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박물관 자원봉사단 원문보기 글쓴이: 장회숙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선교사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이 내한한 것은 1884년의 일이었다. 명성왕후와 인연을 맺게 된 알렌은 고종의 후원으로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으로 곧 개명)을 설립하였다.
의학교육은 1893년 내한한 에비슨에 의해 크게 성장하였고, 1900년 미국의 세브란스가 기부한 기금으로 서울역 앞에 새 병원을 지으면서 이름을 '세브란스병원'으로 하였다. 이후 일제 지배의 어려운 상황 하에서도 한국인이 중심이 된 의학 분야의 연구와 교육을 선도하는 한편 간호학 및 치과학 분야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알렌 선교사는 중국 해안가에서 정착하여 의료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해안가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곳도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 알렌 선교사는 8개월간 상해와 남경일대를 헤매고 다니다가 , 조선이 문을 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조선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바로 미국 선교부에 편지를 썼다. 조선에 가기를 원한다는 편지 였다. 그가 1884년 6월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그해 7월 22일 선교본부는 해저전신을 통해 입국을 허락했고 그는 1884년 9월 20일 드디어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다. 알렌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는 직분을 가지고 조선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공의보다는 왕실의 시의가 되면 더 좋은 선교의 기회가 올 것을 알고, 고관들과 친분을 쌓아 가며 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조선 땅에 온지 2개월이 넘은 12월 어느날, 조선에 큰 어지러운 사건을 만나게 된다. 김옥균을 비롯해서 개화파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수구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이 3일 천하 사건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갑신정변이다. 이 사건으로 민영익은 자객의 칼에 맞아, 목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청나라 외교사절이 되었었고, 23살의 나이로 전권대사가 되어 미국을 거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인도 싱가폴, 홍콩을 둘러보고 온 야망에 찬 고관 민영익, 그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과도한 출혈 끝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은 전전긍긍 손을 쓰고 있었으나, 출혈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다.
알렌이 보기에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출혈이 너무 심했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알렌은 의료기기를 다루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다. 그 결과 민영익은 소생하게 되었고, 민영익을 살해 모함한 개화파는 진압되었다 .
이 사건으로 알렌 선교사는 조정에 신임을 받게 되었고, 알렌은 왕실의 시의가 되었고 조선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 선교사에게 감사하여 십만냥을 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병원을 마련하였는데 이 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이 되었다. 그 후 이병원은 제중원이라고 개명하였고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
< 알렌이 세운 최초의 병원 광혜원 >
알렌 (Horace N.Allen,安 運)은 미국 북장로회 외지선교부의 의료선교사로서의 1883년 중국에 도착하여 상하이에 남경 등지를 왕래하면서 선교에 종사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돌료선교사인 헨델슨으로부 터 한국에 가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타진을 받았다. 헨델슨은 한국 정부의 외교관으로 있는 몰렌돌르프(Mollendorf,)와 가까운 사이여서 한국에 관한 사정을 잘알고 있었다. 조심성이 많은 알렌은 그뜻에 응 락하면서도 확답을 아니하고 한국 제물포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 핫스 (Joseph Hass)에게 의사가 필요한지의 여부를 문의하였다. 그후 뜻을 정한 알렌은 1884년 6월 8일 선교본부를 향해 한국을 위한 선교사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7월 22일 선교회부터 허락을 받 았다.
