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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해*** 오온(五蘊)...오음성고(五陰成苦)라고도 한다. *오온(五蘊) 오취온(五取蘊), 오음(五陰), 오중(五衆), 오취(五聚)라고도 한다. '다섯 가지 모임'이라고 직역할 수 있으며, 화합하여 모인 것, 무릇 생멸하고 변화하는 것을 종류대로 모아 오종(五種)으로 구별. ① 색온(色蘊) : 물질적 현사으로 존재하는것, 형상과 색채까지를 포함한 감각적인 물질의 일반. ② 수온(受蘊) : 苦, 樂, 不苦不樂을 느끼는 마음의 작용. ③ 상온(想蘊) : 외계의 사물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상상, 감상하여 보는 마음의 작용. ④ 행온(行蘊) : 受와 想하는 마음의 작용이 일정한 방향(시간적)으로 작용해 가는 면을 가르키는 말로써 '의지적 형성력'이라고 한다면 가장 가까운 번역이다. ⑤ 식온(識蘊) : 의식하고 분별하는 작용 (안, 이, 비, 설, 신, 의라고 하는 여섯 가지의 인식작용이 색, 성, 향, 미, 촉, 법의 여섯 가지 대상에 접촉하여 인식하는 작용을 총칭하여 識이라고 한다) *18界(六根, 六識, 六境) 육근(六根) 육식(六識) 육경(六境) 안(眼) 본다 색(色) 이(耳) 듣는다 성聲) 비(鼻) 냄새 맡는다 향(香) 설(舌) 맛본다 미(味) 신(身) 느낀다 촉(觸) 의(意) 안다 법(法) - 혜거스님께서 요약하신 '불교개요'에서 발췌 - (9) 하방의 파일체장용맹지왕보살 -*경 문*- 이때 파일체장용맹지왕(破一切障勇猛智王)보살이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을 말하였다. 한량없는 억천 겁 동안 부처님의 이름을 듣지도 못하거든 하물며 친근히 모시고 모든 의혹 끊을 수 있으랴. 여래는 세간의 등불이라 모든 법을 다 통달하시고 삼세의 복을 두루내어 중생들을 다 청정케 하네. 여래의 미묘한 육신은 모든 이의 존경하는 대상이라 오랜 세월에 항상 앙모하여도 그 마음에 싫은 줄 모르네. 부처님의 육신을 본다면 반드시 모든 집착을 버리고 보리의 길에 회향하리라. 여래의 미묘한 육신이 광대한 음성을 항상 내시니 변재가 걸림이 없어서 부처님의 보리문을 여네.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중생들을 깨우쳐서 지혜의 문에 들게 하고 보리의 수기 주시네. 여래가 세간에 나시어 세상에 큰 복밭 되시고 모든 중생들을 인도하여 복덕의 행을 모으게 하네. 누구나 부처님께 공양하면 나쁜 길의 두려움은 없어지고 모든 괴로움도 소멸하여 지혜의 몸을 성취하네. 만약에 양족존을 뵈옵고 광대한 마음을 내기만 하면 이 사람은 부처님을 항상 만나서 지혜의 힘이 증장하리라. 만일 사람 중에서 수승한 이를 보고 뜻을 결단하여 보리에 향하면 반드시 정각을 이룰 것을 능히 스스로 알게 되리라. -* 강설 *- 이번에는 하방에서 온 '일체 장애를 다 깨뜨리는 용맹한 지혜의 보살'이 부처님의 갖가지의 덕과 이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어렵고도 귀한 일이 있습니다.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수천만 가지나 된다는 많고 많은 생명체 중에서 사람몸 받기가 힘들고, 그리고 또 부처님 법을 만나기가 더 어렵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이름을 듣는 것도 어렵거늘 하물며 친근히 모시고 바른 법을 배워 의혹을 완전히 끊는 것은 얼마나 수승한 복인지 모릅니다. 정말 부처님을 만난 인연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사상도 다양하지만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인생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이런 가르침을 만나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과거 생에 많은 선행을 닦고 금생에도 선업을 지어 별 어려움 없이 만나졌는가 보다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정말 이런 가르침은 쉽게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만남보다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맺어진 이 인연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다음 생에서 다른 인연은 하나도 못 만나도 좋다. 단 이 부처님과의 인연은 만나야 한다. 세세생생 부처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결의는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한 마디로 사람을 바르게 살게 한 것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부처님이 뭐를 주시는 게 아닙니다. 복을 갖고 있다가, 우리들이 빌면 인심좋게 마구 내려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진실을 바로 이해하게 하고 세상을 바른 눈으로 보게 한 것입니다. 사람을 가르친다고 해 놓고도 오도(誤導)하여 잘못된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른 가르침에 의해 사람의 진실을 바르게 이해하면 무궁무진한 보고(寶庫)가 우리들 속에 있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 보배의 창고 열쇠를 가져다 주는 참스승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바르게 깨달아 가야겠습니다. -* 강설 *- 여래는 세간의 등불입니다. 절 행사에 등불을 밝히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초파일에 등을 달고 인등을 켜서 일년 내내 불을 밝힙니다. 이것은 바로 세상의 등불인 여래를 켜는 일이고, 내 마음 속에 있는 여래의 등불을 밝히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촛불 하나하나, 등불 하나하나를 켜는 것은 바로 내 속에 있는 여래의 등불을 밝히는 일인 것입니다. 여래가 갖추신 미묘한 육신[妙色身]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존경하는 바이고, 아무리 보아도 싫어하는 마음조차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묘한 상호를 보기만 하여도 모든 세속적인 집착을 버립니다. 무릇 '있다[有]'라고 하는 세속적인 한계를 떠나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갑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여래의 묘색신은 형상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상을 떠나 있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몸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미묘한 육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래의 미묘색신은 갖가지의 음성으로 나투어 아무런 걸림없이 광대한 음성을 내어 모든 중생에게 보리의 문을 열어 보여 주고 깨우쳐 줍니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들에게 보리의 수기를 내립니다. "너희들도 틀림없이 성불한다." 우리들도 깨닫는다하는 확증을 주는 것이 보리기(菩提記)입니다. 그런 수기를 모든 중생에게 다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부처님 앞에서 직접 수기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모든 중생이 다 성불한다. 부처의 종자를 누구나 다 가지고 있고 부처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부처의 씨앗이 싹 트기만 하면 그대로 부처다라고 하는 것을 부처님의 말씀을 담아 놓은 경전을 통해서 배울 때 바로 보리기를 얻은 것입니다. 모두 부처와 똑 같다라는 큰 가르침을 주시니까 여래는 세상의 큰 복밭이 됩니다. 업과 인연에 둘러 싸여 있는 중생에서 부처되게 하여 복덕의 행을 짓게 하시니 여래는 한량없는 복밭입니다. 또한 여래께 공양을 올리면 나쁜 길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모든 괴로움이 소멸됩니다. 여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 바로 불공(佛供)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불공인가.' 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정말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법당에 가서 등상불을 향해 정성을 다하여 불공을 올리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 불공을 올릴 때에 바로 내 부처님을 함께 포함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내 안에 있는 부처를 인정하고 그부처에게 먼저 공양을 할 수 있을 때 남에게도 가슴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불공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주위에서 사랑과 격려를 많이 받으면서 자란 사람이 남을 향하여 베풀기도 잘 합니다. 또 한 가지 생각을 더 해야 할 것은 '과연 부처님이 좋아하는 공양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중생인 우리들에게 이익되는 공양을 올렸지만, 부처인 우리들이 좋아하는 공양이 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식성에 맞는 공양을 법공양(法供養)이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나는 법공양을 좋아한다. 온갖 공양 중에 법공양이 제일이다." 지금 여러 불자들이 이『화엄경』「입법계품」의 강의를 읽고 있는 것이 바로 법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로 우리들 속에 있는 내 부처가 나로부터 최상의 법공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바른 주관으로 있고 난 연후에는 어떠한 불공을 올려도 좋습니다. 어디 가서 어떠한 공양을 하여도 그 때는 걸리지 않습니다. 이런 도리를 알고 등상불에다 대고 열심히 절할 줄 알고 공양을 올릴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게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부처인데 그 까짓 등상불에 절할 게 뭐 있느냐.' 이러면 또 한 쪽에 떨어진 것입니다. 편협된 사람이고 걸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잘 넘나들어야 진정한 불공을 올릴 줄 아는 불자라고 하겠습니다. 이 게송에서는 부처님을 다 각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간등(世間燈), 묘색신(妙色身), 양족존(兩足尊), 인중승(人中勝) 등, 갖가지 이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가장 뛰어난 부처님을 찬탄하는 데에 천 가지 만 가지 이름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인중승(人中勝), '사람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 이'라는 뜻입니다. 이 인중승을 보고는 저절로 감탄합니다. "아, 부처님의 법은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로다, 됐어, 이제 내 남은 인생 전부를 던져도 조금도 아깝지 않아." 