. 그러자 백병전으로 적진 속을 좌충우돌하면서 아버지를 부르며 적을 무찌르는 용맹으로 산더미 같은 시체 속에서 아버지를 찾아 몸소 짊어지고 적진을 빠져 고향에 돌아왔다. 공은 “나는 의기롭게 의병을 모아 보국충정의 기치를 높이 들고 왜적을 향해 돌진하였다. 왜적과 격전을 벌이던 중 아버지의 생명을 적에게 빼앗기고 시신만 모셔왔으니 나는 불효막심한 자식이로다. 내 원수 왜놈들을 전멸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집안 식구를 볼 면목이 없도다.” 하면서 슬피 울다가 쓰러졌다. 온 집안 사람들이 급히 달려들어 전신을 주무르고 물을 떠 넣는 등의 응급치료를 한지 10여분만에 겨우 멈추었던 숨을 내뿜으며 정신을 차렸다 한다. 공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묘 앞에 꿇어 앉아 밤이 지새는 줄 모르니 집안 어른들이 “전쟁터에서 시달리고 또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혼자 짊어지고 수백 리 길을 달려온 몸이라 허약할 대로 허약해 졌으니 그만 울음을 그치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수 없이 권했다. 그러나 공은 끝내 움직이지 않고 “불효불충한 사람이 어떻게 집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하니 모두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묘막을 지어 주었다. 3년의 시묘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공은 더욱 학문에 열중하고 후진양성에 몰두하면서 세상에 나가 이름 내는 것을 꺼려하고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다가 세상을 떴다. 이에 향리의 선비들이 입을 모아 김상경은 순수하고 덕성스러운 자질과 총명하고 영특한 재주로 충효정신이 고매하고 도덕과 학문이 저렇듯 우아하면서도 평소에 쌓은 학문을 펴보지도 못하고 향리에 묻혀 나라의 큰 부름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뜨니 슬픈 일이로다 하였다. 그가 죽은 지 2년 후에 그의 효행을 들어 나라에서 포상해 줄 것을 여러 번 주청하니 나라에서는 김상경의 충효정신을 가상히 여기고 승정원 우부승지에 추서하였다. 공은 김상경은 운남면 하묘리 둔전마을 김해김씨 입향조로 둔전마을에서만 70여 세대의 후손들이 그의 유덕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 고장 유림들이 뜻을 모아 충효단을 건립하고 공을 그 곳에 모셔 그 높은 덕을 기리고 있다.
김상술(金相述. 호-춘강. 1922-1960. 해제면 임수리 수포. 김해인)
공은 일제강점기 어려운 시절에 임수리에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어려운 농촌시절을 직접 겪어서 누구보다도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 농촌이 발전해야 일제의 치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앞장섰다. 광복 후 공직에 투신하여 여러 기관에서 근무하였으며 주민들이 면장에 취임하길 권했으나 주민투표를 고집하여 사양했다. 1952년 지방자치 선거시에 초대 면의원에 당선되어 주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가뭄이 극심한 때는 구황작물인 쑥을 심어 주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도 했다. 또한 땅 한 평을 늘리는 것이 애국의 길이라 생각하고 광천 앞바다 막기 사업을 계획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냈다. 공은 제방공사대표를 맡아 임치방조제를 완공하여 주민들에게 소득창출의 기회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꿈을 펼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달리했다. 2004년 3월에 해제면 서부지역 주민들이 공의 공적비를 세웠다.
