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 크지 않은 키에 바싹 마른 ‘안경잡이’ 투수 최동원은 (당시 177cm, 73kg) 부산 토성중 3학년 때 돌풍을 일으키며 전국 무대에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어느 예선 전에서 그는 9회말 투 아웃 상황까지 ‘퍼펙트 게임’을 선 보이면서 말이다. 1975년. 경남고 2학년 시절 최동원은 드디어 전국 우수 고교 초청 대회를 통해서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고교 투수’란 찬사를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최고’란 말은 약 20여년 간 그의 곁을 떠날 줄 몰랐다. 당시, 고교 최강이라던 경북고를 노히트-노런으로 격파하고, 이튿날 대 선린상고 전에서 그는 또 한번 8회까지 노히트-노런으로 선린상의 강타선을 공략한다. 흔히 볼 수 있는 ‘반짝 고딩’의 활약하곤 차원이 달랐던 ‘완벽한 지배’ 였다. 3학년 때는 어땠나? 1976년 6월 20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제31회 청룡기 결승전. ‘역전의 명수’로 더 잘 알려졌던 군산상고를 상대로 최동원은 탈삼진 12개, 피안타 2개라는 신들린 피칭을 선 보이며 모교 경남고에 첫 청룡기를 졸업 선물로 선사했다. ‘준 개그맨 최동원’, ‘롯데의 최동원’이 아닌, ‘아마 야구의 신화 최동원’을 기억하는 많은 팬들은 아마도 76년 청룡기 야구 대회를 놓고 최동원의 ‘가장 완벽한 원맨쇼’ 라 칭하고 있을 것이다. 대건고와의 2회전 경기에서 탈삼진 10개, 선린상고와의 준결승에서 탈삼진 11개, 군산상고와의 승자 결정전에서 탈삼진 20개, 그리고 패자 부활전으로 다시 결승에서 격돌한 군산상고 (‘역전의 명수’의 근거) 를 그 지경으로 침몰시켜 버린 것이었다. 3개월 후 있었던 한-일 고교야구 친선대회에선 1차전 완투, 7 피안타의 호투로 갑자원 대회 우승팀을 주축으로 한 일본 대표를 3-1로 제압했고, 2차전에선 0-1로 뒤지고 있던 3회부터 릴리프 기용되어 3-2로 팀의 역전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일본 초 고교급 투수라 불리던 ‘사까이’와의 접전 끝에 판정승 함으로써 최동원의 이름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일개 고등학교 에이스 투수의 ‘신고식’ 치고는 너무나 화려했고 국제적이었다. 최동원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화려하게 장식했던 아마야구 시절, 아마도 ‘삼진’ 이란 말만큼 최동원과 떼어놓을 수 없는 동의어는 ‘스카우트 파문’이란 말이었을 것이다. 너도 나도 ‘최고’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76년 청룡기를 그의 ‘돌 잔치’로 치른 다음에 가장 치열했던 스카우트 전쟁이 한국 대학 스포츠의 두 기둥 연세와 고려, 고려와 연세 간에 또 한 차례 벌어졌다. 경남고 선배들이 많이 진학해 있었던 고려 측에선 최동원의 입학 합의서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지만, 최동원의 가족 측에서 무리한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받아 들여지지 않자 전격적으로 연세와 대학 연맹 측에 가등록을 마쳐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뒤통수를 맞은 고려 측은 선수 자격 박탈 등,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으나, ‘연례 게릴라 전’을 방불케 했던 당시 두 학교 간의 스카우트 시비는 그 해 연세의 판정승으로 타협을 보게 된다. 그 누구도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양 측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세 입학을 앞 두고 최동원의 진로는 또 한번의 난항을 겪게 된다. 바로 ‘가네다 사건’ 때문이었다. 일본 프로 야구의 한국계 영웅이자 당시 롯데 오리온즈 감독을 맡고 있던 가네다 감독이 최동원에게 입단 테스트를 제의해 온 것으로 보도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롯데 오리온즈의 코치 중 한명이었던 ‘도이’ 코치가 자이언트 팀 인스트럭터 파견 차 국내에 머무르는 동안, 최동원의 피칭에 감탄했고, 자이언트 감독이었던 고 김동엽 씨의 추천으로 이를 가네다 감독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전격 결정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 사실이 일본의 ‘닛칸 스포츠’에 기사화 되고, 한국의 실업 팀 롯데 자이언트의 일본 가고시마 전훈 기간 동안에, 당시 ‘한국 고교야구 3인방’으로 일컬어지던 최동원, 김용남 (군산상 - 한양대), 김시진 (대구상 - 한양대) 을 직접 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1977년 2월 17일, 롯데 ‘연합팀’ (일본의 오리온즈와 한국의 자이언트)의 전훈지인 일본 가고시마 현장에선 최동원이 투구를 하고 있었다. 