지금까지 껍질로 살아온 인생을 미련없이 날려 보내고 성불을 향하여 거룩한 발걸음을 내딛었으므로 정각(正覺)을 이룬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10) 상방의 법계차별원지신통왕(法界差別願智神通王)보살 -* 경문 *- 이때 법계차별원지신통왕(法界差別願智神通王)보살이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을 말하였다. 석가모니 가장 높으신 세존이 모든 공덕 갖추시니 보는 이의 마음이 청정하여 큰 지혜에 회향하네. 여래의 크신 자비로 세간에 출현하시어 널리 중생들을 위하여 가장 높은 법륜(法輪)을 굴리시도다. 여래께서 수없는 겁 동안에 중생을 위해 애쓰시니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대사(大師)의 은혜 갚사오리까. 차라리 한량없는 겁 동안에 나쁜 길에서 온갖 고통을 받을지언정 마침내 여래를 버리고 벗어나기를 구하지 않으리. 차라리 중생을 대신하여 온갖 고통을 받을지 언정 마침내 부처님을 버리고 안락을 구하지 않으리. 차라리 나쁜 길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이름을 항상 들을지언정 선한 길에 태어나 잠깐이라도 부처님의 이름 듣지 못함을 원치 않으리. 차라리 지옥에 태어나서 낱낱이 수 없는 겁을 지낼지언정 마침내 부처님을 멀리 여의고 나쁜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리. 모든 나쁜 길에 오래 있기를 어째서 원하는가 여래를 뵈옵고 지혜를 증장하려 함이니라. 만일 부처님을 뵈오면 모든 고통을 소멸하고 여래의 지혜 경계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만일 부처님 뵈오면 온갖 장애 떠나고 다함없는 복덕 길러서 보리를 성취하리라. 여래께서는 영원히 모든 중생들의 의심을 길이 끊고 그들의 좋아하는 마음 따라서 모두 다 만족케 하시네. -* 강설 *- 마지막 열번 째로 상방에서 온 법계차별원지신통왕(法界差別願智神通王)보살이 게송을 읊습니다. 이 세상은 전부가 차별합니다. 사람사람이 전부 다릅니다. 생각이 모두 다르고, 소견이 차별하고, 꿈이 다 다릅니다. 법계차별원지신통왕보살은 이름대로 법계의 차별함을 지혜로 다 꿰뚫는 신통을 얻게 되기를 원하는 보살입니다. 이 보살은 부처님의 은혜와 덕이 굉장히 깊다고 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첫 게송에 석가모니불의 공덕을 부르고 있습니다. 『화엄경』의 주불(主佛)은 비로자나불입니다. 여기 나오는 석가모니불은 화신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전혀 걸리지 않습니다.법신불과 화신불의 관계가 전혀 걸리지 않고, 어느 것 하나 법신불 아닌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화신불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신불의 이름인 석가모니불을 불러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진리 덩어리가 온 우주에 꽉 차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눈 앞에 보여지지 않고 우리들의 인식에 조여오지 않는다면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마냥 무명의 암흑에서 언제까지나 빛을 등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꽃피는 봄날 카필라 성의 왕자로 이땅에 오시어 진리를 온 몸으로 보여주신 석가모니불은 모든 공덕을 갖추었으므로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청정함을 심어주고 지혜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진/직지사의 봄/도이님-* 강설 *-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성도 후 그냥 열반에 들려고 하셨습니다. 이 높은 법을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 때 제석이 나타나 간청하였습니다. "무상(無常)의 도를 이루신 분이시여, 그대로 열반에 들지 마시고 제발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하여 자비를 베푸소서! 감로의 법을 내려 주소서!" 그 간절한 소망을 들은 부처님은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 중생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무한한 자비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래, 이 중생들을 버릴 수가 없구나. 누군가 나의 법을 알아 듣는 이가 있겠지.'라는 대자비심을 일으켜 애통해 하는 중생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길에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49년 동안 아니 오늘날까지 또 앞으로도 영원히 중생들을 달래주는 그 자비심을 생각해 보면, 그 은혜를 어이하면 다 갚을 수 있을지 마냥 감격할 따름입니다. 부처님은 은혜를 갚는 확실한 길이 있습니다. 가사정대경진겁(假使頂戴經塵劫) 신위상좌변삼천(身爲狀座偏三千) 약불전법도중생(若不傳法度衆生) 필경무능보은자(畢竟無能報恩者) 가령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미진수겁을 지나고 몸은 부처님의 앉은 자리가 되어 삼천대천세계를 덮어도 불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끝내 부처님 은혜를 갚을 수 없네.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다고 하여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아무리 오랜 세월을 지낸다고 해도 그것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은 길이 아닙니다. 또 부처님께 봉사한다고 우리들의 몸뚱이로 의자가 되고 평상이 되어 부처님을 떠받들고 다닌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은 길이 아닌 것입니다. 법을 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치는 일이 아니고서는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부처님께 정성을 드리고 육체적인 고통을 감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처의 은혜를 갚은 길이 아닌 것입니다. 지혜를 일구어 주는 그 일밖에 달리 부처의 은혜를 갚은 길이 없는 것입니다. 자, 지금부터 진정한 불자로서 원을 세웁시다. "첫째, 차라리 한량없는 겁 동안 나쁜 길에서 고통받을지언정 여래를 버리고 여래로부터 벗어나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저는 세상 사람들이 받는 일체 고통을 제가 다 받는 한이 있더라도 부처님을 버리고 안락함을 구하지 않겠습니다." "셋째. 나쁜 길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이름을 항상 들을지언정 부처님 이름을 듣지 못함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이 비록 선한 길에 있다고 하더라도." "넷째, 저는 한량없는 세월 동안 지옥에 들어가서 악도의 고통을 받을지언정 여래를 버리고 지옥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만약에 나찰이 와서 천 만 번 묻더라도 우리들의 대답은 변함없습니다. "부처님을 믿으면서 지옥에 있을래, 부처님을 버리고 지옥에서 나올래?" "아닙니다. 저는 부처님만 계신다면 지옥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영원히 지옥의 고통이 이어지더라도 부처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법을 제대로 알고 사는 사람에게는 이미 지옥이라는 게 없습니다. 말로써 말을 하자니까 지옥일 따름입니다. 이런 원(願)을 되뇌이면서 더욱 더 결심이 굳어져야 합니다
사진/얼레지/박흥식님/아톰 머리모양처럼 재미있어 다시 올립니다^^-* 강설 *- 여래가 있는 곳이라면 나쁜 길에 더 있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있기에 지혜를 증장할 수 있고 고통을 여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처님을 뵈옵기만 하여도 모든 장애가 떠나고 다함없는 복덕을 길러 보리를 이룰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는 영원토록 중생들의 의심을 끊게 하시고 중생들의 좋아하는 마음을 따라서 모두 다 만족케 해 주십니다. 여래는 생명입니다. 0이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실다운 숫자가 앞에 놓여야만 그 0이 비로소 생명을 갖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인생을 살아 가면서 아무리 큰 사업을 하고 성공을 쌓아 가더라도 인생에 대한 참진실을 우리들이 놓쳐 버리면 그 모든 것이 다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인생의 진실을 모르고 이 마음의 근본 자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리 사회적인 큰 성공을 거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이 없는 것입니다. 뿌리가 없는 것을 아무리 힘을 들여 해 보았자 그것은 실다운 숫자, 1이나 2가 없는데 0만 칠판에 가득 써 놓은 것하고 같은 것입니다. 천만 개의 0 곱하기 천만 개의 0 해 보십시오. 역시 0밖에 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이치입니다. 자기 자신의 진실한 생명을 모르고 아무리 거대한 성공을 거두어 봤자 그것은 아무런 영험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구멍가게를 하더라도 자기 생명력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은 정말 제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마음에 수긍이 가는지 참으로 미지수이지만 여기 경전의 말씀이 틀림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확신이 그 사람의 삶의 질(質)을 높이는 일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의 가치를 가름하게 되는 것입니다. 철들게 되면 여기 이 말씀에 참으로 공감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지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혜를 순수한 우리말로 나타내면 철이라고 할 수 잇습니다. '철들었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 사람은 참으로 인생에 대한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시방에서 구름떼처럼 운집한 대중들을 대표한 보살이 각기 자신들이 앉았던 방향에서 나와 부처님의 덕을 한 부분씩 맡아 찬탄을 하였습니다. 게송으로 읊었기 때문에 표현상의 재미도 있었고, 또 시의 내용은 모두 다 불교의 중요한 핵심을 가르치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하는 데에서 전에 몰랐던 것을 깨달아 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이러한 복덕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과거에 선근을 지어 놓은 사람, 좋은 인연에 둘러싸인 사람들만이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무한한 복덕에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는 길은 쉬지 않고 정진하고 또 정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 진 것을 확인만 하면 되는 이 장엄한 꽃길에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나와서 향기를 맡으며 함께 걸어 갑시다.