때마침 알렌은 미국을 시찰하고 귀국하는 민영익일행을 만나게 되어, 알렌은 그들을 통하여 한국의 사정을 더 잘알게 되었으며 한국선교를 위한 결심을 완전히 굳혔다. 알렌의 한국행을 위해 많이 애쓴 사람은 몰렌돌프이다. 몰렌돌프는 한국정부에 알렌을 소개하였고 그 이후에도 알렌의 선교 활동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알렌은 1884 년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 상륙하였다. 그는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 는 신분으로 일하게되었고 영국, 중국, 일본 영사관의 공의도 겸하게 되었다. 그는 몰렌돌프의 호의에 보답하려는 뜻에서 제물포 세관의촉탁의사 직도 겸임하였다 알렌은 의사의 일만해도 바쁜 시간이었지만 한국어의 학습을 위해 열심이었으며 매일 기도와 예배드리는 일을 규 칙적으로 시행하여 신앙 생활에 아주 충실하였다. (L. George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P.90) 이와같이 알렌은 선교가 아직 정식으로 허락되지 않은 한국에 와서 선교사업을의 료사업부터 발족케 하였으며, 그는 한국에 주재하는 최초의 선교사로서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알렌이 10월 1일 미국 선교회 본부에 발송한 보고문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가 이곳에 온지 2주간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로서의 공식 활동이 허락되지 아니하여 공사관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불원 장래에 선교의문이 열릴 것이라 믿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 습니다] (H.A.Rhodos, Letters form Korea, 1884,The Korea Mission Field No,4.April 1935, P.78)
알렌은 무엇을 하던지 복음전도의 본신사명을 결코 잊지 아니하였다.
그는 먼저 자신의 한국어 교사인 이하영에게 비밀히 전도하였다. (Allen D. Cllark, 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P 40) 어느사이에 알렌이 기독교 선교사라는 소문이 고종의 귀에 들어갔다. 고종은 푸우트 미국공사를 불러 이의 진부를 타진하였다. 푸우트 공사는 [알렌은 공사관 소속의 틀림없는 의사]라고 답변했다는 이야기 이다. (Allen Papers, Allen`s Letter to F.F.Ellinwood, Seoul Oc-t 8. 1884)
알렌 의사는 환경과 배경이 좋았던 것이 그의 사업 진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정부로부터 신임받고 있는 몰렌돌프가 그의후견인이었고 그의 본국인 미국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한국에 침략 야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한국에 위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나가는 부동항을 얻으려고혈안이었으며 영국도 세계제패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광분하고 있었다. 다만 미국의 극동정책은 필리핀을 지키기 위하여 아시아 각국과 우호를 지키면서, 그것만으로 만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고로 한국인이 가진 미국공사나 관리에 대한 신임도는 상당히높았다. 알렌은 의료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복음전달의 기회를 포착하고자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선교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일련의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이 곧 유명한 갑신정변이다.
알렌의 선교사업 전개를 위하여 그의 위치를 유리하게 이끈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것은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을 말한다. 개화파의 주요인물인 박영효, 김옥균,서광봄,홍영식 등은 신흥국가 일본의 새 문물 을 도입하여 고루한 종래의 제도를 고쳐 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혁신적 기운으로 꽉차 있었다. 그러나 그들앞에는 보수세력이 도살이고 있어 혁신을 방해함으로 일이 진척되지 아니하였다. 그런고로 이를 일거 에 제거하여 성사를 기하고자 일으킨 것이 갑신정변 쿠데타이었다.
거사는 우정국 낙성식의 축하연을 이용하여 요로 대관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자객을 통해 대상을 살해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날밤 연회가 무르익어갈 무렵 [불이야]하는 소리에 장내가 수라장이 되었다. 민비의 조 카인 보수 세력의 거두 민영익은 몸에 7군데나 칼을 맞고 쓸어졌다. 그는 동맥이 끊기는 중상을 입어 출혈이 심하여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장안에서 유명하다는 한의들을 14명이나 불려들여 출혈을 막으려시
도하였으나 효력을 보지못하였다. 몰렌돌프는 민영익을 자기 공관으로 옮긴다면 알렌을 불러 응급수술을