대학 진학을 결정했던 최동원에게 도대체 우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의아해 하시는 후추 독자들을 위해 당시 오리온즈에서 뛰고 있던 백인천 전 삼성 감독의 당시 증언을 들어 본다. “가네다 감독이 반드시 최선수를 스카우트 할 것으로 본다. 나도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어려움이 많았으나 이렇게 활약하고 있지 않으냐?” 해석? 당시 막강한 재력을 앞세운 롯데 그룹에서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을 못 하겠느냐? 정도로 풀이가 된다. 이재환 당시 연세 감독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일축 했지만, 가네다 감독은 공식적으로 최동원의 입단을 희망한다고 밝혔고 실제 최동원의 비 공식 입단 테스트는 치뤄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 왜 최동원이 다시 신촌으로 돌아와야 했는지에 대해선 여러가지 추측이 돌았었다. ‘결국은 병역 문제 극복을 못했기 때문이다.’, ‘실력 부족이다.’, ‘장기적으로 롯데 자이언트 팀을 위한 배려다.’…
등의 소문이 난무했지만, 정확한 설명은 따르지 않았다. 단 3개월이란 기간 동안 ‘대학 스카우트 전쟁’, 그리고 ‘일본 프로 야구 진출’이란 묵직하고 민감한 이슈 (issue)를 뿌리며 신문의 머릿글을 장식한 최동원의 출현은 당시만 하더라도 야구계에 전례 없는 최대의 관심사이자, 최동원의 ‘어깨’, ‘그릇’, 그리고 ‘미래’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볼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연세 유니폼을 입은 최동원은 그라운드에서만은 당할 자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그라운드 밖에서의 ‘큰 소리’가 먹혔던 것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인 77년 9월 20일, 그는 실업-대학 평가전에 대학팀 선발 투수로 나와 실업 팀 타선을 5회까지 노히트-노런으로 틀어 막으며 고교 시절의 영광이 ‘반짝 성’이 아니란 것을 다시 한번 입증시켰고, 연세대가 전국 대학야구 대회 5개 중 4개 대회를 석권하는 견인차 역할을 해내고 만다. 최동원이 대학교 1학년 때 말이다. 또한 이 때부터는 본격적인 성인 국가 대표팀의 당당한 에이스로 자리잡아 77년 니카라과에서 개최 되었던 ‘슈퍼 월드컵 대회’ 우승이라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비록 대표팀 막내둥이로 출전해 미국, 일본, 콜롬비아..등의 강호와 격돌해 선발 성적 3승2패라는 ‘무난한’ 성적을 냈지만, ‘방심하다가 큰 것 한방’을 먹는 아픔도 경험해 봤다. 이 대회 기간 동안 미국 메이저 리그의 볼티모어 팀의 스카우터로부터 입단 제의를 또 한차례 받으며 아마 야구 최고의 최동원 임을 과시하게 된다.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일본 그리고 미국 프로 팀들이 대학교 1년생 최동원을 주목했다는 사실을 짚어가고자 한다. ‘병역 문제’라는 우리 유망주 모두의 ‘현실’이자 ‘영원한 걸림돌’만 아니었더라도, 최동원의 운명이 어찌 달라졌을지 조심스레 상상해 본다. 더군다나 박찬호라는 국민적 스타를 벤치마킹 (Benchmarking) 해 보면서 말이다. 지금의 박찬호는 사실 메이저리그의 ‘생산품’ 이라고 봐야만 할 것이고, 대학 1학년 시절의 박찬호와 최동원의 어깨와 잠재력만 놓고 굳이 비교한다면… 최동원의 팔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컨트롤, 스피드, 경기 운영, 배짱… 대부분 당시의 최동원은 박찬호의 대학 시절을 능가했다는 주장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외국 진출이 성사된 후, 과연 최동원이 박찬호가 보여 준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과 극복을 보여줄 수 있었을런 지에 대해선 별개의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선진 야구 스카우터들이 보여준 최동원에 대한 관심을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나 큰 미련과 아쉬움이 따른다. 어쩌면, 박찬호 아니 이원국, 박철순, 보다도 훨씬 더 오랫동안 한국 야구의 위상을 높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선동열, 정민태 보다도 더 먼저 입단 제의를 받아 미국 땅에 태극기를 꽂을 수도 있지 않았느냐는 ‘억지 아닌 억지’를 부려볼 수 있었던 최동원이었기 때문이다.