7. 보현(普賢)보살이 삼매를 설하다 (1) 열 가지법의 글귀 -* 경문 *- 그때 보현보살마하살은 모든 보살들의 모임을 두루 관찰하고, 법계와 같은 방편과 허공계와 같은 방편과 중생계와 같은 방편과 삼세(三世)와 같고 모든 겁과 같고 모든 중생의 업과 같고 모든 중생의 욕망과 같고 모든 중생의 이해와 같고 모든 중생의 근성과 같고 모든 중생의 성숙한 때와 같고 모든 법의 그림자와 같은 방편으로써 여러 보살들을 위하여 열 가지 법의 글귀로 이 사자빈신삼매(獅子頻伸三昧)를 열어 보이며 밝혀 연설하였다.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법계와 같은 모든 세계의 티끌 속에서 부처님이 나시는 차례와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차례를 나타내는 법의 글귀를 연설하며, 허공계와 같은 모든 세계에서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여래의 공덕을 찬탄하는 음성을 나타내는 법의 글귀를 연설하며, 허공계와 같은 모든 세계에서 여래가 나시어서 한량없고 그지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문을 나타내는 법의 글귀를 연설하며, 허공계와 같은 모든 세계에서 부처님의 도량에 보살들이 모인 가운데 앉으셨음을 나타내는 법의 글귀를 연설하며, 모든 모공에 잠깐잠깐마다 삼세 부처님의 변화한 몸을 나타내어 법계에 가득하는 법의 글귀를 연설하며, 한 몸이 시방의 모든 세계 바다에 가득하게 평등히 나타내게 하는 법의 글귀를 연설하였느니라. 모든 경계 가운데 삼세 부처님들의 신통변화를 나타내게 하는 법의 글귀를 연설하며, 모든 세계의 티끌 속에 삼세 모든 세계의 티끌 수와 같은 부처님의 갖가지 신통변화를 나타내어 한량없는 겁을 지나게 하는 법의 글귀를 연설하며, 모든 모공에서 삼세 모든 부처님의 큰 서원 바다에 음성을 내어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모든 보살을 열어 교화하고 인도하는 법의 글귀를 연설하며, 부처님의 사자좌의 크기가 법계와 같으며 보살들의 모임과 도량의 장엄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데,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갖가지 미묘한 법륜을 굴리는 법의 글귀를 연설함이ㄴ라. 불자여, 이 열 가지가 머리가 되어 열 가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티끌수 법의 글귀가 있으니, 다 여래의 지혜의 경계니라." -* 강설 *- 그 동안 시방에서 모여온 보살들이 각각 게송을 읊어서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부처님 덕의 한 부분씩을 담당하여 비유를 섞어가며 멋지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금부터는 보현보살의 여러 가지 행이 소개됩니다. 행이라고 해서 실제적으로 눈에 띄는 그런 행이 아니고, 진리를 나타내 보이는 보현보살의 역할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보현보살이 삼매를 열 가지로 설합니다. 다시 그 내용을 게송으로 펴고 나서는 백호 광명으로 이익을 나타내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현보살마하살은 삼매나 백호 광명이 이익을 설하기 전에 보살 대중들의 모임을 두루 관찰합니다. 두루 살핀다고 하는 것은 꼭 고개를 돌려가며 눈으로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다기보다는 대중과의 공감(共感)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분과 듣고자 하는 분과의 공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현보살의 설하고자 하는 내용과 법계에 있는 모든 분들과의 공감과 공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현보살은 갖가지 방편으로써 여러 보살들을 위하여 열 가지의 글귀로 사자빈신삼매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법계와 허공계와 중생계와 같은 방편입니다. 거기에다가 삼세와 모든 겁과 모든 중생의 업과 모든 중생의 이해와 모든 중생의 근성과 모든 중생의 성숙한 때와 모든 법의 그림자와 같은 방편들입니다. 하나같이 다 지혜가 넘치는 방편들이지만 이 '모든 중생의 성숙한 때'라는 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공부라는 것은 제대로 되는 때가 있습니다. 공부를 2배, 3배 한다고 해서 반드시 깨달음도 2배, 3배 빨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여도 될 때가 있는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서 될 때만 기다리고 있어도 아니 됩니다. 공부를 할 경우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곡식도 심고 가꾸는 과정을 거쳐야만 익는 시가가 있듯이, 아예 심고 가꾸지 않고 덮어놓고 가을이 되었다고 추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마음을 닦아가는 동안에 성숙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숙(成熟)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철이 난 것이라고 하고 지혜가 생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바른 안목이 생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 경문 *- 『화엄경』에서는 '사자빈신삼매(獅子頻伸三昧)' 즉, '사자가 기지개 켜는 삼매' 또는 '사자가 기운 뻗는 삼매'을 자주 언급합니다. 이 말의 속뜻은 '어떤 깨달음의 힘이 밖으로 표출하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삼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매를 통하여 깨달음의 내용이 밖으로 쫙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삼매를 열 가지로 설명한다는 것은 바로 그 삼매 안에 깨달음의 내용이 다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삼매의 이름이, 즉 깨달음의 이름이 '사자빈신(獅子頻伸)'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렇습니다. 사자가 조용히 있다가 기지개를 켜는 순간에 그 동안 갈고 닦아 놓았던 용맹과 신속함과 무외함이 다 나타난다고 해서 삼매 이름을 사자빈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살이 삼매에 들어 있을 때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자기 자신의 내부에 힘이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지혜가 있는 줄도 모르고 능력도 무궁무진한 줄을 모르지만 한 번 기지개를 켜고 활동을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그 동안 쌓아 두었던 모든 힘과 지혜가 터져 나온다는 뜻에서 사자빈신삼매가 많이 나옵니다. 여러 가지 삼매 중에서 높이를 두고 깊이있게 취급하고 있는 삼매라고 보면 됩니다. 보살이 또는 수행자가 정(定)에 들어 있다가 그 정(定)을 털고 일어나서 그 정(定)에서 갈고 닦은 공부와 힘이 밖으로 표출되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어떠한 보살행을 하면 그동안 쌓아 두었던 정진의 힘이 총동원되어서 모든 것을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신중하면서도 힘이 있는 삼매이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보살행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뜻을 지닌 사자빈신삼매를 열 가지 법구(法句)로써 열어 밝혀 보이는데, 첫째 법구는 이것입니다. 법계와 모든 부처 세계의 티끌 속에서 부처님이 나시는 차레와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차례를 나타내는 법의 글귀를 연설합니다. 이 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삼라만상은 전부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흘러갑니다. 우리 사람들은 생(生).노(老).병(病).사(死)를 거듭하고 있고 모든 삼라만상은 생(生). 주(住).이(異).멸(滅)합니다. 이 우주 또한 성(成).주(住).괴(壞). 공(空)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우주 법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 네 가지 단계를 거치는 것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법구는 온 우주와 똑같은 모든 세계에 모든 부처님이 거기에서 출현하는 그 차례와 우주가 생성 변화하는 차례를 시현하는 그런 법구들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법구는 허공계와 같은 모든 부처 세계에서 오는 세월이 다하도록 여래의 공덕을 찬탄하는 음성을 나타내는 법의 글귀입니다. 다음과 같은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빚쟁이가 있었는데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빚 받으려 왔다 갔습니다." "그래 언제 갚는다고 하였느냐?" "한 달 뒤 몇 월 몇 일에 준다고 했습니다. 제가 대답 잘 하였지요?" "잘하기는 뭘 잘했어? 그냥 내일 준다고 하면 될 일을 왜 한 달 뒤인 몇 월 몇 일이라고 딱 잡아 놓았느냐." 아버지, 내일 당장에 줄 돈이 어디 있습니까?" " 아 글쎄, 내일 되면 또 내일 준다고 하면 되지. 내일은 언제나 내일이 있잖느냐. 내일은 끝날 때가 없지." 만약 언제 주겠다고 딱 날을 받아 놓으면 그 날이 되면 꼭 갚아야 하니까 그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내일 해 놓으면 내일은 영원토록 오니까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기에서 보면 미래겁이 끝나도록이라고 했습니다. 