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동편제 소리의 마지막 적자였다. 소리에 대한 치열한 집념과 60여년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소리 연마의 과정, 그리고 자기 예술에 대한 자존심과 예술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고집스런 심성. 농사지으며 소리하는 일을 천직으로 알았던 농투산이 소리꾼. 우리에게 전통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깨우쳐주던 남원의 그 고집스런 소리꾼 강도근 명창(본명 강맹근(姜孟根)·중요무형문화재<홍보가>기능보유자)이 세상을 떴다.천성적으로 타고난 크고 높은 소리의 거친듯한 쉰 목에 쇠처럼 단단한 소리로 늘상 소리판의 관중을 몰아대고 어르며 눈물과 웃음을 전해주던 그 소리꾼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돈과 명예에 눈을 돌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고향땅을 지키며 평생 지켜온 땅을 일구고 소리를 지키며 살았던 그는 햇빛이 눈부시게 환한 5월, 뚝배기 같이 질박한 사투리에 실어냈던 민중적 소리의 멋을 우리 가슴에 남겨놓은채 그렇게 앞서갔다.
96년 5월 13일 오후 3시. 지리산 자락이 닿을 듯 내려다 보이는 남원의 향교동 언덕빼기 자택에서 강도근 명창은 오랜 투병생활을 마감했고, 우리는 자랑스러웠던 또 한명의 소리꾼을 잃었다.
강도근 명창. 일흔여덟해를 살았던 그는 남원을 판소리의 고향으로 우뚝설 수 있게 한 대들보였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고향을 지키며 살았지만 그의 풍요로웠던 예술적 향취로 탄탄했던 남원은 오랫동안 그의 빈자리로 허전할 것임에 틀림없다.그는 1918년 남원시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중농의 집안이어서 생활에는 별 불편이 없었다. 그가 소리를 시작한 것은 나이 열일곱살 되던 해였다. 목이 좋다는 주위의 권유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그의 첫 스승은 김정문이다. 송만갑의 수제자이면서 유성준의 생질인 김정문은 당시 남원 주천에 살면서 남원 권번에서 소리선생을 하고 있었고 강도근은 주로 김정문의 집에서 집안일을 봐주며 소리를 받았다. 2년여동안 소리공부를 하면서 그는 「흥보가」를 완전히 받았으며 다른 소리도 부분적으로 배웠다. 강도근이 무대에 선 것은 그 이듬해부터이다. 남원을 중심으로한 협률사 공연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소리에 부족함이 많다는 판단을 한 그는 공연 활동을 작파하고 다시김정문의 문하에 들어가 소리공부를 했다. 김정문이 작고한 후에는 송만갑·정정렬·이동백 등이 운영하고 있던 「조선성악연구회」를 찾아가 주로 송만갑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스물 다섯 살이 되던 해에는 구례로 내려가 박봉술·강산홍 등과 함께 박봉래로부터 지도를 받으면서 쌍계사에 들어가 독공을 쌓았다. 후에도 쌍계사를 틈틈이 들렀던 강도근은 자신의 소리를 개발하고 완전한 득음을 위해 가진 쌍계사에서의 수련 과정이 자신의 소리를 단련된 소리로 발전시키는 거름이 됐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독공을 마친후 하동에 살고 있던 유성준을 찾아가 살고 있던 유성준을 찾아가 「수궁가」를 배웠다. 강도근이 가장 전형적이고 정통성을 지닌 동편제 소리꾼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스승들이 동편제소리를 발전시킨 대표적 소리꾼들이었다는 영향이 크다. 6·25 직후 그는 서울·목표·여수·부산·전주 등 전국 각 지역을 다니면서 소리 선생으로 지내다가 73년 고향인 남원에 돌아왔다. 남원시립국악원 창악 강사로 부임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지금껏 남원의 판소리를 지키며 수많은 재자들을 가르쳐냈다. 뿐 아니라 자신의 수련에도 치열해서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그는 어김없이 지리산 골짜기를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다. 소리판의 숨어있는 명인이었던 강도근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이다. 판소리의 예술적 완성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걸었던 그의 고집스럽고 치열한 삶은 소리판의 모범이 되기에 족했고 그 소리에 대한 자세나 열정은 그의 독특한 예술성과 함께 민중적 정서의 감동을 얻어냈다. 그는 자신의 소리가 명예나 돈과 바꿔지는 것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문화재가 되는 일에도 별반 관심이 없던 그는 문화재가 되려면 사설을 고칠 필요가 있다는 주위의 권유를 받았을 때도 한마디로 묵살해버렸다. (남원의 억센 사투리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던 그의 사설은 주위로부터 오자가 많다는 오해를 받았다.)
그는 배운 것을 고쳐 부르려 하지 않았음은 물론 자작은 더욱이 하지 않았다.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만을 하겠다는 신념을 간직해온 그는 그만큼 자신이 전승한 소리를 지키려고 노력한 소리꾼이었던 것이다. 판소리 연구가 최동현교수(군산대)는 『강도근이 「타고난 성대」에 일흔살이 넘도록 큰 성량과 고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후천전인 끊임없는 노력이 밑바탕 되었기 때문이며 더욱이 남원 사람의 감성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왔다는 점에서 그는 진정한 소리꾼이다』고 평가했다.
그의 특기는 「흥보가」다. 그중에서도 「제비후리는 대목」은 씩씩하고 담담한 소리에 갑자기 솟구치는 쇳소리로 내지르는 독창적인 창법으로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88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이후 4명의 제자들을 이수자로 두었다. 남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난초·전인삼씨,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명희씨와 구례의 마인화씨 등이다. 이들 외에도 오늘의 국악판에서 활동하고있는 내로라하는 국악인들 중에는 그의 문하를 거쳐간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안숙선·오갑순·강정숙씨 등도 그의 문하에서 소리 바탕을 배웠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기능보유자 후보를 지정하지 못한채 세상을 떳다. 그 깊은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치열해야만 하는 소리길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나이어린 제자들에대한 보다 큰 꾸짖음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제 우리는 동편제 소리의 마지막 적자를 잃었다. 「대마디 대장단」의, 복잡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고 씩씩하게 풍부한 성량으로 관객들을 몰아가던 그의 창창한 소리를 우리는 직접 만날 수 없다. 89년 위암으로 대수술을 받고서도 오히려 예전보다 적극적으로 소리판에 나섰던 그는 오랜 투병 생활중에도 나이 어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렸었다.
그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남원의 국악 애호인들은 그의 장례를 남원민속국악진홍회의 국악장으로 치렀다. 정성이 모두어진 의미있는 자리였지만 그의 예술이 지닌 높이나 깊이로 치자면 그는 너무 쓸쓸하게 속세와 인연을 매듭짓게 했는지 모른다.그는 96년 5월 15일에 많은 제자들과 그의 소리를 사랑하는 애호가와 국악인들의 오열속에 그의 스승 김정문의 잠들어 있는 주천면 상주마을(주천리 산83번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