1979년 3월 25일. 최동원이 연세대 야구부 합숙소를 이탈 했다는 소식이 전 언론에 보도된다. 단체 기합을 견디다 못해 선배들에게 ‘엿 먹어’를 외치고 짐을 쌌던 것이다. 그리곤 ‘연세대에선 야구를 할 수 없으니 이적 동의서를 끊어 달라’고 하며 잠적해 버린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3월 21일 벌어진 대통령기 쟁탈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연세와 맞붙은 동국대가 4:2로 승리하자, 연세 4학년 선수들이 하급생 선수들에게 ‘빠따’를 제대로 돌린 것이다. 그리고 그날 ‘빠따’를 돌린 선수는 다름 아닌 ‘OB 야구의 전설’ 박철순이었다. 지금와서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칼 (ironical) 한 상황이었던 것이, 전 윤동균 OB 감독의 ‘구타’에 반기를 들고 항쟁을 했던 박철순이, 대학 시절 똑같은 성격의 사건에 ‘가해자’ 였다니..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해 1월 공군을 제대하고 복학했던 박철순은 최동웜 보다 2살 위였지만, 학년은 같은 3학년이었고 같은 투수로서 서로 간의 보이지 않는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박철순의 손에 의해 ‘전치 2주’를 요하는 ‘개 죽음’을 당하자 최동원의 ‘뚜껑이 열렸던 것’이었다. 아니, 최동원의 ‘전설적인’ 부친 최윤식 씨의 ‘뚜껑이 열렸던 것’이었다. 기합의 차원을 넘어서 ‘인격 모독’으로 최동원 측은 받아들였고 부친은 ‘고소’ 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학교 측 역시 최동원의 ‘버르장 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강경 대응을 했고, 제 아무리 국가대표 에이스 최동원일 지언정 당시 언론 역시 최동원의 ‘일방적이고 돌출성 무단 이탈’로 기사를 써 버렸다. 이 사건은 비단 연세 야구부와 최씨 집안의 싸움보다도 훨씬 더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야구계 관계자들은 ‘구타 찬반론’을 펼치는 일대 토론회를 지면 상에서 펼쳐댔고, 수 많은 야구팬에겐 ‘충격’ 으로 다가왔다. 최동원의 이탈 사실 보다도 ‘도대체 어떤 놈이 최동원이를 때려??’ 라는 식의 감정 표현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최동원은 팀 이탈 66일 만에 숙소로 복귀하게 되었지만, 최동원의 짧지 않은 야구사에 그의 첫 ‘이탈’을 기록하게 된다. 어찌 보면, 일개 대학생 선수가 기합 받은 일로 인해, 이토록 오랫동안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시 ‘야구인 최동원’의 ‘사회적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다.