미래라고 하는 것은 끝날 때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끝없는 세월 동안 여래의 공덕을 찬탄하는 음성을 시현(示現)하는 그런 법구를 연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허공계와 같은 모든 부처 세계에서 여래가 나시어 한량없고 그지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문을 나타내는 법의 글귀입니다. 어느 세계라든가 어떠한 숫자를 써서 수천 만이나 수억 만이라고 하지 않고 아예 허공계와 같다고 합니다. 허공계가 어디 끝이 있습니까. 끝이 없는 허공과 같은 그런 부처 세계에서 여래가 출세하여 한량없고 그지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문을 나타내는 법구를 연설합니다. 우리들이 알기로는 30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셨니 어쩌니 하고 56억 7천 만년 이후에 미륵불이 오시니 어쩌니 하지마는 여기를 보면 무량무변한 부처님이 출세하여 정각을 이루는 그런 모습을 법구로써 연설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네 번째로는 허공처럼 한량없는 모든 부처 세계에서 부처님이 도량에 앉으시면 많은 보살들이 모여서 쭈욱 앉아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법구입니다. 모든 모공에서 삼세 부처님의 변화하는 몸을 나타내어 온 법계가 가득차는 것을 연설하는 것이 다섯 번째 법구이며 또한 한 몸으로 하여금 시방의 모든 세계에 가득차게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여섯 번째 법구입니다. 모든 경계 가운데서 삼세부처님의 신통 변화를 나타내게 하는 것이 일곱 번째 법구이고, 모든 부처 세계의 미진(微塵) 속에 삼세 모든 부처의 미진과 같은 부처님의 갖가지 신통 변화를 나타내어 한량없는 겁을 지나도록 하는 법의 글귀가 여덟 번째 연설입니다. 모든 모공에서 삼세 모든 부처님의 큰 서원 바다에 음성을 내어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모든 보살을 열어 교화하고 인도하는 것이 아홉 번째 법구이며, 마지막 열 번째는 부처님의 사자좌의 크기와 법계와 같으며 보살들의 모임과 도량의 장엄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데 오늘 세월이 끝나도록 갖가지 미묘한 법륜을 굴리는 법의 글귀를 연설합니다. -* 경문 *- 열 가지 법구를 연설한다고 하는데 거의가 다 비슷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화엄경』은 열 번을 반복하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열'이라는 것은 원만을 의미하는 것이고, 조금도 결함이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니 늘『화엄경』에서 보여주듯이 그 어느 것도 완전무결하여 진리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안목을 우리들이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안목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보면 자꾸 부족한 것이 보이고 못마땅한 것이 보이고, 이렇게 했으면 좋겠고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 그런 생각이라는 것도 사실은 알고 보면 허망한 것이고 믿을 바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무결한 것으로 이해해 가는 그 안목, 그 자세가 모든 사사물물(事事物物)을 전부 진리로 존재하게 하는 또, 진리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바로 보는 그런 안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문장에서 표현되고 있는 이 범위는 우리들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는 거대하기 짝이 없는 범위가 나와 있습니다. 걸핏하면 '허공계와 같다', '법계와 같다', 항상 '무량무변이다', '미래세가 다함이 없도록' 언필칭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말하자면 시간이 끝이 없고, 공간을 이야기할 때는 공간이 무한합니다. 항상 무량무변이고 허공계와 같고 법계와 같고 미래세가 다하지 않다는 표현들이 예사로 나옵니다. 우리들은 시간 속에서 살고 공간 속에서 삽니다. 제한된 시간과 한정된 공간 속에서 살고 있기는 살고 있는데 그 제한된 시간과 한정된 공간이라는 것을 누가 그렇게 정해 놓았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누가 그런 제한을 두었느냐, 누가 그런 공간을 두었느냐하면 그것은 차별심 때문입니다. 차별심 때문에 시간이 정해져 있고, 차별심 때문에 한정된 공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차별심 때문에 여기는 공부하는 법당이고, 지금은 공부하는 시간이고, 이것이 끝나면 이 법당에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런 차별심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오래 있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다, 오래 아니다'하는 그런 시간의 문제들도 전부 차별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화엄경』에서는 그런 차별심을 떨구어 버리면 어디에도 상관없고 언제라도 상관없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차별심을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산다 얼마 살지 못한다 하는 불안으로부터도 이미 벗어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시간에 대한 제약 때문에 '오래 사느니 일찍 죽었느니 애석하느니' 하는 생각을 하지, 시간에 대한 그 관념이 우리에게서 사라졌다면 이미 '오래 산다 일찍 죽었다' 하는 시간에 대한 용어가 아예 없을 겁입니다. 그래서 여기 화엄경에서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차별심, 또는 공간에 대한 한계성 이런 것들에 대하여 완전히 벗어난 모든 것의 진리인 본래의 그 모습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지금 처해 있는 이 시간과 제한받은 이 공간의 좁은 틈에서 상식을 가지고 무한한 그것을 이해하려니까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작은 제약 속에 사는데 여기서 무슨 미래세가 다 하지 않는다, 무량무변이다, 허공계와 같다, 법계와 같다고 하는 것을 100% 이해하기는 어렵고, 하나의 힌트는 들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돌아가서 마음을 가지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대로 조금 이해가 갑니다. 마음은 시간도 공간도 없고 젊음도 늙음도 없고, 남녀의 차별도 없고 이 공간의 간격이나 장애도 없습니다. 또한 시간의 제약도 전혀 없습니다. 산하석벽무장애(山河石壁無障碍)라, 아무리 막아 놓았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고 거리가 아무리 멀다 하더라도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로 곁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가는 마음이나 저기 머나먼 미국에 있는 사람에게 가는 마음이나 시간은 똑 같습니다. 하등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첩첩이 막아 놓아도 마음이 움직이는 데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렇다고 터져 있다고 해서 특별히 편리한 것도 아닙니다. 마음을 가지고서 공간을 가로 질러 가는 데에는 막혀 있거나 트여 있거나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경문 *- 여기서 우리들이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화엄경』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가 반드시 마음에만 국한시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현실을 그대로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현실을 두고 하는 소리이지만 그것이 이해가 잘 안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근거로 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그게 현실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을 가지고 한 번 이해를 해보자' 하면 그런 이해의 길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화엄경』에서의 본래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으로써 이해되어지는 그런 그 마음의 세계뿐만 아니고 지금 현실의 세계를 그대로 다 함께 합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애냐하면 사사무애(事事無碍)가 본래의 목적이니까요. 사(事)와 사(事)가 걸림이 없는 데에『화엄경』본래의 목표가 있습니다. 사물 하나하나 그대로 진리라는 데에까지 우리들이 이르러야 『화엄경』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무애(事無碍), 이무애(理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 그렇게 됩니다. 