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림(崔榮林ㆍ1916-1985)
우리나라 1세대 화가토속적 화법의 소유자
6,25 이전에는 사실적 그림을 그렸고
1950년대 작품경향은흑색시대로 표현 되는데 실향작가로서의
인간적 고뇌를 굵고 진한색 면의 강렬한 추상표현주의로 드러내었다
60년대 이후에는 황색시대로 변모
실화 고대소설 민담 에로티시즘을 소재로 한토속적 문학적 그림으로 바뀌었다

최영림(1916~1985)은평양 출생으로, 회화와 판화 양쪽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작가이다.
그는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미술반에서 활동하였으며 일본 판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했다. 1938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판화가 무나카타 시코에게 판화를 배웠고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 다녔으며, 해방 이후에는 북한에서 황유엽(1916~2010), 박수근(1914~1965)등과 함께 활동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남겨둔 채 혼자 월남하여 제주도나 마산 등을 전전하였고 1955년부터는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하였으며 1957년에는 창작미술협회, 1967년에는 구상전을 창립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번째는 1950년대의 '흑색 시대', 두번째는 1960년대 초반까지의 '황토색 추상 시대', 세번째는 1960년대 중반부터 작가가 사망하는 1985년까지의 '황토색 설화 시대'이다.





최영림의 트레이드 마크는 단연 나부(裸婦)이다.
언뜻 관능미 넘쳐보이는 이 나부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모습으로 화면을 가득 메운다.

도달하기 힘든 이상향의 여인이라고 할까.

벌거벗은 황토색의 여체. 풍만한 가슴과 기이하게 큰 얼굴.
망설임없는 왜곡과 과장. 설화로 남은 실향의 아픔....

최영림은 1950년 이후 30여년간 한국화단을 빛낸 전통적 질감과 색채의 작가였다.



나부와 망향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토속적이고 한국적이라는 말로 그의 예술세계를 압축해도 타당할까.
나부가 단순한 여체에 그치지 않는다면 작품에서 그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최영림과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삶의 궤적을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평양 출신으로 동갑내기 이중섭과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최영림은 한국전쟁 때 처자를 북에 두고 단신 월남했다.
이 사건은 평생 그의 삶을 지배했고, 이는 화면에 직ㆍ간접적으로 형상화됐다.

작품명:여인(女人)의 일지(日志)
1959년(제 8회 국전 문교부장관상 수상작) 캔버스에 유채105×145cm
국립현대미술관(1987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기증)
이 작품 '여인(女人)의 일지(日志)'는 그의 작품세계 중에서 '흑색 시대'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1959년 제 8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최영림의 흑색 시대 작품들의 특징은 '흑색(黑色)'이라는 명제처럼 주로 흑색조의 어두운 색채를 주로 사용하여 매우 암울한 느낌을 준다는 것인데,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절대비극과 이로 인해 가족들을 모두 남겨두고 홀로 월남해야 했던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기원한 것이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구상적인 경향을 보이지만, 1950년대 말부터는 형상들을 실루엣만으로 처리하는 등 점차 추상화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동시대에 유행했던 추상미술사조 앵포르멜의 영향이라고 볼 수 도 있지만 그가 유화와 병행해서 작업했던 목판화의 음각기법에서도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해변, 1956년, 제 5회 국전 출품작, 캔버스에 유채, 90×116.7cm, 삼성미술관 리움
아직 구상적인 경향을 보이는 최영림의 흑색시대 작품이다.
1950년대에 그린 초기작들은 <흑색지대>로 불린다.
< 검은 태양 >처럼 거칠고 굵은 검은 선과 색조의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한국전쟁 때 경남 마산에 정착한 그는 어둡고 탁한 화면으로 빠져들었다.
전쟁의 비극과 이산의 고통을
추상과 반추상의 세계로 넘나들며 견뎌내고 있었던 셈이다.

거미, 1959년, 캔버스에 유채, 91×116.5cm, 개인 소장
흑색시대의 후기 작품으로, 사물(거미)을 거의 흑색의 실루엣만으로 처리하여 마치 목판화의 표현기법을 연상시키고 있다.
절망의 늪에서 헤매던 그에게 재혼은 색조와 형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59년에 이화여대 출신의 재원과 가정을 꾸린 최영림은
설화성 강한 황토색 작품을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고운 황토가루나 모래를 접착제로 바른 뒤 물감을 칠한 것도 이때부터다.
특히 재료의 실험은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이었다.
국내 최초로 모래를 캔버스에 도입하는가 하면
고가의 황토 흙벽을 곱게 빻아 밑그림으로 깔았다.










모시천, 도마, 신문지, 태지 등 갖가지 재료에 자신의 영감을 풀어놓기도 했다.
작품 속 소재는 < 심청전 >이나 < 장화홍련전 >같은 고전에서 주로 차용했다.


최영림「들판위의 여인」
실험과 모색기를 지난 그의 캔버스는 이른바 <최영림식 나부>로 굳어졌다.
현실 저 너머의 여인상을 암유적 표현으로 묘사함으로써 독특한 조형언어를 창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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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림화백은 지극히 착하고 순수하며 진실된 인간성의 소유자였고
소박하며 서민적인 감각과 민중적인 취향의 화가였다.
그러므로 그의 예술도 서민적이고 민중적인 서정,선량한 한국적 해학으로 어우러져 있다.
소년시절에 들었던 전설속의 인간과 풀,바위,나무,흙,호랑이등의 자연이 하나의 화폭에서 공존하고 있다.
물감과 고운 황토를 섞어 화석의 표면같은 마띠에르를 나타내는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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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윤범모씨는 <그의 나부는 단순히 욕망의 대상이라기보다 모성본능 혹은 망향정신이 스며 있다>고 말한다.
전쟁, 실향민, 이산가족, 평화희구를 최영림의 작품세계를 파악하는 키워드로 본 윤범모의 견해는 꽤 설득력있게 들린다.
최영림이 사회적 안정을 얻은 후 화면이 밝아지고, 원초적 여성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근원적으로는 실향민의 메시지를 도식화한 동어반복이었다는 것. 상처없이 자유로운 여체는 청정무구한 세계의 상징으로, 최영림은 못다 이룬 소망을 화면에서 성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