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경영학의 Guru라 칭송되는 Peter Drucker의 책은 번역된 것은 거의 보았다.
번역은 한국 지식인들이 대오각성해야 할 분야인데, 훌륭한 저작이 번역가의 손을
거치면 종이덩어리가 되는 경우를 많이 봤고, 경영컨설턴트들이 선생님으로 따르는
Drucker의 책은 나에게 늘 불만대상이었다.
그런데 메일을 확인하다가 Seri(삼성경제연구소)에서 보내주는 메일을 보면서 번역자
의 불성실함 때문에 도매금으로 미움을 받았던 Drucker 선생의 한 마디가 뒷통수를
때렸다. 비영리기관, Drucker에게 길을 묻다라는 제목의 논문이었다. 제목부터 쉐한
느낌이 왔다. 주절주절 쉬운 말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학자들, 박사들의 일
이니 그렇다치고, 읽어가다 한 문장을 발견했다.
드러커는 NPO의 산출물을 '(행동이) 변화된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 문장에서 그동안 Peter Drucker선생과의 불편한 관계는 해소되었다. D선생과 나의
불편한 관계는 D선생은 전혀 알지 못한다. 돌아가셨으니까. 그리고 그 분의 책임은 아니다.
불성실한 지식인들이 그 어려운 책들을 그리스 로마 철학, 고전, ....... 서양의 모든 철학을
바탕으로 사업가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려고 했던 야심찬 지식인의 고뇌를 원고지 한 매 당
얼마로 책을 찢어발겨 알바로 나누어준 출판계와 번역을 담당한 학자와 그 아래 봉건적인
관계에 신음하는 석, 박사 과정의 문하생들의 무능함과 불성실이 그의 저작과 나의 관계를
이간질해 왔다. 다행히 그가 쓴 글을 해석한 사람의 글 중 내가 꼭 필요한 때 울림을 줄 수
있는 한 마디를 해주었다.
흘러간 얘기를 해보자.
2010년 11월 5일부터 22일까지 17박 18일 간의 일이었다.
facebook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페이북 친구들을 무제한으로 늘일때였다.
페친으로 등록된 윤모선생님이 서울에서 강진까지 걷는 여행을 한다고 올려 놓았다.
강진은 내 마음 속에 금기시되어 있는 고장이었다. 다산 정약용선생이 18년 동안 유배되어 있던 곳,
혹 그곳에 빠져들면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아 현대사의 비극 광주는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강진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강진으로 걸어간다니........ 생각해 볼 틈이 없었다.
내 지인들이 진지하게 "너는 어떤 놈이냐?"라고 볼멘소리로 물어보면 답하는 말이 있다.
"생각보다 발이 먼저 나가는 놈입니다."
주최하는 분들에게 다짜고짜로 전화해서 참여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말하고, 출발지인 옛날
법률집행을 담당했던 사헌부가 있었던 종각 제일은행 앞으로 가서 17박 18일 이름도 성도
모르는 이들과 함께 먹고 자고 걸었다.
다산동호회 윤회장님, 길 위의 역사학 호문님
차츰 사정을 파악해보니 군세가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운 강진 군민들이 스스로 강진을 알리기 위해
그 방법으로 서울에서 강진으로 걷자고 기획했고, 다산 선생의 외손인 해남 윤씨 다산동호회장님이
깃발을 드신 것이었다. 군청에서도 강진군을 알린다는 명분이 있어서 만만치 않은 예산을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걷는 내내 확인해 보았는데 그것 밖에 동기가 없었다. 군에서 몇 분이서 뜻을 맞췄고,
강진 관내 뜻있는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고교 졸업반 학생들을 끼워 넣었다. 윤회장님은 통제가 힘든
나름 노는 학생들을 관리하기 위해 고교 선배인 군인으로 강진 군청에 근무하고 있는 아들에게
휴가를 받게 하여 합류케 했다. 그런데 이 분들은 평소 도보여행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분들이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껌 좀 씹고 담배 깨나 피우며 당구 잘 치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요 놈들이 어떻게
노는 지 안다고 자부했다. 처음부터 어른들 눈치 안보고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그랬다. 며칠 지나서
어른들이 대책회의를 했다. 이래서는 안된다. 담배를 피우더라도 멀리 안 보이는데서 피우게 해야
된다고 바른 말 잘하는 어른이 목소리를 높였고, 나는 이 녀석들과 맞담배를 하면서 술 한잔 씩했다.
그런데 고교 시절 내 친구들과 비슷했다. 아니 어른들과 같이 사는 질서가 배여 있어서인지 더 착했다.
아이들이 천안을 지날 때 쯤 스스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준비하고 어른들 밥상을 차리고...........
전북 정읍을 지날 즈음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고향 강진으로 들어서는 즈음에 아이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강진이 가까워지자 시키지 않아도 포졸, 선비, 포도대장 옷을 챙겨입고, 강진관내 후배 학생들이 마중을 나와서 재잘거리자 한마디 씩 했다.
"이런 기본이 안되어 있는 짜슥들........"
나는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450km 가량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팀에 끼어들어 많은 것을 배웠다.
P. Drucker가 말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산출물을 만들어 내는 참으로 귀한 팀의 일원이 된 것에
무엇보다 감사한다.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마지막에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제 복음을 세상에 나가 널리 알립시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영성체를 한 카톨릭 신자가
가지는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다.
어줍잖게 길 위의 역사학 도보카페를 열겠다고 결심한 것이 이때였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꿈을 꾼다.
지금은 더 머리가 굵고 힘이 들었을 3년 전 겨울로 넘어가는 때 국도변을 걸으며 차차 변화되어
가는 아이들과 그들 곁에서 스스로 변해갔던 나 자신을 한번 더 느껴보고 싶다.
그러고 싶다.
첫댓글 다시 한번 걸어 볼 기회를 만드세요 참가하고 싶어요
네 호문님과 함께 상의해서 다산생가에서 강진 가는 길을 한번에는 못하더라도 릴레이로.......3년 전보다 더 아름다운 길이 열렸다고 듣고 있으니....... 저도 해보고 싶습니다.^^*
어린 학생들의 자세는 쭈볏쭈볏, 구부정...쑥스러움 때문일까?
공부라는 것을 최우선에 둔 학교생활때문에 공부와는 조금 담을 쌓은 때문일까?
사춘기의 반항심과 경쟁심이 스스로를 낮추게 해서 남이 얕보게 한 후 한 방에 적을
거꾸러 뜨리기 위한 동물적 본능일까?
순진무구한 듯하기도 한 그 자세와 표정이 어려서 좋다. 아주 좋다. 부럽다 많이.............
강진으로 돌아간 윤회장님이 학생들 부모들한테 식사대접 많이 받으셨다는 후문입니다. "아 형님, 애가 달라졌단 말이시~ 참말로 고맙소~잉~". 윤회장님은 지금도 도보여행을 학교마다 필수과목으로 해야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십니다.^^*