사사무애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 그대로가 아무 걸림이 없이 완전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마음이 미국 가는 데에 걸림이 없고 막혀 있는 것에도 걸림이 없는 것과도 똑같이 사물과 사물이 걸림이 없는 그런 상황에까지 이르러야 비로소『화엄경』에서 목표로 하는 그런 세계인 것입니다. 전부 한테 섞어 두루뭉실이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진리로 확연하게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사물 하나하나가 완전무결한 진리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만 알면 됩니다. 어느 순간, 어느 때든지 사실 좋은 날이 아닌 때가 없습니다. 어느 하루가 기분 나쁜 날이라고 해서 그 날을 빼어 버리고 나면 내 인생 전체가 없는 것입니다. 즐거운 날이라고 해서 그 날 하루만 돋보이는 날이 결코 아닙니다. 어느 한 수간, 일 분 일 초도 내 인생에 있어서 똑같이 조중합니다. 그 값은 똑 같습니다. 결혼하는 날이라고 해서 뭐 특별히 그 날만 다른 날보다 괴장히 값진 날이고, 헤어지는 날이라고 해서 값이 싼 날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시간은 똑 같이 소중합니다. 어느 하루를 빼어 버리면 다른 날도 같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도 마찬가지이고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이 결국은 어느 시간, 어느 공간 할 것 없이 전부 완전무결한 진리로서의 가치를 우리가 깨닫는 것, 그것만 요달해 버리면 '아! 사사무애구나. 사(事)와 사(事)가 걸림이 없이 모두 대자유, 대자유자재한 진리의 세계이구나.'하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여기서 이야기 한 것은 현실 그대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제약이 많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의식에 와 닿지 않으므로 그것을 이해할 힌트는 없을까해서 소위 우리들이 말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그런 대로 이해가 돌아간다는 것이고, 또 궁극적으로 『화엄경』에서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결국, 모든 시간 모든 공간 모든 사물은 공히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고 또 똑같이 완전무결한 것이라는 사실을 제차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골 보리밥집 글/김 미형 할아버지 몸에 배인 궐연냄새처럼 움푹한 좁은 방 벽에는 쾌쾌한 된장냄새 오가는 사람을 보듬는다 '갱빈아 니는 방구 안낀다고 했는데 오늘 보리밥 묵고도 안끼나 두고 보자 피~~익 뽀오옹' -* 경문 *- 거듭 말하지만 쌀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쌀을 만들고 난 뒤의 겨도 쌀과 똑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겨 입장에서 쌀을 보고 이런 자랑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녀석, 너는 내가 아니고서는 생기지도 못했다. 너는 살지도 못했어." 사실 아닙니까. 겨가 없었으면 쌀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쌀 입장에서 보면 또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네가 아무리 그래 보아라. 너는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너는 나를 싸주기 위한 껍질밖에 안된다." 그러나 겨가 없었으면 어떻게 쌀이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괜히 쌀 입장이다, 겨 입장이다 하고 있지 사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다 고유한 영역을 지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어떤 경우라도 어떤 사물과 어떤 시간에도 자기의 가치관을 가지고 선을 그을 게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게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괜히 자기의 잣대를 가지고서 재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잣대를 단단하게 준비해 놓고 그어 버리고서는 금 바깥에 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해왔잖습니까. 그러니까 괴로움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고 자기가 그어놓은 잣대 안으로 집어 넣으려고 하니까 들어가지 않으려 하고 또 설령 마지 못해서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게 속이 편한 게 아닙니다. 억지로 들어갔기 때문에 속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그렇게 들어가면 들어간 게 아닙니다. 그냥 있는 그 자리에서 우리들이 인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깨달아야 하는데 사실 그게 어렵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겨의 가치나 쌀의 가치가 같다고 하는 사실 그걸 우리들이 확연하게 깨달았을 때에 여기에 있는 모든 시간, 모든 공간 그 어디에도 걸릴 것 이 없는 것이고 모두가 자유자재한 진리의 평등한 세계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진실을 가르쳐 주는 열 가지 법구(法句) 중 한 가지도 제대로 소화가 잘 되지 않는데 십불가설 불찰미진수 법구가 법구가 또 있다고 합니다. 열 개의 말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를 갈아가지고 먼지를 만들었을 때 그 먼지 숫자와 같은 수효의 법구가 있습니다. 이 말은 앞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 진리의 경계이다, 진리 아닌 것이 없다는 의미로 파악하면 되겠습니다. 2) 게송으로 다시 펴다 -* 경문 *- 그 때에 *보현보살이 이 뜻을 다시 펴려고 부처님의 신력(神力)을 받들어 여래를 관찰하고 모인 대중을 관찰하고 부처님들의 생각하기 어려운 경계를 관찰하고 부처님들의 그지없는 삼매를 관찰하고 부사의한 세계바다를 관찰하고 부사의한 환상과 같은 법의 지혜를 관찰하고 부사의한 삼세 부처님들이 다 평등함을 관찰하고 모든 한량없고 그지없는 여러 가지 말하는 법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하나하나 모공 속에 티끌 수의 세계바다가 있어 부처님들이 앉으셨는데 그곳에 다 보살대중들이 모이어 있네. 하나하나 모공 속에 한량없는 세계바다가 있어 부처님이 보리좌에 앉으셨는데 이와 같이 법계에 두루하였네. 하나하나 모공 속에 모든 세계 티끌 수의 부처님들을 보살대중이 둘러 모시었는데 그들을 위해 보현의 행을 말씀하시네. 부처님은 한 국토에 앉으사 시방세계에 가득하신데 한량없는 보살구름이 그 곳으로 다 모여들었네. 억만 세계의 티끌 수 같은 보살의 공덕바다가 그 모임 속으로부터 일어나 시방세계에 가득하였네. 모두 보현의 행에 머물러 법계바다에 노닐면서 모든 세계를 두루 나타내어 다 같이 부처님 회상으로 들어왔네. 모든 세계에 편안히 앉아 모든 법문을 들으면서 낱낱 국토에서 억 *겁 동안 모든 수행을 다 닦네. 보살들의 닦는 행은 법의 바다를 두루 밝히는 행이라 큰 서원의 바다에 들어가 부처님의 경계에 머무르네. 보현의 행을 잘 통달하고 부처님의 법을 내어 부처님의 공덕 바다를 구족하고 신통한 일을 널리 나투네. 몸의 구름[身雲]이 티끌 수 같아서 모든 세계에 가득하였고 *감로의 법을 널리 비내려 대중들을 부처님의 도(道)에 머물게 하네. -* 강설 *- 지금까지 보현보살 마하살은 삼매를 열어 보이며 열 가지로 밝혀 연설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이 뜻을 게송으로 다시 읊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부처님의 신력을 받자와'라는 구절입니다. '승불신력(承佛神力)'이라고 하여 다른 경에서도 이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 행이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보현보살마하살도 부처님의 신력(神力)을 받아서 관찰을 하고 설법을 합니다. 오로지 부처님의 넓고 깊은 진리에만 근거하여 법을 밝히지 자신의 좁고 나약한 소견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온전히 부처님께 귀의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모든 것에 우리들 자신을 내던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자신의 *아집(我執)은 사라지고 부처님의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뼈가 되고 살이 되어야 합니다.*:...:* 주해註解 : 보현보살(普賢菩薩)[명사] 이지(理智)와 깨달음의 덕을 갖추고 석가의 포교를 돕는 보살. 석가의 오른쪽 협시(脇侍)로, 흔히 흰 코끼리를 타고 있음. *겁 (劫) [명사]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때부터 다음 번에 개벽할 때까지의 동안’이란 뜻으로] 매우 길고 오랜 시간. (본딧말) 겁파(劫 ). ↔ 찰나 . *감로(甘露)[―노][명사] 1.하늘이 상서(祥瑞)로 내린다는 이슬. 2.도리천(利天)에 있다는 감미로운 영액(靈液). 3.여름에 단풍나무·팽나무·떡갈나무 따위의 나뭇잎에서 듣는 달콤한 즙. [진드기가 분비하는 것임.] 4.<감로수>의 준말. *아집我執)[명사] 1.개체적인 자아를 실체인 것으로 믿고 집착하는 일. 2.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이나 소견 또는 그것에 사로잡힌 고집. ¶아집이 세다./아집을 버리지 못하다.