최동원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전국구’ 아니, ‘국제적’ 스타가 되어있었다. 하지만,최동원이 그토록 많은 부산 팬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은 이유는 아마도 지역 연고제가 아니던 당시 실업 야구 판에서마저 그는 고향 팀 ‘롯데 자이언트’를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시절 4년을 제외하곤 그는 늘 ‘부산의 아들’로 팬들과 함께 성장해 줬기 때문이다. 물론, 말년에 대구로 팔려가는 ‘사건’을 경험하긴 했지만 말이다. 당시 실업 야구는 크게, 금융단 팀 (한일은, 제일은, 상업은 등의 은행 팀), 군 팀 (경리단, 상무), 공기업 팀 (한전, 포철, 농협 등) 그리고 롯데, 한국화장품 등의 민간 팀으로 크게 나뉘어진다. 75년도에 민간 기업으로는 처음 ‘물량 공세’를 펼치며 수준급 선수를 대거 스카우트하며 창단한 롯데를 뒤이어 한국 화장품이 엘리트 계열에 합류했고, 최동원이 대학을 졸업하던 1981년도 3월에는 결국 ‘세미 프로 급’이라 불리던 두개의 민간 기업 팀이 스카우트 시장을 주름잡고 있었다. 먼저, 롯데 자이언트 팀의 멤버를 보자면, 정현발, 김정수, 천보성, 김인식, 허규옥, 차영화, 박승호, 우경하, 이해창, 박노삼..등의 스타급 선수들을 박영길 감독이 지휘하고 있었다. 한국화장품의 경우엔, 김봉연, 정구선, 정순명, 김일환, 김호인, 심재원, 김재박 등의 선수들이 포진하며 롯데의 최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최동원 스카우트에 혼혈을 다하지 않았던 팀은 없었지만, 최동원의 롯데 행은 싱겁게 끝이 났다. 구단주 신격호 사장, 감독 박영길 씨.. 모두 최동원의 경남고 선배들이었고, 이미 2년 전부터, 아니 경남고 졸업 당시부터 최동원의 롯데 행은 예상된 바 있었다. 나머지 팀들이 김용남, 김시진, 노상수, 선우대영, 성낙수..등의 선수들 영입에 더 치열했던 이유는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최동원 입장에서도 ‘최고 대우만 해준다면..’ 롯데를 져버릴 이유가 없었다. 최동원은 최고 대우를 보장 받고 롯데에 입단하게 된다. 정식 입단금 3천만원에 아버지 최윤식씨에게 직장, 아파트 제공, 총 1억원 상당의 대접을 받게 되고, 2년 후 일본 야구 진출 요청 시, 구단에서 수락해 주는 조건으로 말이다. 국가대표 ‘투수 3인방’의 나머지 멤버였던 김용남은 한국화장품으로, 김시진은 경리단에 입단하면서 당시 투수난에 허덕이던 실업 야구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언제나 그랬듯이, 최동원의 ‘그라운드 밖 잡음, 또는 소동’은 결국 그라운드 안에서 전부 만회 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연, 최동원’이라 말하며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실업 리그 데뷔 역시 마찬가지 였다. 세미 프로 리그와 같이 실업 리그 정규 리그 전, 후반기로 나뉘어져 진행 되었던 81년도 우리나라 실업 야구는, 전반기를 끝낸 5월 말까지 최동원의 13승 1패라는 신인답지 않은 호투에 힘입어 롯데가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16게임 등판, 127과 1/3 이닝을 던져 탈삼진 95개, 방어율 2.62 라는 무서운 실력을 과시했다. 전기 리그 다승왕, 그리고 승률왕을 차지했고, 한전의 임호균 (80과 2/3이닝, 방어율 1.56), 상업은행의 하기룡 (82아 1/3 이닝, 방어율 2.52) 의 뒤를 이어 방어율 3위를 마크 했다. 실업 무대에서 역시 ‘최동원 돌풍’을 잠재울만한 사람이 없었다.
최동원의 역투 덕분에 롯데는 창단 2년 만에 1981년 코리안 시리즈 (실업 야구 왕중왕 대결)에서 강호 경리단 을 물리치고 대망의 실업 야구 평정을 이룩하였다. 정규 리그 성적 17승 4패, 전반기 보다는 부진해 보이는 성적이었지만, 코리안 시리즈가 진행 되었던 6차전에 매 게임 등판해서 (2게임 완투)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시리즈 6차전 동안 42와 2/3 이닝, 탈삼진 37개, 방어율 2.32 를 기록하며 최우수 선수상, 최우수 신인상, 최다 승리상이란 ‘3관왕’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고교, 대학, 실업.. 그 어떤 무대에서도 최동원의 진가는 여지없이 드러났고, 최동원은 그 어떤 선수보다도 ‘밥 값’을 해낸 선수였다. ‘최고’ 임을 자부했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스카우트, 연봉 협상의 회오리 한 가운데에 서 있어야만 했고, 언제나 ‘승자’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아마 야구에서 최동원이 보여 준 성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국내 리그 뿐만 아니라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던 해외 경기에서도 그는 전성기를 맞고 있음을 여지 없이 과시했다. 81년 8월 캐나다 애드먼튼에서 개최되었던 대륙간 컵 국제 야구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상을 받은 당시 나이 23세의 최동원에게 미국 메이저 리그 스카우터들이 몰렸던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고, 그 중에도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입단 제의는 집요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최동원의 토론토 행은 좌절로 끝이 났다. 이번에도 역시 병역 문제를 앞둔 상황이었지만, 토론토 측에선 일단 계약만 하고 나면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해결책을 찾아보겠다고 적극성을 띄었고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 씨는 ‘선 계약, 후 해결’ 에 합의하며 4년 연봉 61만 달러 (약4억 2천만원)에 전격 체결한다. 그럼 무엇이 문제가 되었던가? 최윤식 씨는 최동원의 연봉이 메이저 리그 선수 기준 최하위 급에 속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고 부랴 부랴 ‘계약 무효’를 선언했다. 본인이 ‘사기 계약’에 휩싸였다는 주장과 함께... 당시 메이저 리그 전문가조차 많지 않았을 뿐더러 최윤식 씨의 다소 성급한 결정에 따라 어쩌면 국제적 망신을 당할 일이 초래되었다.