가하게 하였다. 알렌은 밤을 새가며 수술을 하여 바늘질한 상처만도 27 처의 중상이었으나 일단 출혈을 막는데 성공하였다. 알렌은 계속하여 3 개월동안을 민영익의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정성을 다해 치료하여 그 의 생명을 구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갑신정변 직후 시국은 너무나 불안하여 신변의 위험을 느낀 외국인들은 모두가 인천으로 피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알렌은 환자 남아 있으면서 [나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며또 갈 수 있다하여도 가지않겠다]라는 비장한 말과 함께 사생결단하고 치료에 임하였던 것이다. (The ForeignMissionaryforMarch,1885,P429) 만약 그의 의술이 실패하게 된다면 조정의 원망과 불평이 일시에 닥쳐 올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민영익은 빨리 회복되었다. 이에 대한 보상은 과연 놀라웠다. 민영익은 알렌 의사에게 일금 10 만량을 감사의 예물로 전달하였으며, 서양 의술의 탁월함은 한국인들사이에서 완전히 인정받게되는 행운을 만났다. 궁중의 신임은 한결같이알 렌에게 집중되었으며 마침내 그는 국왕의 시의가 되는 영예를 차지 하였다. 거기에다가 고종 국왕이 알렌에게 태극일등훈장을 수여하였음은 더 큰 보상이었다.(Charles A.Sauer,Whithin the Gate, P97)
알렌 의사의 가슴속에는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달하려는 생각으로 꽉차 있었다. 그는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국왕에게 병원 설립의 허가를 요청하여 가납되었다. 한국 정부는 한성 북쪽에 있는 홍영식의 저택을 하 사하였고 이름도 광혜원 Widespriad Relidf House)이라고 지어주었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사형이 집행되어 그의 집은 몰수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2월 25일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병원이 개설되고 3월 12일에는 제중원(Univensal Helpfulness House)이라고 개칭을 보았다. 알렌은 중신, 귀족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의 병도 잘 치료하여 환자는 늘어나 어떤날은 하루에 265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병원을 출입하였 다. 1885년 4월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내한에 이어 6월에는 헤론 의사가 입국하여 제중원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런던 중 알렌은 1887년 워싱톤 주재 한국공사관의 서기가 되었다. 1895년 8월부터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관리로 봉직하게 되었으며 1897년에는 공사관의 대리공사 그리고 총영사가 되었는가 하면 1901년 하였다.
알렌은 1884년 한국에 도래한 이래로 1905년에 한국을 떠날때까지 20 여년을 선교사로, 의사로, 공사로 혹은 대사로 분주히 그리고 눈부시게 활동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한국을 향해 일본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가 겨루고 있는 정치적 압력을 교묘히 헤치면서 한미간의 국교 를 두텁게하는데 공헌했으며 또한 미국교회로 하여금 선교의 길을 이 땅에서 하여금 선교의 길을 이땅에서 펴게하여 한국 선교의 출발을 획 하게 하는 큰 공헌을 세운 인물이다.
알렌이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하는 모습.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알렌은 그 해 12월의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치료하여 명성을 얻어 궁정의 典醫를 겸하였다
왕비 한마디에 채광권 알렌에 넘어가 1903년 70여 명의 서양인 기술자가 운산금광에서 근무했다. 그들은 조선인 광부보다 20배 많은 봉급을 받았다. 청일전쟁 전후 조선 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처럼 단시일 내에 근대화를 이루려면 막대한 재정 지출이 필요했는데, 외화 수입이라곤 해관에서 들어오는 관세 수입이 고작이었다. 크고 작은 개발 계획은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하염없이 지연되었고, 정부에서 고용한 외국인의 임금을 체불해 외교 분쟁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었지만 그것이 자본도, 기술도 없는 상태에서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1884년 조선에 입국한 이후 고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알렌은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광산을 담보로 미국에서 200만 달러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할 것을 고종에게 조언했다. 조선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이용해 개발하면, 양국 모두에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887년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 서기관에 임명된 알렌은 미국의 정·재계 인사들을 상대로 차관 도입과 광산 개발 문제를 논의했지만, 조선에 대한 미국인의 무관심과 오해로 실패했다. 1890년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전직한 이후에도 알렌은 조선의 광산 개발 문제에 매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는 청국의 방해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청일전쟁 종전 이후 청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자, 알렌은 다시 광산 채굴권을 얻기 위한 교섭에 나섰다. 10년 동안의 조선 생활은 그에게 ‘조선인은 어머니 젖을 먹을 때부터 음모에 익숙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알렌은 조선인보다 더 큰 음모를 꾸몄다. 