/사진/하얀민들레/서산부석사 원우스님-* 강설 *- 보현보살은 여래와 모인 대중과 부처님의 경계와 부처님의 삼매와 부사의한 세계 바다와 부사의한 환상과 같은 법의 지혜와 삼세 부처님의 평등함과 여러 가지 말하는 법을 다 관찰하고나서는 게송을 말합니다. 이것을 잘 살펴보면 우리들은 직접 부처의 경계를 보지 못하니까 보현 보살의 눈을 빌려서 갖가지 부처의 경계를 보는 게 되겠습니다. 우리 몸에는 모공이 참 많습니다. 몸에 털이 나 있든 없든 간에 모공은 쭉 돌아가며 다 있습니다. 피부 전체에는 전부 돌아가며 털구멍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인체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것이 모공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중심이기 때문에 일단은 사람에게다 기준을 두고 가장 많은 것을 거론할 때에 항상 떠올리는 것이 바로 모공입니다. 그래서『화엄경』에서 늘 모공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미세하면서도 많은 모공 안에 미진수와 같이 많고 많은 세계가 또 있습니다. 그 세계에는 다 부처님이 계셔서 보리좌에 앉았는데 거기에 수억만인(數億萬人)의 보살 대중들도 동참하여 그 부처님을 다 에워싸고 있습니다. 보현보살이 보현보살의 안목으로 부처님 세계를 보니까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낱낱 모공 속에 한량없는 세계가 있는데, 그 한량없는 세계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밑에 턱 앉아 계시는데 그것이 법계에 두루 찼다는 이 말입니다. 그러고서는 부처님께서는 보살 대중을 위해서 보현행(普賢行)을 설하십니다. 자, 이것을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경계를 관찰하고서 게송을 설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깨어있는 안목으로 부처님 세계를 어디 따로 보았다기보다는 바로 우리들의 삶 터인 이 세상을 보니 전부 부처 아닌 게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이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진리 아닌 게 없다, 완전무결한 진리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성변시광장설 산색기비청정신(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情身 )'이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장중하게 솟아있는 저 산은 산색이 그대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고 이 우주는 그 자리 그대로가 전부 비로자나 법신불이더라, 그리하여 우주에서 흘러 내리는 소리는 그대로 부처님의 설법이더라고 하는 것이 언제나 빛나는 소리인 것입니다. 어디에도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어디 하나 걸릴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 안목을 갖고 보면 정말 보잘 것 없는 미미한 세계에서도 한량없는 그 세계가 보여지고 그 세계의 많고 많은 존재들로 가슴에 와 닿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경우라도 차별심이나 간택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만 없으면 지난 번에도 말하였지만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협간택(唯협揀擇)',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간택(揀擇), 가려내고 선택하고 차별하는 것만 꺼릴 뿐입니다.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다만 싫어하고 좋아함만 없으면 환하게 밝으리라." 다만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하는 그 생각만 우리들이 하지 않는다면 훤출하게 툭 트여 버립니다. 갑갑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말 잘 들어서 좋고 말 안 들어서 갑갑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선택을 하지 않고 차별을 하지 않으면 전부 옳고 그것을 진리로 우리들이 포용할 수가 있게 됩니다. 내가 편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정말 진리로서 우리 눈에 비쳐올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들이 이 공부를 하는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 백호(白毫)광명으로 이익을 나타내다 (1) 광명을 놓다 -* 경문 *- 이때 세존께서 모든 보살들을 여래의 사자빈신 광대한 삼매에 들게 하려고 미간의 백호로부터 큰 광명을 놓으니, 광명의 이름은 보조삼세법계문(普照三世法界門)이었다. 말할 수 없는 세계의 티끌 수 광명으로 권속을 삼아 시방의 모든 세계해의 여러 부처님 국토에 두루 비추었다. -* 강설 *- 지금까지 보현보살마하살이 등장하여 열 가지 법구(法句)로 사자빈신삼매를 열어 보이며 연설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현보살의 눈으로 부처님의 경계를 열어 보이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등장하도록 밑바탕을 마련해 놓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밑받침에서 드디어 부처님께서 등장하여 상서(祥瑞)를 보이십니다. 미간에 있는 백호(白毫)로부터 큰 광명을 놓습니다. 그 광명을 놓아서 이익을 나타내고 또 광명에 의지해서 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서다림에 모인 대중들이 그 다음에 광명에 나타난 경계를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존이 그 광명을 놓으니까 그 광명을 통해서 그 광명 속에 나타난 경계가 아주 휘황찬란하고 상당한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는데 그 모습을 보게 되고, 또 시방에서 그 광명에 나타난 서다림(林)에 있는 대중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도 그 광명에 나타난 경계를 보고 있습니다. 그 광명의 이름은 '보조삼세법계문((普照三世法界門)'입니다. 즉 '삼세의 법계를 널리 비추는 문'입니다. 과거. 현재.미래의 모든 세계를 환하게 비추어 주는 광명입니다. 그러니까 이 삼매에서 나타나는 광명에 과거.현재 . 미래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광명은 한 줄기만은 아닙니다. 주된 광명이 있고, 거기에 권속 광명도 많이 있습니다. 이 말할 수 없는 부처 세계의 티끌 수와 같은 보조 광명도 시방의 모든 세계해의 여러 부처님 국토에 두루 비추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은 왜 그런가하는 옛날의 인연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하는 인연을 증명하게 되는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註解: 부처님께서 지상에서 3회, 천상에서 4회의 7처 9회째 설법을 하신 숲. 지상은 법보리장, 보광명전, 서다림 천상은 도리천궁, 야마천궁, 도솔타천궁, 타화자재천궁 설법차례는 법보리장 보광명전 도리천궁 야마천궁 도솔타천궁 타화자재천궁 보광명전 보광명전 서다림 등의 9회 설처(說處)이다. 여기서 보광명전이 세 번 나오므로 장소로는 일곱이고 법회 모임은 아홉번이다. (1) 광명을 의지하여 법을 보다 -* 경문 *- ① 서다림(逝多林) 대중들이 광명에 나타난 경계를 보다 이때에 서다림에 있는 보살 대중이 모두 보니 온 법계 허공계에 있는 모든 세계의 낱낱 티끌 수 같은 부처님 국토들이 있는데, 갖가지 이름 . 갖가지 빛 . 갖가지 청정 . 갖가지 머무는 곳 . 갖가지 형상이며, 이러한 모든 국토마다 큰 보살들이 도량의 사자좌에 앉아서 등정각을 이루니, 보살 대중이 앞뒤로 둘러싸고 여러 세간 임금들을 공양하였다. 또 보니, 말할 수 없는 세계의 넓이와 같은 대중의 모인 가운데 아름다운 음성을 내어 법계에 가득 차게 바른 법륜을 굴리기도 하고, 혹은 하늘 궁전 . 용의 궁전 . 야차의 궁전과, 건달바 . 아수라 . 가루라 . 긴나라 . 마후라가 . 사람인 듯 아닌 듯한 여러 궁전 속에 있기도 하고, 인간의 마을과 도시와 도성 같은 대처에 있기도 하여, 갖가지 성씨(性氏) . 갖가지 이름 . 갖가지 몸 . 갖가지 모양 . 갖가지 광명을 나타내며, 갖가지위의에 머물고, 갖가지 삼매에 들어, 갖가지 신통변화를 나타내며, 어떤 때는 스스로 갖가지 말을 내기도 하고, 또는 여러 가지 보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대중이 모인 데 있어서 갖가지 말을 하게도 하여, 갖가지 법을 말하였다. -* 강설 *- 부처님께서 미간 백호로부터 광명을 놓으니 그 속에 갖가지의 경계가 다 나타납니다. 그러자 서다림에 있는 보살 대중들이 그것을 봅니다. 일체 진법계 허공계에 있는 모든 불찰의 일일 미진(微塵) 중에, 각각 모든 불찰의 미진수와 같은 부처님 국토가 있는데, 갖가지 이름과 갖가지 빛과 갖가지 청정과 갖가지 머무는 곳과 갖가지 형상입니다. 이러한 부처님 나라에 있는 큰 보살들이 사자좌에서 등정각을 이루니 보살 대중들이 둘러 싸고 여러 세간 임금들이 공양을 올리는 것이 광명 속에 보입니다. 또한 많은 대중이 모인 갸운데에 바른 음성으로 법륜을 굴려서 법계에 가득 차게도 하고, 팔부 신중 속에 있기도 하고, 인간이 거하는 대처에 있기도 하고, 갖가지 성과 갖가지 이름과 갖가지의 몸과 갖가지의 모양과 갖가지의 광명을 나타내기도 하고, 갖가지 위의에 머물고 갖가지 삼매에 들고 갖가지의 신통 변화를 나타내고 스스로 말을 내기도 하고 보살들로 하여금 여러 대중 앞에서 말을 하게도 하여 갖가지 법을 말하는 것이 모두 다 나타납니다. -* 경문 *- ② 시방(十方)에서 광명에 나타난 경계를 보다 이 회중에 있는 보살 대중이 이러한 부처님 여래의 깊은 삼매와 큰 신통의 힘을 보는 것 같이, 온 법계 허공계의 동서남북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 . 하방(下方) 모든 방향 의 바다 가운데서 중생의 마음을 의지하여 머무르면서, 시작없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모든 국토나 모든 중생의 몸이나 모든 허공 가운데 한 털 끝만한 곳마다 낱낱이 티끌 수 같은 세계가 있어 갖가지 업으로 생기어 차례로 머물거든, 그 세계마다 도량에 모인 보살 대중이 있었다. 이 보살들도 이렇게 부처님의 신력을 보되, 삼세를 헐지도 않고 세간을 헐지도 않으면서, 모든 중생의 마음에 그 영상을 나타내며, 모든 중생의마음을 따라 미묘한 음성을 내고, 모든 대중의 모인 데 들어가서 모든 중생의 앞에 나타나는데, 빛과 모양은 다르나 지혜는 다르지 않으며, 그들에게 마땅한 대로 불법을 보이며,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하기를 잠깐도 쉬지 아니하였다. -* 강설 *- 세존께서 모든 보살들을 여래의 사자빈신삼매에 들게 하려고 미간(眉間) 백호로부터 '보조삼세법계문(普照三世法界門)'의 광명을 나타내자 그 속에서 갖가지의 신통 변화가 드러나서 서다림에 있는 대중들이 그 경계를 다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서다림에 모인 그들만이 그 신통을 보는 것이 아니고 온 법계 허공계의 시방 가운데에서 중생의 마음을 의지하여 머무르면서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토, 모든 중생의 몸, 낱낱 티끌 수 같은 세계마다에 업으로 인하여 차례로 나타난 많고 많은 세계의 도량에 모인 수많은 보살들도 광명 속에 나타난 갖가지 신통 변화를 다 봅니다. 