토론토 측도 ‘세상 물정 잘 모르는 한국 노친네’를 상대로 헐값에 데려가려는 저의는 역력했다. ‘사이닝 보너스는 못 주게 되어있지만, 예의 상 10,000불 (70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했단다. (쥐길 놈들… 아예, 주질 말지…) 최동원 측이 ‘계약 무효’ 선언을 하자 이번엔 토론토 측에서 ‘웃기지 마!’ 라고 해 왔다. 계약 위반으로 82년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참가 자격 박탈을 운운했고, 추후 롯데 프로 팀 입단에도 ‘메이저 리그 등록 선수’ 란 명목으로 걸림돌 역할을 하면서 말이다. 82년 봄, 국내에 프로 리그가 창립되면서 자연스럽게 실업 팀 롯데는 해체되고 최동원의 거취도 잠시나마 한국전력으로 옮겨가게 된다.
82년에도 토론토의 또 다른 입단 제의, 볼티모어의 ‘러브 콜’이 있었지만, 최동원은 비로소 해외 진출의 꿈을 접고 ‘9월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 후, 국내 프로 리그 진출’ 이란 명확한 목표를 설정한다. 한대화의 홈런 한방으로 당시 수많은 야구 스타들의 ‘영원한 숙제 - 병역 문제’ 를 해결하게 되었지만, 최동원에겐 이미 ‘한발짝 너무 늦은 특혜’였다. 1983년 2월. 최동원은 프로 팀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금 4천만원, 연봉 3천만원, 보너스 등의 총 ‘1억 패키지’로 부산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마 야구인’ 최동원과 팬들과의 여정은 이렇게 끝이 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최동원’ 이란 표현이 가장 적절했다는 주장도 없지 않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아마 무대에서 최동원이 보여 준 야구는 그야말로 ‘최고’ 였고, 최동원은 ‘최고’의 대접을 받으려 매번 몸부림 쳤다. 그게 전부였다. 최동원… 현재의 많은 야구 팬들이 기억하는 ‘프로 야구 선수 최동원’의 이미지는 어쩌면 그의 전성기를 이미 다 소모해버린 후의 모습 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일축해 버려도 큰 하자가 없을 정도로 그의 ‘아마츄어 야구 인생’은 눈 부셨다. 그는 던지고 또 던졌고, 이기고 또 이겼다. 모교를 위해서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그러면서 그는 남들보다 큰 목소리로 ‘밥 그릇’을 찾으려고 했다. 10년 전 ‘프로 야구’ 라는 개념이 지금 팬들의 그것에 반 만 되었더라도 최동원의 행보에 ‘돈 밝히는 인간’ 이라는 비난은 따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후추는 최동원의 아마 야구 실력과는 무관한 스카우트 얘기, 연봉 얘기 등을 줄기차게 나열해 나갔다. 순수히 그의 야구 실력을 입증해 주는 기록이나 데이터만을 보여 주고도 충분히 그를 후추 명예의 전당에 헌액 할 명분이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는 그의 모든 것이 용서되기 때문이다. 그 만큼 우리 야구 팬들의 ‘선수 대접’ 수준이 향상되어 있고 (선수협 지지율 98% 이상인 것 처럼), 최동원이 연계되었던 수 많은 일화들이 곧 그의 실력을 대변해 준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야구에서 최동원이 불고 온 ‘최동원 돌풍’은 사회적, 문화적 바람이나 다름 없었다. 바로 ‘최고’를 추구한 용틀임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