친일파가 득세한 내각에서는 미국이 광산 채굴권을 얻을 길이 요원하다고 생각하고, 고종의 신임을 이용해 자신과 함께 워싱턴에서 근무했던 친미파 인사를 차례로 입각시켰다. 알렌의 강력한 천거로 전 전권공사 박정양이 총리대신, 전 서기관 이완용이 학부대신, 전 서기관 이하영이 도지부대신, 전 통역관 이채연이 농상공부협판에 등용되었다. 단돈 3만 달러로 동양 최대 금광 차지한 헌트 알렌과 OCMC 대변인 파세트가 대한제국 황제에게 써준 인증서. OCMC 지분 25%를 넘겨받는 대신 20만원을 지불하고 매해 2만5000원을 상납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의 외교관 신분이었던 알렌은 자신의 명의로 주재국의 이권을 획득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알렌은 ‘아메리칸 트레이딩사(社)’ 사장 모스를 교섭 상대로 내세웠다. 뉴욕과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무역에 종사하던 모스는 대(對)조선 무역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알렌이 조선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모스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인연으로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알렌은 금광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는 모스를 ‘대리’해 운산금광 채굴권 협상을 벌였다. 내각 요직에 포진한 친미파 인사들의 도움으로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하지만 광산 허가권을 가진 주무부서장 농상공부협판 김가진의 방해로 제동이 걸렸다. 김가진은 친일파로 분류되던 인물이었지만, 정작 일본 외교관들은 변덕이 심한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알렌이 김가진을 미국공사로 보내고 농상공부대신 자리에 친미파 인사를 심으려는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왕비가 지원에 나섰다.“지난 10년간 조선을 위해 봉사한 알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운산금광을 하사하라.”왕비의 한마디로 난마처럼 얽혀 있던 모든 문제는 한꺼번에 해결되었다. 1895년 7월 15일, 운산 일대 금광을 개발하기 위해 자본금 10만 달러를 들여 ‘조선개광회사’(Korean Mining &Development Co.)를 설립하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조선개광회사는 25년간 운산군 일대 28억 평의 광구에 대한 독점적 채굴권을 부여 받았고, 설비와 자재에 대한 무관세 통관은 물론 법인세, 소득세까지 일체의 세금을 면제받았다.1896년 운산금광 전경. 모스로부터 채굴권을 인수한 헌트는 500만 달러의 자금을 들여 대규모 채굴 시설을 갖춘다. 그 대가로 고종은 회사 지분의 25%를 넘겨받았다. 실(J. M. Sill) 공사의 말처럼 “미국은 차지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이권을 차지”했고, 알렌의 말처럼 “조선이 얻은 이익은 미국 정부와 미국인이 조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정도였다.모스는 얼굴 한 번 내밀지 않고 훗날 동양 최대의 금광으로 성장할 광산의 채굴권을 손에 넣었지만, 광산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도로도 제대로 깔리지 않았고, 변변한 설비조차 없는 운산금광을 개발하자면 10만 달러의 자본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모스가 금광 개발에 의욕을 보이지 않자, 알렌은 시애틀의 사업가 헌트(L. S. Hunt)를 끌어들였다. 3개월 동안 운산금광을 면밀히 조사한 헌트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확인하고 모스를 상대로 채굴권 인수 협상에 나섰다. 모스는 단돈 3만 달러에 운산금광에 관련된 권리 일체를 양도했다.1897년 헌트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자본금 500만 달러를 들여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 OCMC)를 설립했다. 조선개광회사보다 자본금이 50배나 늘어난 OCMC는 첨단 광업 장비를 대대적으로 투입해 운산금광 개발에 나섰다.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첫해부터 운산금광은 엄청난 양의 금을 쏟아냈다. OCMC가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정확한 생산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50만~300만 달러 상당의 금이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1899년 헌트는 대한제국 황실과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황제가 소유한 주식 25%를 10만 달러(20만원)에 인수하고, 생산량에 상관없이 매년 1만2000달러(2만5000원)를 상납하며 계약 기간을 25년으로 연장한다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요구였지만 황실은 무슨 이유인지 요구를 받아들였고, 두 차례 더 계약 기간을 연장해줘 계약 기간은 1954년까지 늘어났다. OCMC는 1903년부터 이익 배당을 시작했다. 12.5%의 배당률로 지급된 첫해 배당금만 53만3000달러. 