이 시방의 보살들은 갖가지의 부처님의 신력을 보면서도 과거 . 현재 . 미래의 삼세를 헐지도 않고 세간을 헐지도 않으면서도 다 봅니다. 하나도 손상이 없이 과거를 현재에 나타내고 현재를 과거에 그대로 나타냅니다. '하나도 헐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인고 하니 바로 무애(無碍)입니다. 걸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 낱낱이 진리의 입장으로, 낱낱이 존귀한 가치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가있습니다. 또한 '광명에 나타난 부처의 신력을 본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결국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과거에 있었던 일, 현재에도 있는 일, 앞으로도 있을 일, 이 세계에서 있는 일, 저 세계에서 있는 일, 그 모두를 그냥 다 드러내어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것을 뭐 달리 어떻게 새롭게 만들고 고치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여(如如)하게 있는 것을 그냥 말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화엄경』에서는 그야말로 보태고 고치고 한 게 없습니다. 이 우주 법계는 참되어서 더 이상의 첨삭(添削)이나 가감(加減)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식하(認識下)에서 바꿀 것은 바꾸어야 합니다. 이 말을 우리들에게 가져와서 생각해 보면 본래로 부처이기는 하지마는 현재 중생인 우리들이 다시 부처로 되는 수행에 걸리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고 하는 데에도 걸리지 말아야 하고, 현재 중생이라고 하는 데에도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중생이면서 부처이고 부처이면서 중생이기 때문에 부처의 입장으로도 보아줄 수가 있어야 그게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중생으로만 보아도 잘못된 것이고, 업과 인연이 얽혀 있는 현실이 엄연한데도 한결같이 부처로만 보고 있어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은 부처이면서 중생이고, 중생이면서 부처다라고 하는 거기에 서로 넘나들면서 걸리지 않는 그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게 말하자면『화엄경』에서 52위를 닦아 올라간다고 하여도 사실은 본래의 자리에서 하나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십신에서 십주, 십행, 십회향, 십주, 등각, 묘각의 수행 계위를 설하면서 점차 높은 하늘로 설법 장소가 올라가지마는 경을 보면 항상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보리수하를 떠나지 아니하고 도리천에 오른다, 보리수하를 떠나지 아니하고 야마천에 오른다, 보리수하를 떠나지 아니하고 도솔천에 오른다, 보리수하를 떠나지 아니하고 도솔천에 오른다."로 되어 있습니다. 바드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보리수하를 떠나서 올라간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 주四柱 사람의 희 . 노 . 애 . 락 이 만드는 대작大作이다. -* 강설 *- '보리수하(菩提樹下)가 무엇입니까. 바로 본래의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올라간다'는 것은 수행해 간다, 52수행 계위(繼位)를 하나하나 닦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보리수하를 떠나지 아니하고 하늘에 오른다'는 진정한 의미는 우리들이 수행을 해가는 데에 있어서 본래로 가지고 있는 지혜 자리에서 닦아 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인 우리들이 수행을 한다 하더라도 본래의 부처 자리에서 하나도 떠나지 아니한 채 수행을 하는것이지, 본래의 지혜와 부처를 망각 해버리고 나는 새까만 중생니니까 수행을 해야된다하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오랜 세월 동안 수행을 한다고 해서 뭐 달라지는 것이 있느냐 하면 또 그것은 아니예요. 본래로 가지고 있던 내 모습을 회복하는것이 수행이지, 없던 모습, 없던 내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수행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걸리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열환화공구(羅列幻化供具), 환화와 같은 공양구를 나열한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 앞에 공양 올릴 일이 뭐 있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전부가 다 부처이고 전부가 다 진리 아닌 게 없다라는 그런 입장이라면 우리들이 올리는 수많은 공양구들, 과일과 떡과 꽃이 다 환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환상과 같은 공양구도 열심히 정성스럽게 올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올리면서 거기에 뭐가 있는 양 매달리면 곤란하고, 그렇다고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밀쳐 버리면 그것도 곤란합니다. 그렇게 이해하여 열심히 올려야 어디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올리지 않아도 걸림이 없고 올려도 걸림이 없는 그런 이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본래로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라고 하는것, 사람이라고 하는것은 본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는 걸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전혀 있지도 않은 이치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화엄경』에서는 걸림이 없는 무애(無碍)가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걸림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차별심이 없어야 걸리지 않습니다. 차별이 있으면 걸립니다. 차별을 없애려면 이왕 보는 것, 나쁘게 보는 것보다 전부 좋은 것으로 보는 게 낫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전부 진리이다. 전부 다이야몬드처럼 빛나는 소중한 시간이고, 소중한 인생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부처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런 인격자이다.'라고 보아 버리면 걸릴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볼 줄 아는 경지가 되면 다른 부처님이 설사 내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하기로서니 거기에 마음이 쓰일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공부 안 하면 '부처님이 공부 안 하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 부처님이 화를 내면 '부처님이 화를 낼 리가 없어.'이렇게 생각도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이 정말 저런 정도로 마음이 깊어졌다면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무애(事事無碍),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아무 걸림이 없고,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아무 걸림이 없고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에서도 아무 걸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3) 옛 인연을 증명하다 -* 경문 *- 이 부처님의 신력(神力)을 보는 이들은 다 비로자나 여래께서 지난 옛적에 선근으로 거두어 주신 이며, 네 가지 거두어 주는 법으로 붙들어 주신 이거나, 보고 듣고 생각하고 친근하여서 성숙시킨 이거나, 옛적에 그를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하였거나, 과거에 부처님들 계신 데서 선근을 함께 심었거나, 과거에 온갖 지혜와 훌륭한 방편으로 교화하여 성숙케 한 이들이다. -* 강설 *- 서다림에 있는 대중들과 또 다른 시방 세계에 있는 보살들도 광명 속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신통 변화를 다 보았습니다.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던 까닭은 과거에 여러 가지 인연을 지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비로자나 여래께서 선근으로 거두어 주신 이들과 보시(布施),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사섭법(四攝法)으로 붙들어 주신 이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친근하여서 성숙하게 한 이와 옛날에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한 이와 과거에 부처님들 계신 데에서 선근을 함께 심은 이와 과거에 온갖 지혜와 훌륭한 방편으로 교화하여 성숙케 한 이들입니다. 4) 이익을 얻다 ① 보살들이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다 -* 경문 *- "그러므로 다 여래의 부사의한 깊은 삼매와 온 법계 허공계의 큰 신통한 힘에 들어갔으니, 법의 몸에 들기도 하고, 육신에 들기도 하고, 옛적에 성취한 행(行)에 들기도 하고, 원만한 여러 바라밀다에 들기도 하고, 장엄하고 청정한 행에 들기도 하고, 보살의 여러 지위에 들기도 하고, 정각을 이루는 힘에 들기도 하고, 부처님이 머무는 삼매와 차별없는 큰 신통 변화에 들기도 하고, 여래의 힘과 두려움 없는 지혜에 들기도 하고,부처님의 걸림없는 변재(辯才)의 바다에 들기도 하느니라. 저 보살들이 갖가지 이해와 갖가지 도(道)와 갖가지 문(門)과 갖가지 들어감과 갖가지 이치와 갖가지 따라줌과 갖가지 지혜와 갖가지 도를 도움과 갖가지 방편과 갖가지 삼매로 이러한 열 가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티끌 수 같은 부처님과 신통 변화 바다의 방편문에 들어가느니라." -* 강설 *- 세존께서는 미간 백호에서 '보조삼세법계문(普照三世法界門)'이라는 광명과 티끌 수와 같이 많은 보조 광명을 여러 부처님 국토에 비추었습니다. 그 광명 속에 온 법계 허공계와 갖가지 신통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것을 서다림에 있는 대중들과 시방에서 온 보살들이 전부 다 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신력을 볼 수 있는 이유로 과거에 비로자나 부처님과 인연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경지를 보아서 얻게 되는 이익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열거하고 있습니다. 