김서보(金瑞甫. 1584 - 1642. 망운면 송현리 두모. 김해인)
공은 망운면 두모마을 입향조이다. 이곳에서 터를 닦은 연대는 경상도 김해에서 살기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온 16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에 주변의 풍광과 풍수적인 지형을 봤을 때 좋은 터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석구(金錫龜. 호-玄圃, 1653-1718. 현경면 현화리 내현화. 김해인)
내현화 마을은 김해김씨와 전주최씨가 각각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김해김씨 최초 입향조는 병사 수연의 후손인 김석구다. 현포공은 조선시대의 대학자 미수 허목의 제자였으며 미수가 직접 그의 호를 지어줄 정도로 스승의 사랑을 받았다. 족보를 보면 현포공은 젊었을 때 주유천하를 했으며 중국에 가 공자묘에 참배를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표적인 유학자인 퇴계 이황의 서원인 도산서원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마을유래지에는 ‘그의 조부 때 나주 노안면 금안동에서 무안읍 성동리로 이주하였다가 1683년경 이 마을로 옮겨 정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을 때는 감방산 아래 서당터에서 바라보고 잡은 곳이다. 공이 서당터에서 이곳을 보니 푸르스름한 불빛이 보여 ‘배우고 익히며 먹고 살 수는 있겠구나’ 하고 여겨 정착하였다고 한다. 공은 마을에 현포정사를 짓고 후학들을 교육하며 여생을 보냈다. 마을에 있는 현포정사는 현포공이 1707년에 세운 건물로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후 1964년에 초가집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사당은 입향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1837년에 건립하였다. 정면1칸 측면 1칸이며 내부에는 위패 2기가 모셔져 있다. 그 외에 김석구유허비가 있다. 공의 행적과 뜻을 기리기 위하여 일제강점기 때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전면에는 ‘조선국현포선생김공유허비’라 명문되어 있다.
김성(초명-귀현, 자-자형, 호-둔암. 1652-1704. 현경면 용정리 용정. 김해인)
용정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성이다. 공은 남원에서 함평을 거쳐 이 마을에 들어왔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용정 마을 입향조로 김해김씨 가문의 김국태(호-陽圃. 절충장군)와 제주양씨 가문의 양세가(호-灘臾. 통정대부)로 기록되어 있다. 김국태는 남원에서, 양세가는 화순 월곡리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왔다. 현재 용정 마을에는 김해김씨 들이 일가를 이루고 있으나 제주 양씨는 두 가구만 있고 용정3리인 월두리에 많이 살고 있다.
김성현(金星礥. 1674-1732. 자-자장, 호-해은당. 현경면 오류리 오류동. 김해인)
오류동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 김씨 김성현이다. 공은 나주 시랑촌에서 세거하다가 1700년대 초에 이곳 현경면 오류리로 이주했다. 공은 늘 성정을 수양하고 명리를 멀리 하였으며 후손들의 교육에 힘썼다. 그의 제각이 곡지 마을 장잣등에 있다.
김세덕(金世德. 자-사원. 운남면 내리 월악. 김해인)
월악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김해김씨 김세덕이다. 공은 1600년대 말 영암군 시종면에서 살기 좋은 곳을 찾아 고랑물로 들어 와 터를 잡았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했다.
김세상(金世相. 자-성보, 호-퇴휴재. 1561-1592. 청계면 월선리 중화. 김해인)
조선중기 문신으로 의병활동을 했다. 벼슬은 호조좌랑을 지냈다. 李珥의 양병설을 지지하다가 그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청계면 월선리로 낙향하여 장정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을 도와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진주전투에서 김천일이 죽자, 이순신(李舜臣: 1545∼1598) 군대의 우익장으로서 전투에 공을 세우다가 당포전투에서 순국하였다. 후에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청계면 월선리 중화마을에 그를 배향하는 삼강문이 있다.
김시지(자-광선, 호-송암. 1715-1769. 현경면 용정리 월두. 김해인)
월두마을 김해김씨 입향조는 김완장군의 후손인 김시지이다. 김완은 임진왜란 때 용맹이 알려져 전라병사 이복남 밑에서 활약했으며, 1597년(선조 30)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방어사 고언백의 밑에 들어갔다. 이듬해 전라도병마절도사 이광악을 따라 남원에 갔을 때, 아버지를 탄핵하여 죽게 한 인물이 권율의 비장으로 와서 병력을 점검하므로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624년(인조 2) 창성방어사로 있을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원수 장만의 선봉장으로 안현에서 반군을 격파했다. 이 공으로 진무공신 3등과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도 부총관·전라우수사를 거쳐 훈련원도정·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공의 후손인 김시지가 세상의 번거로움을 피해 월두 마을로 들어와 살면서 김해김씨 사군파 입향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