만약 대한제국 황실이 지분을 양도하지 않았다면, 이익 배당이 실시된 첫해에 13만3000달러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다. 황실은 1년 배당금보다 적은 돈에 지분을 모조리 넘긴 셈이었다.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이라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OCMC와 운산금광은 건재했다. 일본 관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금광 채굴권을 환수할 구실을 찾았지만, 아무런 계약상의 결함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만큼 알렌을 비롯한 미국인들은 치밀했던 것이다.OCMC는 매년 300만 달러어치 이상의 금을 생산했는데, 단 1달러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배당이 처음 시작된 1903년부터 마지막 지급된 1938년까지 36년간 매년 10% 이상의 고율 배당을 실시했고, 배당금 총액은 초기 투자금의 3배에 육박하는 1437만9395달러에 달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금의 해외 반출을 금지했다. 생산된 금을 일본 정부가 지정한 가격에 넘길 수밖에 없게 되자 OCMC는 수익이 급감했다. 미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마저 악화되자 OCMC의 경영진은 몰수되는 상황까지 내몰리기 전 회사를 넘기기로 결정했다. 1939년 OCMC는 대유동금광을 경영하던 일본광업주식회사에 800만 달러를 받고 운산금광에 대한 권리 일체를 양도했다. 매각 소식이 전해지자 런던증권시장에 상장된 OCMC의 주가는 12.5실링에서 35실링으로 폭등했다.36년간 주주들에게 3배 가까운 배당을 안겨준 OCMC는 청산되는 순간까지 주주들에게 3배 이상의 시세차익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통감 취임사에서 “조선인 중에는 미국인이 운산금광을 개발하는 것과 같이 외국인에게 광산 채굴권을 허용한다면 한국인의 재보(財寶)가 외국인의 손에 침탈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인이 이 땅에 와서 사업을 일으키면 조선인은 그로 말미암아 일자리를 찾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운산금광과 같이 금을 생산해 일본으로 수출하면 그 대가로 화폐가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니 조선에도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운산금광은 수천 명의 조선인을 고용했고, 조선인의 일반적인 임금 수준보다 결코 낮지 않은 50전 내외의 일당을 지급했다. 일본인의 절반, 서양인의 5% 정도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전문 기술자와 단순 노동자의 임금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CMC가 운산은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인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만큼 조선인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익 대부분을 서양인 주주들에게 서둘러 배당했고, 세금은 단돈 1달러도 내지 않았으니 조선 사회에 기여한 것이 많았을 리도 없다. 이를 미국의 이권 침탈이라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미국을 매도하기 이전에 조선 정부의 무능을 반성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조선 정부는 스스로 금광을 개발할 자본도 기술도 없었다. 실제로 1880년대 조선 정부는 스스로 금광을 개발하려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자본과 기술을 도입했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산업을 일으켜 자본을 축적하고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했는데, 조선 정부는 그것을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열강의 침탈 이전에 무능 때문에 자멸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봉 시달림 불구 제물포에 멋진 별장 소유” 알렌이 받은 선물 운산금광 채굴권 확보 이후 지은 제물포 알렌의 별장. 6·25전쟁 중 화재로 유실되었다.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알렌이 받은 연봉은 1500달러에 불과했다. 1400만 달러짜리 이권을 고국 사업가에게 넘겨준 인물의 봉급치고는 지나치게 박했다. 하지만 외교관 신분이었던 알렌은 조선개광회사나 OCMC의 주식을 단 한 주도 소유할 수 없었다. 조선은 서양인들에게 다른 나라보다 생활비가 몇 배나 많이 드는 나라였다. 생필품 대부분을 소규모로 수입해서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정부를 위해 일할 때나 미국 정부를 위해 일할 때나 알렌은 늘 박봉에 시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물포에 멋진 별장을 소유했고, 토리도(Toledo)에 있는 회사 두 곳에 투자했다.그런 자금이 어디서 났을까? 알렌은 친구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스와 헌트는 그들의 이익이 확보되고 금광이 원활하게 운영되자 나에게 두 번에 걸쳐 현금과 선물을 주었다.” 알렌은 목사 신분이었고, 조선과 미국 두 나라의 공동 이익을 위해 금광 개발을 주선했지만,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을 만큼 성인군자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