법신(法身)과 육신(肉身)과 행(行)과 보살 지위와 정각(正覺)과 여래의 지혜와 변재(辯才) 바다를 다 남김없이 얻게 되는 이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드디어 보살 대중들이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근본 광명 지혜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넓은 광명을 비추는 그야말로 살아서 움직이는 그런 근본 지혜를 이미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화엄경』에서 중생 교화를 한다고 하는 것은 가르쳐서 알아듣게 하고 눈이 열리게 하는 그런 교화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본래와 완전 무결하다는 것을 깨닫게 일 뿐입니다. 달리 더 가감하여 가르치고 하여 귀가 열릴 것이 없습니다. 더 닦을 것이 없는 상태를 그저 알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닦을 것이 없다는 것에만 매여 있을 것이 아니라 닦을 것이 없는 가운데서 또 닦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 사실도 너무 고집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지만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기에 이런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부처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냥 내버려두기에는 너무 다듬어지지 않고 너무 서툰 부처니까 조금만 손질을 하면 부처다워지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엄경』의 입장에서는 본래 부처인데 그냥 두기에는 너무 거칠다 그러므로 조금 손질을 하면 바람직한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 반드시 다듬어야 된다고 고집하면 그것도 잘못입니다. 반드시 다듬어야 될 이유는 없다는 상식이 있는 뒤에 다듬어야 허물이 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다듬어야 쓸 만한 부처가 된다고 알고 있으면 그건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차라리 다듬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게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알고 수행하면 길을 잘못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다듬어야 조금도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탈 출 반항의 힘줄 날카롭게 세우며 해방감으로 두려움 사라지는 순간이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세상의 통념 일순간에 허무는 몸부림이다 그대 무엇을 향해 가는가 닫힌 곳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열려진 곳에서도 꽃은 시드는 기막힌 우주의 질서 앞에서.![]()
사진/낙산사 별꽃무늬 담장/무상행
② 보살들의 갖가지 삼매 -* 경문 *- "무엇을 갖가지 삼매라 하는가. 이른바 법계를 두루 장엄하는 삼매 . 모든 삼세의 걸림없는 경계를 널리 비추는 삼매. 법계의 차별이 없는 지혜 광명 삼매 .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 흔들리지 않는 삼매 . 그지없는 허공을 두루비추는 삼매 . 여래의 힘에 들어가는 삼매 . 부처님의 두려움 없는 용맹으로 분신(奮迅)하고 장엄하는 삼매. 모든 법계를 구르는 창고 삼매. 달처럼 모든 법계에 나타나서 걸림없는 음성으로 크게 연설하는 삼매 . 두루 청정한 법계의 광명 삼매와, 거림없는 비단 법왕 깃대 삼매 . 낱낱 경계 속에서 모든 부처님 바다를 보는 삼매 . 모든 세간에서 몸을 나타내는 삼매 . 여래의 차별없는 몸이 경계에 들어가는 삼매 . 모든 세간을 따라 크게 가없이 여기는 창고[藏]를 굴리는 삼매니라."
-* 강설 *- 앞에서는 보살들이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게 되는 크나큰 이익을 밝혀 놓았습니다. 지금부터는 보살들이 들어가게 되는 삼매의 신통 바다를 백 가지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삼매(三昧)를 정수(正受)라고 번역합니다. '정수(正受)'. 즉 '바르게 받아 들인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기 욕심이 앞에 가로놓여 있으면 바르게 받아 들여지지가 않습니다. 내 중심으로 생각하면 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냉정하게 판단하려고 해도 나라고 하는 그런 관념을 비우지 못하는 한, 바른 판단이 내려지지가 않고 또 바르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바르게 받아 들인다'는 삼매는 하나의 덕입니다. 덕(德)! 앞에서 보살들이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법회에 미리 참석하고 있는 오백 명의 보살들과 시방에서 구름떼처럼 모여온 많은 보살들로 이중(二重)으로 소개가 되었는데 나중에는 시방에서 모여온 보살들이 게송으로써 부처님의 덕을 전부 찬탄하였고 아직까지도 이 법회에 동참한 보살들의 덕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도 보살들의 이야기가 긴가 하면 그 보살들이 가지고 있는 덕과 법과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수행하여 얻어야 할 목표이기 때문에 그것을 길게 설명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또 삼매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이겠습니까. 보살들이 얻었다고 하는 삼매라는 것은 결국은 보살들의 인격과 수행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앞으로 소개되는 백 가지의 삼매, 즉 수행의 결과라는 것은 그 근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들의 마음자리 그것이 진여(眞如)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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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수레국화/100일째 寫經을 감사드리면서 화엄경방 바람향기님댁에 핀 수레국화를 올립니다
-* 강설 *- 모든 중생들이 부처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참성품자리가 바로 삼매의 근본자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백 가지의 삼매를 가지고 보살이 얻은 법은 보살의 깨달음과 수행의 경지를 이야기하는데 그 경지는 결국 우리 수행의 한 마음자리를 떠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마음자리를 근거로 해서 이와 같은 진리와 수행을 성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소개되는 수행의 표현은 그 보살들의 개개인 속에 이미 갈무리되어 있던 그 씨앗이 움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결과다 라고 이해하면 우리들하고 바로 연결이 됩니다. 보살이 가지고 있는그 마음, 부처가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을 우리들도 똑같이 가지고 있고 그것을 보살들은 수행하여 표현할 수가 있었고, 우리들은 그 씨앗을 가슴 속에 그대로 담고만 있다는 그 차이이기 때문에 이러한 삼매에 대해 소개해봄으로써 우리들의 수행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다질 수가 있게 됩니다. 지금부터 우리들도 이러한 경지를 반드시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백 가지 삼매를 자세하게 살펴 가도록 하겠습니다. 『화엄경』에서는 하나하나 이름의 의미가 또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삼매의 중요한 이름을 보아서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가 법계를 두루 장엄하는 삼매입니다. 법계를 장엄하는 것은 바로 보살들이지 다른 외형적인 물질이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백 가지 삼매 중에서 바로 보살들이 법계를 장엄하는 삼매를 맨처음에 가져다 놓은 의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편리해지고 물질이 넘쳐 나더라도 그것을 받쳐주는 사람의 자질이 부족하면 그 화려한 외형적인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함께 그 물질들도 마찬가지로 떨어지고 맙니다. 반대로 사람이 충실하면 그 주위에 있는 어떠한 열악한 조건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을 돋보이게 합니다. 그리고는 갖가지의 삼매를 우리들의 생각으로 이르러갈 수 있는 데까지 이르러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소개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삼매의 경지가 나에게도 있을까'할 정도로 진실을 샅샅이 본 깨달은 분의 눈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법계의 구르는 광 삼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지구가 돌고 태양이 도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온 우주가 돌아간다는 그런 삼매, 영원히 지속될 그런 삼매입니다. 달은 밤하늘에 떠올라 은은하게 우리들의 마음을 감싸 안아 줍니다. 또한 그 어디에도 다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산골짝을 비추어 은은한 자태를 더하게 하고 또 물마다 수면을 비추어 아름다운 물그림자가 나타나게 하고 또 자기 자신도 물 위로 덩실 떠 오릅니다. 그래서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라 합니다. 허공에 달은 하나지만 강물이 있는 곳이라면 다 달이 떠 있다는 의미 깊은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능력을, 또한 우리들의 마음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허공에 있는 달은 하나라는 뜻은 본래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강에 비친다는 것은 바로 작용입니다. 어떠한 상황이 되든 어떠한 근기에든 우리들의 마음을 근기에 맞출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온 법계와 온갖 중생들이 근기와 필요에 다 어울리게 설법하는 것을 천하를 두루 비추는 달을 빌어와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